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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어떤 포로의 편지

1943년 4월 5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이것을 도쿄에 있는 독일 대사관 무관 크레치머(Alfred Kretschmer) 소장에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친애하는 크레치머!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제6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네. 나는 지금 겨우 내 한몸을 챙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부탁을 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구만.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보내줄 수 있겠나?

1. 긴 팔 스웨터 한벌, 될 수 있다면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내 키는 자네도 대략 알고 있을 걸세.(파울루스의 키는 187cm)
2. 긴 양말(Wadenstrümpfe) 한 짝, 치수는 11½,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3. 양말 세 짝, 치수는 11½, 색은 자네가 편한 대로 해 주게.
4. 비단 셔츠 두 벌, 목 둘레는 38, 카라 치수는 39, 소매는 긴 것으로 해 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셔츠와 같은 색(특히 어두운 녹색)의 넥타이도 하나 부탁하네.
5. 멜빵 하나.
6. 종이 한 통과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이것도 보내줄 수 있겠나?

7. 초콜렛과 쿠키(Kekse).
8. 잼(Marmelade) 한통.
9. 커피와 차.
10. 담배와 시거.
11. 향수(Eau de Cologne)
12. 화장품.

그리고 자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년 전 부터 위와 장에 문제가 있었네. 위에 적은 목록 중 7번과 8번에 적은 기호품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도움이 된다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7번에서 12번까지의 물품은 매달 한 번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100루블 정도 송금해 주었으면 좋겠네.
지출되는 비용은 나중에 정산할 때 까지 당분간 자네가 부담해 줄 수 있겠나?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2000, ss.47~48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파울루스가 보낸 편지는 독일 대사관 쪽에서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파울루스의 편지는 이래저래 재미있는데 특히 포로가 된 고급장교를 우대하는 유럽 전쟁문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고급장교는 사병들과는 달리 꽤 근사한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장교처럼 팔자좋은 인생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파울루스가 병사들 걱정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이 영양실조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마당에 초콜렛 타령을 하고 있는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점은 잘 느끼고 있었겠지요.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러시아의 병력동원과 철도 문제

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로스뚜노프 외, 『러일전쟁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s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

군사사에 있어서 사단 편제는 ‘근대적’ 군사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사실상 18세기 말에 등장한 사단편제는 21세기인 오늘날 까지도 전 세계 육군의 기본적인 부대편제로 유지되고 있지요.
Division은 단어에서도 대략 느낄 수 있듯 프랑스인들이 만들어 낸 조직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는 당연히 군사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뤘으며 사단 편제의 등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군사사상가들은 18세기 중반부터 당시까지의 전쟁에서 각 국의 군대가 처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4개 연대로 편성된 독립된 작전단위를 구상하게 됩니다. 1788년에는 2개 연대를 여단의 지휘하에 두고 이 여단은 사단의 지휘를 받는 편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1794년에는 혁명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2개 여단으로 구성되며 포병과 기병등의 지원부대를 갖춘 사단 편제가 확립됩니다. 사단편제는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보다 많은 융통성을 부여해 줬으며 연대 이상의 전술 단위가 없던 다른 국가의 군대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역과 1806년의 예나 전역이었습니다. 특히 1806년의 프로이센군은 철저히 박살이 나서 뼈를 깎는 개혁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러한 4개연대-2개여단의 사단편제는 1차대전 까지 계속 유지됩니다만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한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전장의 변화는 4각 편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냅니다. 가장 큰 원인은 화력의 급속한 증대로 방어가 공격에 비해 조금씩 유리해 지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이미 미국의 남북전쟁과 유럽의 보불전쟁에서 이런 조짐이 나타났으며 1877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백히 나타납니다. 플레브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선에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지만 매번 수만의 희생자를 내고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의 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독일군은 중포의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보병사단들이 채택하고 있는 3각편제는 어느 국가가 처음 도입했을까요?

정답 : 오스만 투르크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3각편제를 처음 도입한 국가는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1877년 전쟁 이후 방어적인 군사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은 방어에서는 4각 편제가 병력 운용면에서 비효율 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3개 연대를 방어선에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사단 예비로 두는 방어구조는 1개 여단이 아주 애매하게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데다가 예비대의 운용 문제도 불편했습니다. 만약 예비대가 A여단의 예하 연대인데 정작 투입해야 할 지역이 B여단의 방어선이라면?
18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독일 군사고문단장에 임명된 골츠(Colmar von der Goltz)는 1887년 전쟁에서 방어의 효율이 높았던 결과에 크게 주목했습니다. 그는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거듭된 점에서 현대전에서 방어의 우위가 높아진 것을 거듭 확신했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한 골츠는 계속해서 터키군의 훈련과 개혁을 지도하며 이러한 현대전 양상에 맞는 편제와 전술을 연구했습니다. 골츠는 1909년의 터키군 기동훈련에서 1개보병여단과 1개기병여단으로 편성된 보병사단 편제를 시험합니다. 골츠는 1909년 겨울에 실험적인 보병사단 편제를 거듭 실험했고 그 결과 1910년 터키군 총참모부는 보병사단의 편제를 4개연대-2개여단-보병사단에서 3개연대-보병사단으로 개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터키군의 새로운 보병사단 편제는 사단에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기존에 포병 없이 보병연대만 네개가 있던 보병사단에 비해 화력이 증강되고 방어에 더 적합한 구조가 되었습니다. 터키군은 1910년 10월 3각 편제로 새로이 개편된 1, 2 보병사단을 기동훈련에 투입해 새 편제를 시험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은 2개 군단(6개 보병사단, 2개 기병여단)이 동원된 야전군급 기동훈련으로 대규모 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3각편제는 혁신적인 것 이었음에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에서 신편제를 도입한 터키군은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사단편제를 도입한 프랑스군이 신통찮은 성과를 거둔 까닭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사단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대전에 발발할 당시 주요 열강들은 여전히 4각편제의 보병사단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얼마안가서 보병사단 편제는 급격히 3각편제로 바뀌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전쟁이 참호전 위주로 나가자 보병사단들은 공격보다 방어에 적합한 형태로 개편되게 되었던 것 입니다. 먼저 독일과 프랑스가 1916년 까지 모든 보병사단들을 3각 편제로 개편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게 보병여단 사령부가 3개 보병연대를 거느리는 식으로 3각 편제가 만들어집니다. 3각편제는 여러 모로 4각편제에 비해 우월했습니다. 먼저 여단사령부가 폐지되거나 1개로 줄어들었고 보병연대도 1개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감소했습니다. 다음으로 2개여단-2개포병연대 체제(특히 러시아육군)에서 3개연대-1개포병연대 체제로 전환되면서 1개사단에 필요한 포병도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3각편제는 방어위주의 전쟁이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동이 강조된 2차대전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기본골격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참고서적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2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Edward J. Erickson, 『Defeat in Detail : The Ottoman Army in Balkans, 1912-13』, Praeger, 2003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Steven T. Ross,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 『French Historical Studies』, Vol. 4, No. 1, (Spring, 1965)
David Stevenson,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 Europe 1900-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무능함으로 적을 괴롭힌 사나이 - 비스마르크도 벌벌 떨게한 나폴레옹 3세

Cato님의 글에서 트랙백합니다.

유능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반대로 무능해서 적을 괴롭히는 경우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주의 법칙은 오묘한지라 무능함으로서 적을 괴롭힌 특출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가 던진 떡밥을 덥석 집어 물고 전쟁에 뛰어들 때 까지만 해도 쓸모있는 바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골치거리가 되고 맙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출전을 결심한 이유로는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갈수록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거둔 야전 사령관들에게 영광과 명예가 집중될 것도 우려했다고 설명되지요.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기차편으로 프랑스의 주력군인 라인 야전군(Armée du Rhin) 사령부가 있던 메츠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라인 야전군은 전쟁 초반에 포위되어 버리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샬롱 야전군(Armée de Chalons)에 합류해 스당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 후의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스당 전투지요.

나폴레옹 3세가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구상한 신속한 전쟁 종결은 물 건너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인 비스마르크는 무능한데다 인기도 없는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면 그대로 프랑스 제정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샬롱 야전군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8월 25일에 바이에른의 레오폴드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이건 우리에게 크나큰 골치거리가 될 게요.”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까지 빨리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도망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이 인기 없는 황제는 약간의 센스는 있었는지 항복 직후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의 장기화였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에 이기긴 했는데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군은 프랑스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이건 결국 독일과 프랑스간에 갈등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1차대전 이후로 프로이센 하면 보수 반동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한때는 프로이센의 군대 조차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곳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전 략)

비록 그랜트 행정부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 자신과 유럽 각국의 미국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북독일연방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시민”으로 이뤄진 그 군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주미 프랑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북독일 연방은 내전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또 연방의 공채를 구매해 주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들어 전세가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기울자 주불 대사에게 “사실 나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이센의 군사제도는 너무 완벽하네”라고 털어놓았다.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반 언론들과 정치, 문화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독일은 『전제군주정이며 제국주의적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와는 달리 (비록 프로이센도 군주정이기는 했으나) 지방 분권적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지방 분권과는 다소 일치하지 않긴 하지만) 또 독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가이며 또 비스마르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독일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무기를 든 인민들이 전제왕정의 타락한 무리들을 쳐부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는 뒤에 국무장관 피쉬(Hamilton Fish)에게 “우리 나라가 유럽 대륙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국가 제도와 우리의 그것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독일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 독일 제국이 앞으로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강력한 공화적 연방국가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2월 상원 연설에서 미국과 독일 민족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일부 미국인들은 단순히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대한 혐오감에서 프로이센을 지지했지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비록 매우 깊지는 않더라도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독일을 “지적이며 근면한 인민들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독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국가이며 국민들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문학, 음악,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에 대해서도 개별 인물들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은 나라인 프로이센을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폰 스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남작은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고 또 뷜로우(Friedrich von Bülow)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을 도와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식이었다.

또 미국언론들은 북독일 연방과 개별 가맹국들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독일의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연방 정부를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또 현재의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연방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듯 독일 민족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는 이 매체가 종종 그랬듯 과장적인 어조로 “미국인들은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수상이 그동안 분열되었던 위대한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융커 지주층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머지 않아 독일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진보가 이뤄지면 자연히 정치적 자유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한 유력 일간지는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인민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에 대한 지지 여론의 배후에는 독일인들이 19세기에 미국에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민족집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1870년 당시 외국에서 이주해온 1세대 미국시민 중 30%가 독일계였다. 186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또 강력한 연방 지지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1870년에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많은 외국어 언론이었던 독일어 신문들은 앞다투어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고 독일 연방의 승리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을 찬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독일에서 군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이민 온 하인첸(Kark Heinzen)은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848년 혁명당시 바덴(Baden)의 혁명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헤커(Friedrich Hecker)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871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있었던 독일의 승전 축하 행사에서 주 연설자로 나선 그는 독일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찬양하고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개병제야 말로 독일 군대가 진정한 평등적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정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내의 사회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빈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주아브나 투르코)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사거리가 긴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우수한 훈련과 애국심,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지휘관들에 의해 압도되었다.(그리고 포병의 경우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전쟁이 벌어진지 겨우 한달도 채 안된 1870년 9월 1일의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 10만과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3일뒤 파리의 민중은 봉기를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후 략)

John Whiteclay Chambers II, 『American View of Conscription』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i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82~85

2007년 7월 2일 월요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입니다.

○○○○년 11월 14일, ○○ 장군이 ○○에서 쓴 편지에는 ○○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연대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연대는 ○○○○년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에 ○○을 ○○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 중대 중 일부는 ○○ 카빈, ○○ 소총이나 ○○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를 사용하는 소총을 장비하고 ○○로 만든 ○○를 지급받았는데 이 ○○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의 ○○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리고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둔채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도데체 어느나라 군대일까요? 1945년의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70년의 프랑스군이라는군요.

원래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종이탄포를 사용하는 소총(Percussion Rifle)을 장비하고 마분지로 만든 군모를 지급받았는데 이 모자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뒤리외의 45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프랑스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린뒤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268~269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섬멸되자 프랑스는 황급히 예비군을 긁어 모으고 해군 병사들도 보병으로 전환했는데 전쟁 초기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기본 장비인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야포 부족으로 해군에서 차출한 120mm 해안포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프로이센군 조차 전쟁 초반보다는 프랑스군 포병이 나아졌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와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씩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120mm포의 이야기를 읽을땐 마치 독일 국민돌격대의 판저파우스트가 연상되더군요.

2007년 5월 26일 토요일

전투에서의 기만술 - 1870년 마 라 투르 전투의 사례

웹 서핑을 하다 보니 이런 농담이 있더군요.

여기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대치한 전선. 양군 모두 참호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은 참호에 틀어박힌 이탈리아군을 저격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중에 흔히 있는 이름을 외쳐서 머리를 내밀게 한 후 그것을 저격하는 잔꾀를 발휘했다.

독일 병사 「어이, 마르코! 마르코 어디있어?」

이탈리아 병사 「여기야―」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당했다.
그 방법으로 많은 손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간신히 그 잔꾀을 깨닫고 똑같은 수법을 독일군에게 시도했다.

이탈리아 병사 「어이, 아돌프! 아돌프 어디야?」

독일 병사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누구냐!」

이탈리아 병사 「네? 아, 접니다!」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 당했다.

그런데 이게 웃기기만 하는게 아닌 것이 실제로 독일군은 이런 방법을 꽤 썼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명 단위의 저격이 아닌, 연대 급 전투에서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만술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Geoffrey Wawro의 The Franco-Prussian War에 나와 있는 1870년 8월 16일에 벌어진 마-라-투르(Mars-la-Tour)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잘 아시다 시피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군의 제 3군단과 제 10군단이 베르됭 방면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라인군(Armée du Rhin)의 5개 군단을 포착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프로이센군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오후 까지 프랑스군 주력이 베르됭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오후 3시30분~오후 4시경 제 10군단이 증원되면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오후에 증원된 제 10군단은 프랑스군 우익의 제 4군단을 공격해 퇴각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 됩니다.
저녁 전투에서 프로이센 6보병사단 병력은 프랑스군 제 4보병사단 70연대(제 6군단 소속)에 접근한 뒤 프랑스어로 아군이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이 아군으로 착각하고 소총을 내리자 프로이센군은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 제 70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프로이센 기병이 가세해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 황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자 프랑스 제 6군단전체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마-라-투르 전투에서 있었다는 이 사례는 단순한 기만도 실전에서 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덤으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는군요.

2007년 4월 29일 일요일

보불전쟁 이전 프랑스군의 기강 해이 문제

계속 해서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Louis Jules Trochu)장군은 1864년 메츠(Metz)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트로슈는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남긴 프로이센 장교는 프랑스군의 신형 소총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에 주목했다. 한 부사관이 소총을 보여주고 분해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동안 병사들의 잡담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마침내 한 장교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내무반이 아니다!(Silence! Vous n’êtes pas à la foire!)”

파리 근교의 부대를 방문한 다른 프로이센 참관인은 프랑스 군의 훈련은 매우 늦게 시작되고 종종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 장교들은 부대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쪽에서 남긴 기록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육군의 감찰관은 1896년 7월 엑스-앙-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한 뒤 소총, 총기 수입도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병사들은 체육시간에 여기 저기 늘어져 빈둥거리며 군악대원은 군가를 모르고 펜싱 교관은 펜싱을 제대로 못 하며 또 많은 수의 부사관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병들을 잡아 넣느라고 영창이나 군교도소를 들락 거린다고 지적했다. 앙드레라는 상병은 감옥에서 도둑 한명을 탈옥시켜 주둔지에서 그 도둑과 함께 훔친 돈으로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감찰관은 제 99보병연대의 시찰을 마친 뒤 장교들이 “건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감찰관이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하고 기록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사병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프랑스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군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격 뿐이었다. 장기간의 군복무와 믿고 본받을 만한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은 제멋대로에 기강이 엉망이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요소가 없었다. 그러니 1840년대에 프랑스군의 개편을 주도한 뷔고(Thomas Bugeaud) 원수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한 점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명령 받는 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것은 못 참는 다는 점이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3~44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광경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볼 수 있지요.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1차 대전과 군수체계의 혁명 - Martin van Creveld

이 글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Great War, Total War에 실린 Martin van Creveld의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에서 64-69쪽을 발췌한 것 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같은 저자의 유명한 저서 “Supplying War”의 4장과 거의 동일한데 후자의 분량이 더 많아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고로 양이 더 적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1871년부터 1914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인구적, 경제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였다. 불과 44년만에 유럽의 인구는 2억9300만명에서 4억9000만명으로 70%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산업, 무역, 그리고 교통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해 유럽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1870년에 유럽의 3대 공업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석탄 및 갈탄 생산량은 1억6000만톤이었는데 이것이 1913년에는 6억1200만톤으로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 세 국가의 선철 생산량은 750만톤이었는데 1913년에는 2900만톤으로 거의 300%의 증가를 이뤄냈다. 이런 산업생산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업,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일어났지만 석탄, 선철, 강철로 대표되는 산업화의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은 1870년의 보불전쟁이었다.

공장의 굴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도 크게 증가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군대규모의 증가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사회적 발전과 행정 효율의 증가, 그리고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방대한 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육군을 가졌던 프랑스는 1870년 당시 전체 인구 3700만명 중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50만명으로 그 비율이 1대 74였다. 그러나 1914년에는 전체 인구가 불과 10%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40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독일제국 역시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인구증가율이 프랑스 보다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870년에 전체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의 비중이 44대 1에서 1914년에는 15대 1로 증가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가용한 병력 자원은 거의 20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중요한 미국의 경우 육군 규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전시 동원능력은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막강했다.

전쟁 수행이 보다 복잡해 지면서 군대에 필요한 보급도 마찬가지로 복잡해 졌으며 병사 일인당 필요한 보급량은 병력 증가 보다 더 급속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870년 당시 독일 육군의 군단 사령부 수송대의 마차 대수는 30대 였으나 1914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 전쟁에서 북독일 연방이 보유한 대포는 1,585문 이었으나 1914년 독일 제국이 보유한 대포는 거의 8,000문에 달했다. 게다가 1914년 당시의 무기는 발사속도가 더 빨라졌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기관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압식 제퇴기와 포미장전 방식을 채택한 1914년의 대포는 1866년 당시의 대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3-4배 늘어났으며 병사 세명이 조작하는 분당 발사속도 600발의 빅커스 기관총은 1866년 당시 1개 보병대대의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소모했다. 육군 규모의 증가와 무기 성능의 개선으로 전쟁이 벌어질 당시 각 국 육군이 하루의 전투에 보급해야 하는 물자의 양은 대략 (1870년 전쟁의) 12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각 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단기전을 예상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만약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경제적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Ivan Bloch같은 사람들은 장기전으로 간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유럽인들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70-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 포병의 탄약 소모량은 포 1문이 5개월 간 평균 199발 이었다. 1914년 당시 유럽 각국 중 가장 전쟁 준비가 잘된 독일은 포 1문 당 탄약 1,000발을 비축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갔으며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00발로 6개월을 버틴다는 예상과는 달리 불과 1개월 반 만에 비축량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교전국들이 1914년 말과 1915년 초 까지 이른바 “포탄 위기”를 겪었다. 일부 국가, 특히 러시아는 이때의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탄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일은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그리고 영국은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직면해 행정 체계를 쇄신하고 산업 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1916년이 되자 주요 교전국들은 전쟁 초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약간의 통계를 인용하면 영국의 경우 연간 대포 생산량이 91문에서 4,314문으로 증가했고 탱크 생산은 전무하던 것이 150대로, 항공기는 200대에서 6,100대로, 그리고 기관총은 300정에서 33,5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대포 8,039문, 전차 1,359대, 항공기 32,000대, 기관총 120,9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일일 기준으로 전투 사단의 보급품 소요량은 1914년에 55톤에서 1916년에는 거의 세배로 증가했다. 근본적으로 병사들과 견인용 동물에게 필요한 보급량은 변화가 없었다. 즉 대부분의 보급 소요의 증가는 각종 장비의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장비에 필요한 보급은 사단 보급량의 60-75%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탄약이었으며 차량의 증가로 휘발유 및 윤활유의 소모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교체용 장비(특히 야전 정비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와 예비부품 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철판, 널판지 등 참호전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요도 엄청났다. 보급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마침내 군대가 야전에서 주변의 거주지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것 이었다.

이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던 거대한 보급 혁명으로 보급의 중요성이 병사들의 식료품과 말 먹이에서 기계 장비로 옮겨 가면서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돼야 했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보급 소요량이 크게 증가한 데 비해 보급품을 전방으로 추진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1870년 이래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의 효율이 증가하고 또 철도망이 더 조밀해 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철도 연장은 101,000km에서 322,000km로 늘어났다. 그러나 철도 수송 체계의 비융통성과 취약성은 1914-18년의 전쟁 기간 동안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철도는 보급품을 싣고 내리기 위해 여러 부대 시설이 필요했으며 철도역 같은 시설들은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수십 km 떨어져 있어야 했다. 187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철도역과 전방을 이어주는 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방의 보급소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유럽 각국의 군대는 과거와 비교해서 보급 종단점에서 멀리 진격할 수 가 없게 됐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나 말버러, 나폴레옹, 몰트케(특히 앞의 세 사람은) 같은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몇 주 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철도 시설이 파괴되자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됐다. 설사 독일군이 마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보급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기관총과 참호의 활용, 또 유선전화를 이용한 지휘 통제 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결국에는 작전적 방어가 작전적 공세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런 방어 우위 경향으로 모든 교전국들은 한층 더 동원체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급의 특이한 문제, 즉 전방의 소요량과 이를 추진할 기술적 능력의 불균형이 총력전 체제를 가져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대규모의 보급 소요가 총력전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보급 소요는 엄청났고 특히 1916년 이후로는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군은 솜 공세당시 공격 준비사격을 위해 1,200,000발의 포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무게로 따지면 거의 23,000톤에 달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 양의 100배를 넘는 것 이었다. 만약 첫 번째의 대공세가 돈좌될 경우 그 다음의 공격 준비사격은 더 강력해 졌다.
예를 들어 1917년 6월 Messiness 전투에서는 350만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50만 톤의 폭약이 사용됐다. 2개월 뒤의 이프르 전투에서는 4,300,000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무게로는 107,000톤에 달했다. 이 무렵 미국의 공장들은 월간 5,000~6,000톤의 무연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남북전쟁 전 기간 중 남부군이 사용한 흑색화약과 비슷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전국들은 산업을 총 동원했고 더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 넣었다. 영국의 경우 1914년 국가총생산의 15%였던 전쟁예산이 1918년에는 85%까지 치솟았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서부전선을 살펴보면 이런 20세기 초 보급의 특이한 문제점들은 모든 작전을 과거의 공성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공세를 위해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생산되어 후방에 대규모로 축적된 뒤 전방의 특정한 지점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공격 개시일이 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엄청난 포탄의 폭풍이 전선을 휩쓸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규모 포격은 적의 방어선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특히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와 하계 공세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공세가 성공하면 다음 공격을 위해서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무기, 통신망, 보급품이 전방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진격은 결국에는 철도 종단점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장지역은 후퇴하는 적에 의해 초토화 되고 또 수많은 포탄구멍으로 엉망이 돼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수송수단, 즉 말이 끄는 수레나 사람 말고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이런 식의 보급추진은 진격하는 전방 부대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솜 전투 처럼 유선 전화에 의존하는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될 경우 초기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후속 부대가 제때 투입되지 못 해 진격이 중지되었다. 보급 문제가 작전과 전략적 문제를 압도하게 되자 양 측의 지휘관들은 결국에는 비슷한 방식을 더 크게 반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