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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

2018년 12월 6일 목요일

데이비드 글랜츠 저, 유승현 옮김, 『8월의 폭풍』 길찾기, 2018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8월의 폭풍: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를 읽었습니다. 길찾기 출판사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군사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면서 군사분야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확대하는데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을 시작으로 대중서를 넘어 전문적인 군사사 연구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의 폭풍』은 길찾기 출판사가 내놓은 군사사 연구의 두번째 저작입니다.

1945년 8월에 있었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외교사의 범주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결정한 사건이기에 많은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군사작전'에 관해 주목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군사작전이라는 점, 자료가 러시아어와 일본어 등 영어권 연구자가 접근하기에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영어권에서 손꼽히는 소련-러시아 군사사의 대가 데이비드 글랜츠의 이 연구는 글자 그대로 선구적인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연구자의 저작이기 때문에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소련군의 만주지역 전략 공세를 다루고 있지만 제2차대전 중 소련군의 발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소련은 1941년 부터 시작된 독일과의 전쟁을 계기로 전략, 작전술, 전술적인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전쟁 종결 직전에 있었던 만주지역 전략 공세는 소련군이 그동안 유럽 전역에서 쌓아온 역량이 총체적으로 발휘된 무대였습니다. 4장 부터 9장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 준비와 실행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 작전 시행과정을 다루는 장에서는 1939년 이후로 큰 발전이 없이 교리와 장비면에서 정체되어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신속한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군의 전술적인 분전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면서도 이것이 전략-작전술의 차원에서는 별 영향이 없었음을 지적합니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전략-작전-전술의 차원을 명쾌하게 분리해 설명하면서 일본군의 전략-작전 차원의 패배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데이비드 글랜츠의 초기 연구에 속하지만 작전연구라는 측면에서 매우 훌륭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측 시각을 보여주는 자료 대부분이 1950년대 미육군에서 수행한 작전연구들에 제한되어 있지만 소련에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략~작전술 차원의 연구이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서술도 이 범주에 국한하고 있습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질적 수준과 전략-작전 단위 방어 계획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1990년대 이후에 나온 글랜츠의 일부 연구가 소련 자료에 대한 과도한 편향성으로 작전연구 차원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1980년대에 나온 『8월의 폭풍』에서 보여주는 공정한 시각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길찾기 출판사 편집부의 실력은 기존에 간행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8월의 폭풍』에서도 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만주 전역의 특성상 고유명사를 번역하는데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는 이 어려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도 장점이 많습니다. 특히 큰 판형을 채택해서 본문에 지도와 도판이 많이 포함된 장점을 살리고 있습니다. 편집부가 지도 편집에 많은 공을 들여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지도의 가독성도 높습니다. 게다가 초판 한정 부록에 포함된 대형 작전도는 즐거운 깜짝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후 상업출판사에서 출간된 증보개정판이 아니라 미육군에서 간행한 초판이라는 점 입니다. 물론 초판으로도 만주 전략 공세를 전략-작전술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충분합니다. 증보개정판은 내용면에서도 보완이 있었고 부록으로 1차사료의 영역본을 제공하고 있어 만주 전략 공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역자인 유승현님을 비롯해 감수를 맡으신 주은식 장군님, 그리고 길찾기 출판사 편집진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노력이 들어간 책인 만큼 군사사에 관심 가지신 분들이 많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임익순의 노몬한 전투 참전기

임익순 대령(1917~1997)은 한국전쟁 당시 제9사단 30연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 했고 전쟁 말기에는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금성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경험을 가진 인물입니다. 육사2기로 군 경력도 훌륭했지만 전후 진급운이 없어서 대령으로 한직을 전전하다가 예편했습니다. 그는 만주국군 소속으로 노몬한 전투에 참전한 특이한 경험이 있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장갑차병으로 소련 기갑부대와 기갑전투까지 경험했으니 특기할 만 합니다. 임익순 대령 회고록의 노몬한 전투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개인의 회고담인 만큼 약간 과장되었거나 부정확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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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은 일과로 나날을 보낸 지 3개월이 지난 때였다. 만주 서북부 만소 국경에 노로 고지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의 국경선인 강을 소련군이 점령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름하여 ‘노몬한 사건’이다.내가 속해 있던 야나세 부대도 그 전투에 출동하게 되었다. 나는 장갑차 분대장으로 참전하려고 출동했다.

10월 초였지만 벌써 초겨울 날씨였다. 사람의 키보다 높은 이름 모를 풀들이 그 넓은 평야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높은 고지가 없어 전체적으로 나지막한 구릉으로 구성된 습지대였다. 땅은 거무스름한 모래로 되어 있어 비가 오면 그위를 걸어가거나 자동차로 지나가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다. 구릉과 구릉 사이의 습지대에는 약 1미터 간격으로 물웅덩이가 있었고 그 웅덩이에는 크기가 30센티에서 1미터까지 달하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그 잉어처럼 생긴 물고기를 잡는 데 그물이나 낚시는 필요하지 않았고 곡괭이나 삽자루만 있어도 몇 마라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다. 물고기의 맛이 훌륭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대로 먹을 만했다. 양념이라도 해서 요리를 했다면 더 먹음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물고기들은 잉어와 생김새가 비슷했지만 수염이 달려있지 않아서 우리는 ‘바보잉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넓고 넓은 초원에 백양나무가 군데군대 서 있었고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았다. 대포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만소 국경에 있는 만추리라는 국경 역을 향해 1주일 밤낮을 달리다가 중간에 가설 역에서 하차했다. 길도 없는 곳이었다. 밤이 새도록 자동차 전조등도 키지 못한 채 먼저 간 부대의 발자취를 더듬거리며 따라갔다. 날이 샐 무렵 어느 진지 같은 곳에 도착했다. 선발대가 본부를 설치해 놓았으나 전선은 아직 멀리 있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군은 모두가 경기갑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이 주력이라고 했다. 기동력이 뛰어나고 화력도 막강하며 일명 ‘하바리(종달새)’라고 불리는 소형 전투기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노로 고지 앞에 있는 하루하 강의 수면에 30센티 정도 두께의 철판으로 다리를 놓고 밤을 틈타 공격하곤 했다. 공중에서는 전투기로 아군 후방 깊숙한 곳까지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도 했다. 적의 기갑군도 그 위력이 대단했지만 코사크 기병도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라비아종 보다 두 배가 큰 종이었다. 그 거대한 말을 타는 병사 역시 몸집이 2미터는 족히 넘는 거구였다. 그들이 1미터가 넘는 장검을 휘두르며 돌격해오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것이다.여기에 대항하는 아군은 어떠했을까? 만주 서북부에 위치한 흥안남 북성의 몽고족 기병대가 합류해 결성된 2개 사단과 철도 경비를 맡고 있는 독립 수비대 1개 사단으로 적을 막아내 국경선 밖으로 몰아냈다. 이것이 1차 노몬한 사건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재침공을 할 기미가 보이자 이쪽에서도 정규군과 공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우리 부대도 출동명령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보급품과 탄약을 일선으로 수송하는 군용트럭수송대를 엄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들과 정면충돌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리 장갑차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1개 중대가 3개 소대, 1개 소대가 3개 혹은 4개 분대로 편성되었다. 1분대라고는 해도 장갑차 1대에 분대장이 차장이었다. 장갑차 한 대 즉, 1개 분대(1대)에는 분대장 이하 포수와 사수, 운전수 등 8명에서 9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분대에는 소대장과 연락병이 함께 타 소대본부를 구성했으므로 총 인원이 10명이 되어 공간이 비좁기도 했고 분대장의 정위치인 포탑에 소대장이 있어서 나는 포수자리에 앉게 되었다.

한번은 수송대 엄호임무를 띠고 전선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구릉을 몇 개 넘어 앞에 있는 골짜기에 코사크 기병대 1백여명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코사크 기병대는 우리 장갑부대를 제일 무서워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대장은 간발의 차이를 두지 않고 중기와 경기 등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격을 가했다. 허를 찔린 코사크는 민첩한 행동으로 도망했으나 말보다는 자동차가 속도가 빠른 것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코사크는 약간의 응전도 했으나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남겨두고 초원을 지나 사라졌다.의외의 전과를 거둔 우리 소대는 전리품을 챙기고 있는데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적의 기갑부대 십여 대가 사격을 하며 다가왔다.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대로 후퇴를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전리품을 버려둔 채 전원이 승차해 대전차포로 응사했다. 50밀리 밖에 안되는 작은 포였으나 위력도 좋았고 명중률도 높은 편이어서 사격만 제대로 하면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적의 기갑 두어 대를 격파하고 나니 뒤에서 엄호사격이 시작되었다. 이틈에 나도 차를 돌려서 후퇴했다. 아군진지로 돌아와서 보니 소대장이 중상을 입었다. 그가 즉시 후송되고 내가 소대장 대리를 명 받았다. 그 다음날 나에게 하사 진급명령이 내려졌다. 원래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임무는 소대장이 이끄는 소대가 나가고 나는 비교적 쉬운 임무를 담당했다.

아무 것도 없는 광활하기만 한 지역을 무슨 이유에서 피를 흘리며 뺏고 빼앗기는가에 대한 의문을 일개 사병 신분인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반공사상교육을 그곳에서 철저하게 배웠고 더불어 반공사상이 날로 투철해졌다.

길고 긴 만소 국경선에서 양측 수비대들이 간혹 충돌을 하고 있었지만 그처럼 대대적인 전투는 동만주 국경에서 한 번 있었고 노몬한 전투가 그 두 번째였다. 며칠 지나 일본군 몇 개 사단과 중포부대가 도착해 전투에 임했으나 일본군 사단이 9명의 생존자만 남기고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또다시 강력한 중장비로 무장한 사단 등의 증원군이 도착해 사기충천하여 총공격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러나 총공격  전날 극적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때 소장파 장교와 사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고급장교와 장성이 다수 죽었다고 들었다. 소장파들은 억울하게 죽은 전우들의 원수를 언제 누가 갚을 것이냐고 휴전결정에 항의 했다고 한다.

포성도 멈추고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면서 전선이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멀리 보이는 초원에는 적색과 백색의 깃발이 줄지어 세워져 있고 그 너머 지평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제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리 부대는 12월 초에 원대로 돌아왔다.

임익순, 『내 심장의 파편』 (시월, 2013) 61~65쪽.

2017년 8월 18일 금요일

임팔 대전차전


1944년, 무다구치 렌야가 지휘하는 일본 제15군의 대규모 기갑부대는 연합군의 감시망을 피해 버마의 정글을 뚫고 임팔 평원으로 진입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대규모 기갑전력에 허를 찔린 영연방군은 전투 초반부터 고전을 하게 되는데....

궁금하신 분은 Order of Battle의 새 확장팩 Burma Road를 플레이 해 보세요. 나만 당할 수 없지!!!!!!




2017년 5월 4일 목요일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 육해군 항공대 비행장의 흔적들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한반도에 슬금슬금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2차대전 말기로 가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현재 한국 방방곳곳에는 아직도 일본군이 건설한 군사시설의 잔해들이 남아있습니다. 밀양의 육군항공대 격납고처럼 문화재 지정이 되어 보호받는 경우도 있고 무안 처럼 아직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철거되는 경우도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특히 일본이 본토결전에 대비해 규슈방면 지원을 위한 후방기지로 건설한 한반도 남부의 비행장 유적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비행장 유적들은 주로 1944~45년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것이 특징입니다.

제가 답사했던 곳의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1.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일본해군항공대)

현재 남아있는 일본군 비행장 유적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알뜨르비행장일 것입니다. 제주도는 일본군의 결7호작전에 따라 45년에 필사적으로 방어준비가 이루어졌던 지역입니다. 하지만 알뜨르비행장은 이미 중일전쟁 이전인 1931년에 건설되어 중일전쟁 당시 오무라(大村)해군항공부대의 기지로 사용될 정도로 오래된 곳 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제주도 방어의 주력이 육군으로 넘어가면서 육군 레이더기지가 근처에 설치되는 등 육해군공용기지로 바뀌게 되지요.1)

 일본해군은 1943년 말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를 하면서 20개의 콘크리트 격납고를 건설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격납고의 외형은 비교적 양호한 편 입니다.





2.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ㆍ연금리 (일본육군항공대)


밀양시 상남면에는 전쟁 말기 일본육군항공대가 건설한 콘크리트 격납고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밀양과 아래에서 이야기할 무안군의 비행장은 일본육군항공대 관할이었습니다. 1944년까지 한반도 남부(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육군항공대 비행장은 대구에 위치한 제45항공지구사령부의 관할이었습니다.

朝鮮軍残務整理部, 『朝鮮軍関係史料 2/2』, p.0280-2.

 그러다가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준비로 인해 일본육군항공대가 대대적으로 증강됩니다. 이것은 화북에 있던 일본 제5항공군이 본토결전 준비를 위해 1945년 5월 20일 경성에 사령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무렵 밀양에 주둔한 것이 확실한 항공부대는 제176야전비행장설정대, 제10비행장중대, 제1활공비행대 등입니다.2) 조선군잔무정리부가 남긴 기록에는 항복당시 제5항공군 예하부대 목록과 병력 현황만 있을뿐 주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네요.

朝鮮軍残務整理部, 『朝鮮軍関係史料 2/2』, p.0281.

 현재 밀양시 상남면에는 기산리에 1개, 연금리에 1개 등 총 2개의 격납고가 남아있습니다.

 기산리의 격납고는 사유지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진 촬영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연금리의 격납고는 민가로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방치됐습니다. 기산리에 있는 격납고 보다는 촬영이 편합니다.











3. 무안군 현경면ㆍ망운면 (일본육군항공대)

 무안은 현재 일본군의 비행장 관련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없어서 계속해서 남아있는 유적들이 철거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무안군 현경면과 망운면 일대에 콘크리트 벙커 1개와 콘크리트 격납고 6개가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도 어렵고 지역 주민들의 인식도 좋지 않아 언제 남아있는 것도 철거될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격납고의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현경면에 5개(A, B, C, E, F), 망운면에 1개(E)를 확인했습니다. 전부 확인하지 못해서 추가 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먼저 평산 3리(통정)과 평산 4리(유수정)에 있는 격납고의 사진을 올리겠습니다. 편의상 평산 3리 통정에 있는 것을 A, 평산4리 유수정에 있는 것이 B와 C로 칭하겠습니다.

 A 격납고입니다.








70년이상 방치되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B 격납고 입니다.










C격납고는 현재 창고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지 신문의 설명에 따르면 고구마 저장고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A, B, C 격납고의 구체적인 위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가까운 곳에 몰려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음은 D, E, F 격납고입니다. 재미있게도 D격납고는 현경면과의 경계인 망운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딱 경계면에 붙어있어서 저는 처음에 D격납고도 현경면에 있다고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망운면 목동리의 D격납고 사진입니다. 밭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진을 찍기 어려웠습니다. 농한기에 다시 가서 조사할 생각입니다.




 다음은 현경면 송정리의 E격납고 입니다. 현재 쓰레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경면 송정리의 F격납고 입니다. 여기는 민가로 개조되어 사용된 흔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여기도 쓰레기장입니다. 현경장례식장 바로 옆에 있어 찾기는 가장 쉽습니다.










4.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신평마을 (일본해군항공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 즉 김해공항 옆에도 일본해군항공대가 사용하던 격납고 세 곳이 남아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곳들은 아직까지도 민가로 사용되고 있어서 외형 자체는 꽤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대한민국 공군 소유의 국유지이기 때문에 건축물 신설이나 철거가 어려운게 그 원인인 듯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사해서 관련정보를 업데이트 할 계획입니다.



1)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제주도에서의 일본군의 '본토결전' 준비: 제주도와 거대 군사 지하시설」, 조성윤 엮음 『일제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보고사, 2008) 64~72쪽.
2) 양영조 편, 『일제 조선주둔군과 625전쟁 일본소해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6), 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