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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7일 월요일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는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는 스탈린도 직접 참여해 지휘관들의 의견을 듣고 스탈린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포병 운용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 봅니다.


(전략) 

스탈린: 제122소총병사단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소? 

추이코프(핀란드 침공시 제9군 사령관): 제122소총병사단의 병력은 12,000명이었고 여기에 1개 산악소총병연대, 제88소총병연대, 그리고  NKVD 1개 연대가 배속되었습니다. 

스탈린: 제122소총병사단의 정면은 130km고 담당 지역에는 이렇다 할 자연장애물이 없었소.

추이코프: 스탈린 동지. 만약 제122소총병사단이 퇴각하지 않았다면 이 사단도 다른 사단들 처럼 남쪽으로 부터 포위를 당했을 것 입니다. 이 사단은 35~40km를 후퇴했습니다. 

스탈린: 이 사단은 국경으로 부터 120베르스타(약 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철수를 멈췄소. 이 사단은 대략 스무번은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소. 이것은 사단장에게 달려있는 것이오. 만약 훌륭한 사단장이 있다면 사단도 잘 운용될 것이요. 형편없는 사단장이라면 사단을 붕괴시키거나 사단의 사기를 떨어트릴 것이오. 훌륭한 지휘관은 형편없는 사단이라도 훌륭한 사단으로 만들 수 있소. 지휘관들이 항상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역량을 지닌 것은 아니지. 
동지가 부대를 지휘하는데 방해가 되는 자는 없었소? 

추이코프: 없었습니다. 

스탈린: 주저하지 않고 ‘없었다’고 말하는구려. 

추이코프: 질문하시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누가 방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스탈린: 나야 모르지요. 그저 당신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추이코프: 없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특히 군사위원회의 성원들과 협조를 잘 했습니다. 이제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기존의 전차 중대, 차량화 소총중대, 혹은 유사한 중대의 편제에 기반한 수색대대를 편성 중에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수색대대가 제9군의 작전지역 같은 곳에서 유용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편제의 수색대대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스키 부대가 필요합니다. 스키 부대는 겨울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소택지에도 투입할 수 있습니다.무장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동화기 사격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탄약 소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데그차레프 기관단총을 직접 시험사격해봤는데 이건 매우 우수한 무기였습니다. 한 발만 명중 시켜도 목표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사격을 하면 목표를 명중시키는데 더 많은 탄환이 필요합니다. 

스탈린: 핀란드군이 기관단총을 쏘는 것 처럼 하시오. 여기서 쏘는거요.[의미 불명] 탄약을 조금만 사용한다면 더 많은 병력을 희생해야 하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병사를 아끼면서 총포탄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총포탄을 아끼면서 병사를 더 많이 희생시킬 것인지. 어느게 낫겠소? 

추이코프: 정확한 사격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당신은 틀렸소. 그런건 진부한 생각이오. 만약 아군 포병이 특정한 목표물만 타격했다면 아직도 핀란드와 전쟁을 하고 있었을 거요. 우리 포병이 승리한 이유는 하룻 동안 23만발의 포탄을 퍼부었기 때문이오. 어떤 사람들은 포탄을 많이 소모했다고 비난하기도 하더군. 나는 이런 자들이야 말로 문제라고 생각하오. 이왕이면 23만발 보다 40만발을 퍼붓는게 낫지 않았겠소? 만약 포탄 20발 중에서 한 발이라도 헛간이건 뭐건 간에 목표를 맞춘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오. 만약 100발의 포탄을 쐈는데 99발은 빗나가고 한발만 목표를 맞췄다 치더라도 이건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이런 식으로 포탄을 퍼부어서 적의 후방을 타격하고, 적이 방어선을 강화하는 것을 막으며 적의 움직임을 봉쇄했던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핀란드군을 패배시켰소. 당신은 포병 사격에 정신이 붕괴되어 달아난 핀란드군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핀란드측은 포격으로 충격을 받은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한 특수 시설을 개설했다고 하오. 이것이 바로 포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오.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총포탄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면 인명 희생도 줄고 전쟁도 다섯배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거요. 

추이코프: 제가 스웨덴 의용군을 상대로 1만발의 포탄을 사용하자 곧바로 왜 그렇게 많은 포탄을 사용했냐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스탈린: 누가 그랬소? 

추이코프: 총참모부였습니다. 

스탈린: 그건 잘못된 것이오. 총참모부가 현대전의 본질을 모르는구만. 

추이코프: 저는 총참모장으로 부터 왜 그렇게 많은 포탄을 사용했냐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웨덴 의용군을 상대로 더 많은 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4만발은 쐈어야지.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당신은 더 많은 소총수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그 불쌍한 동무들이 뭘 할 수 있었겠소? 포병이 없다면 이들은 헛되이 죽었을 거요. 

추이코프: 스탈린 동지. 제9군 구역에서 공병이 포병 진지를 구축하는데는 최소한 5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스탈린: 괜찮소. 포병 진지를 준비하는데만 10일이 소요되더라도 말이오. 제8군과 제15군도 비슷한 조건에 있었소. 모든 것은 포병에 달려있소.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한단 말이오. 

추이코프: 공군도 포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오. 항공기는 기상 조건에 영향을 받지않소. 항공기 지원을 많이 받을 수도 없소. 게다가 항공기는 기상조건에 좌우되니 언제나 쓸 수 있는게 아니오. 하지만 포병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잖소. 당신도 포병을 후방에 남겨둬야 한다는 이론가들을 알고 있을 것이오. 이들은 사단 전체에 스키를 지급해 보병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했지. 허무맹랑한 소리 아니오? 핀란드군은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소. 이들은 중기관총과 37mm포, 3인치 포를 가지고 있었지. 야포를 견인하는게 어렵다는 이유로 포병을 후방에 남겨둔 스키 사단이 적군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공격했다면 사상자만 잔뜩 내고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을 것이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추이코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군단 포병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는 군단 포병을 활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군이 레폴라Repola로 진격했을때 아군의 보병, 포병, 공군의 합동 작전은 최고로 잘 수행되었습니다. 아군은 4만발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레폴라 방면에 할당된 재고량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스탈린: 말을 끊어서 미안하오. 포탄 사용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소? 

추이코프: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도로 상태와 보급이었습니다. 


(후략)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열린 대 핀란드전 전훈 수집을 위한 지휘관 회의, 1940년 4월 15일 제3차 모임.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94~96에서 재인용.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진천 전투 당시 김석원 사단장의 지휘(?) 방식


예전에 김석원 장군에 비판적인 미국 문서를 조금 포스팅한 일이 있는데 지나치게 미국 주장에 경도된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의 지휘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김석원에 비판적이고 미군사고문단의 문서를 뒷받침 할 만한 증언도 존재합니다. 한국전쟁 초반 포병단 부단장이었던 김계원의 증언을 보면 김석원이 군사적 지식이 부족해 사단을 운용하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미군사고문단의 평가가 아주 허무맹랑한 중상모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처음 곡사포를 수령한 김성 대대장은 충분한 운용의 실습도 없이 곧바로 진천지구 전투에 투입이 된 것인데 긍지를 가지고 분투하였다. 소속의 대전차포 중대장 허현(許玄) 중위는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 확인차 진천지구 OP관측소에서 오르니 사단장 김석원 대령*은 일본도를 옆에 들고 카이젤 팔자수염을 연신 만지며 참모장 최경록 중령*에게 계속해서 돌격 앞으로만 외쳤다. OP가 무엇을 하달하는 곳인 줄 모르는 것인가.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니 측지관측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가관이었다. 직전 적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아군의 포탄이 떨어져야 함에도 죄 없는 동네 민가에 떨어져 화염에 싸인 집에서 놀라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는 불쌍한 주민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즉시 화력지원 통제소에 뛰어가 오차의 원인을 분석하고 미군 고문관에게는 포의 운용을 점검케하여 시정하였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2), 300쪽

*두 사람의 실제 계급은 각각 준장, 대령입니다. 저자가 말년에 회고를 하다 보니 기억에 오류가 있었던 듯 합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김석원이 유능한 지휘능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는데 미국쪽 자료들과 일부 한국측 증언을 보면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석원의 지휘능력에 대한 비난은 그가 지휘한 사단에 배속됐거나 거쳐간 고문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제3사단 선임고문관 에머리치(Rollins S. Emmerich) 중령은 김석원의 지휘능력이 형편없고 공격성이 결여된데다 고문단이 사단을 지휘하는 동안 잠이나 자고 있었다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 에머리치 문서는 나중에 한번 번역해 보겠습니다.

김석원이라는 군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자료들은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는지라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11년 6월 6일 월요일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전차 무용론

전차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전차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제4차 중동전쟁이 가져온 충격이 있겠지요.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전력에 쓴맛을 보자 전차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방어력과 기동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일련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목소리들이 다시 사그러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라는 글은 대전차화력의 강화로 전장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빅맨의 이 글은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상전을 펼치기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2차대전 초반에 전차가 잠시 맹활약하면서 전차의 시대가 오는 듯 했지만 결국 대전차 화력의 증대로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 입니다. 글에서는 몇몇 실전 사례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붉은 군대는 나치의 우세한 기갑전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러시아의 언론들은 전쟁 첫해, 그리고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둔 뒤 여러차례 포병을 “전장의 신”으로 불렀으며 대전차포와 일반 야포를 핵심적인 대전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포병으로 전차를 상대하여 저지하고,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드러났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 가장 많은 전차와 기타 기갑장비를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군대는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치가 열등한 수단으로 간주한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베르너(Max Wern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결과 나치의 기갑군은 “무력화 되었으며 글자 그대로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2년에 들어와 소련군이 독일군을 보다 잘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게 된 원인은 대전차전을 위해 개발된 많은 수의 향상된 기동력과 향상된 성능을 가진 신형 야포와 같은 포병을 강화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 데 있다.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는 나중에 원수로 진급한 보로노프(Никола́й Н. Во́ронов) 대장의 지휘에 따른 강화된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물론 전쟁 중이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료가 극히 제한되기는 했겠지만 저자는 소련이 1942년에 전차군을 편성하는 등 기갑전력의 강화에 주력했다는 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 소련 기갑부대의 공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은 꽤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전역을 바라보든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의 전차 및 급강하폭격기가 영국의 아프리카 주둔군에 초반의 패배를 안기기는 했지만 영국군이 중근동 전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포병을 중시하고 전차의 활용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42년 6월 13일, 영국군의 1개 여단이 독일군 88mm의 매복에 걸려 난타당한 기갑 부대의 참패 이후 전차를 앞세우는 전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주포의 양각이 제한적인 전차에 대해 야포의 우세함이 뚜렷하다는 것은 거의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2)

만약 영국군이나 미군이 1944년 이전에 동부전선과 같은 규모의 독일군 기갑전력과 맞서야 했다면 이런 판단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군단급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하반기 이후로는 독일군의 소규모 기갑전력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기갑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차 무용론은 미국에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1943년 4월 21일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영국 포병 병과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기존의) 우세를 되찾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신형 전차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상의 공격 작전에 있어 포병은 기갑에 비해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3)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군 고위층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험을 통해  기갑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1942년 12월 14일 부터 1943년 1월 25일 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일선 기갑부대의 실태를 조사한 디버스(Jacob L. Devers) 장군이 내린 결론이란게 “M4는 전장에서 가장 우수한 전차다”라는 정도였다니 말입니다.4)  영국군의 전투경험은 미군에게 매우 악영향을 끼쳤는데 맥네어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투 이후 대전차대대의 상당수를 견인식 3인치포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배치된 미군의 30개 대전차 대대중 11개 대대가 견인식 대전차포를 장비했다고 하지요.5)

다시 빅맨의 글로 돌아가 보지요. 빅맨은 이 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기동력 자체는 타격력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동력의 가치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화력을 기동력 있게 제공해 줄 수 있는데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것은 기동력이 아닌 화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과 장갑에 중점을 둔다면 화력이 애매해 지게 된다. 전차의 화력이란 전차가 본질적으로 기관총에 대한 대응병기라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장갑, 기동력 그리고 화력은 1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 밀집된 소총과 기관총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차의 문제점은 대전차 무기를 동원해 전차에 맞서기 전 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6)

이 글이 쓰여질 무렵 미군은 아직 프랑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차포의 우세를 점쳤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Fred K. Vigman, “Eclipse of the Tank”, Military Affairs, Vol. 8, No. 2 (Summer, 1944), p.103
2) Fred K. Vigman, ibid, p.103
3) “Germany's Gamble on Tank And Dive-Bomber Held Lost” New York Times(1943. 4. 21)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0
5)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p.72~75
6) Fred K. Vigman, ibid, p.107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 직계 보병사단의 편제

제가 이것 저것 늘어놓고 질질끄는 성향이 있다 보니 공수표만 남발하고 아직 못쓴 글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 독일 군사고문단이 훈련시킨 국민당군의 독일식 사단에 대한 글이 하나 있는데 기분 내킬 때 몇 줄씩 쓰는 제 성향상 언제 다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의 사단 편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 봤는데 오늘은 이거나 올려볼까 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모두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上册(解放军出版社, 2009) 457쪽~496쪽을 정리한 것 입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국민당군과 여기에 속한 군벌군대는 전형적인 4각 편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인데 유럽의 군대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3각 편제로 전환한 것과 비교하면 편제의 개편이 지독하게 늦었다고 할 수 있지요.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군은 4각 편제사단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3각 편제로 편성된 사단도 상당수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1. 4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사실 국민당군의 4각 편제는 제대로 된 4각 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편제는 각각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된 2개 보병여단 이었지만 사단 직할대의 규모가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편제상의 편성만 보더라도 포병은 불과 대대급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1차대전 초기 일반적인 4각 편제 보병사단은 2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1개 포병여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군의 포병전력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편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국민당군의 4각 편제 보병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단사령부
-참모처(參謀處)
-부관처(副官處)
-군계처(軍械處)
-군수처(軍需處)
-군법처(軍法處)

보병여단(2개)
-보병연대(3개 보병대대)
 >보병대대(3개 보병중대)
   =보병중대(3개 보병소대)
     -보병소대(3개 분대(班))
   =기관총중대(機槍連, 기관총 6정)
 >박격포중대(박격포 6문)
 >통신소대(通信排, 2개 분대)
 >수송소대(輸送排)
 >후송소대(擔架排, 3개 분대)

기병중대(4개 소대)
-기병소대(2개 분대)

포병대대(砲兵營, 3개 중대)
-포병중대(3개 소대)
 >포병소대(2개 분대)
-통신소대
-수송소대(3개 분대)
-탄약대(彈藥隊, 3개 분대)

공병대대(3개 중대)
-공병중대(3개 소대)
 >공병소대(3개 분대)
-수송소대(3개 분대)

특무대대(보병대대와 편성 동일)

병원(300 침상 규모)

통신대

정비대(修械所)
(中国军事史 编写组, 中国历代军事制度(解放军出版社, 2006), p.627 )

하지만 편제란 어디까지나 편제라서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 중앙군 직계 사단 중에서 실제로 포병대대를 제대로 갖춘 사단은 15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사단은 포병중대 1개만 가졌거나 아예 포병이 편제에 없었지요;;;; 편제대로 1개 포병대대를 가져봐야 산포 16문 정도에 불과하니 완전 편제된 일본군 보병사단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에서 정예로 꼽혔던 독일식 사단도 산포 1개 대대만 달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국민당군 보병사단의 편제상 공용화기 및 중화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경기관총 : 274정
중기관총 : 54정
경박격포(擲彈筒) : 243문
박격포 : 30문
산포/야포 : 16문

국민당군 직계사단 중 중일전쟁 발발당시 4각 편제로 편성되어 있던 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 1, 공병대대 1, 보급대대(輜重營) 1, 기병중대 1, 특무중대1
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의무대(衛生隊)1
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 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위생대1
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1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2,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2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3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2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보충연대 1, 포병대대1
4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4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5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군병원 1
5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특무중대1
5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5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통신대대1, 공병중대1
6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7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보급대대1, 기병주대1, 특무중대1
8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8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대전차포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중대1, 군병원1
9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보급대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2. 3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한편,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중에도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3각 편제사단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5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43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4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51사 : 3개 보병연대, 통신중대1, 특무중대1, 위생대1
5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60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대2, 의무대1, 전신반1
61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2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93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6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7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3. 특이한 편제를 가진 보병사단
특이한 편제를 갖춘 사단도 있었습니다.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인 2보병사단은 무려 6개 보병연대에 보충연대도 하나 가진 특이한 사단이었습니다. 물론 포병은 달랑 1개 대대로 머릿수만 많은 사단이었지만 말입니다;;;

2사 : 3개 여단 6개 보병연대, 보충연대1, 기병연대1, 포병대대 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94사의 경우는 3각 편제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별도로 2개 보병대대가 더 추가된 편제입니다.

94사 : 3개 보병연대 2개 보병대대,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이 글에서는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만 이야기 했는데 사실 국민당 중앙군의 직계가 아닌 사단이나 군벌 사단도 이것 보다 나을 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군벌군대까지 정리를 하면 한번 표로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잡담하나.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曹剑浪의 国民党军简史는 원래 두권 짜리였는데 2009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세권으로 늘어났습니다. 처음 개정판을 샀을 때는 구판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보여 김이 샜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니 꽤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상권의 앞부분에서 국민당군의 복잡한 계통을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해 놓았는데 이게 정말 좋더군요. 구판에서는 그냥 간단히 중앙군과 군벌군대에 대한 설명만 있어서 좀 아쉬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