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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금요일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년)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 포스팅에서 인용할 통계는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공군에 전투기를 원조하는 계획을 마련할때 실시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에 대한 조사입니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북한이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에 의존한 것과 비슷한데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분야일수록 기존 지배체제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표. 한국공군 조종사의 출신별 통계(1949. 12. 7)
조종사
총 비행시간
(1946년까지)
전투기 조종사
출신
폭격기 조종사
출신
수송기 조종사
출신
1
9,800


1(일본군)
1
6,000

1(중국군)

4
2,500
2(일본군)
1(일본군)
1(일본군)
5
1,500
1(일본군)
2(일본군)
2(일본군)
5
700
1(일본군)
1(일본군)
3(일본군)
13
500
1(미군)
8(일본군)
4(일본군)
10
400
4(일본군)
3(일본군)
3(일본군)
13
300
8(일본군)
1(일본군)
4(일본군)
11
200
8(일본군)

3(일본군)
(표출처 : Despatch No.777, “Enclosure No.1, Present Personnel Experience Factors”(1949. 12. 7), RG330 Entry 18 Box68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 Office of Military Assistance Project  Decimal File, Apr 1949~May 1953)

2011년 7월 9일 토요일

국민당군의 융통성있는 병력운용(?)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장교로 참전했던 저자의 경험담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당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아서 꽤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 중일전쟁 중 일선 부대의 병력 운용(?)에 대한 내용이 하나 있어서 인용을 해 봅니다.

중국은 운 좋게도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은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귀금속을 대거 지폐로 대체함으로써 전쟁 초기에는 인플레이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에 이르러 물가는 처음으로 전쟁 발발 이전의 열 배를 돌파했다. 그 이후 물가의 상승이 빨라졌고, 그 파괴적인 효과가 모두의 일상생활을 위협했다. 1941년에 소위인 나의 월급은 42위안이었다. 식비는 정부가 지급했으나 의복과 신발은 내가 부담했다. 마을의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이 3위안이었으므로, 월급을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다 약간 나았을 따름이다.

이 당시 각 중대의 중대장에게는 두 명의 가짜 이름을 명부에 끼워 넣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명의 급료와 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용인된 숫자는 더 많았는데, 모두가 사단장의 묵인을 얻었다. 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총사령관 장제스는 1941년 최고위 장군들에게 돌린 한 통의 비밀 서한에서 몇몇 사단들이 명부상의 병력을 각각 3천명씩 부풀렸음을 지적했다. 그들은 전투의 사상자를 보고할 때 자신들을 구제할 기회를 잡았다. 한 사단이 5천에서 6천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허위 보고의 증거를 모두 지우고 기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걸 의미했다.

레이 황/구범진 옮김,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  234~235쪽

레이 황은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중앙군 소속인 14사에 배속되었는데 중앙의 직계군이 이 정도로 엉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라울 정도입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 용병단에서 급료를 올리기 위해 병력 규모를 허위로 부풀린 것과 비슷하지요. 이 상태로 전쟁을 1945년까지 지속했다는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 직계 보병사단의 편제

제가 이것 저것 늘어놓고 질질끄는 성향이 있다 보니 공수표만 남발하고 아직 못쓴 글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 독일 군사고문단이 훈련시킨 국민당군의 독일식 사단에 대한 글이 하나 있는데 기분 내킬 때 몇 줄씩 쓰는 제 성향상 언제 다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의 사단 편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 봤는데 오늘은 이거나 올려볼까 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모두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上册(解放军出版社, 2009) 457쪽~496쪽을 정리한 것 입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국민당군과 여기에 속한 군벌군대는 전형적인 4각 편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인데 유럽의 군대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3각 편제로 전환한 것과 비교하면 편제의 개편이 지독하게 늦었다고 할 수 있지요.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군은 4각 편제사단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3각 편제로 편성된 사단도 상당수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1. 4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사실 국민당군의 4각 편제는 제대로 된 4각 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편제는 각각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된 2개 보병여단 이었지만 사단 직할대의 규모가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편제상의 편성만 보더라도 포병은 불과 대대급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1차대전 초기 일반적인 4각 편제 보병사단은 2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1개 포병여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군의 포병전력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편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국민당군의 4각 편제 보병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단사령부
-참모처(參謀處)
-부관처(副官處)
-군계처(軍械處)
-군수처(軍需處)
-군법처(軍法處)

보병여단(2개)
-보병연대(3개 보병대대)
 >보병대대(3개 보병중대)
   =보병중대(3개 보병소대)
     -보병소대(3개 분대(班))
   =기관총중대(機槍連, 기관총 6정)
 >박격포중대(박격포 6문)
 >통신소대(通信排, 2개 분대)
 >수송소대(輸送排)
 >후송소대(擔架排, 3개 분대)

기병중대(4개 소대)
-기병소대(2개 분대)

포병대대(砲兵營, 3개 중대)
-포병중대(3개 소대)
 >포병소대(2개 분대)
-통신소대
-수송소대(3개 분대)
-탄약대(彈藥隊, 3개 분대)

공병대대(3개 중대)
-공병중대(3개 소대)
 >공병소대(3개 분대)
-수송소대(3개 분대)

특무대대(보병대대와 편성 동일)

병원(300 침상 규모)

통신대

정비대(修械所)
(中国军事史 编写组, 中国历代军事制度(解放军出版社, 2006), p.627 )

하지만 편제란 어디까지나 편제라서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 중앙군 직계 사단 중에서 실제로 포병대대를 제대로 갖춘 사단은 15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사단은 포병중대 1개만 가졌거나 아예 포병이 편제에 없었지요;;;; 편제대로 1개 포병대대를 가져봐야 산포 16문 정도에 불과하니 완전 편제된 일본군 보병사단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에서 정예로 꼽혔던 독일식 사단도 산포 1개 대대만 달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국민당군 보병사단의 편제상 공용화기 및 중화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경기관총 : 274정
중기관총 : 54정
경박격포(擲彈筒) : 243문
박격포 : 30문
산포/야포 : 16문

국민당군 직계사단 중 중일전쟁 발발당시 4각 편제로 편성되어 있던 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 1, 공병대대 1, 보급대대(輜重營) 1, 기병중대 1, 특무중대1
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의무대(衛生隊)1
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 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위생대1
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1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2,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2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3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2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보충연대 1, 포병대대1
4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4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5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군병원 1
5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특무중대1
5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5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통신대대1, 공병중대1
6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7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보급대대1, 기병주대1, 특무중대1
8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8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대전차포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중대1, 군병원1
9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보급대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2. 3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한편,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중에도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3각 편제사단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5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43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4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51사 : 3개 보병연대, 통신중대1, 특무중대1, 위생대1
5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60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대2, 의무대1, 전신반1
61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2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93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6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7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3. 특이한 편제를 가진 보병사단
특이한 편제를 갖춘 사단도 있었습니다.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인 2보병사단은 무려 6개 보병연대에 보충연대도 하나 가진 특이한 사단이었습니다. 물론 포병은 달랑 1개 대대로 머릿수만 많은 사단이었지만 말입니다;;;

2사 : 3개 여단 6개 보병연대, 보충연대1, 기병연대1, 포병대대 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94사의 경우는 3각 편제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별도로 2개 보병대대가 더 추가된 편제입니다.

94사 : 3개 보병연대 2개 보병대대,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이 글에서는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만 이야기 했는데 사실 국민당 중앙군의 직계가 아닌 사단이나 군벌 사단도 이것 보다 나을 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군벌군대까지 정리를 하면 한번 표로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잡담하나.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曹剑浪의 国民党军简史는 원래 두권 짜리였는데 2009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세권으로 늘어났습니다. 처음 개정판을 샀을 때는 구판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보여 김이 샜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니 꽤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상권의 앞부분에서 국민당군의 복잡한 계통을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해 놓았는데 이게 정말 좋더군요. 구판에서는 그냥 간단히 중앙군과 군벌군대에 대한 설명만 있어서 좀 아쉬웠지요.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중국 전선의 패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의 회고록에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패튼을 중국 전선으로 차출하려 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광대한 중국 전선은 패튼 같은 인물에게는 꽤 잘 맞는 전장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독일이 6월(원문의 오류)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에는 일본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인력과 물자를 돌릴 수 있었으며 나는 마셜 장군으로부터 내가 패튼, 심슨(William Hood Simpson), 그리고 트러스콧(Lucian Truscott) 장군 등을 잘 통솔할 수 있다면 이들을 중국 전선에 파견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훌륭한 전투 경험을 갖춘 간부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중국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 총통도 진심으로 찬성했다. 한편, 패튼 장군은 나보다 상급자였기 때문에 나는 마샬 장군에게 현재 직위를 그만 두고 전구 사령관을 패튼 장군에게 넘길 것과 어떤 역할이건 간에 그의 지휘 하에서 계속 복무하겠다고 했다. 마샬 장군은 내가 전구 사령관을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경우 내가 4성 장군으로 진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장 총통과 헐리(Patrick J. Hurley) 대사는 내가 4성 장군급의 직위를 이어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 있는 몇몇 대장 계급의 장군들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에게 나를 진급시켜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매우 빨리 진급해 왔으며 다른 전구의 사령관들과 비교했을 때 근무 연한이나 경험 면에서 부족하며 현재의 계급으로도 중국군의 대장은 물론 원수들을 잘 상대해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패튼에게 중국 북부를 담당하게 해서 베이징, 톈진, 그리고 친황다오(秦皇島) 등의 중요한 목표를 향해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트러스콧은 중부를 맡아 양쯔강 계곡을 따라 상하이로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중국 남부를 잘 알고 있으며 지난 수개월간 능숙하고 공세적인 전투 지휘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매클루어(Robert A. McClure)는 남부를 맡아 광둥-주롱(九龍)-잔쟝(湛江, Fort Bayard) 등의 중요 목표를 향한 작전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 나는 그 이전에 매클루어를 중장으로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과 큰 임무에 걸맞는 직위였다. 심슨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을 맡아 미군과 중국군 지상부대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인도에서 중국 전구로 차출된 유능한 항공 지휘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이자 전구 연합군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945 년 8월로 넘어갔을 때 광둥을 점령하기 위한 카보네이도(CARBONADO) 계획은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실제로 광둥-주롱을 향한 진격 준비는 일정을 앞당겨 추진되고 있었다. 8월에 보다 공세적으로 동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후송하고 보충병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한 전방 군수 지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준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즉, 나는 광둥을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하면 공격 부대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강력한 항공지원이나 탄약, 또는 보충병이 부족해서 돈좌되지 않기를 원했다.

Albert C. Wedemeyer, Wedemeyer Reports!(Henry Holts and Company, 1958) pp.331~332

그러나 중국 본토의 반격 작전이 아직 계획 단계이던 8월에 일본이 항복한데다 패튼도 사고를 당해 결국 패튼이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사가라면 꽤 재미있는 가정을 할 수 있겠죠.

재미삼아 썰렁한 가정을 조금 해 보죠.

일단 패튼의 작전 구역이 중국 북부가 된다면 독일에 이어서 다시 한번 그가 혐오했던 소련군과 접촉하게 됐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됐다면 패튼과 소련측은 다시 한번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면 패튼이 그렇게 좋아했다던 셔먼이 전차 노릇을 아주 아주 잘 했을 겁니다. 태평양 전선의 셔먼 전차는 유럽 전선 처럼 얻어터지는 야라레메카 신세는 아니었으니 말이죠. 유럽 전선에서 셔먼의 굴욕을 지켜봐야 했던 패튼은 꽤나  흡족해 했겠죠.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중국측이 본 상하이 지구 항공전(1937년 8월 14일~17일)

10일 전에 쓴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이란 글에 배군님이 "전투기 무용론"이란 답글을 써 주셨습니다. 배군님의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1936년 8월 14일에서 8월 17일에 걸쳐 벌어진 일본군과 중국군의 항공전인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써 보려 했으나 제가 요 며칠동안 약간 정신이 없다 보니 제때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이 공중전에 대한 중국측 시각에 대해 간단하게 써 보겠습니다.

먼저 중일전쟁 초기의 공중전이니 만큼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의 편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일전쟁 직전 중화민국 공군은 급속히 증강되었습니다. 1936년 까지 중화민국 공군은 총 14개 비행중대(飛行中隊)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6년 8월에 광동공군의 9개 비행중대가 중앙군 예하로 들어와 다음과 같이 개편되었습니다.1)


광동공군 제1비행중대 → 중앙군 제16비행중대
광동공군 제2비행중대 → 중앙군 제17비행중대
광동공군 제3비행중대 → 중앙군 제1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4비행중대 → 중앙군 제1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5비행중대 → 중앙군 제2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6비행중대 → 중앙군 제28비행중대
광동공군 제7비행중대 → 중앙군 제29비행중대
광동공군 제8비행중대 → 중앙군 제30비행중대
광동공군 제9비행중대 → 중앙군 제31비행중대

그리고 10월에는 중앙군 예하에 7개 비행중대가 새로 편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37년 7월에 중화민국 공군은 총 10개 비행대대(飛行大隊)와 6개 독립 비행중대로 편성되었고 구체적인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2)

항공위원회
 │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
   └공군굉작기사령(空軍轟炸機司令)*
   │   └제1비행대대
   │     └제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2비행대대
   │     └제9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1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14비행중대(노스롭 감마 2E)
   │   └제8비행대대
   │     └제10비행중대(사보이아 S.72)
   │     └제19비행중대(He111A-0)
   │     └제30비행중대(마틴 138WC)
   │    
   └공군구축기사령(空軍驅逐機司令)**
   │  └제3비행대대
   │     └제7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8비행중대(브레다 Ba.27, 피아트 CR.32)
   │     └제17비행중대(P-26A)
   │  └제4비행대대
   │     └제21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2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3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Fw44)
   │  └ 제5비행대대
   │     └제2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5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제28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Fw44)
   │  └독립제29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I)
   │    
   └공군정찰기사령(空軍偵察機司令)
   │  └제6비행대대
   │     └제3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4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5비행중대(더글라스 O-2MC)
   │     └제15비행중대(피아트 CR.32)
   │   └제7비행대대
   │      └제6비행중대(Vought V-92C)
   │      └제12비행중대(Vought V-92C)
   │      └제16비행중대(Vought V-92C)
   │   └독립제31비행중대(정찰기)
   │
   └제9비행대대(공격기)
   │  └제26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제27비행중대(커티스 A-12 슈라이크)
   │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   └제32비행중대
   │   └제34비행중대(커티스 호크 II)
   │   └제35비행중대(Vought V-92C)
   │
   └제13독립비행중대
   └제18독립비행중대
   └제20독립비행중대
   └제33독립비행중대

*굉작기(轟炸機) 폭격기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구축기(驅逐機)는 전투기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상하이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중국 항공위원회는 8월 14일 오전 2시, 공군작전명령 제2호를 발령해 상해에 상륙하고 있는 일본군을 폭격하도록 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폭격기 부대인 제2비행대대와 전투기 부대인 제4, 제5비행대대, 그리고 공군전적총지휘부(空軍前敵總指揮部) 직할대인 항주견교항교잠편대대(杭州筧橋航校暫編大隊, 이하 잠편대대)가 투입됐습니다.

8월 14일 부터 8월 17일까지 전개된 항공전의 추이는 唐学锋저, 中国空军抗战史, 90~100쪽의 내용에 따라 서술하겠습니다.

8월 14일 오전 7시, 잠편대대 제35비행중대 소속의 보우트 V-92C 5대로 편성된 중국공군의 제1차 공격대가 젠차오(筧橋)비행장을 출격했습니다. 제1차 공격대는 손실 없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제2차 공격대는 제2비행대대 소속의 노스롭 감마 2E 21대로 편성되었으며 오전 8시 40분 제2비행대대 부대대장 쑨통강(孫桐崗)의 지휘하에 250kg 폭탄 14발과 50kg 폭탄 70발을 탑재하고 광더(廣德)비행장에서 출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는 두 제대로 나뉘어 첫 번째 제대는 휘산(山) 부두를 폭격하고 두 번째 제대는 우송(吳淞) 하구에 상륙하는 일본군 함선을 공격했습니다. 2차 공격대 또한 손실 없이 귀환했습니다. 3차 공격대는 제5비행대대의 호크III 8대로 편성되었으며 5대대장 딩지쉬(丁紀徐)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250kg 폭탄 1발씩을 탑재하고 오전 9시 20분 출격해 상해 인근의 일본 해군 함정을 공격했습니다.
중국공군은 오후부터 폭격을 재개했습니다. 제4차 공격대는 제5대대 제24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3차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각각 250kg 폭탄 1발을 탑재하고 오후 2시20분 출격했습니다. 4차 공격대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차 공격대가 목표 상공에 도달했을 때 일본군 전투기가 기습해와 부중대장이 격추되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5차공격대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편성되어 오후 2시 40분 출격했으며 상해의 일본해군 육전대사령부를 폭격했습니다. 제6차 공격대는 제3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0분에 출격해 궁다(公大) 방직공장을 폭격했습니다. 제7차 공격대는 제25중대의 호크III 3대로 편성되었으며 25중대장의 지휘하에 오후 2시 45분 출격해 일본군 사령부 등을 폭격했습니다. 오후 3시 40분에는 제2대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제8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오후 3시 50분에는 잠편대대 소속 제34중대의 호크 II와 호크III로 편성된 제9차 공격대가 출격해 50kg 폭탄 2발과 18kg 폭탄 11발을 투하하고 귀환했습니다.
한편, 이날 제공전투는 제4비행대대 소속의 전투기들이 담당했습니다. 오후 2시 50분, 제4비행대대는 공격해 오는 일본군 폭격기들을 습격해 21, 22, 23중대가 각각 1대씩, 총3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중국공군은 8월 15일에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날 중국공군은 모두 8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각 공격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1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3대
2차 공격대 : 제6대대 5중대, 5대
3차 공격대 : 제6대대, 대대장 단독출격
4차 공격대 : 제5대대, 14대
5차 공격대 : 제2대대 11중대, 17대
6차 공격대 : 제5대대, 6대
7차 공격대 : 제7대대 16중대, 6대
8차 공격대 : 제4대대, 8대

한편, 8월 15일 전투는 배군님의 글에 잘 서술되어 있듯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국쪽 기록은 이날 전투에서 러이친(樂以琴)이 4대, 탄원(潭文)이 3대를 격추하는 등 총 30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측의 주장은 실제보다 다소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이 전투는 일본측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8월 16일에도 대규모 공중전이 계속되었는데 중국측은 이날에는 11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7일에는 제 2, 4, 5, 7대대의 호크 17대와 노스롭 감마 2E 12대, 보우트 V-92C 15대 등 총 44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6차 걸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는 소규모 공중전이 있었으며 일본군 항공기 1대를 격추시켰다고 합니다.

중국공군은 8월 내내 상하이와 우송 일대에 출격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습니다만 이 글을 쓴 이유가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8월 14일~17일의 항공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이었으니 8월 하순의 작전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전투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미국에서 퇴물로 취급하던 호크II, III와 같은 기종으로도 공격해 오는 적의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구식 항공기들이 동원된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전투기들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미국은 전간기의 여러 전쟁에서 교훈을 얻는데 신통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1) 刘凤翰, 国民党軍事制度史 上(北京,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2009), p.469
2)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下(北京, 解放军出版社, 2004), pp.1557~1558

잡담하나, 이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참고한 唐学锋의 中国空军抗战史는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주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약간 난감한 증언들....

현대사는 다루고 있는 시기의 특성상 글 쓰기를 할 때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키보드를 잘못 치거나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바로 고소가 날아오니 말입니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언론인이 있으면 바로 고소를 때리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자료가 굴러들어와도 함부로 쓰긴 어렵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로는 구술자료가 대표적입니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비사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떠돌고 구술자료의 형태로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종종 문서로 기록되지 못할 만큼 난감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문서의 공백을 메꿔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거나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글쓰는 사람들을 갈등에 처하게 합니다. 욕 좀 먹더라도 이걸 쓸 것이냐 왠지 불길한데 그냥 쓰지 말 것이냐.

한국 현대사는 기묘하게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편입니다. 일단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서를 잃어버린 것이 첫번째 이유 겠지만 현대사의 당사자들이 뭔가 구린 구석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불리할 법한 기록은 최대한 회피하지요.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사자들이 민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다보니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있다 보면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임시정부나 만주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증언들은 기존에 남한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한국측 기록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일본 항복 직후 만주로 파견되어 한인들을 보호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김홍일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게 되자 그의 상관인 두율명(杜聿明)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두율명이 만주의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다고 보고하자 분노한 장개석이 김홍일을 파면해서 난징으로 소환했다는 게 조선족들 사이에 떠도는 버전입니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고 간도특설대와 같이 악명(!!!) 높은 곳에서 복무한 이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증언은 좀 더 난감합니다.

이 와는 조금 다른 경우가 196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증언록입니다. 국방부가 1960년대에 한국전쟁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채록 작업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증언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실 책으로 나와 있는 증언록은 민감한 이야기들이 삭제된 축약본입니다. 1960년대에 채록한 원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문이 필요하며 군사편찬연구소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게다가 복사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요. 받아 적는건 허용되는데 이 방대한 증언록을 노가다로 쳐 넣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도 미공개된 증언록의 일부를 읽은 일이 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더군요;;;; 조선족들의 증언 처럼 신뢰도가 크게 의심되는 것도 아닌 당사자들의 증언이지만 좀 곤란한 내용이 많다보니 역시나 함부로 쓰기가 곤란합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자료는 많습니다만 잘못 썼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쓸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이런 민감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4월 4일 일요일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의 대전차전투 사례 하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을 정리해놓은 『승리』라는 책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말단 사병에서 간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계급의 회고담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그중 북평전투 당시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 군의 포위망 돌파를 대전차팀으로 격퇴하는 내용이 하나 있어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제가 보기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949년 1월 14일, 인민해방군 모 부 제3영(대대)의 전사들은 북평시 광안문 밖의 곽공장 재묘신 일선에서 북평시안에 포위된 적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지초 단장은 적들이 풍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증원한 다음 당고를 거쳐 남쪽으로 뺑소니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3영 지휘부에 전화로 알린 다음 다른 부대와 배합작전하여 풍대를 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단장은 적들의 땅크를 까부시기 위하여 로케트발신관(바주카포)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도원 마부증은 지휘소에 있다가 9련 진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련은 조선족들이 비교적 많은 련이었다. 9련의 진지는 재묘신에 있었다. 북평으로 부터 풍대로 가는 신작로가 재묘신의 옆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을 잘 지키면 적들은 천진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어두움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패(排, 소대)의 전사들은 괭이로 대피호를 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힘차게 괭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조선인 전사 리윤태였다. 교도원은 리윤태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마디 던졌다.

"땅이 대단히 얼었군."

"그래도 우릴 당해내지 못하지요."

리윤태는 괭이끝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비벼 떨구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한창 궁금해 있는데 전사들 앞에 교도원이 나타났으니 물어볼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욱- 모여들었다.

" 교도원 동지, 담판을 한다던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적들이 투항 했습니까?"

어둑시근한 곳에서 서툰 한어로 한 전사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교도원은 "적들은 투항은 고사하고 풍내를 탈취한 다음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적의 이러한 동태를 전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망을 친다! 놈들은 꿈을 꾸고 있구만."

"내 생각 같아선 담판이고 무엇이고 걷어치우고 답새겨야 해(때려야 해)."

교도원이 1패의 작업현장을 떠나 9련 련부에 이르자 리윤태가 따라왔다. 그의 뒤에는 조선인전사 박현길이 따랐다. 리윤태가 교도원을 보고 청을 했다.

"교도원 동지,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땅크를?" 교도원의 반문이다.

" 그렇습니다" 하고 리윤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적의 땅크가 우리의 엄폐호를 파괴할 뻔 했습니다. 놈들의 위풍을 꺾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리윤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군한지 오래서 로전사들처럼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였다. 교도원이 리윤태, 박현길에게 단부에서 이미 로케트발신관을 발급했으며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꼭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무척 기쁜 심정이였다.

15일 이른 새벽이다. 자욱한 안개가 넓은 벌을 뒤덮었다. 적들은 옹근 하루동안 준비하더니 또 발악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광안문 안에서 련이어 3영 진지로 날아와 터졌다. 약 10분 가량 발광적으로 포를 쏘아대더니 뒤이어 땅크를 내몰았다.

로케트발신관 반장 진봉상은 로케트 발신관으로 땅크를 겨누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땅크가 신작로 굽인돌이(커브길)에 나타났다. 진봉상의 로케트발신관 아구리에서 "씽" 하고 불줄기가 뻗어나갔다. 땅크의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땅크는 신작로에 박힌채 꼼짝 못했다.

"명중이다, 명중이다."

전사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적의 땅크 웃뚜껑이 열리더니 한놈이 상반신을 내밀다가 리윤태의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적은 그래도 전진을 중지하지 않았다. 아군의 화력권안에 기여든 적을 발견하자 9련 련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각종 무기가 적들을 향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아군의 포탄들도 수구자와 련꽃못쪽 적진지를 향해 연거퍼 날아갔다.

3영의 정면에는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적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적들은 9련 1패 리윤태네 앞까지 접근하였다. 전사들에게는 반땅크 무기가 없었다. 사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때 리윤태와 박현길이 교도원에게 달려갔다.

"교도원 동지, 제가 가서 저 땅크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윤태의 손에는 수류탄묶음이 쥐여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무들은 잠시 저 작은 다리에 가서 엄폐하고 있으면서 저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시오!"

교도원의 말이 끝나자 리윤태와 박현길은 탄우를 맞받아 다리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적의 땅크도 거의 다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앞에서 오던 땅크가 다리우에 오르자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만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연기가 흩어지자 그놈의 땅크는 계속 이쪽으로 움직였다. 리윤태와 박현길은 어느사이에 땅크 우에 올라섰다. 리윤태가 땅크 웃뚜껑을 열다가 박현길과 함께 땅크에서 떨어졌다.
적의 땅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마구 갈기면서 덮쳐왔다. 두번째 땅크도 다리를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리윤태는 힘겹게 첫번째 땅크 뒤로 부터 기여오고 있었다. 적탄은 사정없이 그의 앞뒤에 박혔다. 그의 솜옷에서 솜이 삐죽삐죽 나왔다. 그는 계속 기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땅크 우로 올라갔다.
갑자기 첫번째 땅크에서 불기둥이 일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땅크는 폭파되어 불덩이로 변했다. 뒤따라 오던 땅크와 장갑차는 앞길이 막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였다.

비록 적들의 땅크는 길이 막혔으나 적의 보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제1패 진지앞에 덮쳐들었다. 7련과 8련도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 이때 단부에서는 1련을 보내왔다. 1련은 오른켠에 있는 개천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덮쳐오는 적들의 길을 차단하였다. 앞의 놈들이 물러가지 못하자 뒤의 놈들도 전진할 수 없게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대포가 노호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들이 적의 땅크무리에,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 속에서 터졌다.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돌격이다. 전사들은 엄폐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하면서 도망치는 적을 족쳤다. 적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사들은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잔뜩 메고 진지로 돌아왔다.

지휘원과 전사들은 리윤태와 박현길이 보이지 않아 속을 태웠다. 진지에서 떨어져 있는 몇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창 안타깝게 찾고 있는데 리윤태와 박현길이 서루 부축하고 쩔룩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다리를 상했다. 특히 리윤태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의 솜바지가 선지피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심한 동통으로 해서 얼굴은 해쓱해졌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었고 머리칼은 새노랗게 그을었다. 교도원이 그의 앞에 다가오자 리윤태는 신작로에 박혀있는 땅크와 늘어져있는 적들의 주검을 가리키며 힘겹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다.

" 교도원동지, 보십시오. 적들은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녁노을은 마치 래일의 맑은 날씨를 알려주기나 하듯 서켠 온 하늘을 피빚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진해방소식이 날아왔다. 북평성 안에 포위된 적들의 환상이 부서졌다.

1949 년 1월 16일,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의 북평수비사령 부작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였다. 아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 밑에 부작의는 저항을 그만둘 결심을 내렸고 북평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조선족역사족적 편집위원회편,『승리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5』 (北京, 민족출판사, 1992), 637~640쪽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장비 부족을 반영하는 것인지 바주카포 팀을 단(연대)에서 예하 부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바주카포는 연대급 단위로 운용되고 있고 소대 단위에서는 변변한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게 안습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군이 공여한 M5 같은 경전차들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국민당군의 전차 종류를 명시하고 있지 않아 아쉽군요. 결국 리윤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전차에 대해 집속수류탄을 사용한 육박공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속수류탄은 1차대전 부터 사용된 꽤 유서깊은(???) 대전차 무기죠. 본문에서 리윤태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병 개개인의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력 타령만 하면 곤란하겠습니다만.

국공내전기의 대전차 전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꽤 재미있는 글 입니다.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한국군의 M-24 경전차 운용과 관련된 의문 하나

한국군이 한국전쟁 기간 중 잠시 M-24 경전차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1952년에 보병학교 전차교육대의 교육용으로 20여대의 M-24를 도입하여 사용하다가 같은해 말 다시 대만으로 양도했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미국 국방부장관실 문서 중에서 한국군이 1954년에도 M-24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54년 4월 30일자로 되어 있는 한국군 장비목록표에는 한국군의 기갑장비에 77대의 M4A3E8 중형전차 외에 21대의 M-24 경전차가 있는 것으로(In Hands of Troops)로 나타나 있습니다.* 보고서의 성격상 오타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1952년에 대만군에 M-24를 양도한 뒤 다시 도입된 기록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Assets of selected items of equipment available to ROKA as of 30 April 1954',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Tentative Proposal for Support of ROK Army, etc.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오늘 도착한 책 몇권

얼마전 중국 아마존에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습니다. 발송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뒤 9일만에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선박편으로 주문했던 것 중 가장 빨리 도착한 것 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빨리 도착한 게 10일 걸렸고 보통 2주정도 걸렸는데 드디어 배송기간이 한자리수로 내려갔군요.


뭐 언제나 그렇듯 군사서적 위주로 주문했는데 이번에 도착한 서적 중에서 가장 반가운 녀석은 이놈입니다.

『국민당군사제도사(国民党军事制度史)』는 예전에 조금 썼던 국공내전 후반기 국민당군에 대한 글을 이어서 써볼 생각으로 샀습니다. 겨울에 간단하게 써보고 싶은 글 중에 중공군이 3대전역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국민당군이 재편되는 과정에 대한 글이 있거든요. 이 책은 상하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은 육해공군의 전투부대의 편제와 전투서열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고 하권은 후방지원부대, 헌병, 준군사조직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권을 조금 훑어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육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시기별로 잘 정리해 놓아 베껴써먹기 좋은것 같습니다.


『국민당 역사상의 158개군(国民党历史上的158个军)』은 중화민국 수립부터 국공내전이 종결될때 까지 편성된 국민당군의 군(군단급)단위 부대들의 부대사를 간략히 정리한 서적입니다. 역시 국민당군의 재편성 과정에 대한 글을 쓸때 참고하려고 샀습니다.
예전에 글을 쓸때 국민당군의 편성에 관해서는 주로 『국민당군간사』를 참고했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이 늘어나는건 괜찮은 일이지요.

이것들 말고는 모두 인민해방군에 대한 책인데 나중에 따로 소개를 하던가 하겠습니다.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원래는 어제 올렸던 한국전쟁 이전 국군의 사단편제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재미있는 자료가 조금 더 굴러 들어와서 이 글은 다음 번에 더 보강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 대신 땜빵 포스팅으로 김석원 이야기나 조금 해 볼까 합니다.

예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사고문단장이 평가한 한국군장성들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보통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군사적 능력을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비해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예외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사단장을 지낸 김석원 준장이었습니다.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18일 신성모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한데다 공직을 남용하고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를 자행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s you will remember, I expressed myself unequivocally on the subject of this ex-officer last July and August when his peculations, dishonesty, corruption, misuse of public office and total disregard of the ethics and moral standards required of an officer were brought to light. In addition to the deficiencies I have just cited, it was my considered opinion at the time, as a professional soldier, that his knowledge of military science and tactics was extremely limited. He had failed to grasp the basic principles of the organization of his sector for defense and exhibited a fundamental ignorance of tactical principles which I would not tolerate even in a very junior officer. I feel that his deficiencies as a tactician would, if he were placed once more in a responsible position, seriously jeopardize the security pf the Republic.

March 25, 1950,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굉장한 혹평입니다. 특히 전술적 능력이 초급장교 보다 못하다고 하는 부분은 왜 저렇게 심각한 비난을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은 김석원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듯 김석원과 군사고문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일까요?

김석원은 1949년의 38선 충돌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개성 방면의 1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에 그의 전술적 능력을 평가할 만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1949년 여름에 미군사고문단이 1사단의 방어구역을 시찰하고 김석원의 부대 운용에 대해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번 조사의 결과 현재 1사단 구역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방어상의 위험한 취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a. 경계 순찰이 전무한 상태이다.

b. 현재 38선상에서 돌파되어 침범당한 지역에 전초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

c. 사단 정면에 주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단 주력이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d. 11연대가 부적절하게 투입, 배치되어 있다. 이 부대는 연대지휘소와 대대가 개성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는 개성 회랑 동쪽으로 부터의 공격에 후방이 차단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 연대는 개성-문산 도로의 약간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개성-문산 도로를 따라 종심 깊게 배치되는 대신 연대 전체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배치가 잘못 되어있다. 만약 임진리의 교량이 적의 신속한 진격에 탈취될 경우 1개 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포병은 고립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군대가 적용하는 올바른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 진다. 각 대대와 중대는 소수의 병력만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대를 확보한다.; 최소한 1개 연대에는 1개 대대가, 1개 사단에는 1개 연대가 예비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사단은 사단 예비는 물론 연대 예비대도 전무한 상태이다. 사단장은 예비대 없이는 보다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e. 나머지 2개 연대 -12연대와 13연대- 도 마찬가지로 종심이 깊지 못하고 예비대가 전무한 상태로 전술적으로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This investigation revealed the following deficiencies and dangerous defensive weakness in the present zone of the 1st Division.

a. Total absence of security patrolling

b. No established outpost line of resistance to present penetration and violation of the 38th degree North Parallel.

c. Absence of a main line of resistance on the Division front, thus exposing the Division’s main element to an attack and possible demoralization by North Korean Forces.

d. Improper placement and disposition of the 11th Regiment. This unit, with the Command Post and battalion located at KAESONG is, in its present position, highly vulnerable to being cut off and destroyed by a force attacking east through the KAESONG corridor. This regiment is incorrectly disposed, inasmuch as it is slightly south of KAESONG-MUNSAN road and the entire regiment is facing directly north rather than being astride the above-mentioned road and disposed in depth. If the bridges over the Im-Jin-ni River are taken by a quick thrust of the enemy, over one regiment and artillery will be cut off. Correct dispositions, as applied by all real armies, are as follows : each Battalion and Company Keeps few troops in front and each has a Reserves; at least 1 Battalion of a Regiment must be in reserve; at least 1 Regiment of a Division must be in reserve. As it is, there are no Regimental reserves nor Division reserves. Not having these, the Division Commander is unable to accomplish much decisively.

e. The two remaining Regiments – the 12th and 13th – are similarly placed in tactically-unsound position in that they are not disposed in depth and no reserves have been established.

August 1, 1949, ‘Tactical Disposition of the 1st Division, Korean Army’;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일단 위의 보고서에서 지적된 것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석원이 ‘예비대’라는 것을 전혀 확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은 부대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김석원은 사단장이 되어 제대로 된 예비대 없이 사단 전 병력을 전방에 배치해 놓은 것 입니다. 초급장교 만도 못하다는 혹평이 단순한 비난이 아닌 것이죠.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 사단의 전 병력이 전방에 배치되어 방어 종심도 얕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으면 한방에 붕괴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예비대도 없으니 만약 이 상태로 전면전이 발발했다면 개성-문산 지구는 순식간에 붕괴됐을 것 입니다.

김석원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승렬과 백선엽은 이런 비상식적인 부대운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전 당시 1사단은 11연대를 예비대로 확보해 놓았고 기습 공격과 전력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선전합니다. 김석원이 하던 대로 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면 서부전선이 일거에 붕괴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회해전역 패배에 대한 장개석의 반응

장경국이 쓴 장개석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해전역이 종결될 무렵 장개석의 반응을 서술한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회해전역은 국민당 직계 군이 대규모로 괴멸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전역인데 장개석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는 꽤 궁금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장경국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담담했던 모양이더군요. 과연 실제로 그랬을지는 조금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구청천(邱淸泉) 사령관이 오늘(1월 9일) 전쟁터에서 전사 했다. 지난해 11월 22일 황백도(黃伯鞱) 장군이 서방회전에서 전사한 이래로 우리 군의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두율명(杜聿明) 부대 역시 근일 정세가 몹시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군이 서주에 저장해 두었던 화학포탄을 미리 폐기하지 못한 관계로 공산군이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 진지를 파괴하고 많은 장병들을 참살시켰으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영성(永城)과 숙현(宿縣) 사이의 청룡집(靑龍集)과 진관장(陳官莊) 지구의 두율명 부대는 이미 반격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버렸다. 아버지는 두(杜), 구(邱) 사령관의 전보를 받고는 전국이 절망 상태임을 판단하고 그들을 데려올 비행기를 보냈다.
두율명 부대가 격파를 당한 뒤 아버지는 일기에 그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율명 부대가 오늘 아침 태반이 공산군에게 격멸된 모양이다. 보고에 따르면 그래도 3만 명이 진관장 서남에서 포위망을 뚫고 있다는데 무사히 탈출했는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여태 남들의 강압 때문에 인퇴를 할 수 없다고 버텨 온 것도 실은 이 두율명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내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어야 하고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태연해 지기도 한다.

蔣經國 著/金學主 譯, 『풍운 80년의 나의 아버지 蔣介石』, 澈文出版社, 1976, 183~184

주력군이 붕괴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되었는데 마음이 태연해 진다니(;;;) 확실히 장 총통 각하도 대인배는 대인배인 모양입니다. 장경국이 인용한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장개석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짧은 글을 두 편 썼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

국내에 나온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들은 대개 신해혁명을 다룬 다음 1차대전에 대한 설명은 간략히 하고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과 5∙4운동에 대한 서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국내에 출간된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를 모두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개설서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1차대전 같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중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개설서라 하더라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게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중국사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를 찾아 보다 보니 정말 중국과 1차대전의 관계에 대한 단행본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권의 연구는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과 함께 해외 중국학 연구의 양대 산맥인 영어권의 연구가 저 정도 라는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쉬궈치(Xu Guoqi, 徐国琦)의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는 바로 영어권의 중국사 연구에서 ‘공백’이라고 할 만한 1차대전기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유럽 파송 같은 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을 1차대전이라는 하나의 틀에 넣어 잘 정리해 놓은 글은 처음 접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연구서가 한 권 나온 일이 있긴 하다는데 이것은 중국 쪽 자료를 별로 이용하지 않고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자인 쉬궈치가 1차대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초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중국의 지식층은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병립은 다소 모순되게 느껴지는데 20세기 초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것의 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국력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국제질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강화된 민족주의는 5∙4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5∙4운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1차대전 중 근대적 민족주의가 함양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 수궈치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중국의 역할 자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 키건이나 니알 퍼거슨 등이 쓴 유명한 개설서들은 1차대전 중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중 중국 지식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청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은 아직 세계체제(World System)하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체제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중화’라는 개념 대신 ‘시민’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민’의 사상적기반으로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저자는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를 타고 수많은 근대적 언론매체들이 등장한 것은 대중(public)의 증가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적 ‘대중’은 중국의 국가적 운명과 주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대중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르는데 좀 오묘한 느낌이 드는 용어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중국 민족국가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문제로 골몰하고 있을 때 드디어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기회가 왔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 입니다.

저자는 중국정부가 1차대전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전쟁에 교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한다면 새로운 중국 국가는 평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량치차오(양계초, 梁啟超)와 같은 지식인들과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원세개의 측근이고 참정원(參政院) 참정으로 있던 량스이(梁士詒)는 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에게 참전을 부추겼고 원세개는 주중공사 존 조던(John Jordan)에게 영국이 칭타오를 공격할 경우 중국군 50,000명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1915년 말까지 계속해서 영국에게 참전의사를 밝힙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만약 중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의 참전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참전제안을 거부당하자 중국 정부는 우회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노동자 파견을 제안합니다. 이공대병(以工代兵) 이라는 정책은 역시 량스이의 발상이었다고 하는데 량스이는 1915년 영국측에 30만명의 노무자(이 중 10만명은 전선에 투입될 무장 노무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서부전선의 소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1915년 3월 프랑스가 중국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해왔고 영국은 1916년 8월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노무자들이 서부전선으로 파견됩니다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공헌은 철저히 무시당합니다. 당시 영국 외무상이었던 밸푸어(Arthur Balfour)는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해서 “1실링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는 군요.
물론 중국도 뒤에 공식으로 전쟁에 참전하긴 합니다만 애당초 중국군 파병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한 미국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군사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중국은 선전포고만 하고 전투는 참여하지 못 하게 됩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연합군에 기여한 것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참여한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 와중에 원세개가 다시 제정을 부활하려다 정권 자체가 무너져 버려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중국의 주장이 모두 무시당하면서 낭만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중화민국 초기의 외교정책은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 국제체제에 편입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무산되게 됩니다. 신해혁명 이후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적인 중국 지식인들은 1차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보인 태도를 통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깨닫고 이후 공산주의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지식인들이 냉전 초기까지도 국제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 이었는데 저자의 일부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노무자 파견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식민지 이긴 했지만 역시 수많은 노동자와 전투 병력을 파견한 베트남의 전쟁 기여도가 차라리 중국 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파병조차 하지 못했으니 기존 역사가들의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저자의 일부 논지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쉬궈치는 근대국가 건설문제를 국제전쟁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시각을 매우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일자가 다가와서 허겁지겁 읽느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은데 뒤에 다시 시간을 내서 숙독해볼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권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중국공군항전사 - 唐學鋒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화문서적에 갔다가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도로 구매한 책 입니다. 가격은 22위안인데 4,500원에 샀습니다. 이 책은 중일전쟁 발발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국민당 공군의 작전과 편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관심은 있으되 아는게 없는 분야고 가격도 5,000원이 안되는지라 바로 질렀는데 조금 훑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이 없습니다! 맙소사. 명색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인데 이럴수가! 경악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이런 경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독의 군사사가인 그뢸러(Olaf Groehler)도 자신의 저작에 각주를 달지 않았지요. 물론 이 사람은 참고문헌 목록까지 빼 먹진 않았습니다만.... 이 당학봉이란 양반은 더 대인배로군요.

다음으로는 제본 상태가 불안합니다. 이거 몇년이나 더 갈런지... 물론 중국책이 러시아 책 보다는 더 잘만들긴 하는데 아직 평균적으로는 한국 만큼 잘 만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에 쓰는 종이도 질이 약간 낮은 것 같고...

이것을 제외하면 개설서로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중국공군(국민당공군)의 주요 작전을 잘 다루고 있으며 일본측 자료도 많이 참고한 듯 일본측에 대한 서술도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 전선에서 작전한 미육군항공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대략 훑어본 느낌으로는 개설서로서 상당히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초기 공군발전과정에 대해서도 앞 부분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도 좋은 점 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von Hardesty의 Red Phoenix에 비교할 만한 저작 같습니다.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