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에바잡담 - 초호기와 제르엘의 전투에 대해서

조조로 에바 破 10회차 관람을 마쳤습니다. 이제 급한불은 거의 다 끄고 약간 여유가 생겼으니 내일 모레는 중앙시네마에서 느긋하게 서와 파를 동시 관람할 계획입니다.

이번 破에서 제가 가장 집중해서 본 부분은 초호기가 제10사도(TV판의 제르엘)를 격파하는 장면이었습니다. TV판과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많아 흥미롭더군요. 물론 빔을 발사하며 제르엘을 쪼개버리는(!!!) 초호기의 박력넘치는 전투장면도 큰 화면으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몇번을 반복해서 봐도 근사했습니다.

제가 제르엘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가 처음으로 본 에반게리온이 바로 19회의 대 제르엘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반게리온에 빠진 친구가 재미있다면서 한번 보길권하며 보여준게 19회였고 저는 처음 본 순간 충격(!!!)에 빠졌습니다. 제르엘을 쓰러트린 초호기가 안광을 번득이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네 발로 돌진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르엘을 말 그대로 산채로 뜯어먹는 장면은 어떠한 공포영화의 장면보다도 소름끼쳤고 여기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한동안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처음 봤을 때는 너무나 암울하고 비장한 분위기 때문에 한 다음화 정도에 끝나는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레이는 우울한 혼잣말을 되뇌며 자폭을 하고 아스카는 절박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제르엘에게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하게 되죠. 게다가 본부가 박살났으니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마지막화가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고 나서야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만.

그래서 에반게리온을 즐겨보게 만든 계기가 바로 제19화였던 셈 입니다.

그리고 거의 15년이 다 되어 훨씬 세련된 기술로 다시 만들어진 제르엘과의 전투를 커다란 화면으로 보게 되니 묘한 감정이 듭니다. 초호기와 제르엘의 전투는 분명 더 박진감 넘치고 호쾌하게 변화했지만 처음 봤을때 만큼의 강렬한 충격은 주지 못했습니다. 재미는 있지만 아쉽다고 해야 겠군요.

하지만 제르엘이 발령소의 메인스크린을 부수며 난입했을 때 미사토의 얼굴 표정만큼은 신극장판의 압승입니다. 아무래도 작화의 우월함이란;;; 말 그대로 사도의 침입을 허용한 데 대한 분노+마지막 방어선이 돌파당했다는 절망+이제 죽게생겼다(!)는 공포 등이 모두 나타나는 오묘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는 표정이지요. DVD가 나오면 그 장면을 캡쳐해 바탕화면으로 할 생각입니다.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하지와 제이콥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

1947년 9월, 미 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가 남조선 문제로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은 드레이퍼에게 한국의 정치정세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는 주한미군과 미군정의 입장을 옹호하고 육군부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드레이퍼에 대한 설명은 객관적인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당시 대화의 녹취록이 남아있는 덕분에 후대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들을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이 자리에서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미군정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도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제이콥스(Joseph E. Jacobs, 미군정 정치고문) : 아닙니다. 이승만은 어떠한 공식적인 직함도 없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미국 정치인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승만은 민족대표자대회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작은 집단에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가 그들을 방문해 회견을 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웨드마이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사기를 쳐 볼까 하다가 이 일로 체면만 구긴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은 아닙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드레이퍼 : 이승만에게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한 일은 있습니까?

하지 : 만약 이승만이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한다면 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것 입니다. 이승만은 스스로를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드레이퍼 : 알겠습니다. 이승만은 그런 사람인가 보군요. (이하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 관련 내용은 생략)

(중략)

하지 : (앞부분 생략)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을 장악할 위험성이 꾸준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위험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 우익집단들이 벌이는 짓은 우리가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으며 동시에 러시아인들을 상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집단은 지난해 12월 이승만이 출국했을 때 남조선에서 봉기를 일으켜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조선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김구는 이승만의 계획에 따라 우익의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을 죽이는 것을 포함해 무슨 짓이든지 할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우익들은 미국인을 몇 명 살해해 미국 본토에서 미군정이 인기가 없으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주한미군을 철군시키도록 하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승만의 추종세력은 때가 적당하다는 판단만 있으면 언제든 그런 짓을 하려 들 것입니다. 저는 우익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익들이 원하는 것은 독재정권입니다.

드레이퍼 : 물론,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된다면 이승만도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것 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 : 이승만은 단 15분도 버티지 못 할 것입니다. 이승만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이승만에게 이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고약한 여자입니다. 우리는 이승만의 아내가 소련놈들로 부터 돈을 받아먹는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입니다. 이승만의 집단은 정권을 잡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을 방문했을때 국무부의 힐드링(John R. Hilldring, 국무부 민정담당 차관보)을 만난 것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고 귀국할 체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들은 이승만이 전쟁부장관과 만날 수 있도록 하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승만은 이 모임에 참석했지만 우리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전쟁부 장관께서는 너무 바빠서 이승만에게 내 줄 시간이 없었습니다. 국무부는 이승만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군용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드레이퍼 : 먼슨(Munson) 대령이 이 항공편이 준비된 것을 알고 그것을 취소했지요.

하지 : 이승만은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장개석은 여전히 임시정부의 늙은이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을 무렵 장개석이 김구 일당에게 미국돈 2십만 달러를 제공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20만 달러는 장개석이 2년 전에 김구에게 제공한 것 입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이승만이 이 돈에 손을 대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은 김구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이승만 일파는 김구의 돈을 먹으려 했습니다.

드레이퍼 : 하지 장군, 이승만과 김구는 잘 협력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 (두 사람의 협력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느냐에 좌우됩니다. 현재 이승만과 김구는 결별한 상태입니다. 작년 겨울 이승만이 출국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한 패였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가 과거 중국의 군벌들이 하던 식으로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자료를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이승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승만이 중국을 방문할 허가를 얻었을 때 저는 이승만에게 선박편으로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 무렵 조선을 오가는 항공편은 모두 미육군의 항공기였기 때문에 만약 이승만이 항공편으로 가게 된다면 조선인들은 그것이 미육군이 제공한 항공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은 "미국 정부는 내가 미국을 떠날 때 비행기를 마련해 주었소. 국무부와 전쟁부가 나에게 이 비행기를 마련해 준 것이오"라고 떠들었을 것 입니다. 조선인들은 이승만이 무슨 비행기를 타고 오건, 그게 L-5건 C-54건 상관없이 그것을 이승만의 전용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승만도 조선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습니다. 어쨌든 이승만은 국무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얻어 중국을 방문했고 장개석은 이승만에게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대접이었으며 이승만은 장개석으로 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귀국해 조선인들에게 저를 당장 쫒아내겠다고 떠들었습니다. (이승만은) 내가 당장 떠나야 한다, 남조선에 지금 당장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힐드링 장군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나를 제외한 미국 정부의 모든 사람들이 단독정부 수립을 약속했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승만이 미국 방문중에 저를 지독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저는 2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고위층에 계신 분들에게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변론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절대 농담이 아닙니다. 몇몇 국회의원들과 제가 접촉한 많은 인사들, 그리고 언론은 제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친공적인 인물이라고 보고 있었고 저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문을 재빨리 잠재웠지만 뉴욕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도 뉴욕을 방문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헨리 루스(Henry Luce)는 이승만의 패거리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지원을 계속하고 있으며 록펠러 빌딩의 사무실 한 칸, 그리고 다른 사무실 한 곳과 행정적인 지원을 공짜로 제공했습니다. 이승만의 패거리들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적이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적이긴 합니다만 조선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 입니다. 우리는 매년 우리를 방해하는 이 자들과 일을 함께 하기 위해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차관님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조선의 우익들이 싫어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이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야 그 놈들에게 쫒겨난다는게 불쾌하겠지만 한 번쯤은 고려해 봐야 할 것 입니다.

'Orientation for Undersecretary of the Army Draper and Party, by Lt. Gen Hodge at 0900 23 September 1947', RG 338, Records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11070, Box 103, AG File, 340.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나타나지만 꽤 흥미로운 평가입니다. 특히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해서는 꽤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프란체스카에 대한 평가인데 이승만 대통령 당시 비서실에 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프란체스카 여사의 정치 개입문제도 다시 한번 검토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뒷부분은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CHO의 댓글문제

할로스캔을 대신해 설치한 ECHO가 약간 말썽을 피우고 있군요. 아직 할로스캔으로 부터의 이전이 완전히 이루어지 지지 않아 댓글 다는 것이 지연되거나 잘 표시되지 않는 등 문제가 있습니다. 할로스캔 서비스는 공식적으로 26일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한동안은 계속 유사한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트랙백이 되지 않는 이유도 할로스캔의 데이터를 완전히 이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해결되려면 꽤 기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CHO의 안내사항을 읽어보니 지금 당장 블로그에 할로스캔의 코드 대신 ECHO의 코드를 설치하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변환이 완료되지 않은 할로스캔의 댓글과 트랙백은 지워진다고 하니 기다리는 수 밖에요. 원래 ECHO로 갈아탄 이유도 할로스캔의 댓글과 트랙백을 모두 이전해 준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한동안 불편이 계속될것 같은데 제가 댓글을 지우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시는 분들은 없으셨으면 합니다^^;;;;;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관계가 없는 듯 하면서도 있는것 같은 약간의 이야기

오늘 드디어 사업최종보고회를 마쳤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보고를 받아야 할 제일 높은 분과 주요 실무진들이 관련 법안문제로 국회에 출석하신 덕인지 보고회는 다소 맥빠진 분위기였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지적도 있었고 영 알맹이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성공적인(???) 보고를 마치고 식사를 하다가 이번 사업과 관계가 있는 전직장관 S선생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분은 손녀들을 통해 어떤 전직 대통령과 어떤 당의 총재와 인척관계에 있기도 합니다. 이 양반에 대해서는 모두가 '귀족이다'라는 일치된 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남조선은 세습적인 귀족제 사회로 복귀한 것이 틀림없다는 썰렁한 농담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회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구글리더를 확인해 보니 몇몇 사람들의 신세한탄이 이어집니다.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좌절되었다는 자괴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글을 읽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제가 있어야 할 작은 자리에 만족하고 있는 입장이라 그런 좌절감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고통을 이겨냈으면 합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걱정하시는 것 처럼 우리사회의 구조를 결정짓는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지금은 약간의 빈자리만 남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는 암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

러시아식 저녁식사에 대한 여운형의 추억

1921년, 코민테른은 워싱턴회의에 맞불을 놓는 차원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대회는 서유럽과 미국 등 서방열강의 전후처리에 실망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었고 조선에서도 많은 대표자를 파견합니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홍범도 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민족운동의 거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됩니다. 여운형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상태라 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입니다. 여운형은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기 전날의 저녁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일부러 역부(驛夫)대신 우리를 차깐으로 안내한 러시아동무가 준비해 가지고 온 초에 불을 켜니 얼룽거리는 누런 광선의 히미한 조명이 그려내는 차실(車室) 한복판의 광경은 자못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의자의 '쿳숀'은 다 떨어저서 밑바닥의 나무가 보기 싫게 노출되어 있고 천정에는 거미줄까지 보였다. 마루판에는 물론 두꺼운 먼지가 우리의 발자국을 번듯하게 색여주었다.

일행이 먼지를 툭툭털며 한복판에 모여앉어 자리를 잡고나니 곧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보다 훨신 뒤떨어져서 들어온 다른 러시아동무가 검은 나무토막을 하나 가슴에 안는 듯이하고 들어오더니 가지고 온 도끼로 패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스토-브'에 땔나무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은 의외에도 검정'빵' 이었다. 밀가루 뿐만 아니라 집푸래기 가루까지도 다분히 섞인 이 검정'빵'을 원악 오래 묵힌데다가 추위에 꽝꽝 얼어서 나무패듯이 도끼로 찍기전에는 도저히 쪼개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검정빵 밖에 연어알과 무엇인지 이름 모를 소름에 저린 생선이 우리에게 급여된 저녁음식의 전부였다. 물론 차도 붙었으나 때무든 양철찻잔과 집이나 삶은 물 같은 누르틉틉한 차물빛은 그다지 식욕을 끄는 것은 되지 못하였다. 양고기 밖에는 먹지를 않는 몽고 동무들은 물론 조선 동무들도 모도 이 심히 살풍경한 반찬에는 감히 손도 대려고 하지 않었다. 그러나 나는 연어알을 조금하고 검정빵을 찻물에 충분히 축인것을 조금 먹어 보았다. 내가 먹는 바람에 다른 동무들도 차물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각사탕도 오직 한개 씩 밖에는 차레에 오지 않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의 흉내를 내고나니 이 뜻밖에 황량한 저녁식사는 우리들 일동의 활발한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 내일도 모레도 여행하는 동안에 때마다의 식사가 늘 이러면 어떨까하는 불안이 누구의 말틈에도 새여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의 러시아를 전국적으로 휩쓸고 지나간 저 대기근의 뒤를 이은 극도의 식량결핍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또 그 조악한 식량에 의하여서도 능히 역사가 그들의 어깨우에 얹어주는 모든 짐을 하나로 거절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어나가는 이 땅의 새로운 민중정신의 감화력이 우리의 이따위 불안같은 것은 오직 웃음거리에 지나지 못한 것임을 잘 알게 하여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呂運亨,「모스크바 印象」, 夢陽呂運亨先生全集發刊委員會, 『夢陽 呂運亨 全集 1』, 한울, 1991, 64~65쪽에서 재인용.

독립운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건만 빵을 도끼로 쪼개는 부분에서는 살짝 웃음이 나오는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독립운동을 하려면 식성부터 좋아야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식성이 까탈스러우니 저당시 살았다면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에바 잡담

영등포 CGV에서 일곱번째로 에반게리온破를 관람했습니다.

다음주에 끝나는 일의 최종보고서 작성을 주말동안 마무리 해야하는지라 금토일은 시간이 안되니 수요일 밤에 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원래는 일을 일찍끝내고 10시30분 것 부터 2회 연속으로 이어서 볼 생각이었는데 마음같이 일이 끝나는게 아니라 12시 50분 것만 보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부터 에반게리온 포스터를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아쉽지만 일을 마무리해야 하니 금토일 관람은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심야상영인데도 아기를 데리고 부부동반으로 오신 분이 있던데 연애시절 에반게리온 팬이 되셨던 분들이 아닐까 싶더군요.(아니면 말고요)

일곱번째 관람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10번째 사도가 발령소의 메인스크린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초호기가 돌진하며 막아내는 부분이었습니다. 사도가 코 앞에 닥친 상황에서 미사토의 표정이 아주 인상 깊더군요. 사도가 돌입하는 장면에서 미사토의 얼굴에 공포+절망+분노 등의 감정을 잘 담아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DVD가 나오면 이 장면을 캡처해서 바탕화면으로 쓸까 생각중입니다.) 그리고 바로 직후에 신지가 초호기로 난입해 미사토를 구해냈으니 신지+미사토도 괜찮은 조합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이왕이면 신지 하렘이 좋지만 굳이 한 명 고르라면 지금 같아서는 미사토를 밀겠어요.)

화요일에 보고를 끝내면 2009년의 일은 완전히 종결되니 그 이후에 에바를 더 볼 수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도착한 책 몇권

얼마전 중국 아마존에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습니다. 발송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뒤 9일만에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선박편으로 주문했던 것 중 가장 빨리 도착한 것 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빨리 도착한 게 10일 걸렸고 보통 2주정도 걸렸는데 드디어 배송기간이 한자리수로 내려갔군요.


뭐 언제나 그렇듯 군사서적 위주로 주문했는데 이번에 도착한 서적 중에서 가장 반가운 녀석은 이놈입니다.

『국민당군사제도사(国民党军事制度史)』는 예전에 조금 썼던 국공내전 후반기 국민당군에 대한 글을 이어서 써볼 생각으로 샀습니다. 겨울에 간단하게 써보고 싶은 글 중에 중공군이 3대전역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국민당군이 재편되는 과정에 대한 글이 있거든요. 이 책은 상하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은 육해공군의 전투부대의 편제와 전투서열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고 하권은 후방지원부대, 헌병, 준군사조직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권을 조금 훑어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육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시기별로 잘 정리해 놓아 베껴써먹기 좋은것 같습니다.


『국민당 역사상의 158개군(国民党历史上的158个军)』은 중화민국 수립부터 국공내전이 종결될때 까지 편성된 국민당군의 군(군단급)단위 부대들의 부대사를 간략히 정리한 서적입니다. 역시 국민당군의 재편성 과정에 대한 글을 쓸때 참고하려고 샀습니다.
예전에 글을 쓸때 국민당군의 편성에 관해서는 주로 『국민당군간사』를 참고했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이 늘어나는건 괜찮은 일이지요.

이것들 말고는 모두 인민해방군에 대한 책인데 나중에 따로 소개를 하던가 하겠습니다.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2차대전 중 소련군의 주요 장비별 생산단가

넵. 땜빵포스팅입니다. 뭔가를 쓸까 했는데 생각이 안나서.

대신 2차대전 중 소련군의 주요 장비별 생산단가에 대한 표를 하나 올려봅니다. 단위는 루블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땜빵에는 뭔가 내용이 있는 도표를 넣는게 최고인듯 싶군요.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翼をください - Chorale Résonances

다들 잘 아시는 그 노래입니다. 느낌이 좀 묘하지만 아주 좋군요.

히틀러 집권기 독일의 보탄(Wotan)신앙

히틀러 집권기의 보탄(Wotan, 오딘) 신앙은 과거 이글루스 시절에 댓글로 한 번 언급했던 문제인데 이글루스를 날려먹었으니 재탕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책은 "그 때의 그 책" 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1933~1945)에는 이단 신앙이 널리 고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1933년 의회에서 가톨릭 정당의 나치당 지지가 있었는데 이로인해 나치당은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나치 정권이 이교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2차세계대전 중의 전시선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신비학자(Occultist)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대독일선전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오딘과 토르 신앙'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앙은 수많은 문학적 찬양의 대상이었다. 나는 민속학과 신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앙이 다른 하급 종교는 물론 폴리네시아나 고대 페루의 신앙과 비교하더라도 특별히 품격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 독일신앙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몰락한다면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다른 이교신앙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라는 두 명의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은 우수인종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믿음을 고무하는 아리아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종했던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보탄(Wotan)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야. 우리의 고대 신화는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었을 때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스펜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를 "나치의 이단 교회"인 다신신앙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존 요웰(John Yeowell)의 최근 연구는 다신교도들이 나치 독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박해받는 존재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신종교의 지도자들은 나치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넨마이스터(Runenmeister)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Friedrich Bernhard Marby)는 1936년에 체포되어 이후 9년동안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르비만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1941년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다신교와 밀교 단체가 불법화 되었다.(이 중에는 보탄 숭배자이며 아리아주의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다.) 수많은 다신교도들이 다른 히틀러 정권의 희생자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Prudence Jones and Nigel Pannick, A History of Pagan Europe, (Routlege, 2000), pp.218~219

물론 여기서 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의 일부분을 전달할 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마르비가 탄압받았던 원인으로는 다신교간의 교파 분쟁으로 히믈러의 지원을 받은 교파가 승리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으며 히틀러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의 소수 인사들이 이교도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를 통해 독일의 전통 신앙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이상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은 찝찝한 일이지요.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할로스캔으로 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할로스캔의 서비스가 2009년 12월 26일부로 종료된다기에 JS-KIT의 ECHO로 갈아탔습니다.

1년에 9.95달러인 유료서비스인데 할로스캔의 데이터를 그대로 이어받아 쓸 수 있으니 이것을 쓰는게 좋을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2년 가까이 쌓인 댓글을 날려먹는 것은 아까우니 1년에 만원을 내는게 좀 더 나을 듯 싶었습니다.

한번 써 보니 한글지원기능이 확실히 할로스캔보다 좋아진 것 같습니다. 세글자 이상의 한글 아이디도 잘리지 않고 제대로 표시되니 앞으로 방문객 분들의 아이디를 몰라서 당혹스러울 일은 없어질듯 싶군요. 그동안 할로스캔의 부족한 한글지원 기능으로 애를 먹었는데 이것하나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

유료서비스라 살짝 아쉽지만 기존의 댓글이 그대로 남았으니 적당히 만족할까 합니다. 일단 써보고 신통치 않으면 다른 서비스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추가 - ECHO의 공지사항을 보니 아직 할로스캔의 데이터 전환이 완료되지 않아 트랙백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댓글의 경우 몇가지 선택사항이 있는데 댓글이 등록되면 블로그 운영자가 댓글을 선별해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있더군요. 일단 저는 게을러서 댓글이 올라오는대로 달리도록 해 놓았습니다. 욕설이나 광고메일만 골라서 삭제하면 되겠지요.

앞으로도 욕설이나 광고메일이 아니라면 삭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ECHO 서비스는 할로스캔보다는 안정적일 듯 싶으니 예전 처럼 지우지도 않은 댓글을 지웠다고 난리를 치는 인간들은 더이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추가2 - 새로 설치한 댓글창에 글자가 너무 작게 나온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ctrl을 누르시고 마우스휠을 굴리는 것으로 글자크기를 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번동아제님이 쓰신 군기시(軍器寺)터 발굴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건물지 11호'에서 조선시대의 화약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동아제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이를 통해 조선시대 화약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Bert S. Hall의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중세말기~르네상스 시기의 군사적 발전을 '기술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데 3장 전체를 할애해 15세기의 화약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어서 읽을 당시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난 김에 이 책에 대해서 조금 소개를 해 보려 합니다.

이 책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출간한 기술사연구(Johns Hopk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Technology)의 열 다섯번째 저작입니다. 몇 년전 2차대전에서 근대유럽전쟁 전반으로 관심사가 옮겨가면서 근대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에 대해 쓸만한 서적이 없을까 찾아보던 중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Bert S. Hall은 중세말~르네상스 시기의 군사기술이 전쟁의 양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법 합니다. 네. 그래서 Hall은 화약 무기에 대한 기술적 분석과 전술의 변화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약 무기의 생산을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자는 14세기에 공성병기로서 화약무기의 사용이 확산된 데 대해 대포의 위력뿐 아니라 138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하기 시작한 화약의 가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에 걸쳐 화승총으로 대표되는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하게 된 데에도 단순히 화약의 개선과 기술적인 요인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자는 화승총의 개발과 확산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주도된 데 주목하여 이 지역의 분열된 정치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즉 영국, 프랑스와 달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들은 공세적인 전쟁을 치르기 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는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이때문에 방어 전투에 적합한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이러한 주장은 초기 화승총의 운용이 야전에서도 창병과 참호의 지원을 받아 방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단순히 군사기술적 측면에만 집중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전쟁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설명으로는 해결하기 곤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또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분석도 충실합니다. 15세기 화약 생산을 분석한 3장과 초기 화약무기의 탄도적 특성을 분석한 5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의 경우 20세기에 실시된 15~16세기 화약무기에 대한 실험 등 초기 화약무기의 기술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여 기술적 한계가 어떻게 화약무기를 활용한 전술을 형성했는지 고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88년 부터 1989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 실시된 실험인데 이 실험의 결과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자는 활강식 총신과 탄두의 형태로 인한 낮은 명중율과 원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초기의 소화기는 근거리에서 대규모 일제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런 전술에서는 명중율 보다 발사속도가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총신에 강선을 파는 방식으로 명중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음에도 널리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장전속도가 느려져 대규모 보병전투에는 약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이런 구성은 꽤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한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서 다른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중간에 변화의 요인이었던 기술적 문제에 대해 별도의 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장을 이해하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적 변화와 전술적 변화를 함께 서술하는 것 보다 명료한 구성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례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미권 학계에서 이 시기의 전쟁을 기술 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스페인 등 기술적, 군사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다른 지역의 사례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후스전쟁과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전쟁 말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후스전쟁에 대한 군사적 분석은 꽤 드문편이라 읽으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대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용자왕 이카리 신지

오늘 아침에 삼성역 메가박스에서 '용자왕 이카리 신지'를 조조로 관람했습니다. 이번이 네번째로군요.

제가 평일에도 이러고 다니는 것을 알면 제게 일을 맡긴 분들이 엄청나게 황당해 하시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재택근무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날자만 맞춰드리면 되는 것이죠.(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재미있는게 극장에서 하는데 놓칠 수는 없잖아요.

이번 '용자왕 이카리 신지'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진심입니다. DVD 구매는 당연히 확정.(뭐, '序'도 있으니)

눈에 빨간불 들어온 신지가 제르엘을 떡실신 시키고 레이를 구해내는 장면은 정말 '유치해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진심입니다. 저는 유치한게 너무 너무 좋습니다.

신지가 이번 극장판에서 레이를 공략(???)하는데 성공했으니 남은 두 편의 극장판에서 분발하여 모든 여캐들을 구원해 주길 희망합니다.(혹자는 레이는 엄마라서 안된다는데 그러시면 안되죠)

아스카가 떡실신 당한 것은 안타깝지만 다음편에 부활할테니 그것으로 됐고.

마지막 편의 엔딩이 소외받는 리츠코까지 포함한 하렘완성으로 끝나게 된다면 저는 진심으로 감동할 것입니다. 정말이에요.

※ 이번 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은 사하퀴엘을 저지하기 위해서 에바 세대가 질주할 때 깔리는 배경음악입니다. 친절한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군요.

후발주자가 누리는 이점

요즘 읽는 어떤 책의 서문에 꽤 마음에 드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정치사에 대해 역사학적 접근이 가지는 이점에 대한 글인데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볼까합니다.

동방정책(Ostpolitik)에 대한 연구는 넘쳐나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할 여지가 있는지(나의 연구는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방정책에 대한 연구에 기여할 여지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다. 이 연구는 1차사료에 근거하여 신동방정책(新東方政策)이 공식화되고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최초의 연구이다. 베르너 링크(Werner Link)가 옳게 지적한 것 처럼 최근 공개된 문헌 자료들에 의거해 신동방정책을 총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최근 공개된 문헌 자료들은 과거 동방정책에 대한 연구들이 구술자료, 신문, 또는 개인이 소장한 부분적인 문서를 활용했던 것과는 달리 외교문서와 그밖의 문헌자료들을 통해 '총괄적인 역사상'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동방정책이라는) 잘 알려진 주제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새로운 연구를 촉진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von Dannenberg, Julia. The Foundations of Ostpolitik : The Making of the Moscow Treaty between West Germany and the USSR,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p.11

현대사에 대해 역사학적 접근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을 잘 보여줬다는 생각입니다. 현대 정치 문제는 자료의 문제 때문에 정치학 등 다른 학문이 먼저 다루게 됩니다. 현대 정치문제는 1차사료라고 할 수 있는 정부문서가 공개되어야 본격적인 역사학적 접근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정부의 공문서, 특히 외교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문서들은 공개가 수십년간 제한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역사학은 현대 정치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대부분 정치학에 대해 후발주자일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니 역사학적인 접근이 시작될 때 쯤 되면 해당 주제는 이미 수십년 동안 정치학 등 다른 학문 분야에서 많은 연구성과를 내놓은 이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연구들이 활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료의 활용은 (뒷북을 치는) 역사학적 접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후발주자가 누리는 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09년 12월 6일 일요일

아이구 좋구나!

타미야에서 근사한 녀석을 하나 뽑아주는군요.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타미야의 1/48 Sd.Kfz 251은 AFV클럽 물건보다 살짝 아쉽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시리즈가 꾸준히 나온다는게 아주 즐겁군요.



ドイツ ハノマークD型 “グランドスツーカ” ロケットランチャー搭載型


사실 24구경 75mm를 탑재한 4호전차를 신제품으로 뽑아주거나 셔먼 계열을 계속해서 1/48로 뽑아주길 원하지만 이런것도 아주 나쁘진 않습니다. 2차대전기의 AFV를 1/48로 뽑아준다는게 즐거운 일이죠.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중국서적 구입문제

책을 사다 보면 가끔씩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습니다.

대 표적인것이 중국서적 구입문제입니다. 중국은 바로 바다 건너 마주보는 나라이고 한국과의 교역규모도 엄청난데 희한하게도 중국책을 구입하는 것은 은근슬쩍 까다롭습니다. 작년에 채승병님도 중국 인터넷 서점의 이용문제에 대해서 글을 한편 쓰셨는데 이문제는 정말 사람을 은근슬쩍 화나게 합니다.

실망스러운 중국 인터넷서점 당당망(当当网)

예를들어 국내의 중국서점들은 구입할 수 있는 책이 한정되어 있고 기간도 오래걸리는 편 입니다. 사당역의 중국도서문화중심이나 대학로의 화문서적이 나 주문을 넣으면 들어오지 않는 책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데다 화문서적의 경우 주문할 때 시기를 놓치면 다음달 주문할 때 책을 구해오니 최악의 경우 6주 이상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6주씩이나 기다려서 원하는 책을 구하지 못하면 정말 울화통이 터지죠. 국내 중국서점들이 실제 환율에 100원 정도 더 얹는 환율을 적용하는 것이야 중국 인터넷 서점에서 직접 구입할 경우 붙는 황당한 배송료와 비교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느린데다 필요한 책도 구하지 못하는건 정말 짜증나는 일입니다.

※ 얼마전 화문서적에 책을 사러 가보니 연말 특가라고 1위안에 300원에서 270원으로 인하한 환율을 적용하고 있더군요.

중국 인터넷 서점들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아마존은 배송면에서 나쁘지 않지만 의외로 없는 책이 많습니다. 당당망은 재고가 충실한 편이지만 배송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해결책이라면 중국 아마존의 취급 도서가 더 많아지거나 당당망의 배송 서비스가 개선되거나 하는 것일텐데 단기간 내에 해결되긴 어려울 듯 싶습니다.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모스크바 용팔이

한국전쟁당시 중국이 무기 구입을 위해 소련에 대표단을 파견했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공군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1951년 4월 21일)에서 비로소 대규모로 투입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중국인민해방군은 한국전쟁에 총 10개 전투기사단(총 22개 사단 중)을 순환체제로 투입했다. 소련측은 처음에는 충분한 숫자의 MiG-15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MiG-9만 판매하려했다. 중국측이 구식화된 MiG-9로는 미국의 최신예 항공기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깎아내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문제를 보고 받자 중국측이 372대의 MiG-15를 구입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중국과 소련의 협력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굳건해져갔으며 그것은 저우언라이가 1960년에 스탈린은 한국전쟁이 진행되어 가면서 중국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고 말하게 할 정도였다.

Goncharov, Lewis and Xue,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아마 당시 중국측의 불평에 발끈했다는 소련측 담당자도 MiG-9가 F-86의 상대가 된다고는 믿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 대표단과 소련측 간에 오고간 대화의 녹취록이 있다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

1950년대에 무장친위대 출신 퇴역군인들은 상호원조회(HIAG, 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로 불리는  참전군인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HIAG의 각종 대외활동은 외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은 전쟁기간중 나치당의 무장조직인 무장친위대에 소속되었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고 이때문에 전직 무장친위대원들은 공개적으로 무장친위대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HIAG에 가입한 회원은 2만명을 기록한 뒤 1960년에 이르면 기존의 회원조차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문에 하우서(Paul Hausser)길레(Herbert Otto Gille)와 같은 무장친위대의 유명인사들은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전쟁범죄와 '거리가 먼' 조직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예를들어 길레는 1953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의 집회에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무장친위대에게 전쟁범죄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성토했습니다. 또한 HIAG의 기관지 중 하나인 Der Freiwillige는 1957년 6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무장친위대를 친위대보안국(SD, Sicherheitsdienst), ..... 그리고 강제수용소 경비원들과 동일한 부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최근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무장친위대는) 이러한 조직들과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해군, 공군 또는 육군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무장친위대는) 다른 병종과 같은 군사조직이었으며 전투에 임할때나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상대할 때에 있어서나 군사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Large, David Clay. 'Reckoning without the Past: The HIAG of the Waffen-SS and the Politics of Rehabilitation in the Bonn Republic, 1950-1961',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59 No.1(Mar., 1987) pp.84~85 

기이하게도 전직 친위대가 또 다른 전직 친위대에게 전쟁범죄 책임을 떠넘기는 양상이 된 것 이었습니다. 물론 무장친위대는 전쟁범죄로 부터 자유롭지도 않았고 점령지의 민간인들에 대해 항상 규율을 엄격히 준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1990년대에 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때 까지 전쟁범죄 문제를 두고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형성되었는데 육해공군등 국방군은 친위대 조직(무장친위대+일반친위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무장친위대는 일반친위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군요.

육해공군 : 우리는 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무장친위대 : 우리는 일반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일반친위대 : 이런 위선자 새퀴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로는 나치 시기의 범죄연구가 국방군의 전쟁범죄로 까지 확산되어 더 이상은 이런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존재할수 없게 되었지요.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대영제국의 '확실한' 몰락

구글리더를 확인하던 중 황당한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Just five bullets for each soldier

이 기사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 내각 당시 대중여론을 의식해서 이라크전쟁 참전을 비밀리에 준비하는 바람에 보급 등 전투지원 준비가 부실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일부 부대는 병사당 다섯발의 실탄만 지급한 상태로 전투에 나가야 했고 일부 부대는 방탄조끼 등 개인 방호장비도 부족한 상태에 처해있었다는 것 입니다. 여기에 군용 무전기는 열에 약해 쉽게 고장나는 형편없는 물건이 많았다고 하는군요;;;;

이 외에도 기사를 읽다 보면 영국군의 비참한 실상이 잘 나타납니다.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차는군요.

100년전의 영국 장군들은 이런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김일영 교수 사망

어제 밤에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김일영 교수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암 투병 중이시긴 했으나 마지막으로 뵈었던 2주전 까지도 상태가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학자의 중요한 덕목인 성실함을 갖춘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계신 분이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좋은 분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김일영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야당의 올바른 자세???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1965년 초 한일회담 타결이 가시화 된 시점의 이야기 입니다.

야당지도자들은 한일회담에 대하여 두가지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는 한일회담은 어차피 타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반일감정에 비추어 타결한 정부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반대한다는 명분과 기록만 남겨두고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타결하게 하자는 것인데 지금 몇몇 재야정치인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둘째는 이번의 한일교섭은 한국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어서 극한투쟁을 해서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 반대투쟁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세하면 현정권을 아주 무력하게 거세하거나 또는 더 나아가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민정당 주류에서 작년에 그와같은 전략을 따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일교섭이 대단원을 향해 쾌속으로 달리는 이때 야당측이 어떤 전략을 택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현실이 지나치게 앞질러 가고 있으니 둘째의 전략을 택할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첫째의 전략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南載熙*, 「剩餘價値만 남기는 政治」, 靑脈 第7號(1965. 4), 15쪽

*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오늘날의 야당 또한 민감한 일이 발생한다면 위의 두가지 중 한가지 테크를 타겠지요. 이래서 야당 노릇 하는게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한 무장친위대 대원의 전쟁범죄

구글리더에 쌓여있는 아직 읽지 않은 글들을 정리하던 중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어떤 전쟁범죄에 대한 소식을 하나 접하게 됐습니다.

Former Nazi SS member charged with killing Jewish labourers - Guardian

이 기사에 따르면 올해 90세의 전 무장친위대 대원 아돌프 슈톰스(Adolf Storms)이 전쟁 종결직전인 1945년 3월에 수십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5 SS 기갑사단 비킹(Wiking) 소속이었던 아돌프 슈톰스는 57명의 유태인들을 오스트리아의 도이치 쉬첸(Deutsch Schützen)에서 사살했으며 다른 한명은 도이치 쉬첸에서 하르트베르크(Hartberg)로 이송하던 도중 걸을 수 없게 되자 사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슈톰스는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이름을 바꾸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조용한 말년을 보내는 것은 실패한 것 같군요.

당사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슈톰스의 과거는 조용히 떨쳐버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 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득템



어떤 도서관에서 오늘 하루동안 중복되는 서적들을 정리한다기에 냉큼 가서 얻어왔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책들이라 기분이 아주 좋군요.

1990년, 붕괴 직전 소련군의 일화

우울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죠.

1990년 6월 '병사의 어머니들' 이라는 운동단체가 과거 4~5년간 1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이후 부터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가 다른 출처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인민대표회의의 우즈베키스탄 대표 한 명은 "최근" 타쉬켄트 한 지역에서면 190명의 신병이 사망했으며 이미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신병 430명이 사망했다는 폭로를 했다.

이 대표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병사들을 노린 살인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며 국방부 대변인은 (1990년) 11월에 발표하기를 1989년 (1월 부터 ) 9월까지 사망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는 167명이며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출신은 123명, 우크라이나 출신은 25명, 카자흐스탄 출신은 15명, 벨라루스 출신은 13명, 그루지야 출신은 7명, 아제르바이잔 출신은 7명, 그리고 이 밖의 다른 공화국 출신 병사 일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이러한 증거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들만 차별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망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다른 민족(공화국)들이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에 제기한 의심을 더 확신하게 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가 일관성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나 발표된 통계를 보면 사망자의 숫자는 1990년 이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조프 원수는 12월에 있었던 한 비공개 회의에서 1990년 한 해에만 500명의 징집병이 자살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69명의 장교와 32명의 부사관이 살해당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장 니콜라이 쉴랴가 대령은 1990년 (1월부터) 11월까지 2,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말했다.(이렇게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 수치에 타지키스탄과 카프카즈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즉된다.)

Odom, William E.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93

붕괴될 무렵의 소련군대나 옐친 시절의 러시아군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군의 병영생활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따라잡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옐친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군대내의 가혹행위를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이 무렵의 소련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적당한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살짝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1973년, 붕괴 직전 캄보디아 정부군의 일화

저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부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붕괴와 공산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당시의 반공교육을 위한 책자들은 캄보디아의 학살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정체모를 공포감과 함께 상상력을 자극했지요.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 군사사 서적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어린시절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접근하게 됐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당시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건들입니다. 뭐랄까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 여전히 머릿속 한 구석에 짜릿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일을 하다가 딴청을 피우던 중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책을 한권 집어들고 예전에 표시해둔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캄보디아 정부가 계속해서 패배하자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던 부대도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군사원조관계자들은 캄보디아 정부군의 7사단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73년) 4월 초 이 사단의 예하 부대는 타케오(Takeo)성의 성도 부근에서 매복공격을 받자 공황상태에 빠져 105mm 유탄포 8문 중 5문과 트럭 40대 분의 포탄을 적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집단적인 기강해이"로 인한 사고는 더 늘어났는데 이러한 사고의 원인은 주로 정부가 병사들에게 제때 월급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월 중순, 수백명의 병사들이 프놈펜(Phnom Penh) 북서쪽의 방어진지를 이탈해 봉급 지불을 요구하면서 수도의 중심지로 행진했다. 이 병사들은 총사령부를 향해 대로를 따라 가면서 허공에 소총을 난사해 행인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이 병사들은 봉급을 전혀 지불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3일 동안 급식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크게 놀란 참모장교들은 즉시 병사들에게 올림픽 경기장에서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정심이 많은 대령 한명이 자신의 돈으로 몇 자루의 빵을 사서 지프에 싣고 올림픽 경기장으로 왔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프에서 빵 자루를 내리자 마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빵을 집어들고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캄보디아군 중위 한 명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고요?"

새 정부란 미국의 요구에 의해 얼마전에 조직된 '최고 정치 위원회'를 뜻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 당장 여길 와 봤으면 합니다."

캄보디아군 장교단은 더할나위 없이 무능했으며 여기에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크메르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합의에 따라 "병사들의 급여에 사용할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전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방지하는것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발표한 지 2년이 지난 뒤에 대략 4만명에서 8만명의 '유령'이 군대의 급여 명부에 올라와 있었다. 이런 유령 병사들은 한달에 최고 2백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돈은 부패한 장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미국 국방부의 한 장군은 1973년 5월 상원의 비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투른 변명을 해야 했다.

"캄보디아 정부군 사령부는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첫 단계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님께서 주장하신 것과 같은 부패행위, 급여 명부에 없는 사람을 집어 넣는 행위, 전투에서의 무능력함 같은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Issacs, Arnold R.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p.218~219

이왕 군사사에 관심을 가질 바에는 좀 멋진(???)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암울하고 한심한 이야기가 더 솔깃하더군요. 이 책에 표시해 놓은 다른 부분들도 이와 비슷한 한심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이런 혼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흥미롭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짜증

이런 이야기에 실명을 거론하면 큰일나겠죠. 진짜로 맞을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 몇년간 인터뷰를 몇 번 하다보니 일종의 편견이 생깁니다. 무슨 편견이냐면 알맹이도 없는 양반들이 쓸데없는 말은 더럽게 많으면서 까탈스럽다는 것 이죠. 오늘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는지라 아주 화가 납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그저 어중간한 지위에 있었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만나야 하는데 왜이리 까탈스러운지 모르겠군요. 그시절이라면 잔챙이에 불과했던 인물이 다른 거물들(장관급) 보다 사람 신경을 더 긁습니다.

뭐. 먹고 살려면 이런 짜증나는 양반들 비위도 잘 맞춰줘야 겠지요. 별수있겠습니까.

박정희 때리기에 대한 잡생각

잡담을 조금 하고 싶군요.

저는 진보진영의 박정희 때리기가 당분간은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현재 진보진영이 쏟아넣는 노력만큼 성과를 거두는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물론 장기적으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겠지요.) 박정희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은 상태이며 박정희에 대한 어지간한 공격은 그런 '믿음'에 상처를 주기에는 약합니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이야 이미 그가 처음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윤보선이 한 번 써먹어 봤지만 별로 재미도 보지 못했으며 만주국 군대에 복무했다는 점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를 때리는데 힘을 쏟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로 보일 뿐 입니다.

재미있게도 어제 읽은 김헌태의 『분노한 대중의 사회』(후마니타스, 2009)에도 제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국민 모두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노력한 시절에 대한 대중의 향수는 박정희가 거론될 때마다 되살아나는 대중의 기억에서 중심에 있다. 물론 반대로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비판도 무겁다. '친일논란', '군사 쿠데타 과정', '일본 제국주의식 국민 동원 모델에 대한 논란', '대일 굴욕 외교', '정적 제거와 인권 탄압', '산업화 과정에서의 영남 중심 경제개발과 화남에 대한 차별'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상에서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이 그의 부정적 실체를 보지 못해서라고 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해 그들이 알아야 할 만큼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김헌태, 『분노한 대중의 사회 : 대중여론으로 읽는 한국정치』, 후마니타스, 2009, 274쪽

김헌태의 지적은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진보쪽에서는 박정희의 지지자들의 무지함을 비웃을 수 있겠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은 그들 나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저와 같이 민주당을 찍는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정치적 영향력도 꽤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보쪽에서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중을 향해 '계몽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박정희에 대해 심각하게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일으키지는 못 했으며 그저 진보진영에 한정된 찻잔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무지몽매한 박정희 교도'들을 깨우쳐 주겠다는 희생정신(?)은 나름 숭고해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과가 신통치 않다면 방법을 조금 바꿔볼 필요도 있을 것 입니다. 실제 박정희가 냉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박정희는 좀 긍정적인 모습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고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여기에 대해 지적인 우월감을 들고 가볍게 달려든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지요.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오늘은 오전에 예정된 일이 일찍 끝나서 오후시간이 비게 됐습니다.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한겨레 신문사가 주최한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라는 학술 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주최측의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 토론회는 '진보진영'이 어떻게 하면 박정희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가 주된 화두였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통틀어 박정희 신화를 잠재우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그 신화 덕분에 이명박 같은 3류 짝퉁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재앙까지 겪고 있으니 '진보진영'이 박정희의 유산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토론회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토론회 자체를 급히 준비한 것인지 발표자들, 특히 정치분야 발표자들이 발표 당일까지도 발표문을 완성하지 못해 발표장에서 별도로 출력해 제공했다는 점 입니다. 특히 1부의 마지막 발표를 맡은 박명림 교수의 경우는 발표문이 부족하게 복사되어 발표문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책자로 배부된 발표문도 오탈자가 더러 있었는데 역시나 토론회를 급히 준비하느라 책자를 교정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분야의 발표는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정치분야의 발표는 신통치 않은 글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주최측(한국경제정책연구회, 한겨레신문사)이나 후원측(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성격상 박정희 정권기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사회자들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는데 특히 함세웅 신부의 발언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흑백논리로 점철되어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 입장임에도 듣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저는 박정희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절대악'이라는 공식은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반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박정희와 그 유산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박정희를 극복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는 반한나라당 진영을 결속시키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회색지대에 있는 다수의 대중을 끌어들이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말이지요. 현재와 같은 방식의 박정희에 대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영향력을 넓혀갈 경우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두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가 꼽히고 있는 만큼 반한나라당 진영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이런식의 단순한 공격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60~70년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는 만큼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뀔 것이고 그를 둘러싼 신화도 상당부분 불식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박정희가 남긴 유산, 특히 박근혜에게 계승된 정치적 자산이 단시일내에 쉽게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한나라당 진영은 박정희 때리기를 부차적인 일로 미뤄두고 중간지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문제가 4대강 사업과 같이 현실의 시급한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은 별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 문제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이라는점은 분명합니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

漁夫님이 지난 4일에 쓰셨던 '20세기 최악의 기록들; 독재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漁 夫이 언급하셨듯 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단위 사회에서는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으며 특히 남성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으니 Keely의 이야기를 한 번 소개해 보지요.

Keely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통계화 할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의 '문명화된' 사회보다 '비문명화된' 사회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에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구 손실은 전체 인구의 2.5%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야노마뫼(Yanomamo)족의 경우 20%를 거뜬히 넘어가며 히바로(Jivaro)족의 경우는 30%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게다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성인남성의 경우는 수치가 더 높아지는데 야노마뫼족은 전쟁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남성의 40% 가량이 사망하며 히바로족은 그 비율이 거의 6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외에 Keely가 인용한 인류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비교대상으로 선정한 '문명화된' 사회와 '비문명화된' 사회의 통계에서 대부분의 '비문명화된'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를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에서 압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Keely는 비록 부족단계의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은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에 비해 사망자의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전쟁이 발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이밖에 복수 등의 동기에서 개인 단위의 습격이나 살인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남성의 비율도 극단적으로 높으며 교전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기준으로는) 잔혹한' 대우 등 사망률을 높이는 요인이 많습니다. 여기에 사망자의 숫자가 적지만 그만큼 사회의 규모도 작아서 한번 피해를 입으면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뉴기니아의 한 작은 부족은 결혼한 성인남성이 총22명이었는데 4개월 반의 전투를 겪은 뒤 결혼한 성인남성의 '27%'에 해당하는 여섯명의 남성이 전사하고 여덟명의 남성은 부족에서 이탈해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결혼한 성인 남성 22명 중 14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부족은 엄청난 타격을 받은 셈이지요.

몇몇 사례들을 보면 우리의 사회에서는 말로 해결될 것도 창과 활이 동원되고 있으니 사망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현대의 문명사회가 살인 기술에 있어 훨씬 효율적이지만 폭력을 사회적 제도로 억제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사망률에서는 비문명화된 사회보다 낮은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문명사회의 경우 한번 폭력을 사용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되긴 합니다만;;;;;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

학자들의 노고(?)

옛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건 참 재미있는 경험이지요.

(전략)

돈키호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학자들의 노고는 주로 가난입니다. 모든 학자가 다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난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도 저는 그들의 불행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가난해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가 되면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오는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데 바로 배고픔에, 추위에, 헐벗은 차림으로, 혹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먹지 못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닌 것입니다. 비록 유행에서 약간 뒤쳐지거나 부자들이 쓰고 남긴 것을 쓰게 되더라도, 학자들의 최고의 고통은 바로 '수프를 찾아나서는 일'일 것 입니다. 그래도 남의 집에 가면 화로나 난로 옆에서, 몸을 데울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추위를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밤에는 집 안에서 잠을 잘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밖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즉 속옷이 부족하거나, 여분의 신발이 없다거나, 털이 빠져 요상한 옷이라거나, 운 좋게 어느 연회에 가서 지나치게 많이 먹어 배탈이 나거나 하는 것 까지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학자는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험난한 길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넘어져, 이쪽에서 일어서고 또다시 저쪽에서 넘어지고 해서 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후략)

미겔 데 세르반테스/박철 옮김, 『돈키호테』, 시공사, 2004, 529~530쪽

오늘날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소위 학문이라는 일을 하면서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돈을 벌기란 참 어렵죠.

번역의 탄생

요즘 읽는 책 중에 『번역의 탄생』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번역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많아져서 생각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책이 뭐 없을까 찾다가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구입했는데 구입하고 한참을 방치해 두고 있다가 지난달 부터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한번에 모두 읽는것 보다는 조금씩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한번에 조금씩 나누어 읽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한다는 점에서 이책을 추천해준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자는 번역의 핵심이라고 할수있는 '우리말'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제가 쓰는 글들이 번역투라는 비판을 많이 들어서인지 한국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자주 들던터라 저자의 주제의식이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금 느끼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쉽게 해결된 문제는 아니겠지만 노력은 해 봐야겠지요.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잡담 하나 더

재보궐 잡담 하나만 더 해볼까 합니다.



 어제 오전에 괴산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민노당 후보의 현수막을 봤을 때 좀 기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평소 민노당의 행각에 대해 불쾌감을 많이 느끼는 편이긴 하지만 이 현수막을 처음 봤을 때는 약간 측은한 감정이 들더군요. 오죽 당에 인물이 없으면 강기갑을 내세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이나 당에 대한 호불호를 배제하고 평가하더라도 강기갑은 그저 그런 기행으로 유명할 뿐이지 다른 정당의 거물급들과 비교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정치인입니다. 사천에서 이방호를 꺾고 당선된 것도 강기갑의 실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만큼 강기갑은 기본적인 실력조차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웹상에서는 제법 거물로 비쳐질 지 몰라도 실질적인 파괴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죠.

 아직 재보선 개표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기호 5번에게는 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양치기 늑대?

대한민국 정치 소식은 블랙유머의 산실이라죠.

"與, 재보선 패배시 서민경제정책 추동력 상실"

저는 이 기사를 읽은 뒤 늑대가 양들에게 "늑대가 온다!!!"고 외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별로 믿음이 안가죠.

유탄포

귀찮기는 한데 쓸건 써야겠죠.

일단 앞의 글에 달린 대사님의 반론을 먼저 읽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희한하게도 대사님은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한 것 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글과 댓글들을 모두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두 단어가 수십년간 혼용되어 왔는데 어느게 더 익숙하냐는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이걸 객관화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까?"라고 썼지 두 단어가 "같은 비중으로 쓰인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책 그대로 베낀 고색창연한 인쇄물 말고, 21세기 인쇄물 중에서 유탄포로 쓰인 책 좀 봤으면 좋겠네요.일본책 베낀 거 말고..국군에서도 그냥 곡사포로만 번역하고 있는데 무슨.." 이라는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긴 싫으니 제 컴퓨터에 있는 PDF 파일 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한 단행본을 조금 찾아 봤습니다. 국방부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연구소이니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은 되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2004년에 출간된 『6ㆍ25 전쟁사』 1권입니다.


다음은 2006년에 출간된 『6ㆍ25 전쟁사』 3권입니다. 3권에서도 Howitzer는 유탄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귀찮아서 제가 가진 책만 대충 찾아봤는데 대사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은 어느정도 될듯 싶습니다.

유탄포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의 글에서 적었듯 영한사전의 경우도 출판사 별로 Howitzer를 곡사포와 유탄포로 옮기고 있습니다. 저의 견해는 앞서 거듭 밝혔듯 Howitzer를 유탄포로 번역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입니다.

애시당초 원래의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 이었을 뿐입니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단어 사용 문제

원래 별도로 글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입장에 대해 간략히 정리할 필요는 있겠더군요.

제가 이전의 글의 댓글에서 이야기 했듯 Howitzer라는 영어단어는 한국에서 '곡사포' 그리고 '유탄포'로 번역이 됩니다. 두 가지 용례가 널리 사용되다 보니 영한사전의 표기도 두가지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민중 영한사전'이나 '동아 프라임 영한사전' 같은 경우는 Howitzer 항목을 간단히 '곡사포' 라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사영어사에서 내고 있는 'e4u 영한사전'의 경우는 Howitzer 항목을 '유탄포(곡사포의 일종)'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곡사포'와 '유탄포' 모두가 번역 용례로 사용되고 있으니 일반적인 번역에서 '유탄포'로 번역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둘 중 어느 단어가 더 익숙한 것이냐는 질문은 그야말로 넌센스입니다. 두 단어가 수십년간 혼용되어 왔는데 어느게 더 익숙하냐는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이걸 객관화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까?

그리고, 아예 잘못된 표현이라면 모를까 엄연히 영한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 단어를 가지고 '뭘 번역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물어보면 뭘 어쩌자는 겁니까.

오역도 아니고 영한사전에 있는 일반적인 용례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데 이게 도데체 논쟁거리나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싫습니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미 육군의 프랑스제 야포 채용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야포"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1차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서부전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력전이 전개되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대서양 건너의 미육군에서도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륙의 불똥이 언제 바다 건너까지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러나 비교적 19세기 말 유럽의 육군군비경쟁과는 무관하게 한발 물러서 있던 미육군의 포병전력은 세계대전에 뛰어들기에는 살짝 모자란 수준이었습니다. 1898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육군이 보유한 야포는 123문의 3.2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야포, 22문의 3.6인치 유탄포, 그리고 소수의 공성포(siege gun)가 전부였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이때문에 포병 전력의 확충을 위해 영국으로 부터 34문의 암스트롱 4.7인치 야포와 8문의 6인치 포를 급히 구매해서 배치해야 했습니다.1) 미국 전쟁부는 이 전쟁의 경험과 유럽의 군비경쟁에 자극을 받아 포병전력의 확충에 고심했지만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유럽대륙의 군비증강에 자극받아 1912년에 새로운 보병사단의 포병개편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개편안은 1개 보병사단에 1개 포병여단을 두고 이 포병여단은 다시 2개 포병연대로, 그리고 각 포병연대는 2개 대대의 3인치 야포(각 대대당 3인치 야포 12문)과 1개 대대의 4.7인치 유탄포(대대 당 4.7인치 유탄포 8문)로 편성하는 것 이었습니다.2) 이 개편안의 목적은 미육군 보병사단의 포병전력을 유럽대륙의 보병사단 포병편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증강하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4.7인치 유탄포는 6인치 유탄포를 배치하는 방안으로 교체됩니다.

사실 1차대전 직전에는 포병전력 뿐 아니라 미육군 자체가 전반적으로 전력 강화에 부진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916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se Act)이 목표로 한 것은 1921년까지 정규군을 165,000명, 주방위군(민병대)을 450,000명으로 증강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습니다.3) 포병 증강을 위한 시도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지만 1917년 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계획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포병 증강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트리트 위원회(Treat Board)는 1915년 4월 17일의 보고서에서 육군의 포병전력을 8년에 걸쳐 3인치 야포 1,968문, 3.8인치 유탄포 936문, 4.7인치 유탄포 312문, 4인치 야포 312문, 7.6인치 유탄포 104문, 11인치 유탄포 72문으로 증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방대한 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총 4억8천만 달러로 예상되었습니다.4)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단포병의 주력장비가 될 3인치 야포의 개량형, M1916을 예정에 따라 충분히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현대적 야포의 생산에 필요한 기술적 정보가 부족했으며 이때문에 1916년에는 병기국의 힐맨(L. T. Hillman) 소령을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 영국 정부와 접촉해 미국이 필요로하는 기술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미국측에게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기피했으나 힐맨 소령이 영국과 접촉해 빅커스(Vickers)의 9.2인치 유탄포와 12인치 유탄포의 설계도와 기술을 구매하자 태도를 바꿉니다. 힐맨 소령은 프랑스로 부터 생샤몽(St. Chamond)사의 야포용 완충기 생산권 등 중요한 기술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5)

미 전쟁부는 1917년 부터 유럽으로 부터 구매한 신기술을 대거 활용해 대규모 포병증강계획에 돌입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단포병의 주력 장비인 3인치 야포와 6인치 유탄포의 대량생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포병증강계획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미국이 이제 막 유럽에서 도입한 신기술을 적용해 개량한 3인치 포는 시험 결과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예정된 시간까지 유럽에 파견할 육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M1916은 물론 영국제 18파운드을 바탕으로 한 M1917의 시험 결과도 신통찮았기 때문에 미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소장은 "우리는 이번 전쟁에 우리 군대를 야포로 무장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6) 미국정부는 미국 원정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미국제" 장비로 무장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7) 하지만 현실은 미국의 "야무진 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 국 병기국장 크로지어(William Crozier) 소장과 프랑스 병기국장 갸네(M. J. M. Ganne)간에 1917년 5월 25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프랑스제 야포를 도입해 미국원정군(AEF)을 무장시키고 미국제 야포는 국내에서 훈련용으로만 사용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프랑스 정부는 1917년 8월 1일 부터 75mm포를, 1917년 10월 1일 부터는 155mm포를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따라 7월 9일에는 공식적으로 보병사단의 포병편제에서 3인치 포를 프랑스의 75mm포로 교체하고 6인치 포는 155mm유탄포로 교체한다는 명령이 내려집니다.8) 이미 미국원정군의 제 1진 14,000명은 1917년 6월 28일에 프랑스의 생나제르(St. Nazaire)에 도착했으며9) 다음날인 1917년 7월 10일에는 퍼싱 장군이 1919년 6월 까지 총 95개 사단을 편성하고 이 중 80개 사단을 유럽전선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투입할 8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데만 총 3,840문의 75mm급 야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당시의' 미국으로써는 단시일내에 그정도의 국산 야포를 배치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까지 미육군에 총 3,352문의 각종 야포를 원조하게 됩니다.10)

※ 물론 국제관계가 다 그렇듯 미국도 날로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75mm포 1문당 6톤의 강철을, 155mm유탄포 1문당 40톤의 강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1)

하 지만 그동안 진행되고 있던 3인치포 등 국산 무기의 개발을 취소하고 새로이 프랑스의 기준에 맞춰 야포와 탄약을 생산하는 문제는 쉽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제공하는 설계도 등을 번역하는 등 기술적 문제가 산적해 있었습니다. 75mm 포탄 생산을 위해 프랑스가 제공한 자료들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1917년 12월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자국산 야포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75mm포 면허생산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18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12)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생산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1차대전 중 미국 국내에서는 프랑스제 75mm포는 단 1문도 생산되지 못했고 대신 영국제 18파운드포를 기초로한 M1917이 724문 생산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면허생산한 프랑스제 야포는 146문으로 이중 144문이 155mm유탄포였습니다.13)

미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제 야포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으며 특히 사단포병의 75mm포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75mm의 탄두 위력 부족으로 사단포병에 1개 연대의 105mm 유탄포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전쟁이 끝날때 까지 75mm포는 사단포병의 주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육군이 75mm포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1940년까지도 사단포병에 75mm 대신 105mm를 배치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할정도였다고 하지요.14) 그리고 155mm 구경은 오늘날에는 서방 국가들의 표준적인 야포 구경이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인치 구경을 사용하는 자국산 야포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표준적인 야포구경은 6인치가 되어 있겠지요.




1) H. A. De Weerd, "American Adoption of French Artillery 1917-1918", The Journal of the American Military Institute, Vol. 3, No. 2, (Summer, 1939), pp.104~105
2) Vardell E. Nesmith Jr, "Stagnation and Change in Military thoght : The Evolutuion of American Field Artillery Doctrine 1861~1905", U.S.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1976, p.284
3) Mark E. Grotelueschen, The AEF Way of War : The American Army and Combat in World War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1
4) De Weerd, Ibid., p.106
5) De Weerd, Ibid., p.108
6) Robert B.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and France in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p.100~111
7) Elisabeth Glaser, "Better Late than Never : The American Economic War Effort, 1917~1918", Great War, Total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2006, pp.405~406
8) De Weerd, Ibid., p.110
9) Bruce, Ibid., p.91
10) Bruce, Ibid., p.105
11) Bruce, Ibid., p.106
12) De Weerd, Ibid., pp.111~112
13) De Weerd, Ibid., p.116
14) Janice McKenney, "More Bang for the Buck in the Interwar Army: The 105-mm. Howitzer", Military Affairs, Vol. 42, No. 2, (Apr., 1978), pp.80~81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요?

흥미로운 떡밥이 투하됐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추가. 오늘은 31차 한미군사위원회 회의가 있었습니다. 내일은 한미안보협의회가 있을 예정이지요.

國漢混用의 필요성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네. 물론 저는 국한혼용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농담입니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질보다 양?!

'영국'이라는 단어와 '전차'라는 단어는 따로 사용할 때는 뭔가 멋진 느낌을 주지만 함께 사용할 경우에는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 된다지요.

영국 육군은 북서유럽에서 대재앙을 겪는 바람에 장갑차량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것 보다는 실용성과 유용성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전차라면 무엇이든지 생산부터 하는 것에 우선권을 두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가 붕괴하기 이전 부터 전차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질보다 양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에는 영국 본토와 다른 지역을 방어하는 문제가 최우선과제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1941년 부터 1942년까지 전차 생산을 좌우했다.

이런 압력은 설계도 단계의 전차에 생산 결정을 내리고 시험평가도 부족한 전차를 양산하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이 방법은 요구사양의 결정에서 선행양산품(pilot) 생산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시제품을 생산할 필요성을 줄였다. 이러한 정책은 다른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육군은 이 정책을 단지 장갑차량의 생산에만 적용했다. 그 성과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실제로 1942년 하원의 보고에서는 '우리는 시제품 생산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곧바로) 생산을 하는 것(we were not avoiding the manufacture of prototypes, we were manufacturing nothing else)'이라는 발언이 있었다.

이렇게 숫자부터 채우자는 정책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불러왔으며 그 중 하나로는 막대한 투자를 퍼부은 A13 코베난터(Covenanter) 전차가 있었다. 이 전차는 무작정 생산을 시작했지만 자체적인 결함과 전반적인 신뢰성 부족 때문에 실전에는 투입도 하지 못 했다. 뿐만아니라 "설계도 단계에서 생산명령이 내려진(off the drawing board)" 또 다른 사례 중 하나인 A22처칠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연합군의 장비 중 효율적이고 유용한 것이 되었으나 처음 배치될 당시에는 자질구레한 문제와 결함에 시달렸다.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62~163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죠?

Cat Shit One 80 VOL.2

용역비를 받아서 질렀습니다.

"적의 최후 방어거점입니다."

"구르카부대를 투입해!"

"메에" "메에" "메에"

"구르카부대, 돌격전진!"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메에!"

"안되겠다"

"항복하자"


푸하하하!


저작권 문제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올릴수 없는게 아쉽군요.

한미관계에 대한 어떤 논평

최근 이글루스에서 한일회담과 관련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논쟁거리여서인지 좋은 글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저는 특히 번동아제님의 '한국이 원하는 돈을 받지 못한 이유'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번동아제님께서는 이 글에서 한일협정이 진행되던 과정의 국제적 정세와 당시 한국이 처한 한계점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를 해 주셨는데 저 또한 이 글의 주된 논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뭔가 사족을 조금 달아볼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한일협정과 관련된 문서는 주로 이승만 정부 시기에 이루이전 협상에 대한 문서만 조금 읽었는지라 박정희 정부 시기의 한일협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적을 만한 것이 없더군요;;;; 대신 당시 한일협정 문제로 고조된 반미/반일감정을 경계하는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견해를 보여주는 글을 한 편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박준규(朴俊圭)는 시사잡지인 청맥 1965년 1월호에 「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의 결론부분에서는 당시 한일협정 체결문제로 격앙된 민족감정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전략)

이상에서 몇 가지 주요 조약과 협정을 통하여 한미관계를 고찰하였다.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것은-적어도 조약 및 협정의 조문을 통해서는- 과연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마땅히 받어야 할 대접을 받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 다음에 느껴지는 것은 대체로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회피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문제를 하나의 가외(加外)의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아심이다. 그리고 최근의 미일관계를 조감할 때 미국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비중의 격차가 너무나 현격하다는 비애감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한미관계를 어떻게 조정해나가느냐가 한국의 당면한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미관계를 국가대 국가의 외교관계로서 고찰할 때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는것이 아닌가를 재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란 도덕사회도 자선사회도 아니며 그곳에서는 '힘'의 서열에 따라서 응분의 지위가 규정되며 각자의 지위에 따라서 응분의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월등한 비중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원리로 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우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해야 할 입장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받고있는 정도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한다고 반미적 감정에 흐른다거나 한미관계의 역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미국 이외의 다른 강국(예컨데 일본)과 새로운 기축(基軸)관계를 형성하려고 덤벼드는 것은 모두가 '한국의 국가이익'에 배치되는 처사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2차대전 말기에 한국을 분점(分占)하게 된 것은 대일전쟁 종결을 위한 전략적 고려의 결과였으며 한반도에 항구적으로 고착할 의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한정책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한미관계의 기축이 변동할 리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대미일변도니 사대주의니 하고 비판할는지도 모르나 세계정치의 현세하(現勢下)에서 소위 중립국가를 제외한 국가로서 미국 혹은 쏘련과의 기축에 크고 작고간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가 몇개나 되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 서독, 일본 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드골'의 프랑스가 큰소리 칠 수 있는 것도 역시 미국 세력의 배경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처럼 미국의 전쟁처리 과정에서 탄생한 나라가 대미관계를 국가 이익의 기축으로 삼는것은 자명의 이치라 하겠다.

(후략)

朴俊圭,「條約協定으로 본 韓美關係」, 靑脈 第5號(1965.1), 82~83쪽

지금은 이 당시보다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물론 '민족감정'에 입각해서 본다면 당시 협상은 굴욕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쩔수 없는 당시의 국제적 역학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강화협상에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수는 없었지요.

사실 논쟁의 시발점(?) 이었던 슈타인호프님의 글이나 번동아제님의 글은 어디까지나 당시 협상이 진행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분들이 보이는 것 같아 구경하는 입장에서 약간 난감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1964년이 아닌데 말입니다.

잡담하나. 한일협정관련문서가 공개된 뒤 동아일보에서는 이 협정 문서 전체를 PDF로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일회담 관련 공개 문서 全文 다운 받기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인터넷의 유용함

어떤 책을 읽던 중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재미있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영어로 "The deeper we delve in search of these causes the more of them we find"라고 번역된 부분이었는데 책에는 어디서 인용했는지 따로 설명이 없어서 출처가 꽤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구글 검색창에 해당 구문을 넣고 검색하니 전쟁과 평화 9권 1장이 뜨더군요.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영어로 번역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일일이 읽어보며 이 구절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을 텐데 인터넷 덕분에 그런 수고를 덜게 되었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평소에 고전을 즐겨 읽었더라면 바로 알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학과 담을 쌓고 살다 보니 결국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된것 같습니다;;;;

2009년 10월 13일 화요일

이태준의 스탈린그라드 기행기

이태준(李泰俊)은 식민지 시기의 문인 중 가장 유명한 편인데 해방 이후 월북해버려 노태우 정권하에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 까지는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네. 물론 이 어린양도 문학쪽에는 관심이 없지만 북한 현대사에는 관심이 있다 보니 이태준의 글들을 조금 읽은 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것이 논픽션인 『소련기행』입니다.

『소련기행』은 이태준이 1946년 8월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기록한 글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강하긴 해도 종전 직후 소련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를 다룬 부분은 매우 재미있는데 이 중 마마예프 쿠르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9월 19일.

일찍부터 전적(戰跡) 구경을 나섰다. 먼저 옆에 있는 전사광장, 여기는 이번 싸움(독소전쟁)보다 10월 혁명 때 혁명군 54명이 사형받은 광장으로 기념되는데 광장 중앙에는 공원처럼 된 그들의 묘가 화원과 화환과 기념비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주위는 모다 속은 타버린 거죽만 5, 6층의 대건물들로 둘리웠는데 그 독군사령관(파울루스)이 잡힌 백화점, 혁명 때 '혁명군'이란 신문이 발간되던 집, 이런 유서 깊은 집들이 지하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적들처럼 잔해들과 침묵으로 둘려 있었다.

다음으로는 강변에 가까이 있는 침입하는 독군을 향해 최초의 공격을 개시한 '5월 9일광장' 그리고 바로 그 옆인 '빠블로브 군조관(дом павлова)'을 구경하였다. 과히 크지 않은 벽돌 4층의 건물인데 독군에게 포위되어 우군과 연락이 끊어진 곳에서 하졸 8명을 다리고 빠블로브(Якоб Павлов) 군조가 57일간 싸워 네 명은 죽고 군조와 다른 네 명은 지하도를 뚫고 생환하여 영웅 빠블로브는 지금 독일 점령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주택으로 쓰고 있으나 이 집을 기념키 위해 먼저 나선 것이 '첼까쓰운동'의 주인공 알렉산드라 첼까쓰 여사로서 가장 맹렬한 사격을 받어 허물어진 한편을 서툴은 솜씨로나마 고쳐 쌓어서 집 면목을 유지시킨 것이 이 여사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자들도 벽돌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에서 '첼까쓰운동'이 일어난 것이니 이 집에서 영웅 두 사람이 난 것이였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용케 무너지지 않었고 벽돌 한 장 한 장 성한 장이 별로 없다. 창마다 문마다에는 더욱 사격이 집중되어 창틀, 문틀은 모두 새로 고쳐 쌓었다.

여기서부터 10리나 되게 공장지대만을 지나보는데, 공장이 무너지고 불타고 한 것은 철근의 난마(亂麻) 무데기요, 큰 빌딩만큼한 석유탱크, 까쓰탱크가 무수한데 모두 불에 녹아 바람 빠진 고무주머니가 되어 어떤 것은 아주 주저앉어버렸다. 이런 공장지대엔 큰 건물들이 벌써 많이 새로 서있었다. 우리는 공장구경은 오다 하기로 하고 그 길로 '마마애브' 구릉으로 왔다.

이 언덕은 스딸린그라드의 유일한 고지로서 여기를 차지하고 못하는 것이 서로 승패의 운명을 결하는 것이 되였다. 주위 10리는 넘을까 고도도 시가에서 4, 50척 될지한 정도다. 나무도 별로 없다. 잔숲이 군데군데 있으나 그 뒤에 자란 것들일 것이다. 큰 전차 한 대가 보인다. 이것은 기념으로 남겨둔 것으로 우군 응원전차대가 가장 깊이 들어왔던 선봉전차였다 한다. 탄피는 걸음마다 밟히고 가장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여기 저기 해변에 조개껍질 나부끼듯 하는 임자 없는 쇠 전투모들이다. 산적했던 전차, 트럭, 대포, 비행기, 기관총 등의 잔해를 기계로 긁어가고 철모, 혹은 벌써 자루가 썩고 녹투성이가 된 총신들은 다시 부스러기로 떨어진 것이라 한다. 뒹구는 철모는 탄환에 구멍 뚤린 것도 많었다. 독군 시체만 14만이 넘었다니 이 임자 없는 전투모인들 얼마나 많었으랴! 장비 좋은 독군으로도 가장 중장비와 중포(重砲), 중전차(重戰車)로 들어왔던 곳이 여기라 한다. 이 언덕에서만 독군의 시체 14만 7천, 포로가 9만 1천, 그 중에 장관만 25명, 장교 2천5백, 대포 4천, 자동차 6만, 비행기 3천여대 였다 한다. 적시(敵屍)만 14만7천! 얼마나 많은 피였을까! 여기 저기 피 묻은 군복자락 썩는 것이 그냥 나부낀다. 푹신푹신한이 붉으레한 황사언덕, 걸음마다 아직도 신바닥에 피가 배일 것 같다. 더욱 언덕 밑에서 독군포로들이 수도공사로 땅을 파고 있는 것과 건너편 마을 가까이서 꽝 소리가 나더니 검은 연기가, 영화에서 보던 폭탄처럼 올려솟는 것이 실감을 준다. 전적을 설명해주던 장교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지뢰가 가끔 저렇게 터지기 때문에 길 이외에는 들어서기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태진, 『소련기행ㆍ농토ㆍ먼지』, 깊은샘, 2001, 112~114쪽

구글 블로거의 라벨 제한

글을 수정하다가 라벨(다른 블로그의 태그 정도 되겠군요) 제한에 걸렸다는 오류 메시지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구글 블로거는 라벨을 최대 2000개 까지만 허용한다는 군요. 이런 저런 글을 쓰다 보면 여러가지의 라벨을 달게 되는데 구글이 인심(?)을 써서 라벨 제한을 올려주거나 해제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라벨은 더 달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존 라벨 중 잘 쓰지 않는 것을 몇 개 지워볼까 했는데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겠더군요.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 장비 상태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1942년 하계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1942년 6월, 이탈리아군에 배속된 독일군 연락본부(Verbindungskommandos)는 이탈리아군의 장비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2. 장비상태(Ausrüstung)

a) 화기 및 장비
: 보병용 소화기 - 기관총과 박격포는 쓸만하다. (이탈리아군의) 기관단총은 각 부대에 보급된 수량이 적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부족한 수량은 보충되었다.
: 포병 - 사단포병의 75mm와 100mm포는 사정거리와 위력이 부족하다. 군단포병의 105mm포(사정거리 13km)는 훌륭한 포이다. 단점은 탄도가 곧은 편이라는 것이다. 현재 포신은 과도하게 사격한 상태이다. 교체할 포신이 수송중에 있다.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75mm와 20mm 대공포는 훌륭한 장비이나 마찬가지로 대전차용 탄약이 전혀 없다.
: 대전차포 - 보병연대와 군단 직할, 사단 직할의 대전차 부대는 공통으로 47mm를 장비하고 있다. 포의 위력에 있어 독일군의 구형 37mm포에 상응한다. 포구초속은 360m/sec이며 유효사거리는 700m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200m에 불과하다. 소련군의 중형 전차 및 중전차에 대항할 장비가 부족하다. 75mm 대공포는...(후략)
: 공병장비 - 목재부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성능을 입증했다. 독자적인 건설 방법으로 통과중량(Tragfähigkeit)을 5-10톤에서 7-13톤으로 증가시켰다.
: 통신장비 - 수량과 성능 모두 불충분하며 유선전화기의 경우 구식이고 습기에 민감한데다 케이블도 부족하다. 무선통신장비는 부분적으로 현대화되어있고 성능도 좋은 편 이지만 야전에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b) 차량현황
: 현재 기동성이 심각하게 감소된 상태이다. 이탈리아군의 차량 가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쾌속(Celere)사단 75%,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35~40%. 모든 정비부대를 통합하고 현재 보충용 차량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수참모의 견해에 따르면) 2개 사단의 차량가동율을 3주 이내에 15~20% 정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현재 이탈리아군은 차량화된 수송부대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새로 배치된 차량 :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더 많은 수송부대가 (이탈리아) 8군의 차량수송에 투입되고 있다. 보병부대의 차량인 1톤 트럭(LKW)을 수송용차량으로써 평가하면 강력한 엔진을 가지고 있으나 야지주행능력은 굴곡이 없는 지형에 한정되어 있다. 2륜 오토바이와 3륜 오토바이는 훌륭한 장비이다. 화물차의 대부분은 디젤을 사용하고 있으며 가솔린을 사용하는 차량은 일반적으로 반궤도차량, 고기동 트럭(화학대대에 배치된), 트레일러(Karette), 병력수송차량 및 오토바이 등 [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의 소모는 2/3이 디젤이고 1/3이 가솔린이며 모든 차량의 운용에는 V.S*가 1/2에서 1/2이다.

c) 마필현황

각 기병연대와 마필화 포병연대의 마필 현황은 (편제의) 50% 수준이다. 보충용 마필이 도착하는 중이다. 보병연대의 노새는 마찬가지로 (편제의) 50%이다.

d) 피복

정상적이다. 동계 피복은 대부분 항공수송을 통해 적시에 도착하였다. 매우 훌륭하다.(Sehr Zweckmäßig) 하계피복은 상의만이 확보된 상태이다.1)
*1V.S.(Verbrauchssatz)는 해당 부대의 전 차량이 100km 이동할 수 있는 연료량을 뜻함.

독일군의 평가는 이탈리아군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화기의 부족, 통신수단의 부족, 수송수단의 부족.

이 세가지 모두 현대 전쟁에서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특히 기동전이 중심이었던 동부전선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지요. 불행하게도 이탈리아군은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피복상태는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옷이 좋다고 싸움을 잘 하는건 아니죠;;;;

동부전선에 파견된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에서는 제8군으로 개편되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들은 1941년 파견된 이탈리아 러시아원정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들로 고참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CSIR에 배속된 사단들은 제가 예전에 쓴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서 언급했듯 명칭상으로는 모두 그럴싸한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 쾌속사단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차량화 사단이었던 파수비오 사단과 토리노 사단은 소련으로 출동할 당시 부터 말로만 차량화였고 보병연대는 도보 부대였다고 하지요.2) 어쨌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의 이런 약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키예프 포위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스탈리노를 점령하는데도 꽤 기여를 해서 클라이스트 장군도 호평을 했다고 하지요.3)

하지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런 약점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탈리아군은 1941/42년의 겨울 방어전에서도 꽤 괜찮은 성과를 냈지만 상당한 장비를 손실했고 이 때문에 원래부터 좋지 않던 사단들의 장비상태도 더 나빠졌다는 점 입니다.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동부전선의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수송능력의 부족등을 이유로 거부한 바 있었습니다.4) 그러나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은 1941/42년 겨울에 큰 타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하계공세 준비를 위해 이탈리아 등 동맹국들에게 추가 파병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추가로 파병한 사단들은 1941년에 파병한 사단들에 비해 장비면에서 나을것이 없는 부대들이었고 이러한 부대들은 1942/43년 겨울에는 소련군의 반격에 그야말로 철저하게 박살이 나게 됩니다.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이탈리아군의 장비 현황에 대해서는 '동부전선의 이탈리아군'에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 차량을 포함한 기동수단의 부족은 공격 보다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됩니다. 알피니 군단과 같은 정예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분전했지만 장비의 열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반 보병사단이었던 라벤나(Ravenna) 사단은 1942/43년의 동계전투에서 야포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90%이상 상실했습니다.5) 만약 충분한 수송/견인수단이 확보되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 더 줄일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수송수단의 부족은 장비 뿐 아니라 병력손실을 크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이 12월 25일에 알렉세예보-로소브스코예를 차단하자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와해되어 1만5천명 이상이 생포되었습니다.6) 독일군도 차량 등 수송수단의 약화가 심각해진 1943년 이후로는 비슷한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탈리아 제8군이 동계전투에서 괴멸된 뒤에도 이탈리아 측은 최소한 이탈리아군 1개 군단은 동부전선에 잔류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7)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 무렵이 되면 이탈리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1943년으로 접어들면 미영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침공해 오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빈약한 공업능력을 고려해 본다면 이탈리아가 항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1개 군단을 동부전선에 잔류시켰다 하더라도 그 전력은 1941년의 CSIR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über das italienische Expeditionskorps vom 9. Juni 1942',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2005, ss.95~96에서 재인용.
2)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talingrad, Piper, 1992, s.259.
3)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127.
4) DiNardo, ibid. p.129.
5) 'Gefechtsbericht des Deutschen Verbindungskommandos bei der Division "Ravenna" vom 20.März 1943', Thomas Schlemmer(Hrsg),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s.123에서 재인용.
6)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s.319.
7) DiNardo, ibid. p.155.

2009년 10월 10일 토요일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는데...

클린턴이 대선 출마를 고려하던 무렵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클린턴과 그의 측근들은 대체로 대선의 가능성에 대해 약간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분위기를 살펴보자는 쪽이었다. 대선에 출마한다는 구상은 4년 전 부터 주지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이 고려하던 것 이었다. 클린턴은 1988년 대선을 얼마 앞두고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에 대한 구상을 결코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1990년, 클린턴은 재선 운동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와 그의 참모들은 적절한 시점에 성공적인 전략을 사용했으며 그는 다시 낙승을 거둘 수 있었다. 클린턴과 그의 아내 힐러리, 그의 선거참모인 프랭크 그리어(Frank Greer), 여론조사가인 스탠 그린버그(Stan Greenberg), 그리고 소수의 가까운 측근들은 주지사직을 확보하자 즉시 1992년 대선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모두 클린턴이야 말로 민주당을 통털아 가장 유능한 중도적 인물이라고 믿었다. 이들의 모임은 1990년 12월 초 부터 시작되었으며 1991년 초에는 더욱 더 심각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때 걸프전쟁이 터졌으며 부시의 인기도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별반 잃을 것이 없던 클린턴 조차도 대선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은 그리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국인들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통령을 내쳤다는 이야길 들어 봤나?"

그리어는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 했다고 대답했지만 또한 매우 유동적인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적 대중매체의 위력 때문에 과거의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 이었다. 그리어는 정치적 흐름은 훨씬 빨리 변화하고 예측하기 어려워 졌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었는데."

그리어가 대답했다.

"저도 군대에 가지 않았고 베트남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리어는 한 반전단체의 활동을 도운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리고 국민 대부분이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은 마침내 대선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19

지원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병역이 한 번 정도는 고려해 봐야 할 문제였다는 점에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입니다.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군복무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뜨거운 감자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회창 같은 거물도 자녀의 병역문제로 격침당했고 최근에는 정운찬 총리가 비슷한 문제로 고역을 치렀지요. 그리고 한 편에서는 또다시 식지않는 떡밥인 군가산점 문제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만약 대한민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원병제로 전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집니다. 최소한 요즘 처럼 병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정치인들은 없겠지요. 클린턴은 걸프전 때문에 병역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지만 특별히 전쟁할 일이 없는 대한민국이라면 의무 병역이 폐지될 경우 정치에 뛰어들려는 엘리트들은 한가지 부담은 덜게 될 것 입니다.

시민의 상당수가 군대와 무관한 상황이 오게 된다면 병역문제는 어떤 존재가 될까요? 의무 병역제는 인권 침해라는 측면에서 아주 고약한 제도이긴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그나마 엘리트들이 적어도 선거철에는 시민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물론 병역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이 시민의 눈치를 봐야할 것이 많긴 합니다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병역 만큼 효과적인 것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아주 멋지게 꼬이는 중 입니다.

면담 대상자들이 최하 1920년대에 출생하신 분들이다 보니 연락을 해 보면 몇 주전에 돌아가셨다, 치매라 대화가 불가능하다 같은 대답이 돌아오고 있지요. 정말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발주처에서 돈 토해내라 그러는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들 정도이죠.

한 20년 정도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사업인데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혹시나 나중에 술자리에서 뵙게 되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