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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6일 화요일

The Defeat of the Damned

 무장친위대의 딜레방어 여단은 전쟁범죄로 유명한 부대입니다. 많은 무장친위대 부대가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악명에 견줄 수 있는 부대는 없습니다. 워낙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형편없는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의 부대사가 몇권 나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온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군사적으로 무가치한 부대는 관심이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미국의 저명한 군사사학자 내쉬(Douglas E. Nash sr.)가 딜레방어 여단 부대사를 쓴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금 놀랐습니다. 어째서 이런 저명한 군사사학자가 딜레방어 여단 같이 형편없는 범죄조직의 부대사를 쓰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쉬가 집필한 The Defeat of the Damned : The Destruction of the Dirlewanger Brigade at the Battle of Ipolysag, December 1944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1944년 말 헝가리의 이포이샤그(Ipolyság)에서 벌어진 전투에 초점을 맞춘 연구입니다.(Ipolyság 현재 슬로바키아의 도시 Šahy가 되어 있습니다.) 내쉬는 무장친위대 제4기갑군단의 역사를 다룬 3부작 From the Realm of a Dying Sun을 집필하던 중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딜레방어 여단의 부대사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이포이샤그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체 15개 장 중에서 11개 장이 이포이샤 전투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결론을 제외한 3개 장이 딜레방어 여단의 창설, 성장과정, 종전에 이르기 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는 이펠(Ipeľ, 헝가리어로는 이포이Ipoly)강을 접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가는 주요 도로 중 하나가 이 곳을 지나갑니다. 이런 지리적 입지 때문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전쟁에서 요충지로 인식됐습니다. 이때문에 1944년에도 이 도시는 격전지가 됩니다.

 이포이샤그 전투는 1944년 12월 14일 소련군 제9근위기계화군단이 이포이샤그를 점령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12월 15일 부터 독일군이 감행한 역습입니다. 12월 15일 전투에는 딜레방어 여단이 포함된 린텔렌(Rintelen) 사단집단이 주공을 맡았으나 소련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은 제357보병사단의 잔존병력에 딜레방어 여단, 헝가리군 등 다양한 부대를 배속시킨 임시부대였습니다. 이 임시 부대는 제357보병사단장 요제프 린텔렌(Josef Rintelen) 장군의 이름을 따와서 린텔렌 사단집단으로 불렸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의 패배로 소련군의 전력이 상당히 강하다는걸 파악한 독일군은 제8기갑사단을 이포이샤그 지구로 이동시켜 반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제8기갑사단의 반격도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이포이샤그 지구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포이샤그 전투 당시 딜레방어 여단의 형편없는 작전 수행을 매우 세밀하게 재구성 했습니다. 이 부대의 전투력이 엉망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범죄자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정치범들로 구성되어 병사들의 전투 의지가 낮았고, 지휘관들은 후방에서 치안유지와 학살을 하던 인물들이었으며 보유한 장비도 그에 맞게 잡다한 구식 무기 위주였습니다. 린텔렌 사단집단에 배속된 뒤에는 다른 부대들의 중화기 지원을 받을 수 있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형편없는 전투력을 단기간에 개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포이샤그 전투에서 딜레방어 여단의 많은 병사들이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않고 도주하거나 소련군에 투항했습니다.

 1944년 12월 헝가리 전역을 다루는 연구는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수가 독일 기갑사단의 작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내쉬의 연구는 독일군 내에서도 전투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보병 부대가 중요한 작전에 투입되어 와해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포이샤그 전투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만 읽었는데, 이렇게 상세하게 작전 경과를 분석한 연구가 나와서 반갑습니다. 

 

※유튜브의 WW2TV 채널에 내쉬가 Ipolysag 전투에 대해 설명한 동영상도 올라와 있습니다.

(258) Dirlewanger Brigade and the Battle of Ipolysag - YouTube


2024년 1월 1일 월요일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 관한 사료집이 나옵니다

 Generaloberst Friedrich Fromm: Diensttagebuch beim Chef der Heeresrüstung und Befehlshaber des Ersatzheeres 1938–1943 – Ein Dokument aus dem Zentrum der deutschen Kriegsrüstung | Brill


 2024년에 새로 나오는 책이 뭐가 있는가 살펴보다 보니 흥미로운 책이 하나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보충군(Ersatzheer)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 관련된 사료를 엮은 사료집이 나오는군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프롬 상급대장이 직접 작성한 기록을 엮은 사료집으로 전시 동원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수록된 걸로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사료집입니다만....


 가격이 무려 700유로에 달하는군요. 한국 돈으로 100만원에 달하는 가격이라서 개인이 소장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저도 이거는 못 사겠네요. 대한민국의 공공도서관에서는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입니다. 그래도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곳에 신청은 해보는게 좋겠네요.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Ben Wheatley 저,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

 결론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벤 휘틀리(Ben Wheatley)의 The Panzers of Prokhorovka : The Myth of Hitler's Greatest Armoured Defeat는 제가 2023년에 읽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 중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1990년대에 칼 하인츠 프리저의 선구적인 연구가 발표된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서술도 상당 부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틀리의 이 연구는 새로운 사료를 활용해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기존에 발표한 연구들을 보완한 것 입니다. 예를들어 프로호롭카 일대의 항공사진을 분석한 연구는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라는 제목으로 2019년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에 실렸습니다.

 이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새로운 사료 발굴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그중에서도 프로호롭카 전투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휘틀리는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해 이런 선입견이 틀렸다는걸 입증했습니다. 휘틀리의 업적 중 특히 중요한 건 그동안 사료의 공백 이었던 1943년 7월 20일 부터 1943년 8월 1일 까지 독일측의 기갑차량 통계를 입증한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실상이 드러난 뒤 이 시기의 사료가 공백상태라는 점을 들어 독일측이 실제 손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물론 이건 러시아쪽에서 불리한 사실이 드러날 때 마다 내놓는 상투적인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휘틀리의 연구로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러시아측의 주장은 또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저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분석했을 때 1943년 7월 11일 부터 7월 20일까지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 손실은 '최대 16대'이며 치타델레 작전 전 기간을 포함한 손실은 '41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측 1차 사료의 성격을 분석한 1장이 매우 중요하니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군 각 사단의 차량 '차대번호' 까지 확인하는 철저한 분석으로 연구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개별 차량의 차대번호까지 확인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 러시아쪽이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러시아쪽에서는 휘틀리의 연구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죠.

 통계 분석 뿐만 아니라 항공사진을 활용한 전투 분석도 매우 훌륭합니다. 저자는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한 제4장에서 항공사진을 구술자료 및 문헌자료와 교차 검증해 전투를 미시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휘틀리는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은 핵심적인 요인은 독일군의 진격에 당황한 소련군이 충분한 정찰 및 정보수집 없이 역습을 감행한 데 있다고 봅니다. 이때문에 소련 제5근위전차군은 소련군이 구축한 대전차호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돌격하다가 공황상태에 빠져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물론 휘틀리는 소련군이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승리'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도 숫적으로는 여전히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소련군이 많은 수의 대전차포와 야포로 방어를 하고 있어 독일군의 진격이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 연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하리코프(하르키우) 함락 이후 시작된 독일군의 전략적인 후퇴와 이에 따른 기갑전력의 소모 문제입니다. 휘틀리는 1943년 8월 까지는 독일군이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작전가능 상태로 되돌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기갑전력의 손실이 크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리코프를 상실한 뒤 계속해서 철수를 하게 되면서 손상을 입은 전차를 회수해 수리하는게 어려워졌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독일 본토로 후송한 전차를 수리해서 복귀시키는 것 또한 독일 국내의 인프라 부족(대형 크레인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제6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휘틀리는 무장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기갑차량들은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수가 남아있지만 9월 부터 12월에 걸쳐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제6장은 1943년 하반기의 작전에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이 소모를 통해 붕괴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의 밀도가 높고 1차 사료의 활용도 매우 탁월한 우수한 저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꼭 읽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6월 6일 화요일

『진흙속의 호랑이』 완역판, 길찾기, 2023, 진중근ㆍ김진호 역

 군사사 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독일 국방군의 유명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 『진흙속의 호랑이』 완역판을 냈습니다. 몇 년 전 영어 중역판이 오역을 비롯한 몇가지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처음 부터 새로 번역을 하는 일은 힘들었을 텐데 대단합니다. 『전격전의 전설』, 『독일 국방군의 신화와 진실』 등 다수의 군사서적을 번역한 육군대학의 진중근 중령님이 번역을 담당하셨습니다. 오토 카리우스는 매우 유명한 '전차 에이스'여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겁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일찌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국어판이 간행되기 전에도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원서나 다른 언어의 번역판으로 접한 분이 많았지요.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서독 사회가 패전의 상처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에 집필되었습니다. 이 점은 카리우스가 회고록의 서문에서 독일 국방군을 비판하는 서독 사회 일각의 기류를 불편해 하면서 비난하는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참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장은 물론 전우들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서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카리우스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는 태도는 현재 시점에서 제3국의 입장으로 볼 때 다소 불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회고록은 자신에 대한 방어를 위해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점을 차치하고 보면 이 회고록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료입니다.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대부분의 내용이 1943~1944년 제502중전차대대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카리우스가 군인으로서 정점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아마 저자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 일 겁니다. 카리우스는 유능한 전술 지휘관 답게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여러 경험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전술적 교훈을 도출하려 합니다. 저자는 회고록의 곳곳에서 '당시'의 독일연방군 장병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교훈을 주려고 합니다. 특히 1944년 7월 소련군의 전략적 대공세를 맞아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 제22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대표적입니다. 저자는 제227보병사단의 어떤 연대장과 함께 사단장 빌헬름 베를린 장군을 설득해서 문제가 있는 작전을 철회시킨 일화를 소개합니다. 카리우스는 이 일화를 통해 '독일 국방군'의 임무형 전술이 실전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이런 장점을 '독일 연방군'의 '후배'들이 계승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회고록은 독일 국방군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집필되었지만 적군이었던 소련군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간행된 독일 국방군 고급장교 출신자들의 회고록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소련군을 폄하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과 비교하면 제법 '공정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당시 전쟁영웅으로 주목을 받던 인물이다 보니 전투 이외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많습니다.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휴양을 하던 중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카리우스가 힘러를 만났을 당시 힘러는 친위대 외에도 정규군의 보충군 사령관을 겸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쿠데타 이후 친위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정규군에 대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선 시점입니다. 카리우스와 힘러의 대화는 정규군이 정치 싸움에서 친위대에 밀리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입니다. 이 외에도 나르바 전투 당시 유명한 기갑부대 지휘관인 슈트라흐비츠 '백작'이 지휘하는 전투단에 배속되었을 당시의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슈트라흐비츠 '백작'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지휘로 많은 비판을 받은바 있는데 카리우스는 나르바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슈트라흐비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만큼 번역은 전체적으로 좋다고 생각됩니다. 역자가 독일어 원판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식의 군사용어 표기를 잘 살린 부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이 전후 나토에 가입하면서 많은 군사용어가 미국-나토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들어 미터법을 사용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에서는 화포의 구경을 cm로 표기하지만 독일 연방군에서는 mm로 표기합니다. 카리우스는 독일 국방군 경험만 있고 전후에는 연방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전쟁 당시의 용례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자는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영어 번역판은 원서에서 화포 구경을 cm로 표기한 것을 mm로 바꾸고 있고 영어 중역판은 이걸 그대로 따라갔지요. 또한 역자는 불가피한 예가 아니라면 최대한 많은 용어를 현대 한국군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맞춰 한국 독자들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리우스가 잘못 회고한 내용에 대해서는 역자주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서적을 번역할 때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역자가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인공지능 번역의 품질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 처럼 아직은 전문적인 번역가가 필요합니다.

 

2023년 4월 1일 토요일

아브라함 라비노니치 저, 『욤 키푸르 전쟁』

 2022년에 간행된 아브라함 라비노니치의 『욤 키푸르 전쟁』 한국어판을 읽었습니다. 한국어판 번역을 담당한 분이 이승훈씨 인데 이 분은 일조각에서 간행한 『미드웨이 해전』을 번역하신 바 있습니다.

 플래닛미디어에서 간행한 한국어판은 2017년에 나온 개정판을 모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2017년에 나온 개정판은 여러가지의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총참모부에서 간행한 욤키푸르전쟁 공간사를 참고하여 주요 국면에서 이스라엘군 수뇌부가 내린 결정과 그 영향을 잘 서술한 점이 강점입니다. 2017년 판에 추가된 흥미로운 내용들은 이렇습니다.

- 나세르의 사위를 포함한 이집트인 정보원들이 이스라엘의 반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 전쟁 전 이스라엘군 특수부대가 이집트에 침투해 이집트군의 통신을 감청할 수 있는 장비를 설치했으나 정작 개전 직전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이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치명적 실책을 저질렀다.

- 국방장관 모세 다얀이 아랍측을 위협하기 위해 핵을 사용할 구상도 했으나 메이어 총리가 거부했다.

- 개전 5일차에는 전황이 너무 불리해서 자신감을 상실한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이 정부에 휴전협상을 요청할 정도였다.

 2017년 판에는 이렇게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 중에서 나세르의 사위가 이스라엘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는 넷플릭스 영화로도 만들어 졌지요. 

 논픽션으로서 구성이 매우 탄탄합니다.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정부의 정책적 결정, 군 수뇌부와 야전 부대 지휘관들의 결정, 일선의 장교와 사병들의 경험을 생동감 있게 보여줍니다. 원서를 읽다 보면 간혹 일선 전술부대들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버거울 때가 있는데 한국어판은 충실한 역자주를 통해 이런 아쉬운 점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 또한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욤 키푸르 전쟁을 보여주는 저작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관점의 책은 지금까지 매우 많이 나왔습니다. 이 책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입장을 매우 상세히 보여주는데 비해 여전히 이집트와 시리아 등 아랍쪽의 움직임에 대한 서술은 소략합니다. 이집트군 일선 병사의 입장을 보여주는 인물로 마흐무드 나데의 일화가 실려있긴 합니다만 이 이야기도 나데의 일기장을 이스라엘군이 노획했기 때문에 알려진 것 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영어권도 비슷한 편 입니다. 다니 아셔의 저작 The Egyptian Strategy for the Yom Kippur War 같은게 있긴 하지만 이것 조차 이스라엘 쪽에서 쓴 책이죠.

 매우 훌륭한 논픽션이고 한국어판의 번역도 좋습니다. 번역을 할 때 역자주를 최소화 해서 가독성을 높였는데, 이건 매우 좋은 방식 같습니다.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스탈린의 전쟁』이 간행되었군요.

 열린책들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Stalin's War의 한국어판을 낸 걸 알게 됐습니다. 한국어판은 무려 744쪽에 달하는군요. 영문판의 2배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스탈린의 전쟁




 이 연구는 스탈린의 전략가적 자질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1941~1942년에 스탈린이 저지른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43~1944년에 스탈린이 보여준 전략적 식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1950년대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스탈린의 군사적 업적은 과도하게 폄하당한 경향이 있는데 로버츠는 이런 비판에 대해서 선을 긋고 있습니다. 로버츠는 1943년 이후 소련군의 반격 과정에서 스탈린이 전략적인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때로는 작전술 차원에서도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스탈린의 전략가적 면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1944~1945년 소련군의 동유럽 진출 과정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소련의 군사적 성과를 충실하게 활용해 소련의 전략적 입지를 강화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이 연구는 독일 문제 처리 과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냉전 초기 단계에서 스탈린의 전략적 결정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에서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냐는 해석이 주목할 만 합니다. 로버츠는 스탈린이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아시아에서 제한적인 군사적 충돌을 구상했고 그 결과물이 한국전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전략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략하게 개요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독소전쟁사』를 함께 보시면 보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 간행된 저작임에도 군사작전에 대한 몇몇 서술은 모호하거나 다소 부정확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서술입니다. 저자는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갔으나 다소 2000년대의 최신 연구경향을 반영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연구이기 때문에 저도 번역본으로 한 번 읽어볼 생각이 있습니다. 이제는 간행된지 16년이 넘은 책 이지만 여전히 일독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11월 6일 일요일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 , 허진 저, 수문출판사, 2022

  『무장친위대 전사록』의 저자 허진이 올해 상반기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다룬 책을 한권 출간했습니다. 수문출판사에서 나온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은 본문만 800쪽이 넘어가는 대작입니다. 책의 판형도 크고 편집도 빡빡하게 되어 있어 정보량이 매우 많습니다. 책을 처음 보면 분량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 방대한 양에 기반한 정보의 량 입니다. 저자는 독일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작전 단위의 서술을 하면서 소부대의 전투들은 기존에 간행된 2차 문헌들을 인용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각 단계별로 독일 중부집단군 예하 부대들이 수행한 전투들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다룬 한국어로 된 문헌은 매우 부족합니다. 오래전에 나왔던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의 해당 권 등 개설서 수준의 단행본이 몇권 있던 정도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은 그 자체로 장점이 됩니다. 

 하지만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도 『무장친위대 전사록』의 한계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책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저자 허진은 책의 서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 데이비드 스태헐(David Stahel) 등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스태헐에 대해서는 "러시아 민족주의와 공산당 기관지의 서술에 경도되어 있다"고 까지 비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전작 『무장친위대 전사록』에서도 글랜츠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허진은 글랜츠를 필두로 한 소련 시각을 반영하는 연구들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있는데 무의미해 보입니다. 영어권에서 글랜츠가 확보한 학문적 위치는 너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스톨피(R.H.S. Stolfi)의 고전적인 연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스톨피가 바르바로사 작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허진의 시각이 전통적인 1980년대의 시각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책  『바르바로싸 : 중앙집단군 1941.1-12』이 글랜츠나 스태헐 등의 연구의 대척점이 되는 충분한 해답을 주는가? 제 생각엔 아닙니다. 이 책의 결론을 읽으면 저자 허진도 마땅한 답을 도출하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소련군이 양의 질로의 전화라는 거의 초자연적인 총체적 능력을 발휘한 끝에 벼랑 끝의 조국을 구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중략)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요인임에는 분명하다."(818쪽)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런 설명은 기존의 연구들에서도 하던 이야기 입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기존의 연구들을 자신만만한 어조로 폄하하고 있으나 정작 이 책은 새로운 연구라고 하기에는 분석의 수준이 그리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수많은 전술 차원의 전투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전투들을 장황하게 일일이 나열하는건 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습니다. 기존 연구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기존 연구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집어서 그 부분을 비판하는 분석을 하면 되고 이건 작전 차원의 서술로 가능합니다. 굳이 소대-분대 단위의 소규모 전투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초점을 흐트릴 필요가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책 전체의 초점이 모호하며 분석이 치밀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저자의 문체입니다. 좋게 평가하면 아주 자유로운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런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불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입니다. 

"소련군의 앙증맞은 무승부는 실제적인 군사적 효과 이상으로 격상시키는 (...)" (16쪽)

"1차 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도 없으며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딸 수 있다는(...)."(486쪽)

"종횡무진, 신출귀몰, 동분서주하는 이 월드클래스 장군은 (...)" (521쪽)

"브라우히취 육군 총사령관은 (....) 사실상 공익요원 정도의 식물인간이었으며 (...)" (660쪽)

"물론 PPSh도 잔고장이 많은 신뢰성이 딸리는 화기였으나 (...)" (676쪽)

 이런 가벼운 문체 뿐만 아니라 비문 문제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꽤 많은 비문이 있습니다. 이런건 편집 단계에서 잡아내야 하는데 그게 잘 된 거 같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내용이 방대해서 교열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게 원인이 아닐까 짐작이 됩니다. 주석이 있어야 할 곳에 붙어있지 않거나 저자의 개인적 견해를 설명하는 부분에 별 관련없는 주석이 붙어있곤 합니다. 이런 문제는 편집자가 보고 바로잡아줬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앞으로도 독소전쟁에 관련된 단행본을 계속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성향을 봐서는 앞으로 나올 책들도 지금까지 나온 책들과 같은 기조를 유지할 듯 하군요. 

2022년 8월 7일 일요일

미하엘 프뢰리히의 신간

 독일의 기갑차량 연구자 미하엘 프뢰리히(Michael Fröhlich)의 신간이 올해 하반기에 나온다고 합니다. 


THE PORSCHE TIGER AND FERDINAND TANK DESTROYER


처음 책 소개를 얼핏 봤을땐 프뢰리히가 독일 모토부흐 출판사(Motorbuch Verlag)에서 낸  Der Panzerjäger Ferdinand : Panzerjäger Tiger(P), Porsche Typ 131의 영어 번역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지 정보를 보니 아닙니다. The Porsche Tiger and Ferdinand Tank Destroyer는 무려 500쪽을 넘어가는 대작입니다. Der Panzerjäger Ferdinand : Panzerjäger Tiger(P), Porsche Typ 131는 참고문헌 항목까지 포함해도 207쪽에 불과합니다. 아마 프뢰리히가 썼던 Der andere Tiger: Der Panzerkampfwagen Porsche Typ 101의 내용도 포함된 걸로 추정됩니다. 샘플 페이지를 보니 상당수의 도판은 Der Panzerjäger Ferdinand와 Der andere Tiger에 있는 것 들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중복되겠지만 혹시라도 새로운 내용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서평이 올라온 다음에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게 좋겠습니다.

2022년 6월 3일 금요일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요즘 간행되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의 저작들을 보면 연구의 중점이 테러와의 전쟁과 냉전으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사실 제2차세계대전은 워낙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니 혁신적인 연구가 나올 여지가 적지요. 미국 육군군사사연구소는 U.S. Army in the Cold War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유럽의 냉전을 중심으로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냉전도 다루게 되겠지요. 올해 U.S. Army in the Cold War 시리즈로 꽤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Covert Legions : U.S. Army Intelligence in Germany, 1944-1949

이 연구는 미육군의 독일 점령 초기 부터 냉전이 본격화되는 베를린 봉쇄에 이르기까지 미국 육군이 독일에서 수행한 정보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미육군의 대독 정보활동을 다루는 부분 입니다. 두 번째는 냉전 초기 미육군의 정보활동 조직과 체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육군의 독일내 정보활동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세번째 부분은 중요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미육군의 전쟁범죄 조사활동과 독일의 탈나치화 정책 수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전 초기 독일내의 대소련 정보활동 등 입니다. 소련 관련 내용을 다루는 제9장과 제10장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9장은 미육군의 정보기구와 독일 사민당의 협력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건 나중에 독일 총리가되는 빌리 브란트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간첩 스캔들의 기원이 냉전 초기 대소련 정보활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을 보여주는게 재미있지요. 빌리 브란트가 미국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밝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빌리 브란트를 비롯해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정치계의 거물들과 미국 정보기관과의 관계를 밝혀낸 점은 이 연구의 장점입니다. 연구의 마무리를 짓는 제10장은 베를린 봉쇄로 냉전이 격화되고 미육군의 정보활동 방향이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국 독일의 체제 변화에서 동맹 독일과의 협력 체계 구축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지요.

매우 재미있는 연구입니다. 특히 1945-1948년 시기 한국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히네요.

2022년 5월 6일 금요일

Osprey 출판사에서 판터에 관한 재미있는 책을 내는군요

 Osprey 출판사에서 올해 하반기에 출간할 책을 몇권 발표했던데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보입니다. Foreign Panthers라는 책으로 영국군, 프랑스군, 소련군 등이 노획한 판터를 어떻게 운용했는지 다루는 내용이네요. 물론 이 주제는 잘 알려져 있고 관련자료들도 많이 공개되어 있긴 합니다만 정리된 단행본으로 나오는건 또 다른 문제죠. 아주 흥미로운 주제라서 사봐야 겠습니다. 

2021년 3월 29일 월요일

Black Cross, Red Star 5권 도착

 


Christer Bergström의 Black Cross, Red Star 5권이 도착해서 조금 훑어봤습니다. 이 책의 1권을 처음 접하고 굉장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어느덧 1943년 7월까지 다루고 있군요. 저자가 좀 독일군에 편향된게 아닐까 싶을때도 있지만 독소전쟁 항공전에 천착하는 태도는 존경스럽습니다. 다루는 주제의 특성상 양측 공군의 지상지원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상당히 독일군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연구에서는 독일군의 작전을 다소 비판적으로(어찌보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연구를 많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2020년 5월 22일 금요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

으휴. 간만에 블로그에 뭘 하나 쓰는군요.

'산처럼' 출판사에서 로널드 스멜서(Ronald Smelser)와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Edward J. Davies)의 공저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의 한국어판『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이 출간되었습니다. 류한수 교수님이 한국어판 역자이시군요. 예전에 РККА님이 블로그에 이 책을 번역해서 올리셨기에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면 РККА님의 번역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이 책은 냉전기에 만들어진 '무결한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오늘날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독일국방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이 책의 절반 이상(1~5장)은 기존에 생산된 연구의 정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나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 없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6~8장)에서 미국인들의 왜곡된 2차대전 인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상당히 재미가 있어집니다. 특히 냉전기에 형성된 2차대전 인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북미권의 군사서적 출판사들과 아마추어 군사연구자에를 비판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미국인들이 냉전기에만들어진 독일인들의 변명을 재생산하고 이것이 인터넷이라는 수단과 결합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페도로위츠(J. J. Fedorowicz) 출판사 같이 독일군 관련 서적을 주력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미국인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페도로위츠, 쉬퍼(Schiffer) 출판사와 같은 군사서적 전문 출판사들이 간행하는 서적들은 균형이 잡힌 연구서라기 보다는 독일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서술하는 수준에 그치는 책들입니다. 페도로위츠 출판사는 악명높은 오토 바이딩어가 집필한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사 같은 것들을 영어로 번역해서 간행하고 있죠. 


2차대전을 다루는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비판도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아흐퉁 판처와 같은 웹사이트들에 실린 내용은 2000년대 초반 저와 같은 한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7장은 인터넷이라는 영향력 있는 수단이 독일국방군 무오설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밀리터리 오타쿠들이 편협한 역사관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잘 설명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은 독일인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뒤바뀐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밀리터리 오타쿠들의 '군사사 연구'는 정치적인 맥락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책은 소위 '독빠'들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밀리터리 오타쿠 전반에 적용되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낭만화 하고 탈정치화하는 위험한 경향은 굳이 독빠가 아니라 밀리터리 오타쿠 다수에 내재해 있으니까요. 책의 내용도 재미있고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저자들은 미국의 밀리터리 오타쿠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Guru라고 칭하는데 류한수 교수는 이걸 '본좌'로 옮겼습니다. 아주 탁월한 번역어 선정입니다. 하지만 진짜 좋은 번역은 독일군 애호가들을 칭하는 romancer를 '낭만무협인'으로 옮긴 부분입니다. 너무나 탁월한 초월번역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1~5장의 내용은 기존에 간행된 연구들과 차별점이 없다고 쓰기는 했는데 사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한국어 문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국어판은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을 낭만화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라면 자기 반성을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부대명인 JG52를 JU52로 표기 한 것 같은 사소한 오탈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수정될 수 있게 이 책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 3월 20일 금요일

존스 홉킨스 대학출판부 간행물의 한시적 무료 공개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사태 때문에 사회활동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와주시는 분들도 직장이나 학교가 온라인 위주로 전환해 생활에 지장이 많으실 겁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춰 유료였던 간행물을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기관과 학교들이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출판부에서도 단행본과 학술지들을 한시적으로 무료 공개하고 있군요.

존스 홉킨스 대학출판부 간행 서적들 중에서는 Johns Hopk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Technology시리즈와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Studies in Historical and Political Science시리즈에 군사사와 관계된 서적이 있습니다. 한시적으로 무료 공개를 하고 있으니 빨리 다운로드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2020년 3월 16일 월요일

니클라스 세테를링의 Normandy 1944 개정판

스웨덴의 군사사가 니클라스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의 개정판을 읽었습니다. 큰 틀은 2000년도에 페도로비츠 출판사에서 냈던 초판과 같습니다. 전면개정판이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편 입니다. 하지만 좋은 저작이고 노르망디 전역을 공부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테를링은 2019년에 낸 이 개정판에서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근래의 연구들을 반박하려 합니다. 특히 독일군이 생산한 1차사료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연구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세테를링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연구는 독일 연구자 뤼디거 오버만스(Rüdiger Overmans)가 추산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인명피해입니다. 세테를링은 오버만스가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에 대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크게 과장했다고 비판합니다. 오버만스의 연구에서는 특히 1944~1945년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독일군의 인명손실이 기존의 통설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테를링은 이게 자료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라고 봅니다. 그는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는 전반적으로 정확한 편이고 독일군의 인명손실은 공식기록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이 연합군 보다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미국측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봅니다. 특히 그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피터 맨수어(Peter Mansoor)입니다. 세테를링은 미군이 생산한 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하는 맨수어와 같은 연구자의 글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맨수어는 The GI Offensive in Europe에서 미군의 전투효율성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크게 향상되어 독일군을 능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이 지적한 것 처럼 맨수어는 독일측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교차검증이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않은 겁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저작 중에는 이런 문제점을 가진 것이 꽤 많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D-Day 같은 저작이 대표적이죠.

피터 맨수어가 자신의 주 논지를 뒷받침 하기 위해 인용한 존 슬로언 브라운(John Sloan Brown)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존 슬로언 브라운은 통계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듀푸이는 통계기반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미군과 영국군에 비해 높은 전투효율성을 발휘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존재하지요. 세테를링은 독자적으로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검증하고 이것이 신뢰성이 높음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그는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신뢰하는 입장이고 브라운의 듀푸이 비판은 오독과 자료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했다고 낮게 평가합니다.

오머 바르토브(Omer Bartov)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르토브는 동부전선의 전투가 서부전선 보다 더 격렬했으며 이때문에 인명피해도 더 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은 인명손실의 총계가 아니라 사단 단위 평균 손실로 평가하면 동부전선과 노르망디 전역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노르망디 전역에서 발생한 사단당 인명손실이 동부전선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판에 비해 수정된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의 전투력과 손실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저작입니다. 그리고 독일 자료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태평양전쟁: 펠렐리우-오키나와 전투 참전기 (유진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

얼마전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부 구매했습니다. 몇년전 HBO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 퍼시픽을 아주 감명깊게 봐서 유진 슬레지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도 있던 차에 그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나왔다니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은 미해병대의 말단 보병의 시각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말단 사병의 시각에서 본 회고록은 제법 많고 국내에도 이미『잊혀진 병사』를 비롯해 몇권이 번역되어 소개됐습니다.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 약력에도 잘 나와있듯 그는 전쟁 초 교육 수준이 높다는 이유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전후에는 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또한 전장에서도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비교적 일찍 회고록 저술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했던 덕분에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구체적입니다. 유명한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저자가 거의 대부분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 집필을 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나중에 진실성 여부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줍니다. 또한 그의 지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도 시간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회고록들이 혼란스러운 서술을 보여주는 점을 생각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쟁 중에 남긴 기록과 그의 명료한 지적 능력은 그가 전투에서 겪은 여러 사실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말단 보병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지상전을 미시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펠렐리우 전투 당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동료 해병대원들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전리품을 얻기 위해 일본군 시체에서 금이빨을 뽑으려 들었던 순간을 회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 합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고참 병사가 어느 순간 PTSD에 시달리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큰 틀에서 국가에 헌신한 동료 해병대원들의 명예를 기리고자 하지만 단순한 무용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추악한 면, 특히 동료 해병대원들에 의한 행위들을 이야기 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영어판을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에 대해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이 좋고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몇몇 용어가 어색하게 번역된 느낌이 드는데 영어판을 확인해 보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도 훌륭하고 번역도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Taking Nazi Technology - Douglas M. O'reagan 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력은 전후 수십년에 걸쳐 신비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B급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나치의 비밀병기라는 클리셰는 지겹기까지 할 정도죠.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떠했을까요? 더글러스 오레이건(Douglas M. O'reagan)의 Taking Nazi Technology: Allied Exploitation of German Science after the Second World War(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9)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와 직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과학기술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것이 냉전에 끼친 영향을 다루는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독일 과학기술력을 자국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있는 합동정보위원회(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주독일미군정 그리고 미국상부부 등이 독일의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V2 미사일과 제트기로 대표되는 항공 기술은  독일이 우위에 있어 미국이 습득해야 할 기술로 평가되었습니다. 미국 군부는 항공분야의 기술자와 설비를 철저하게 쓸어갔습니다. 예를들어 미국 육군항공대는 독일 항공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풍동시험시설이 미국 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째로 반출했습니다. 군부 뿐만 아니라 보잉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마그네틱 테이프 같이 전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산업기술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대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계에 대한 조사결과 독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전쟁 이전에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항공 기술과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 분야는 미국이 우월하거나, 독일의 기술 발전이 미국에 불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석탄에 기반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일은 석탄을 활용한 기술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미국의 화학공업은 석유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유용하지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석탄을 활용한 인조 고무 생산은 독일 화학 공업의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후 이를 조사한 뒤 독일의 인조 고무 생산 기술은 미국 보다 뒤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일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은 항공우주기술에서 조차 대량생산에 필요한 금속가공 등의 몇몇 공정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력과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 부터 산업 경쟁력 저하로 고심하던 영국은 독일의 기술을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의 군사기술 중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계와 산업계의 평시 이익에 활용할 수 있는"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5년 10월에 보도된 한 언론기사는 독일에서 획득한 과학기술 정보의 가치가 1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에서도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 이전에 기대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자국에게 가치가 없는 독일의 기술이라도 전후 잠재적인 경쟁국이 습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은 미국과 비교적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나 소련에 비하면 제약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은 영국과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했으나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후 배상 차원에서 독일의 산업시설을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프랑스가 포섭할 수 있었던 독일 과학기술자는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포섭된 주류 과학기술자들과 지적 네트워크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군에서는 지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독일 기술진과 연구시설들을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대안으로 독일의 연구소등에 프랑스 유학생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는 동시에 감시역을 맏기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국력의 한계가 있었던 프랑스는 '승전국' 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어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자 오레이건은 프랑스가 독일의 과학기술을 약탈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독일과 협력하는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독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군사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지적으로 도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약탈하는데 있어 프랑스와 동일한 정책을 폈으나 훨씬 효율적이고 큰 규모로 수행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정부가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더 이상의 연구를 진행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서 뒤쳐지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이 소련의 기술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음으로는 전후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기술의 부흥에 끼친 역할입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정책을 취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대전 직후에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독일 과학계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독일 과학계를 서방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 및 산업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패전국인 독일 과학자들은 승전국의 대학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화학 산업계는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뒤쳐져 있었던 석유 기반 화학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과학 네트워크에서 축출합니다. 미국은 경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연구는 대중적으로 과대 평가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 과학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조직한 기구가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통제 수단이 되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독일육군 제505중전차대대사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505중전차대대는 포탑에 그려넣은 돌격하는 기사 마크로 유명한 부대죠.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부대의 활약에 비해 이 부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헌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대가 제2차대전 말기 동부전선에서 완전히 괴멸되었고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에 항복한 중전차대대의 경우 부대사가 비교적 일찍 간행되었죠. 매우 형편없는 전과를 거둔 제508중전차대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부대를 연구한 부대사가 간행된다고 하네요. 판처렉스에서 제공하는 샘플 사진을 보니 상당히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약간 우려되는 점은 저자가 독립연구자로 보인다는 점 입니다. 물론 독립연구자라도 Leaping Horseman Book의 제이슨 마크 처럼 훌륭한 연구를 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간혹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죠.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0년 1월 출간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사야겠습니다.

https://www.panzerwrecks.com/product/charging-knights-on-the-eastern-front-the-combat-history-of-schwere-panzer-abteilung-505/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옵니다

통계 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 연구소의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 연구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제목은 Aces at Kursk 라는군요.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 전개된 항공전에 대한 통계 기반 연구입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공전의 양상을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위해 94쪽 분량의 새로운 내용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항공전 통계자료만 77쪽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독소전쟁 항공전의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인 중요한 저작이 될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전작인 Kursk: The Battle of Prokhorovka와 이 책의 축약판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에도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만 부차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지요. 집필은 거의 마쳤다고 하니 조만간 책으로 접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2019년 4월 20일 토요일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무장친위대 전사록』


길찾기 출판사에서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인 저자의 연구서로군요. 1943년 하리코프-쿠르스크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의 작전을 분석한 저작입니다. 저자 소개문의 약력을 보니 허진이라는 분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셨군요.




인터넷 서점에 샘플이 뜬걸 보니 독일측 1차사료를 활용한 점이 눈에 띄입니다. 실물을 직접 읽어봐야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책의 분량도 700쪽이 넘는 상당한 분량인 것으로 봐서는 정리가 잘 된 저작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다만 목차를 보니 좀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는데, 1장의 '전격전 교리의 원칙과 수정'은 왜 이런 제목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죠.




2018년 12월 6일 목요일

데이비드 글랜츠 저, 유승현 옮김, 『8월의 폭풍』 길찾기, 2018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8월의 폭풍: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를 읽었습니다. 길찾기 출판사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군사서적을 꾸준히 간행하면서 군사분야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확대하는데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을 시작으로 대중서를 넘어 전문적인 군사사 연구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의 폭풍』은 길찾기 출판사가 내놓은 군사사 연구의 두번째 저작입니다.

1945년 8월에 있었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외교사의 범주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결정한 사건이기에 많은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군사작전'에 관해 주목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2차대전 종전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군사작전이라는 점, 자료가 러시아어와 일본어 등 영어권 연구자가 접근하기에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영어권에서 손꼽히는 소련-러시아 군사사의 대가 데이비드 글랜츠의 이 연구는 글자 그대로 선구적인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연구자의 저작이기 때문에 내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소련군의 만주지역 전략 공세를 다루고 있지만 제2차대전 중 소련군의 발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소련은 1941년 부터 시작된 독일과의 전쟁을 계기로 전략, 작전술, 전술적인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전쟁 종결 직전에 있었던 만주지역 전략 공세는 소련군이 그동안 유럽 전역에서 쌓아온 역량이 총체적으로 발휘된 무대였습니다. 4장 부터 9장에 이르는 소련군의 공세 준비와 실행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 작전 시행과정을 다루는 장에서는 1939년 이후로 큰 발전이 없이 교리와 장비면에서 정체되어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신속한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군의 전술적인 분전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면서도 이것이 전략-작전술의 차원에서는 별 영향이 없었음을 지적합니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전략-작전-전술의 차원을 명쾌하게 분리해 설명하면서 일본군의 전략-작전 차원의 패배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데이비드 글랜츠의 초기 연구에 속하지만 작전연구라는 측면에서 매우 훌륭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측 시각을 보여주는 자료 대부분이 1950년대 미육군에서 수행한 작전연구들에 제한되어 있지만 소련에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략~작전술 차원의 연구이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서술도 이 범주에 국한하고 있습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질적 수준과 전략-작전 단위 방어 계획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1990년대 이후에 나온 글랜츠의 일부 연구가 소련 자료에 대한 과도한 편향성으로 작전연구 차원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1980년대에 나온 『8월의 폭풍』에서 보여주는 공정한 시각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길찾기 출판사 편집부의 실력은 기존에 간행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8월의 폭풍』에서도 그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만주 전역의 특성상 고유명사를 번역하는데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는 이 어려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도 장점이 많습니다. 특히 큰 판형을 채택해서 본문에 지도와 도판이 많이 포함된 장점을 살리고 있습니다. 편집부가 지도 편집에 많은 공을 들여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지도의 가독성도 높습니다. 게다가 초판 한정 부록에 포함된 대형 작전도는 즐거운 깜짝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후 상업출판사에서 출간된 증보개정판이 아니라 미육군에서 간행한 초판이라는 점 입니다. 물론 초판으로도 만주 전략 공세를 전략-작전술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충분합니다. 증보개정판은 내용면에서도 보완이 있었고 부록으로 1차사료의 영역본을 제공하고 있어 만주 전략 공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역자인 유승현님을 비롯해 감수를 맡으신 주은식 장군님, 그리고 길찾기 출판사 편집진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노력이 들어간 책인 만큼 군사사에 관심 가지신 분들이 많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