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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2일 수요일

How the War was won (Phillips Payson O'Brien 저)

2015년에 나온 필립 페이슨 오브라이언의 How the War was won은 꽤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브라이언의 핵심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해전과 항공전에서 결정된 것이며, 동부전선은 인명손실이란 측면을 제외하면 연합군의 승리에 부차적인 존재였다는 겁니다.

오브라이언이 중요시 하는 것은 '인명손실' 보다 경제력(자본 및 자원 소비, 공업생산) 입니다. 동부전선의 지상전은 투입되는 인명이 많기 때문에 거대해 보이지만, 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들어 쿠르스크 전투와 그 이후 소련군의 반격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을 독일의 공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환산하면 소수점 단위의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고 단언합니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소련의 역할이 과대평가됐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전쟁 중 소련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비판적입니다. 특히 소련이 해전과 항공전에 기여한것은 정말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저자의 냉소적인 서술에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오브라이언은 일본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소련 공군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우수했으며 전쟁 수행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소련 공군에 대해서는 전체 항공기 손실의 40%를 비전투 손실로 잃어버리는 수준낮은 군대라고 가차없이 비난합니다. 독일 공군이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서도 소련 공군과 대등하게 싸운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인지라 오브라이언의 소련공군 비판을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브라이언은 He 111이나 Ju 87 같은 구식 기체가 전쟁말기까지도 동부전선에서 쌩쌩하게 활약한 사실을 예로 들며 소련공군의 열등함을 조롱합니다. 실질적으로 한 일이 없는 소련 해군에 대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 자체가 공해전을 중시하다 보니 일본에 대한 평가는 엄청나게 우호적입니다. 저자는 일본이 동맹국의 실질적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도 1944년까지 공업생산을 크게 증대시킨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소련은 렌드 리스를 통해 방대한 기술, 자원 지원을 받았지만 일본은 거의 자체적인 자원만으로 미국과 공해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공업생산을 했다는 겁니다. 소련이 일본보다 수십배 많은 전차를 생산했지만 지상장비 생산은 일본이 건조한 전함과 항공모함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오브라이언은 미국과 '영국'의 공해전이 전쟁 승리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연구들이 비효율적이고 잔인하기만 했다고 비난하는 영국공군의 야간 전략폭격도 독일의 전시 산업생산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한 성공이라고 높게 평가합니다. 1944년 미육군항공대의 성공적인 전략폭격에 대한 평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독전에서도 대서양 해전이 독소전쟁 보다 더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찝찝하게 보는 책입니다. 어찌보면 러시아를 폄하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가득찬 반동적인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산업화된 전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2013년 8월 6일 화요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어떤 전문

1990년대 이후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들은 그동안 우리가 정황으로만 추정하거나 다소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입증해 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문서들 중 하나가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주북 소련대사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이 서한은 미국의 폭격에 견딜수 없게 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신속한 휴전 체결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의 핵심적인 내용 외에도 김일성의 몇가지 요구사항이 눈에 띄는데 남한에 보복 폭격을 할 수 있도록 공군력을 증강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윌슨센터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올라와 있는 영어 번역본을 중역해서 올려 봅니다.


긴급

바실레프스키 동지께.

비신스키 동지께.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 동지께 보낸 편지에 대해 보고합니다.

라주바예프


배부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 흐루쇼프, 비신스키, 소콜로프스키



“친애하는 대사동지, 이 전문의 내용을 스탈린 동지께서 검토해 주시도록 전달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이시오프 비사리오노비치,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해 볼 때 휴전협상이 무기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1년여간의 협상 결과 우리는 사실상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동적인 방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적은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주 최근에 적은 조선 전역의 발전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군의 작전으로는 상황을 호전 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초래되어 누적되고 있습니다.

평양이라는 단 한개 도시에 대해 (7월 11일과 7월 12일 밤의) 단 한번의 24시간 동안의 야만적인 공습으로 6천여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지들은 당연히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마오쩌둥 동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 인민을 고통과 부당하고 무의미한 피해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능동적인 군사작전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합니다.

1. 방공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10개의 대공포 연대(3개 연대는 중구경, 7개 연대는 소구경)를 편성할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탈린 동지께서 중국 동지들에게 5개 연대, 우리에게 5개 연대 분의 장비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2.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이 능동적인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조선, 적어도 평양까지는 주간에 전투기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인민군 공군은 언제라도 능동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얼마 뒤에는 조선인민군 조종사 40명이 소련에서 Tu-2기 훈련을 마칠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조종사들이 Tu-2기와 함께 귀국해서 즉시 능동적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중요한 적의 거점에 피해를 주기를 원합니다.

3. 적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지상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적 공군이 우리 후방을 타격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고 개성에서 진행되는 협상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1952년 1월 10일과 1952년 7월 9일의 각서에 따라,  그리고 1951년 10월 6일의 각서 내용을 1952년에도 적용하여 동지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기술 장비와 물자를 주실 필요가 간절합니다.

4. 동시에 개성에서는 조속한 휴전 체결과 교전 중지, 그리고 제네바 협약에 따른 모든 포로의 송환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것 입니다.

지상과 공중에서 군사 작전의 성격이 변화한다면 적에게 이에 상응하는, 우리에게 유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전문과 비슷한 내용을 마오쩌둥 동지에게도 보냈습니다.

조선 인민은 동지께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베풀어 주신 헌신적인 막대한 원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동지의 지시와 조언을 기다리겠습니다.

진보적인 인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동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일성.


평양, 1952년 7월 16일.”



이 전문에서는 북한이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휴전을 체결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 상태에서의 휴전이 북한에게 불리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김일성 스스로가 언급한 무의미한 희생의 원인이 김일성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입맛이 씁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김일성 같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멍청한 일은 잊을만 하면 되풀이 되지요.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The German Air War in Russia - Richard Muller

오늘은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The German Air War in Russia라는 좀 오래된 책 이야길 해 볼까 합니다. 1992년에 나왔으니 딱 20년 전에 나온 책이군요. 뜬금없이 예전의 책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평전, Wolfram von Richthofen: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를 읽고 나서 몇가지 확인해 볼 것이 생각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가 또 읽은 김에 내용 정리나 해 볼까 해서 입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에는 학계 외부에서 독일공군이 처음부터 단순히 육군을 지원하는 ‘전술공군’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나온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독일어권 바깥에서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는 연구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보크의 논의는 영어권의 군사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는 보크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출간될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멀러의 문제의식은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항공전은 단순히 지상군 지원작전에 그치지 않고 전략폭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기존의 저작들은 독일공군을 단순히 전술공군으로 파악하는 틀 안에 갇혀 있어 동부전선 항공전의 다면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공군의 작전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43~44년 시기 전략폭격 작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사족을 더 붙이자면 1999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의 대표작,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도 호르스트 보크, 리처드 멀러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독소전쟁 시기 독일공군의 개별 작전들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독일공군의 교리가 소련 전선에서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떠한 한계에 부딛혀 패배로 이어졌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전쟁 이전의 독일공군 교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이 처음 부터 전술공군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독일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의 군사사상에 대한 재검토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베버를 단순히 두에Giulio Douhet의 이론을 따르는 전략폭격의 옹호자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베버가 전략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장거리 폭격기 개발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버의 사상은 공군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베버의 군사사상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상에서 전략폭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소모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적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타격함으로써 전략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두에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후에도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베버의 죽음으로 독일공군이 전술공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서술은 무리한 비약임을 지적합니다. 아래에서 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사상이 1943~44년에 독일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전략폭격으로 선회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반면 독일공군의 상징과 같은 지상군지원에 대해서는 2차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도 독일공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38년 까지도 지상군에 대한 직접지원을 임무로하는 전문 부대가 편성되지 않았으며 독일공군의 주력이었던 중형폭격기 부대는 오히려 차단과 같은 간접지원에 더 적합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공군의 간접지원에 만족하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강조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지상군 직접지원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담하는 부대의 증강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 졌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외에는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의 첫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작전에 대한 서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전 초기에는 독일 공군이 교리를 충실하게 따라 독립된 공군으로서 소련 공군을 목표로 한 제공권 장악과 지상군에 대한 ‘간접 지원’에 집중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제공권을 장악한 직후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는 항공차단과 같은 간접 지원의 비중이 더 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남부집단군을 지원한 제4항공군이 계획 입안 단계에서 육군측의 지원요청에 대해 제공권 장악이 제4항공군의 최우선 목표이며 이를 위해 지상군 지원을 위한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차출은 최대한으로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예로 드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전역을 거치면서 독일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것을 전담한 것은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었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같은 직접 지원의 상당수는 제8항공군단이 전담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공군지휘장교Kommandeur der Luftwaffe, KoLuft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공군은 육군과의 협력을 위해 육군의 사령부에  공군지휘장교를 배속 시켰지만 역할이 육군과의 연락임무와 정찰비행부대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육군에 대한 지원임무는 전적으로 항공군단 사령부 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급 부대들에 파견되었던 항공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FliVO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전역에서는 단순한 연락업무 이외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말에 실시된 몇 차례의 모스크바 공습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항공전 교리에 기반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입니다. 저자는 전쟁 후 헤르만 괴링과 같은 독일 공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 공습을 단순히 히틀러를 의식한 체면치레의 성격을 가진 공격이라고 증언한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독일공군의 능력 부족으로 소수의 폭격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힘의 원천”을 타격할 것을 강조하는 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 공군은 독립된 공군에서 점차 육군에 종속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이 가진 전략적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1942년의 블라우 작전도 단지 수개월의 짧은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전략적인 작전 능력을 갈수록 상실하게 된 원인이 단지 히틀러를 위시한 수뇌부와 육군에 있다는 전후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942년 전역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공군 지휘관들, 특히 남부전선의 제4항공군과 제8항공군단의 지휘관들은 독일공군도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남부에 독일 공군의 전력을 집중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942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육군의 지원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결정은 또다시 실패로 이어집니다. 독일 공군은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는 전력의 집중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름 전역에서 리히토펜이 지휘한 제4항공군은 크림반도에 투입한 전력보다 그리 많지 않은 500여대의 항공기로 카프카즈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 입니다. 공세가 진행되면서 독일 육군은 카프카즈로의 진격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조금씩 전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공군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1941년 전역에서 1개 항공군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한 것과 달리 1942년 전역에서는 1개 항공군단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일 공군은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 1942년 전역의 실패로 독일 공군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소련의 핵심 공업지역에 대한 폭격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독일 육군이 전략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은 공군이 이를 지원했으나 육군의 작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공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만슈타인의 반격으로 남부전선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이후 독일 공군은 폭격기 부대의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폭격기 부대를 육군에 대한 직접지원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6월 초 부터 독일 제4항공군과 제6항공군은 고리키,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등에 대한 야간 폭격을 시작했고 독일 공군은 이 공격, 특히 고리키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위한 표적 선정과 함께 이에 필요한 능력을 확충하려 합니다.
1943년 8월 예쇼넥이 자살하자 그의 후임으로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은 두가지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먼저 전선의 요구에 따라 지상군에 대한 지원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 공군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전략 폭격을 추구하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코르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준비는 지나치게 늦었고 충분하지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의 주 전력이 He 111이나 Ju 88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었고 He 177은 동부전선에 지나치게 늦게 등장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각해 지는 연료 부족은 폭격기 부대의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3년 하반기 부터 독일 육군이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하면서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가 고리키와 같은 전략 목표들을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비행장들을 계속해서 상실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독일 공군이 전략 폭격으로 선회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조차 늦었던 것 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독일 공군이 추구했던 전략 공군으로서의 역할은 좌절되었으나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육군의 요구에 따라 강화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설명한 것 처럼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일 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결국에는 독일 공군이 육군의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 초기와 달리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특히 1944년에 공군과 육군의 협조 체제가 개편된 것을 지적합니다. 먼저 항공연락장교, 즉 FliVO는 집단군과 야전군 단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군단급과 중점Schwerpunkt 사단의 연락은 항공통신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Luftnachrichten, FliVO-LN가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지상군과 지상공격기 부대의 직접적인 연락은 지상공격 항공관제장교Fliegerleitoffizer(Schlacht)가 지휘하는 지상관제단Fliegerleittruppe이 담당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 입니다. 저자는 지상공격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서 1944년 6월에 이르면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서 지상공격기 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르바롯사 작전 개시 당시 폭격기 부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상공격기 부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 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입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판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지상공격기 부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일 공군의 실패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적 요인인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략적인 열세입니다. 독일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전력으로 소련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전쟁이 확대될 수록 그 제한된 능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소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독일 공군의 내부적 요인으로서 융통성있는 교리와 독일 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처한 상황에 대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판단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가지는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했으며 결국 독일 육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에야 독립된 공군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2012년 1월 20일 금요일

독일공군의 항공기 손실에 대한 미국측 추산과 독일측 자료의 차이

전쟁에서 전과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최대한 정확한 전과를 확인할수록 작전에 대한 평가와 향후 작전 수립에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어렵습니다. 전시 선전의 목적에서 과장되는 경우는 제외하더라도 전장을 장악하여 전과 확인이 가능한 경우 조차 사소한 오차는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중전에서의 전과확인은 빠르게 움직이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오류가 발생합니다. 건카메라 같은 기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된 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Stephen L. McFarland와 Wesley Phillips Newton의 공저, To Command The Sky : The Battle for Air Superiority over Germany, 1942-1944의 권말에 실린 도표로서 독일공군의 항공기 손실에 대한 독일측 자료와 미국 제8공군의 주장을 정리해 놓은 것 입니다. 공중전에서 전과확인의 어려움을 한눈에 잘 보여주는 통계라고 하겠습니다.

자료1과 자료2는 미공군 역사연구소U. S. Air Force Historical Research Center가 독일측 관계자들과 노획문서를 통해 전후에 작성한 자료입니다. 자료1은 1949년 6월 28일 작성된 것으로 Auswertung der Einsatzbereitsch(aft) der fliegenden Verb(ände) vom 1 August 1943 bis November 1944(1943년 8월 1일 부터 1944년 11월 까지 항공부대의 준비태세에 대한 평가) 라는 제목의 자료입니다. 이 자료는 독일본토와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항공기 손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료2는 요셉 슈미트Josep Schmid 중장이 1954년에 작성한 “Day and Night Aerial Warfare over the Reich, 1943-1944”라는 제목의 문서로 자료1과 달리 독일 본토의 공중전에서 발생한 손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료3은 영국이 노획한 독일문서들을 번역하여 정리한 것 으로 여러건의 문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자료1과 다루는 범위가 같은데 수치는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날자
미8공군 주장
자료1
자료2
자료3
1943.10.2
20
9
10
12
1943.10.4
56
1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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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10
1943.10.10
202
12
26
25
194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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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4
12
12
12
-
19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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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94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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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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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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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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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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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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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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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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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51
1944.5.30
65
-
95
53
총 계
4,176
1,038
1,139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