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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4일 토요일

AHEC 도서관에서 러일전쟁 당시 미국 관전무관 보고서를 판다고 하네요


펜실베니아에 있는 미육군 AHEC에서 도서관 정리를 하면서 헌책들을 대거 방출하고 있습니다.




 목록을 살펴보니 러일전쟁 당시 미국 관전무관이 작성한 보고서(1906년 간행) Reports of Military Observers Attached to the Armies in Manchuria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가 있네요. 1권은 없고 2~5권이 올라와 있는데 가격도 각권 35달러로 괜찮은 편 입니다. 물론 이 책은 E북도 있긴 합니다만 이왕이면 종이책이 좋죠.

 젠장. 내가 갔을땐 왜 이런게 안나온건지.

2012년 2월 10일 금요일

오늘의 득템

오늘은 0000님(그분의 요청에 따라 익명처리)과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0000님께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이렇기 기쁜일이!


요즘은 엔화 환율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아져서 일본서적은 거의 사질 않았는데 뜻밖에 0000님의 호의로 횡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0000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 서는 로버트 폴리의 주장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다루었습니다. 로버트 폴리의 첫 번째 글과 여기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은 전초전적인 성격으로 분량도 매우 소략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접한 뒤 본격적인 반박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다룰 글은 로버트 폴리가 2006년 War in History 13권 1호에 기고한 “The Real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글입니다.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학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로버트 폴리의 이 글은 슐리펜 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고 1차대전 직전 독일육군 총참모부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로버트 폴리의 재반론


1. 테렌스 주버의 사료 해석에 대한 비판

로버트 폴리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테렌스 주버가 사용한 주사료였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가 보기에 디크만의 연구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04~1905년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가 1945년 소련군에 노획된 이후 1989년 독일에 반환될 때 까지의 시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던 무렵 가용 가능했던 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지난번 글에서 슐리펜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한 독일군 참모부출신들이 빌헬름 디크만의 일급기밀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1918~1945년 사이 독일육군의 문서고가 1차대전 시기 독일군의 모든 문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1918~1919년의 혼란기에 많은 사료가 파기된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1914년 이전의 문서들 중 상당수가 정보 누출을 우려해 독일군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어서 가용한 사료가 부족했기 대문에 독일육군은 전간기 사이에 사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슐리펜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비망록이 입수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증거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슐리펜 가문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서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폴리의 설명을 따르게 되면 이 점이야 말로 전통적인 학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를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1890년대 중반까지의 계획, 그리고 두 번째가 1890년대 중반에서 1903년 까지의 계획,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계획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누락되어 있지만 목차에는 제목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폴리에 따르면 세 번째 부분의 제목은 바로 “포위 계획(Der Umfassungsplan)”이었습니다. 본문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이 1904년 이후 대규모 우회 포위기동을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목차의 구성이야 말로 디크만의 연구는 슐리펜이 수많은 계획 변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하는 대규모 포위기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주버는 디크만이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 이유가 모든 음모를 꾸민 참모부 출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결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폴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는 테렌스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인 참모부연습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슐리펜이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1905년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Kriegsspiel), 그리고 소(小)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슐리펜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전쟁계획이 아니며 슐리펜계획은 허구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 주장이 일부 타당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먼저 논쟁을 시작한 테렌스 홈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매우 융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서 주버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주버가 독일군의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참모부연습의 주목적은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보다는 참모부 장교들의 교육훈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인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의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을 인용하여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특정한 작전의 연습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자유롭게 시험하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면 기밀등급이 최고등급인 절대기밀(Streng Geheim)로 분류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 기밀(Geheim)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게다가 기밀등급이 낮을 뿐 아니라 참모부연습 결과를 25개 군단사령부 및 각급 기관에 배포한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 전쟁계획이라면 적국에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시에 잔뜩 뿌려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은 기밀누출을 우려해 유효기간이 지난 기밀문서의 파기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참모부연습은 파기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 문서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기 이전에 수립한 1905/06년도 부대전개계획만 살펴보더라도 슐리펜계획의 기본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1905/06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는 26개 군단과 20개 예비사단을 총 8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주력을 메츠 북쪽에 집결시켜 저지대국가들을 통해 진격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전개계획 II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일부 보강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23개 군단과 16개 예비사단을 7개 야전군으로 편성해 부대전개계획 I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서 벨기에의 철도망을 장악하는것을 중요시해 5개의 기병사단이 신속히 마스강의 철교를 점령하도록 하였습니다.

폴리는 주버의 가장 큰 문제가 주사료인 디크만의 연구를 잘못 해석한데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같은 다른 사료들도 오독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는 것 입니다.


2.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문제

폴리는 사료해석의 문제 다음으로 주버의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계획은 국제정세와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독일의 전쟁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로는 러일전쟁의 결과와 이것이 끼친 영향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피해로 부터 재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결국 양면전쟁의 위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폴리는 이에 대해 앞선 논쟁에서 테렌스 홈즈가 인용한 바 있는 1905년 6월 10일에 슐리펜이 독일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예상 이상으로 약하며 전쟁 결과 더 약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군개혁이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너무 취약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것은 러시아군에 파견된 관전무관들의 보고서였습니다. 폴리는 오토 폰 라우엔슈타인(Otto von Lauenstein)이 1905년 12월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장교단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혹평했습니다. 라우엔슈타인은 러시아군이 이런 문제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다음으로 외교적 상황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1905년의 독일은 러시아를 다시 독일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슐리펜이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리는 1906년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정부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슐리펜도 예방전쟁을 강력히 지지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프랑스와의 포병전력 격차를 우려한 전쟁부 장관 아이넴(Karl von Einem)이 황제와 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폴리에 따르면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러시아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과 단독으로 승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요새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수세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 프랑스가 요새를 강화하는데 맞춰 독일군도 대구경 야포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1905년 시점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노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슐리펜 계획이 작성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의 주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소(小) 몰트케의 전쟁 계획

세번째로는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1905년 이후의 정세 변동입니다.

소 몰트케 취임 초기 독일군의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러일전쟁과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몰트케 초기의 부대전개계획은 슐리펜 말기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결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군의 좌익으로 돌파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는 1906/07년 계획에서 우익의 주력에 23개 현역군단과 11½개 예비군단을 배정하고 이를 7개 야전군으로 편성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각 야전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1군(5개  예비군단)은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여 우익을 엄호, 제2군(4개 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진격, 제3군(4개 군단+1개 예비군단)은 제4군(4개 군단+3개 예비사단)과 함께 리에쥬와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를 공격, 제5군은 지베(Givet)-스당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여 우익의 주력과 제6군과 접촉을 유지, 제6군(5개 군단)은 이 대규모 우회기동의 중심축으로 카리냥(Carignan)-롱귀용(Longuyon)을 잇는 선으로 진격, 제8군(1개 군단+4개 예비군단)은 6군을 후속하여 진격하면서 베르덩 방면에서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견제, 좌익의 제7군(3개 군단+2개 예비군단)은 프랑스군을 정면에서 견제.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세변동과 함께 수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먼저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영향에서 빨리 회복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910년 경에는 독일군 정보당국도 러시아군의 회복을 확실하게 인식하였고 몰트케는 같은해 8월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쓴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신형 야포의 도입을 서두르면서 장교단을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동원체제를 개편하여 부대동원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계획이 완성된다면 동원개시 13일차에 유럽전선에 투입할 병력의 2/3을, 18일차에 전 병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상황이 소 몰트케의 전쟁계획에서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더욱 더 높아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군은 단기간에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루기 어렵기에 프랑스와의 승부를 더 빨리 내야 했다는 것 입니다. 소 몰트케는 프랑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한차례의 결전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다시 돌리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야포 개발과 배치는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취약점은 여전히 좌익에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1912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한적인 보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가 이 지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반면 프랑스군은 보다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다시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독일측은 프랑스가 수세만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좌익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외교적인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고 소 몰트케는 이탈리아군으로 프랑스군 일부를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결국 이러한 변화가 소 몰트케의 계획을 더욱 더 신속한 공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소 몰트케의 1908년 계획에서 좌익의 병력은 8개 군단으로 증강되는 한편 우익의 약화와 함께 장기전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독일의 대외 창구로 삼기 위해서 네덜란드 침공은 계획에서 누락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철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만큼 벨기에의 철로, 특히 철교들을 안전하게 탈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주력인 제1군과 제2군을 합친 60만의 대군이 불과 12마일에 불과한 정면으로 진격해야 했으니 이 제한된 정면에 있는 철도망이 파괴된다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 입니다. 벨기에의 철도망을 신속하게 탈취하기 위해서 1908년 계획에서는 동원 11일차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시했는데 1913년 벨기에가 새 육군법을 제정해 육군 규모를 크게 늘리자 동원 5일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 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에 대한 폴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 몰트케는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을 낮게 평가해 서부전선, 특히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점차 러일전쟁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소 몰트케는 독일이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장을 신속히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를 더 신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력동원과 공격일정을 더 앞당기는 것으로 반영되었습니다.

폴리는 주버가 지나치게 작전 단위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주버의 사료 인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원래는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계속해서 1-8을 연재해야 되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일단 2003년에 들어와 다른 학자들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주버와 홈즈의 논쟁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부터는 주버와 로버트 폴리(Robert T. Foley), 그리고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간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2003년 부터 시작된 테렌스 주버와 로버트 폴리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Here comes a new challanger!!!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독일 군사사를 전공하던 로버트 폴리가 새롭게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폴리는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10-2호에 The Origins of the Schlieffen Pl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폴리의 주된 논점은 슐리펜 계획의 실체는 인정하되 그 형성 시기를 훨씬 이른 시점으로 잡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미 1899년의 전쟁 계획에서 부터 슐리펜 계획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다이믈링(Berthold von Deimling)의 회고록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이믈링은 1900년 중령 계급으로 총참모부에 발령받아 전시 전투서열 작성의 감독과 전시 부대전개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는데 업무가 업무인 만큼 슐리펜의 전쟁 계획 수립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이믈링은 1930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가 총참모부에 발령받았을 때 이미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는 기본 개념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폴리는 다이믈링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계획은 바로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Aufmarschplan I) 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재를 시작 할 때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도 했는데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계획이고 부대전계획 II는 동부전선에 조금 더 중점을 두는 계획입니다. 폴리는 주버와는 달리 부대전개계획 I이 서부전선에 집중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인 조건에서 양면전쟁도 고려한 계획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이 해석은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1899/1900년도 부대전개계획 I은 서부전선에 23개 정규군단, 19개 예비사단, 11개 기병사단, 13개 향토여단(Landwehr brigade)+1개 향토연대를 집중하고 동부전선에는 소규모의 부대만 배치했는데 이것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과 유사합니다.

한편, 슐리펜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을 염두에 두고 1898년 10월에 작성한 대 프랑스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개전 2주에서 3주차에 동원을 완료한 뒤 선제공격을 개시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슐리펜은 독일의 동원 완료는 4주가 걸릴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데 프랑스군의 주공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우회하기 위해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를 거쳐 독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 주력을 끌어들여서 우익의 1군과 2군, 그리고 좌익의 6군으로 양익 포위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1군과 2군은 포위 섬멸을 위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독일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또한 국경의 요새지대를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스위스군은 전쟁준비가 잘 되어 있고 프랑스로 이어지는 유라(Jura) 산맥은 요새화가 되어 있어 돌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먼저 8개 군단으로 구성된 1군과 2군이 마스(Maas)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요새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1군과 2군의 좌익은 3군(4개 군단+2개 예비사단) 이, 우익은 7군(6개 예비사단)이 엄호합니다. 그리고 우익을 엄호하는 3군은 1군과 2군을 후속해 마스강을 도하합니다. 한편 8개 군단으로 구성된 4군과 5군은 자르브뤼켄(Saarbrücken)과 자르부르크(Saarburg)를 잇는 선에 전개해 상황이 유리할 경우 낭시(Nancy) 방면으로 진출, 낭시 동쪽의 요충을 점령한 다음 낭시와 툴(Toul)-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6군(4개 군단+6개 예비사단) 은 상 알자스에 전개해 독일군의 좌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군이 공격해 온다면 동부전선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하면 서부전선에서 증원군을 보내도록 했습니다.
폴리는 이것이 1905년 비망록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익에 12개 군단과 8개 예비사단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다음으로 우익의 우회기동도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것 보다는 훨씬 작아서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선을 우회 포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슐리펜 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포함해 기존의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의 완성 시점을 훨씬 내려 잡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은 해당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정세를 반영한 것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1899/1900년의 부대전개계획과 1905년의 비망록 모두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필자는 먼저 1898/1900년 계획에서는 프랑스가 공격해 올 가능성을 높게 본 반면 1905년 비망록은 그러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1905년 시점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고 프랑스는 러시아 없이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에서 독일군은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의 병력이 더 많아질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계획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1899년의 14호 계획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 19개 군단과 12개 예비사단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독불국경에 병력을 밀집 배치하고 그 좌익을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우회기동을 큰 규모로 실시하지 않더라도 포위 섬멸을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미 1898년에 14호 계획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필자는 이 정보가 슐리펜의  1898년 비망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 지만 프랑스가 1903년 3월 15호 계획을 채택하자 상황이 크게 바뀝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39개 보병사단과 12개 예비사단, 8개 기병사단을 4개 야전군으로 편성했는데 이 중 제4군을 독일군의 벨기에-룩셈부르크 침공을 대비해서 보다 북쪽으로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1905년 시점에서 독일군은 15호 계획에 대해서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프랑스군이 독일군 우익의 돌파에 대응하기 위해 배치한 병력의 규모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독일군의 우익을 더 강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요새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알자스와 로렌의 방어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따라 메츠, 디덴호펜(Diedenhofen, 프랑스 명 티옹빌Thionville), 스트라스부르크의 요새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부터는 신형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요새를 강화하는 공사가 수행되었습니다. 폴리는 국경지대의 요새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그만큼 더 우익의 공세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로버트 폴리는 슐리펜 계획의 기본 개념이 이미 1899/1900년에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테렌스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완성된 시점을 1904년 이후로 보는 것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 입니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안녕하세요.

진도가 참 안나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아직도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2010년 말에 테렌스 주버가 테렌스 홈즈를 비판하는 논문을 또 냈습니다. 한마디로 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초장기 연재가 되겠군요. 일단 지금까지 나온 논문과 책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매우 게으르다는 점도 문제군요.

2003 년 부터는 홈즈 외에도 전통적인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논쟁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지만 이 연재물에서는 논쟁을 시간 순서대로 다루기 보다는 개별 연구자별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합니다. 일단은 현재까지 진행 중인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논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 논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지난번 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에 서는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인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을 소개했습니다. 테렌스 홈즈는 주버의 반론에 대해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대응합니다.

먼저 지난번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테렌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홈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1. 테렌스 홈즈의 주장에 따르면 슐리펜 계획에서 독일군 주력, 즉 독일군 우익이 파리를 우회해서 포위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조직적으로 후퇴할 경우 취하는 최악의 경우였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학설들은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하는 것이 슐리펜 계획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테렌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부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홈즈가 예로 든 21, 22군단과 근위예비군단은 이미 1902년에 서류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이 부대들을 편제에 맞춰 편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슐리펜은 항상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숫적으로 위협적인 규모였으며 슐리펜은 이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상 동부전선을 비워두고 서부에 주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4. 홈즈는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참모부 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 지역이다. 이 시기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 기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5.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과 소몰트케가 입안한 계획은 유사하지 않다.


홈즈는 War in History 10-4에 기고한 “Asking Schlieffen: A Further Reply to Terence Zuber”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주버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서 주력부대가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냐의 문제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군이 선제공격에 나선다면 독일군 주력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슐리펜은 그럴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의 예상 반응에 대해 여러가지 예측을 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프랑스군이 수세로 일관하되 독일군 주력이 메지에흐(Mézières)-덩케르크 선에 도달할 경우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주력이 엔(Aisne)-랭스(Rheims)-라 페레(La Fère)를 잇는 선에 도달했을 때 측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라 페레 방면으로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프랑스군이 조직적으로 철수를 단행할 경우인데 이때는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해 최대한 독불국경 가까운 곳에서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할 기회를 포착하길 원했으며 프랑스군이 새로운 방어선 까지 퇴각하는 것은 독일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여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 계획이 파리 서쪽으로 우회 포위를 실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Oise) 강을 건너는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독일군 주력이 우아즈 강을 도하할 경우 파리 동쪽으로 우회기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것은 프랑스군의 주력이 공세에 나서고 독일군 주력은 우아즈 강을 건너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방어에 주력하면서 조직적으로 철수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주버가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비판한 독일군의 가용병력 문제입니다. 홈즈는 먼저 주버가 지적한 Kriegskorps문제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비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자신이 푀르스터의 연구를 잘못 이해했지만 주버도 푀르스터의 주장과 자신이 잘못 인용한 푀르스터의 견해를 혼동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푀르스터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푀르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0개 예비사단이 있었으나 1906/07년 부대전계계획에는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으로 가용병력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푀르스터의 주장을 교차검증할 사료가 없다는 주버의 비판에 대해서는 독일의 1차대전 공간사(Der Weltkrieg 1914 bis 1918)중 전시동원을 다룬 Kriegsrüstung und Kriegswirtschaft 1권을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독일의 공간사에 따르면 독일군의 예비사단이 1902년에서 1910년 사이에 27개 사단으로 증가했으며 이것은 푀르스터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것 입니다. 또 한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이 971개 대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명시된 52개 현역사단과 27개 예비사단을 대대로 환산하면 970개 대대가 되므로 푀르스터의 주장은 타당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1905년 비망록에서 1906/07년 부대전개계획 보다 2개 사단이 더 많은 53개 현역사단과 28개 예비사단을 명시한 것에 대해서는 전시동원이 이루어질 경우 추가로 편성되는 사단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먼저 1개 현역사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04년에 2개의 Kriegskorps가 해체되면서 여기에 소속될 여단과 연대 일부는 남아서 다른 군단에 분산 배속되었는데 이러한 여분의 부대를 유사시 통합하면 신규 사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자스의 15군단은 1개 보병연대를 더 가지고 있었고 로렌의 16군단은 1개 보병여단을 더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통합하면 1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는 전시에 16군단 예하에 43사단이 편성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리고 1개 예비사단에 대해서는 예비 보병대대들을 통합해 편성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슐리펜은 이 정도 병력도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하는데는 부족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이 시작되는 대로 8개의 보충군단(Ersatzkorps)를 편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도 병력이 여전히 부족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 슐리펜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세초기에는 우익에 23개 현역군단이 투입되고 공세가 진행됨에 따라 좌익에 있던 2개 군단이 추가로 우익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진격이 계속되어 우아즈강에 도달할 무렵 후방은 예비군단과 향토여단(Landwehr-birgade)이 담당하게 됩니다. 우선 안트베르펜 공격에 최소 5개의 예비군단을 투입하고 주력부대가 공격하지 않고 지나간 요새들을 견제하는데 14개의 향토여단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주력 부대의 측면과 후방을 엄호하는데 2개 예비군단과 1개 예비사단, 2개 향토여단을 배정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을 실시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합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8개의 보충군단을 더 편성한다면 이중 6개 군단을 파리 봉쇄에 사용하고 주력인 현역부대들은 우회하면서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8개의 보충군단을 적시에 동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데 홈즈는 슐리펜이 의문을 가진 것은 기술적으로 보충군단 중 몇개를 우익에 투입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된다면 세느강 하류를 도하해 파리 동쪽으로 우회 기동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이 사실상 슐리펜이 총참모장에서 퇴임한 이후 작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부대 운용에 대한 권한이 없는 슐리펜이 보충군단 편성과 같은 신규 부대 편성에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8개의 보충군단 편성은 바로 1904년 참모부연습에서 편제상에 없던 신규부대를 동원한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반박합니다. 즉 슐리펜은 이미 현역시절 부터 유사시 부족한 병력을 신규부대 동원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고스란히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 반영됐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양면전쟁 문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에서 비록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의 취약점이 폭로되었지만 러시아군은 여전히 유럽전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프로이센을 텅 비워두고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에 크게 의존해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과 동부전선에 대한 Aufmarsch II 두가지가 있습니다. 이중 서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 I에서는 동프로이센에 10개 사단을 남기고 주력을 서부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버는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I를 중시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디크만의 연구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양면전쟁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독일군의 부대 전개계획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므로 디크만의 연구는 한계가 있습니다. 홈즈는 주버도 인용한 1905/06년의 계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 동부전선에 10개 사단, 서부전선에 62개 사단을 배치하지만 전쟁이 서부전선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72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 계획에서 81개 사단을 모두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부대전개계획 I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설 역량이 감소했다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면 방어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네 번째로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결전이 아르덴느와 로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홈즈는 이 주장에 대해서 뵈티허(Friedrich von Boetticher)가 1930년에 쓴 ‘근대전쟁의 스승(Der Lehrmeister des neuzeitlichen Krieges)’이라는 소논문을 인용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뵈티허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아 프랑스군이 로렌으로 공격해 올 경우 우익에서 소수의 병력을 차출해 좌익을 증원하는 한편 나머지 병력으로 우회기동을 실시, 랭스와 베르덩 사이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 주력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우익의 주력 부대로 공세를 감행, 파리 동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 작전 56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연습을 종료했습니다. 홈즈는 여기서 첫번째 연습은 바로 우아즈 강을 도하하는 슐리펜 계획의 첫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고 두번째 연습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슐리펜 계획, 즉 비망록에 명시된 두번째 안과 동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05년 11~12월에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주버는 홈즈가 문법적인 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반박합니다. 슐리펜은 마지막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 양면전쟁의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단 주버는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 독일 단독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것 자체가 오독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은 워게임에서 독일이 고립된 상태로 양면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슐리펜은 워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홈즈는 슐리펜도 러시아군이 점차 러일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을 실시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계획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양자 사이에 유사점이 적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몇가지 사례를 들어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1914년 8월 27일 제1군 사령관 클룩(Alexander von Kluck)에 내려진 명령은 진격방향을 남서쪽에서 보다 서쪽으로 돌려 루앙(Rouen)과 망테(Mantes)를 잇는 선으로 진출, 세느강에 도달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것은 파리를 서쪽에서 우회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이것을 소몰트케가 파리 자체를 포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파리를 우회하는 것과 그 자체를 포위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소몰트케는 1911년에 작성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평에서 국경지대의 프랑스 요새선을 무력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익을 최대한 강화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전후에 남긴 저술에서도 확인되는데 이에 따르면 소몰트케는 1914년에 슐리펜이 계획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가 슐리펜과 차이를 보인 것은 네덜란드를 공격하지 않는 것 정도였는데 소몰트케는 네덜란드까지 침공할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그만큼 우익의 타격력이 감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소몰트케는 전후에 펴낸 회고록에서도 이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물론 전쟁 초기 소몰트케는 로렌 지방에 슐리펜의 원래 구상 보다 6개 사단이 더 많은 16개 사단을 배치해 우익을 다소 약화시키기도 했으며 프랑스군 주력이 알자스-로렌으로 침공해 올 경우 우익의 상당부분을 이 방면으로 돌릴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소몰트케가 실질적으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기본 개념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화된 독일군 좌익은 우익의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정면의 프랑스군을 능동적으로 붙잡아두는 임무를 가지고 있엇습니다.
한편, 주버는 독일군의 병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떻게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슐리펜의 원래 계획 처럼 파리를 봉쇄하는 것은 실시할 수 없었고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프랑스군 주력이 후방의 위협을 느껴 (유사시 강력한 보루가 될 수 있는) 파리를 버리게 하고 남동쪽으로 몰아 내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지만 슐리펜의 기본적인 개념은 유지되었다는 것이 홈즈의 주장입니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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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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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주버가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비판에 반박하자 홈즈도 다시 재반론을 합니다. 사실 주버의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는 제목부터 그렇고 내용에서도 도발하는 면이 없지않았는데 홈즈도 새로운 반론에서 날을 살짝 더 세웁니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홈즈는 반박문의 도입부에서 주버가 1914년 여름 소 몰트케가 취한 전략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 대해 비판하는게 아니라 주버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빈정거립니다. 홈 즈 자신은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 비슷하게 우익을 통한 포위기동을 실시하려 했다고 설명했는데 주버는 이것을 싹 무시하고 홈즈는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슐리펜 계획으로 회귀한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 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8월 27일 소 몰트케가 제1군에게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일이 없는데 주버는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멋대로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홈즈의 반론은 처음에 했던 반론과 동일합니다. 주버가 계속해서 사료를 오독하고 자신의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슐리펜 계획이 무조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 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의 계획은 매우 융통성이 강한데 주버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버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는 홈즈가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는데 홈즈는 주버야 말로 사료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초기 부터 우익에 주력을 두고 베르덩-벨포르(Belfort) 를 잇는 프랑스군의 요새선을 포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안에서는 돌파의 중점이 메지에흐(Mézières)-라 페레(La Fère) 방면이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 이지요.

  다음으로는 1905년 비망록에 대한 주버의 주장을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독일군의 병력 부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일단 존재하지 않는 사단으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을 위해서는 80개 보병사단과 16개 보충사단(Ersatz-division)이 필요한데 1905/06년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에는 72개 사단만이 배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이에 대해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일반적으로 해당 년도의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즉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1906년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의 작성은 그 전해의 1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즉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1905년 12월 경에는 이미 1906/07년의 부대전개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에는 26개 군단과 12개 예비군단, 3개 예비사단 등 총 79개 사단이 배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볼프강 푀르스터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이라는 점 입니다. 즉 주버가 선행연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8개 군단에 해당되는 병력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홈즈는 전시에 동원되는 예비병력으로 부족한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슐리펜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슐리펜은 이미 1891년부터 이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전쟁성은 예산 문제로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총참모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8개 군단의 편성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전시에 예비군을 대량으로 동원해 신규부대를 편성할 생각을 했다는 점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습에서 슐리펜은 당시 동원 가능했던 19개 예비사단 대신 16개 예비군단(32개 예비사단)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이 96개 사단이 있더라도 서부전선의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점을 들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일 가능성을 부정했는데 홈즈는 이것도 주버가 전후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8개 보충군단(Ersatzkorps)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의 독일군이며 8개 보충군단만 편성되면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생각하고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면전쟁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슐리펜계획은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에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먹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독일 정보당국이 러시아군의 동원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슐리펜이 가장 신경쓴 것은 러시아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질이었다. 홈즈는 그 근거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러시아군을 평가한 몇 편의 문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이 남긴 문서를 보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대해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작성이 되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모로코 위기 당시 러시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홈즈는 첫번째 반론에서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들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분석하면 슐리펜이 이 무렵부터 우익을 강화해 포위섬멸전을 펼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한 재반론에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 반격을 통해 격파하는 방안을 더 중요시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실시한 뒤 프랑스군을 로렌에서 격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히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할 경우 국경의 요새선으로 퇴각할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 경우 독일은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은 1904년 참모부연습의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강력한 우익으로 포위기동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는 것 이지요.
1904년의 두 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홈즈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두 번째 참모부 연습은 1905년 비망록과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우려한 것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 독일측에서 로렌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공세를 중단하는 것 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지적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오자 우익에서 2개 군을 차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이 맡은 임무는 프랑스군의 2선급-3선급 부대에 대한 견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주버의 해석이야 말로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슐리펜이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우익만 가지고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쵤너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쵤너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라 페레, 랭스 방면까지 공격하는 것이 명백하며 이것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 즉 서부와 동부 양면에서 전략적 방어를 취했던 워게임에 대해서는 주버의 설명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무엇보다 주버가 1905년 겨울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오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의 논평 중에서 “Wir würden demnach zu bekämpfen haben…”이라는 구절을 주버는 "Therefore we will have to fight against..."로 번역하는 오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해석하면 "Thus we would have to fight against..."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슐리펜은 양면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훈련에서 가정한 상황이 모두 현실화 될 경우에 양면전쟁을 치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게다가 슐리펜은 논평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홈즈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이를 위한 실제 전쟁계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