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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9일 목요일

정보 출처로서의 중국 인터넷

포린폴리시에 재미있는 기고문이 하나 올라왔군요. 군사 정보 출처로서 중국 인터넷의 공개정보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논하는 글 입니다.




다른 나라의 인터넷 사이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도 상당수는 익히 알려져있거나, 또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것들이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이 워낙 정보공개에 폐쇄적인 집단이고 가끔은 선전을 위해 인터넷에 정보를 흘리기도 하므로 정보가 부족한 외국의 관찰자 입장에서는 중국의 인터넷망의 밀덕(軍迷)들을 주시할 필요성은 있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소련 시절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중소분쟁 당시 소련군의 T-62 회수/파괴작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1에 실린  D.S. Riabushkin와 V.D. Pavliuk의 글 “Soviet Artillery in the Battles for Damanskii Island”를 읽다 보니 127쪽에서 130쪽 까지 중소분쟁 당시 중국측이 소련군의 T-62를 노획한 경위가 짤막하게 실려있었습니다. 회수작전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게 전개되었는지라 간단히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1969년 3월 15일, 이만 국경수비대의 지휘관 레오노프(Д. В. Леонов) 대령은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 방어진지 후방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제135 차량화소총병 사단 전차대대에서 1개 전차소대를 차출합니다. 이 대대는 T-62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노프 대령은 4대의 T-62 중 545호차를 타고 선두에서 서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군도 아무 생각없이 후방을 비워놓은 것은 아니었고 레오노프 대령은 선두에서 전진하다가 중국군이 얼어붙은 우수리강의 빙판에 구축한 지뢰밭에 걸려서 전차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탈출과정에서 레오노프 대령과 545호차의 장전수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인 레오노프 대령이 전사하자 나머지 세대의 T-62는 퇴각했습니다.

문제는 T-62가 신형전차로 중국군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는 존재였다는 점 입니다. 소련군은 즉시 지뢰밭에 격파되어 방치된 545호차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중국군이 545호차를 견인해가려는 것은 뻔한 것 이었기 때문에 작전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작전은 3월 16일에 실시되어야 했으나 놀랍게도 이날 지방선거가 열려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작전이 연기되었습니다!

소련군의 회수작전은 선거 다음날인 3월 17일 개시되었습니다. 중국군은 소련군의 기동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작전 개시와 함께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해 제13독립 로켓포대대의 BM-21 로켓포와 제378포병연대의 M-30 122mm포 24문과 D-1 152mm포 12문을 동원해 반격했습니다. 이중 제3대대 7, 8포대의 152mm 포는 중국군이 투입한 4대의 ISU-122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소련군의 포격은 효과적이어서 중국군의 ISU-122 한대가 완파되었고 다른 한대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대의 ISU-122는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견인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45호차에 견인 케이블을 연결하려는 과정에서 한명이 전사하고 한명이 부상당한 것 입니다.

견인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군은 그냥 T-62를 폭파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이 너무 적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 폭파시도는 폭약은 충분했으나 전차의 내부에 폭약을 설치하지 않고 전차의 바닥에 놓고 터뜨려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폭약으로 격파하는 것이 두 번 다 실패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보유한 괴물 박격포, 240mm구경의 M-240 2문이 급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240mm 박격포도 별 효과가 없어서 좀 더 정확한 152mm 포를 투입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제378포병연대 8포대 소속의 152mm포 2문이 투입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고폭탄으로 사격했으나 얼음을 깨뜨려 T-62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이를 위해 3월 말 378포병연대 2대대의 122mm포 12문이 동원되어 얼음을 깨뜨려 버립니다. 545호차가 강바닥이 주저앉자 소련측은 작전이 성공이라고 판단하고 4월에 포병부대들을 철수시켜 버립니다. 다만 중국군이 어떻게든 회수하려는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T-62가 가라앉은 지점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기관총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중국군은 위력적인 소련군의 포병이 철수하자 T-62 회수작전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해군 소속의 잠수부들을 차출해서 회수팀에 포함시켰습니다. 중국군은 4월 20일 경부터 먼저 잠수부들을 동원해 545호차의 포탑을 먼저 회수했습니다. 강 건너의 소련군은 기관총으로 중국군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중국군은 10일 내내 근성을 발휘해 매일 밤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잠수부들을 물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2일 야간에 걸처 강바닥에 가라앉은 545호차의 차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데 성공해 전차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근성을 발휘해 꽤 근사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고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베이징에 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도 2008년에 545호차를 보고 중국인들의 근성에 경의를 표한바 있지요.

2011년 8월 7일 일요일

조선족들의 한국전쟁 회고담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회고담 모음집을 읽는 중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시기 중국군 수뇌부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높은 기계화를 두려워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선 병사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공포가 한층 더 강하게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적기의 폭격은 영화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가렬하였다. 하늘은 타래치는 검은 연기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련속적인 폭발소리에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군부대가 마을에 들었다는 소문이 나면 폭격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폭격이 즘즉해지면 서로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 동네는 처참한 정경으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폭격당할 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폭격이 끝나고 보면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중략)

적기의 공습은 수시로 되였다. 우리는 보총, 기관총으로 낮게 뜨는 적기를 쏘아 떨구겠다고 무등 애를 써보았으나 맞을리가 없었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면 폭탄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냈는지 몰랐다.

한번은 아군의 야전병원에 적의 전투기 네대가 날아와 기관포사격을 하고 뒤이어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격하여 우리는 희생자 5명을 내였다. 1차 전역때 남조선에서 참군한 한 전사는 폭격에 목이 거의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선 평안남도에서 참군한 리무석이라는 전사는 두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담가에 눕혀가지고 얼마 안가니 두 다리가 고무풍선처럼 부어나더니 조금 지나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전쟁은 전후방이 없었고 죽는데에도 군대와 백성의 구별이 없었다.

적기의 폭격은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았고 후방에 있는 백성들도 많이 죽었다. 그때 한 전사는 된감기에 걸려 양지쪽 산비탈에 누워서 햇뱇쪼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메터밖에서 터진 포탄파편이 그 전사의 머리를 명중하여 당장에서 즉사하였다. 한 녀성은 아이를 업고 있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는데 적기의 기관포탄알이 그녀의 뒤흉추상부로부터 복부로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업혀있던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의 폭격기편대가 앞에 한대, 뒤에 두대 이렇게 사람인자를 이룬 편대로 되여 날아가면 온 하늘이 떨리였다.

배태환 구술, 「정전전후」,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료녕민족출판사, 2002), 262~265쪽
‘비행기 사냥군조’가 미제의 공중비적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북한 쪽 선전보다는 훨씬 솔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선전목적이 있기 때문에 무용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만 북한쪽의 기록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민군 5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의 증언도 비슷합니다.

며칠후 상급에서는 우리 부대에 남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밤낮 걸어서 락동강반에 이르렀다. 락동강반에 이르니 우리더러 나가보라는 것 이였다. 우리 진지의 포 42문이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적기의 공습에 몽땅 녹아났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강변에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고 땅우에는 피가 질벅하였다. 도하하던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무엇이 전쟁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는 누구나 말 없이 머리를 떨구고 돌아왔다.

김리정 구술, 「청춘도 사랑도 다 바쳐」, 위의 책 184쪽
몇몇 구술은 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지식과 결합해서 군대괴담 수준이긴 한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다른 조선족은 미군의 화력과 장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원전투까지는 인민군과 국방군과의 싸움이였다. 그러나 평택전투부터는 전쟁의 성격이 변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승격하였다. 미국 태평양전선사령부는 팬프리트의 륙전대를 부산에 등륙시켰다. 평택까지 다가든 적들은 땅크와 122미리 대포로 우리와 맞섰다. 그들은 매 한메터에 포탄 하나씩 떨구었다. 미 공군도 B-29폭격기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고 F-48(F-84의 오기인 듯) 전투기는 지면을 누비면서 소사하였다. F-48전투기가 지면을 소사할 때면 매 한메터 사이에 기관포알 하나씩 떨구었다. 적들의 화력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중략)

1950년 8월, 우리는 락동강반의 신반리(경상남도 의령군)까지 쳐들어갔다. 락동강전투는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원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현대화무기를 썼다. 그들은 비행기 폭격을 한 다음 뒤이어 연막탄을 쉬임없이 던졌다. 그러면 옆의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세균무기를 썼다. 그러면 전사들은 세균에 감염되어 설사를 하고 토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또 독가스탄을 썼는데 가스탄이 터진후 반시간 동안은 호흡을 할 수 없었다. 병력이 집중되여 있을만한 곳에는 비행기로 류산탄을 투하했다. 류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했기에 파편 쪼각들이 비오듯 쏟아졌고 그 살상력은 다단하였다. 지금도 나의 머리엔 류산탄 파편 두개가 박혀있다.

(중략)

1951년 3, 4월에 서울을 해방하고 부산까지 쳐들어갈 계획이였으나 적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특히는 적들의 공중우세로 하여 아군은 어쩔수 없었다. 우리 부대가 순천에 있을 때 적들은 운수기로 땅크를 투하하였다. 땅크는 공중에서 발동을 걸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앞으로 달리면서 싸울 수 있었다.

류호정 구술, 「피로 바꾸어온 평화」, 앞의 책 232~236쪽

류호정의 구술은 군사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잘못된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틀린 것이 많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낙동강 전투에 대한 회고 담에서 세균무기와 독가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나 북한측 참전자들이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을 어떻게 사실로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의 창궐은 전쟁터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입된 여러가지 지식이 결합되면 훗날의 기억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낙동강 전투 때 설사병이 돌았었지” → “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했다는군” → “아하.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세균무기를 썼구나”

실제로 구술을 받다 보면 당시의 소문에 불과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점을 고려하면 류호정의 이상한 회고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전차와 같은 미국의 첨단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힌 김진계의 회고록인 『조국』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을 정도로 당시 공산군이 미국의 군사기술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김진계의 회고록에서는 헬리콥터가 고지 정상으로 탱크를 실어 나르죠;;;;;)

체르카시 전투에 대한 걸출한 저작을 낸 군사사가 내쉬(Douglas E. Nash)는 기 사예르의 회록에 대한 논쟁에서 참전자들의 기억에 나타나는 군사지식의 오류문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참전자들의 전쟁 기억은 세부적인, 혹은 전문적인 부분에서 종종 부정확하고 엉터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조선족들의 회고담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보이고 종종 과장된 내용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사창리 전투에 대한 미9군단장 호그 소장의 반응

한국군 6사단은 군사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흥미로운 부대입니다. 한국전쟁 초기 춘천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공훈을 세웠고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는 중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참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우수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습니다.

당시 6사단을 지휘했던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사창리 전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장도영 회고록의 사창리 전투 관련 서술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단은 이날 가급적 속히 중간목표선까지 진출하여 일몰전에 방어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지형상 사창리로부터의 포병지원이 가능한데다, 또 제7연대의 예비선을 전진시켜 23일 초월공격으로 화천-금화 도로상의 수개 요점을 점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22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갑자기 적의 저항이 심하여지며 반격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부득이 일선공격부대들은 진격을 멈추고 각 연대의 진출선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드디어 일몰이 되자 중공군은 새로운 부대로 대거 침공을 개시하여 우리 일선전후에 쇄도하였다. 피아의 공방전은 밤이 되면서 더욱 더 치열해졌다. 자정이 되자 적의 새로운 대부대가 포격을 증가시키며 파상공격을 계속해 왔고, 또 다른 부대들은 전에 없던 기병대와 혼성하여 사단 전구 후방에 침투, 각 지휘소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방어진지에서 이탈하여 공격 전진 중에 적의 대부대의 공격을 받은 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일선을 전날의 공격출발선까지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예비 7연대도 역시 전진하여 일몰전까지 방어에 들어가 사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밤에 사창리 예비진지로 후퇴하였다.

23일 새벽까지 공방전을 계속하는 동안 적의 새로운 대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계속 남하하였으며, 여명시에는 이미 우리 전선 후방 깊숙이 진출하였다. 사단은 부득이 주력을 사창리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예비 7연대는 다시 38선 일대의 진지를 점령케 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24일에도 역시 적은 계속하여 우리 일선부대와 교전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우리 후방으로 우회 포위하고 또 다른 부대들로 깊숙이 남하하여 우리 후방 요지들을 점거하는 작전을 반복하였다. 우리 사단은 중공군 제20군 소속 제58, 59, 60사단, 그리고 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 이었다. 25일에 이르러 우리는 가평북방까지 철수하여 방어선을 확보하고 국부적으로 반격을 감행하여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적의 진격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1)

장도영의 회고록에서는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다소 축소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잘 아시다 시피 사창리 전투는 6사단이 경험한 패배 중 가장 황당한 패배였습니다. 사창리 전투 직후 6사단이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황당하지요. 6사단의 패주는 군단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27여단이 투입되어 겨우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 공간사는 6사단의 패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4월 22일 오후, 한국군 6사단은 제19연대를 좌익에, 제2연대를 우익에 두고 와이오밍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대보다 3마일 정도 앞선 차량화수색대는 적과 접촉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 제9군단의 포병 관측기가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적이 남진하는 것을 포착하여 적의 접근을 알렸으며 이 소식은 제8군의 전선 전체에 전달되었다.

한국군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1600경 선두의 두 연대를 정지시키고 두 연대의 전투지경선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좋은 지역이었던 인접한 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도영 준장은 제7연대를 제2연대 뒤에 배치했다. 한국군 6사단은 날이 밝는대로 종심 5마일의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도영 준장은 지원부대로 6사단 포병대대외에 제16 뉴질랜드 야전포병연대(대대급)와 미군의 4.2인치 박격포 1개 중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미 9군단의 155mm 야포 1개 대대와 105mm 야포 4개 포대가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날이 지자 한국군 6사단은 사단 및 군단 지휘소의 지도에 표시된 진지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도영 준장이나 6사단 사령부의 참모들이 각 연대의 구역을 직접 시찰했다면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질 않았다. 방어진지로 재전개 하는 것이 매우 느렸고 사격 진지는 진창이었다. 야간 방어 전투에 필요한 많은 장비들이 산 아래에 있긴 했지만, 초급 장교와 부사관, 사병들은 꾸물거렸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가 코앞에 닥쳤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부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군 장교들 중 상당수가 특별한 기준 없이 선발되었고 훈련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에는 불출분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몰 후 대략 한시간이 지나자 중국군 제60사의 선두 연대가 공격 준비사격이나 다른 공격 조짐도 보이지 않은채 갑자기 한국군 제2연대의 최전방 대대를 휩쓸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제2연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중국군의 두 번째 연대가 나타나 (2연대의) 예비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저항은 약간의 간헐적인 소화기 사격에 그쳤다. 제19연대는 왜 사격을 하는 건지 물어본 뒤에야 제2연대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제2연대의 생존자들과 제19연대 전체가 방어진지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무기와 장비도 모조리 버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보다 신중한 이들은 장비와 탄약, 무전기는 챙겨서 후퇴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장비가 유기되었다. 제7연대는 제2연대의 패잔병들 때문에 비상이 걸려 2200에서 2230사이에 황급히 방어선에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7연대도 패주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뉴질랜드군의 포대는 한국군 6사단 구역에 관측소를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화력지원본부(fire support center)를 통해 목표를 지정받아야 했다. 한국군의 전방포병관측요원들도 도주하는 보병들과 함께 달아났기 때문에 미군과 뉴질랜드군 포병들은 화력지원요청을 받지 못했다. 한국군의 포병 진지들은 총퇴각의 와중에 모두 버려졌다.

2230 경 군사고문관 한 명이 뉴질랜드군의 지휘소에 한국군의 전방에 배치된 2개 연대가 공격을 받아 5km 정도 퇴각했다고 알려왔다. 한시간 반 뒤 한국군 6사단 사령부도 예하 연대와의 연락이 모두 두절되었다고 알렸다. 이 무렵 소규모의 한국군 병사들이 뉴질랜드군의 포진지를 지나쳐 가평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도망쳤다. 23일 0100 무렵이 되자 이 길은 수많은 패잔병들로 가득 메워졌다.

다행히도 한국군은 적군보다 훨씬 앞서 도망치고 있었다.(Fortunately, they had outpaced their foe.)2)

미육군 공간사인 Ebb and Flow에서는 사창리의 패전을 무미건조하게 사실 위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영국군 공간사는 살짝 시니컬하게 쓰고 있어 한국사람을 무안하게 하지요;;;;3)  6사단 부사단장 이었던 임부택 대령은 사창리 전투 당시 6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간신히 귀환할 정도로 6사단의 혼란은 심각했습니다.4)  다행히도 중국군은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반격에 직면해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만 한국군의 정예부대였던 6사단은 체면을 있는대로 다 구기죠.

사창리 전투에서 제6사단과 배속된 부대가 상실한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5)


한국군 제6사단과 배속부대의 장비 손실(1951. 4. 22~23)
한국군 제6사단
6사단 배속부대
75mm 야포
6
105mm 야포
8
15
M1 소총
2,353
카빈
852
BAR
85
중기관총
45
경기관총
43
기관단총
72
권총
45
60mm 박격포
37
81mm 박격포
7
4.2인치 박격포
7
3/4톤 트럭
11
11
1/4톤 트럭
22
27
2½톤 트럭
17
22
도요타 트럭
23
닛산 트럭
13


장도영의 회고록에는 호그 소장의 질책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참패를 겪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을 리가 없지요. 6사단의 어처구니 없는 패배뒤에 미 제9군단장 호그(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 준장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장도영 장군에게,

이 서한은 귀하가 1951년 4월 25일 귀하의 사단의 상태와 현황을 보고한 서한에 대한 답장이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 스러운 것이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측의 지원부대들 까지 유린되게 했소. 이 때문에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소.

제7연대도 나을 것이 없소. 제7연대는 예비대로서 공격을 감행해 제2연대가 잃어버린 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 공격을 실시했다면 성공했을 것이 분명하고 다른 부대들의 와해를 막는 한편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오. 제7연대는 이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대신 후방으로 달아났고 연대의 일부 병력이 23일 오전 수마일 후방에서 재집결했을 뿐이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소. 적군이 초기의 성공을 확대했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오. 아군이 적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적군이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군 6사단의 패배로 인한 이점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지휘력과 통제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위 제대의 부사관과 장교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러한 혼란은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하는 것이오.

상위 제대의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 단계에 해당 구역에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패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위제대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오.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 연대장과 그 이하의 지휘관들은 부대의 훈련과 규율 유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과거에 이러한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고 이러한 긴급 상황에서 공격적인 지휘력을 발휘할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패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 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소.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소.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 정말 유감이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 날 것이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8군의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하는 바이오.6)

그리고 호그 소장은 5월 2일에는 제8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도 보냈습니다.

1951년 4월 22일의 적 공세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군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현재까지의 정보로는 1951년 4월 22일 공세 당시 적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한국군 6사단 보다 열세했습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않아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와해되어 이렇다할 저항도 하지 않은채 혼란에 빠져 패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내버려두고 도망치면서 우리측 지원부대들 마저 유린되게 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제7연대는 명령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제7연대 또한 혼란에 빠져 후방으로 패주했습니다. 4월 23일 오전 한국군 제6사단장은 사단의 병력이 대략 3,000명 정도라고 파악했습니다. (6사단 예하) 연대들이 패주, 와해된 것은 도데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모든 측면에서 불명예스럽습니다. 4월 23일, 재편성된 사단의 잔여 병력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다시 방어진지를 버렸으며 지원부대들을 뒤로 하고 후방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군 6사단을 와해시킨 공격은 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제27여단 소속의 약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한국군 6사단에 소속된 분대에서 연대에 이르는 모든 부대들이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혼란에 빠져 와해된 상태로 퇴각한 것이나 무기와 장비를 내팽개쳐 적이 노획하도록 한 사실은 모든 계급의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부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의견 : 본인은 한국군 제6사단의 패주는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공격적인 지휘력을 결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위 제대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사단 내에 제5열이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문을 퍼트리는 병사는 순식간에 공황과 혼란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의심과 공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제안 : 모든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지휘관은 책임을 가지며 이것은 부하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이란 부하들의 훈련, 군기 유지, 그리고 복지라는 기초적인 원칙을 철저히 숙달시켜야 합니다.7)

여기서 호그 소장은 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패전할 경우 단골로 지적되는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문제이지요. 다행히도 장도영과 6사단은 얼마 안되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쉬운 것은 사창리 전투의 패배만 없었다면 제6사단은 전설적인 부대로 남을 수 있었다는 점 입니다.



1) 장도영, 『望鄕』(숲속의 꿈, 2001), 215~216쪽
2) Anthony Farrar-Hockley,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Vol.II : An Honourable Discharge(HMSO, 1995), pp.139~140
3) 미육군 공간사의 사창리 전투 서술은 Billy C. Mossman, Ebb and Flow(USGPO, 1990), pp.381~385를 참고하십시오.
4) 林富澤, 『洛東江에서 楚山까지』(그루터기, 1996), 375쪽
5) 6th ROK Division(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6) From Major General W. M. Hoge to Brigadier General Chang Do Young(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7) IXCCG76,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2010년 11월 21일 일요일

진명행(무명)은 어떤식으로 사기를 치는가?

제 블로그에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은 2년 전에 진명행이라는 블로거가 국공내전에 10만명의 북한군이 참전했다는 주장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논쟁이 심해져서 결국 난장판이 됐는데 나중에는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쓰겠다고 하고는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 지워버렸지요. 하여튼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쓴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2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새로 옮긴 블로그에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올렸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 뿐이라 김이 새긴 합니다만 2년전에 지적하지 못한 오류들이나 지적해 보지요.

먼저 진명행이 북한군의 국공내전 참전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들고 나온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조선인민군 총정치국, 1950)을 살펴보지요. 진명행-무명이 저보고 글을 잘라서 왜곡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을 해대니 진명행의 원 글을 통짜로 올리겠습니다.


누르시면 커집니다

 진명행은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당이라는 용어가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그럴리가 있나요. 이건 전형적인 진명행-무명의 사기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왜나하면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은 북한측이 중국공산당의 문헌을 번역한 자료집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는 세 편의 번역글이 실려있습니다.

1. 자위 전쟁으로써 장개석의 진공을 전승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지시
2. 적을 각개 섬멸할데 관한 지시 :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1946 8 16
3. 중공중앙 1948 7, 8, 9 삼개월간의 경험에 관한 총결

글 세편 모두 성주체가 중국 공산당이죠. 한마디로 진명행-무명은 중국공산당을 지칭하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예시를 조금 들어볼까요.


상식적으로 중공중앙이 작성한 문건에 나와있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으로 읽는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진명행-무명은 작성주체는 살짝 잘라먹고 저걸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죠.

궁금하신 분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제공하고 있으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짧은 팜플렛이니 금방 읽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인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진명행의 추종자들은 눈꼽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쯤되면 사이비 교주가 따로없죠;;;;

사실 외국어자료를 왜곡하는 것이야 외국어를 모르는 분들도 있으니 통할 수 있겠지만 한글로 된 자료까지 잘라서 왜곡하다니 진명행의 사기치는 방식은 참 조잡하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냥 '중국내전에 관한 제문헌'만 치면 나옵니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미국 공군에 대한 어떤 평가

팽덕회는 한국전쟁 참전 직전 사단급 이상 주요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미국 공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합니다.

미 공군은 비록 조선에 [항공기를] 많이 투입하고 있지는 않음에도 우세하다. 그러나 공군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공군은 나름대로의 곤란한 점이 있다. 또한 공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존재도 아니다.

‘在中人民解放军师以上干部动员大会上的讲话’(1950. 10. 14), 彭德怀军事文选(中央文献出版社, 1988), p.323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남베트남군 보병사단의 편성문제(1955~56)

얼마전 1950년대 베트남군 지원을 다룬 미육군의 공간사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 베트남공화국(이하 남베트남) 군대의 편성문제였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베트남화~남베트남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보니 베트남전쟁 초기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남베트남군의 초기 보병사단편제는 약간 의외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결과 1955년 남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미국 군사고문단(MAAG,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예산상의 문제로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하려 했습니다. 이때 미국 쪽에서 군대를 감축하기 위해 6천명의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풍부한 고참 부사관을 일거에 전역시키기도 했는데 이건 나중에 미국의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지요. 어쨌든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베트남군을 10개 사단 15만명으로 증강시킨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 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크레핀비치(Andrew F. Krepinevich, Jr)의 단행본에서는 초기 남베트남군의 사단 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에 북베트남과 중국 등의 전면공격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1)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베트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포병연대를 가진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한국군도 전쟁의 경험으로 사단포병을 연대급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규전을 염두에둔 편제라면 당연히 이런 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육군 공간사를 읽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더군요. 1956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편제는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에 더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먼저 정규전 수행을 고려한 4개 야전사단은 편제상 병력 8,500명에 3개 보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대대’와 중대급 지원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급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38선에 배치된 한국군 보병사단과 유사한 구조지요. 그리고 6개의 경보병사단은 사단포병 없이 3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되었습니다.
물론 사단단위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군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한국국전쟁 직전의 한국군 편제 보다는 훨씬 나은 편제였습니다. 연대 단위에서는 오히려 미군의 편제 보다도 나은 부분이 있더군요. BAR는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50% 많았고 81mm 박격포는 3분의 1이상 많았습니다. 경보병사단은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경기관총은 30% 더 많았고 BAR는 10% 더 많았습니다.2)  사단급 화력의 부족을 연대급 이하의 화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메꾸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창군 초기 남베트남군대의 보급이나 전투지원능력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물론 경우에 따라 중국군과의 정규전도 고려했다는 편제치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편제입니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가 한국의 경제사정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적당한 편제였을지 몰라도 정규전에는 부적합한 편제였지요.

크레핀비치의 저작에 남베트남군의 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있었다면 오해가 없었을 텐데 이점이 아쉽군요. 어쨌든 늦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Andrew F. Krepinevich, Jr, The Army and Vietna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2
2) Ronald H. Spector,  Advice and Support, The Early Years(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3), pp.262~268

2010년 8월 3일 화요일

썰렁한 이야기 하나

1987년에 나온 구판 항미원조전사(抗美援朝戰史)의 부록에 있는 사상자 통계를 다시 보니 꽤흥미롭더군요. 처음 읽었을 때는 허풍이 좀 세다 싶었는데 다시 읽으니 허풍을 떠는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주 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판 항미원조전사에서는 중국군이 1951년 4월 22일 부터 6월 10일까지 계속된 5차 전역에서 미군 31,926명을 살상하고 포로 958명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많은분들이 아시겠지만 실제 이 기간 동안 미군이 입은 손실은 중국이 주장하는 것 처럼 많지 않습니다. 미국쪽에서는 중국의 5차 전역을 두개의 중국군 공세와 미군의 반격작전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4월 22일 부터 29일까지를 중국군의 1차 춘계공세로, 5월 17일 부터 22일 까지를 중국군의 2차 춘계공세로 구분하고 이 외에 5월 16일 부터 20일까지의 소양강전투, 5월 20일 부터 6월 8일 까지의 데터네이트(Detonate) 작전, 6월 3일 부터 6월 12일 까지의 파일드라이버(Piledriver) 작전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미군의 사상자는 대략 이렇습니다.

중국군 1차 춘계공세 : 전사 314, 부상 1,600
소양강전투 : 전사 406, 부상 ?
중국군 2차 춘계공세 : 전사 333, 부상 888
데터네이트작전 : 전사 530, 부상 3,195
파일드라이버작전 : 전사 231, 부상 1,787

유감스럽게도 제가 참고한 자료에는 소양강전투 당시 미2사단의 부상자 통계가 빠져있는데 이걸 제외하고 합산하면 중국군의 5차전역 당시 미군의 손실은 전사 1,814명, 부상 7,470+α 가 됩니다. 대략 1만명 내외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인데 중국측의 주장과 비교하면 대략 1/3 정도입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국측은 약 8만5천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비교하려면 여기서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빼야 하는데 자료가 없어서 조금 어렵군요.

이상 알맹이 없는 썰렁한 이야기 끝.

2010년 4월 4일 일요일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의 대전차전투 사례 하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을 정리해놓은 『승리』라는 책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말단 사병에서 간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계급의 회고담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그중 북평전투 당시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 군의 포위망 돌파를 대전차팀으로 격퇴하는 내용이 하나 있어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제가 보기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949년 1월 14일, 인민해방군 모 부 제3영(대대)의 전사들은 북평시 광안문 밖의 곽공장 재묘신 일선에서 북평시안에 포위된 적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지초 단장은 적들이 풍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증원한 다음 당고를 거쳐 남쪽으로 뺑소니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3영 지휘부에 전화로 알린 다음 다른 부대와 배합작전하여 풍대를 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단장은 적들의 땅크를 까부시기 위하여 로케트발신관(바주카포)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도원 마부증은 지휘소에 있다가 9련 진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련은 조선족들이 비교적 많은 련이었다. 9련의 진지는 재묘신에 있었다. 북평으로 부터 풍대로 가는 신작로가 재묘신의 옆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을 잘 지키면 적들은 천진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어두움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패(排, 소대)의 전사들은 괭이로 대피호를 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힘차게 괭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조선인 전사 리윤태였다. 교도원은 리윤태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마디 던졌다.

"땅이 대단히 얼었군."

"그래도 우릴 당해내지 못하지요."

리윤태는 괭이끝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비벼 떨구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한창 궁금해 있는데 전사들 앞에 교도원이 나타났으니 물어볼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욱- 모여들었다.

" 교도원 동지, 담판을 한다던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적들이 투항 했습니까?"

어둑시근한 곳에서 서툰 한어로 한 전사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교도원은 "적들은 투항은 고사하고 풍내를 탈취한 다음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적의 이러한 동태를 전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망을 친다! 놈들은 꿈을 꾸고 있구만."

"내 생각 같아선 담판이고 무엇이고 걷어치우고 답새겨야 해(때려야 해)."

교도원이 1패의 작업현장을 떠나 9련 련부에 이르자 리윤태가 따라왔다. 그의 뒤에는 조선인전사 박현길이 따랐다. 리윤태가 교도원을 보고 청을 했다.

"교도원 동지,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땅크를?" 교도원의 반문이다.

" 그렇습니다" 하고 리윤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적의 땅크가 우리의 엄폐호를 파괴할 뻔 했습니다. 놈들의 위풍을 꺾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리윤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군한지 오래서 로전사들처럼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였다. 교도원이 리윤태, 박현길에게 단부에서 이미 로케트발신관을 발급했으며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꼭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무척 기쁜 심정이였다.

15일 이른 새벽이다. 자욱한 안개가 넓은 벌을 뒤덮었다. 적들은 옹근 하루동안 준비하더니 또 발악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광안문 안에서 련이어 3영 진지로 날아와 터졌다. 약 10분 가량 발광적으로 포를 쏘아대더니 뒤이어 땅크를 내몰았다.

로케트발신관 반장 진봉상은 로케트 발신관으로 땅크를 겨누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땅크가 신작로 굽인돌이(커브길)에 나타났다. 진봉상의 로케트발신관 아구리에서 "씽" 하고 불줄기가 뻗어나갔다. 땅크의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땅크는 신작로에 박힌채 꼼짝 못했다.

"명중이다, 명중이다."

전사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적의 땅크 웃뚜껑이 열리더니 한놈이 상반신을 내밀다가 리윤태의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적은 그래도 전진을 중지하지 않았다. 아군의 화력권안에 기여든 적을 발견하자 9련 련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각종 무기가 적들을 향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아군의 포탄들도 수구자와 련꽃못쪽 적진지를 향해 연거퍼 날아갔다.

3영의 정면에는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적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적들은 9련 1패 리윤태네 앞까지 접근하였다. 전사들에게는 반땅크 무기가 없었다. 사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때 리윤태와 박현길이 교도원에게 달려갔다.

"교도원 동지, 제가 가서 저 땅크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윤태의 손에는 수류탄묶음이 쥐여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무들은 잠시 저 작은 다리에 가서 엄폐하고 있으면서 저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시오!"

교도원의 말이 끝나자 리윤태와 박현길은 탄우를 맞받아 다리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적의 땅크도 거의 다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앞에서 오던 땅크가 다리우에 오르자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만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연기가 흩어지자 그놈의 땅크는 계속 이쪽으로 움직였다. 리윤태와 박현길은 어느사이에 땅크 우에 올라섰다. 리윤태가 땅크 웃뚜껑을 열다가 박현길과 함께 땅크에서 떨어졌다.
적의 땅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마구 갈기면서 덮쳐왔다. 두번째 땅크도 다리를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리윤태는 힘겹게 첫번째 땅크 뒤로 부터 기여오고 있었다. 적탄은 사정없이 그의 앞뒤에 박혔다. 그의 솜옷에서 솜이 삐죽삐죽 나왔다. 그는 계속 기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땅크 우로 올라갔다.
갑자기 첫번째 땅크에서 불기둥이 일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땅크는 폭파되어 불덩이로 변했다. 뒤따라 오던 땅크와 장갑차는 앞길이 막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였다.

비록 적들의 땅크는 길이 막혔으나 적의 보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제1패 진지앞에 덮쳐들었다. 7련과 8련도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 이때 단부에서는 1련을 보내왔다. 1련은 오른켠에 있는 개천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덮쳐오는 적들의 길을 차단하였다. 앞의 놈들이 물러가지 못하자 뒤의 놈들도 전진할 수 없게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대포가 노호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들이 적의 땅크무리에,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 속에서 터졌다.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돌격이다. 전사들은 엄폐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하면서 도망치는 적을 족쳤다. 적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사들은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잔뜩 메고 진지로 돌아왔다.

지휘원과 전사들은 리윤태와 박현길이 보이지 않아 속을 태웠다. 진지에서 떨어져 있는 몇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창 안타깝게 찾고 있는데 리윤태와 박현길이 서루 부축하고 쩔룩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다리를 상했다. 특히 리윤태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의 솜바지가 선지피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심한 동통으로 해서 얼굴은 해쓱해졌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었고 머리칼은 새노랗게 그을었다. 교도원이 그의 앞에 다가오자 리윤태는 신작로에 박혀있는 땅크와 늘어져있는 적들의 주검을 가리키며 힘겹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다.

" 교도원동지, 보십시오. 적들은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녁노을은 마치 래일의 맑은 날씨를 알려주기나 하듯 서켠 온 하늘을 피빚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진해방소식이 날아왔다. 북평성 안에 포위된 적들의 환상이 부서졌다.

1949 년 1월 16일,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의 북평수비사령 부작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였다. 아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 밑에 부작의는 저항을 그만둘 결심을 내렸고 북평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조선족역사족적 편집위원회편,『승리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5』 (北京, 민족출판사, 1992), 637~640쪽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장비 부족을 반영하는 것인지 바주카포 팀을 단(연대)에서 예하 부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바주카포는 연대급 단위로 운용되고 있고 소대 단위에서는 변변한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게 안습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군이 공여한 M5 같은 경전차들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국민당군의 전차 종류를 명시하고 있지 않아 아쉽군요. 결국 리윤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전차에 대해 집속수류탄을 사용한 육박공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속수류탄은 1차대전 부터 사용된 꽤 유서깊은(???) 대전차 무기죠. 본문에서 리윤태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병 개개인의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력 타령만 하면 곤란하겠습니다만.

국공내전기의 대전차 전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꽤 재미있는 글 입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가 기대되는군요

北京で建国60年軍事パレードの予行演習

이번 10월 1일은 중국 건국 60주년이지요.

지난 6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전차와 자주포를 동원한 대규모 예행연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이었던 2007년에 베이징에 놀러가서 99식 전차를 구경한 뒤로 인민해방군의 기갑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지라 이번 행사가 꽤 기대됩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 전차처럼 위용을 과시하는데 적당한 장비는 드물지요.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관대한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의 관대함(???)을 엿볼수 있는 일화 하나입니다.

기묘하게도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대부에 동의한 뒤 중국이 이것을 환불하는 문제와 환불 방법에 대한 문제는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환은 이루어 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기 도입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했으나 어떤 경우에는 스탈린이 그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스탈린은 중국이 인민군 2개 사단(1950년 초 북한군에 합류한 2개의 조선계 사단과는 별도로)에 장비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련이 전쟁 중 공급했던 64개 사단 분량의 장비 가격 중 20개 사단 분의 가격을 면제해 주었다. 중국은 나머지 무기에 대한 비용은 분할해서 지급했다. 모든 차관은 연간 10억 위안의 비율로 상환되어 1965년 말에는 모두 청산되었다.

중국 공군의 항공기들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4월 21일)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그 후 인민해방군은 (총 22개 중) 10개 전투기사단을 교대로 전쟁에 투입했다. 초기에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군의 장비에 MiG-15가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는 MiG-9 전투기만을 판매하는데 동의했다. 중국측이 구식인 MiG-9 전투기는 미군의 최신예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침내 스탈린에게 까지 알려지자 스탈린은 중국에게 372대의 MiG-15를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사실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땜빵 포스팅입니다.;;;;;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 - 김태우

국내의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한 양이 축적되어 있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기원과 발발과정, 또는 휴전과정과 그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대부분은 전쟁기의 학살, 피난민 문제 등 사회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본격적인 군사사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흥미로운 민간 연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문제에 대한 반론

이젠 배가 산 꼭대기로 올라간 느낌이지만 진명행님의 반론이 있었으니 거기에 대한 답을 할까 합니다. 진명행님의 반론은 지난번 글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1. ISNK nr.28에 대한 반론

진명행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논점흐리기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 문제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지 미군이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아니었거든요. 제가 지적한 문제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진명행님의 블로그에서 캡쳐한 아래 부분을 보시지요.


진명행님은 이상하게도 저의 핵심 주장이 담긴 윗 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있습니다. 굳이 반론을 하고 싶으시다면 아래와 같이 잘라야 정상이죠.


앞으로 계속되는 진명행님의 비난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제가 원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의 문제점은 비켜가고 엉뚱하게 미군의 분석으로 이야기를 돌리고 있습니다.


2. ISNK nr.30에 대한 반론

저는 진명행님이 이 글을 언급하시기에 그 동안 쭉 해왔던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가 nr.30을 오역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반론글을 보시죠.


아니. 제 해석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해석이 틀리지 않았으니 이 부분은 어물쩡 넘어가고 엉뚱한 꼬투리를 잡아 비난을 하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 해석이 틀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실토하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분은 처음 봅니다.;;;;

다음으로, 제가 고의적으로 뒷 문장을 잘라내 내용 왜곡을 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저는 고의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아님의 글 “다른 해석의 가망성”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뒤의 문장 “A 2,000,000 man goal was evidently intended as propaganda since both soviet and peoples Committee officials have stated privatelly that an army of 500,000 was the actual goal”을 언급했습니다.


이 문장을 은폐할 거라면 왜 다른 분의 블로그에 가서 이 이야기를 꺼냅니까? 저는 그런 한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본문에 넣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똑같은 신뢰성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진명행님은 북한이 이미 1947년 초에 50만을 징병하려 했다는 것은 믿으십니까?

그나 저나 진명행님께서는 그 동안 제가 ISNK nr.30을 오역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시더니 이제는 아무 해명도 없이 저와 같은 해석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제게 했던 공갈은 다 거짓말 이었군요.

궁금한 것이 진명행님께서는 예전에 ISNK를 읽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오역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 입니까? ISNK를 읽었다면 오역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예전에 읽었다는 것도 거짓말 입니까?


3. ISNK nr.35에 대한 반론


아니. 결국 또 원점으로 돌아오는 군요. 이미 1947년에 훈련병을 포함해 125,000명이 있었다면 왜 1949년 여름까지도 북한군 병력이 8만 수준밖에 안 됐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ISNK의 내용을 ISNK로 검증합니까?


4. ISNK nr.36에 대한 반론


별표까지 쳐 놓은걸 보니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아주 기쁘셨던 모양입니다. 이 부분에서 진명행님께서는 1947년 5월에 제8종대 소속의 22, 23, 24사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진명행님의 글에 댓글로 지적했듯 제8종대는 1947년 8월에서 9월에 걸친 부대개편 기간 동안에 편성되었습니다. 5월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부대를 억지로 가져다 맞추시는군요. 그리고 Column을 어떻게 종대로 해석하냐고 하시는데 ISNK nr.36에 나오는 23rd Column에 대한 설명을 보지요.

23rd Column – This unit has been held mainly in reserve. It is up to its full strength of 90,000 and is at present engaged in training and rear area guard duty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병력이 90,000명이나 되는 사가 있습니까? 저런 문장이 나온다면 보다 상위 제대인 종대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1947년 5월 동북민주연군에는 병단(兵团)이나 군(军)급 편제가 없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다시 제8종대의 실재 여부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먼저 중국국방대학에서 출간한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解放军出版社,1983/2003)의 부록에 실린 1947년 6월 당시 동북민주연군의 전투서열에는 소속 부대가 다음과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종대 - 1종대, 2종대, 3종대, 4종대, 6종대
동북민주연군 직할사 - 독립1사, 독립2사, 독립3사, 독립4사
동북민주연군 직할대 - 기병사령부, 포병사령부

ISNK nr.36이 나오고 한달이 지난 뒤에도 제8종대는 편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张明金, 赵功德의 『中国人民解放军 历史上 70个军』(解放军文艺出版社, 2006), 328쪽에 따르면 제8종대는 7, 9, 10종대와 함께 1947년 8~9월에 걸쳐 편성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으니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진명행님은 바로 삭제하더군요. 이유는 본인의 마음이랍니다.;;;;;;


어쨌건 제가 위와 같이 반론을 달았더니 진명행님 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셨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시는군요. 그런데 진명행님 본인의 블로그에서는 제 댓글을 삭제하고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다시더군요.


그것 참.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게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겠다는 것 이었습니까.;;;;; 진명행님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입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