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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2일 일요일

어떤 "민주화"

1945년 8월,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중 있었던 일화랍니다. 협정문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이런 일이 있었다는군요.

중국 공산당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우호동맹조약 초안의 1조에서 소련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부로서 지지할 것을 서약하고 있었는데 스탈린은 여기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국민당 정부가 “중국의 국가적 통합과 민주화”를 이행하는 것을 소련 정부가 확인한 이후에 (1조를 이행한다) 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조장하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이었다. 중국 대표단은 이 조건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되물었다. “여러분은 중국을 민주화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겁니까?”

쑹[쯔원, 宋子文]은 그러한 통고는 중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해명했다. “만약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계속해서 탄압한다면 우리가 중국 정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간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당이 계속 공산당과 싸운다면 우리가 여러분을 진심으로 지지하기가 어려워 질 것 입니다.” 결국 스탈린은 포기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원들은 우리를 저주하겠지요.” 스탈린은 이 문제에 있어 크게 양보했지만 양측은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224~225

사실 제가 쑹쯔원이라 해도 저런 식의 민주화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ㅋㅋㅋ


2010년 11월 21일 일요일

진명행(무명)은 어떤식으로 사기를 치는가?

제 블로그에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은 2년 전에 진명행이라는 블로거가 국공내전에 10만명의 북한군이 참전했다는 주장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논쟁이 심해져서 결국 난장판이 됐는데 나중에는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쓰겠다고 하고는 그동안 썼던 글들을 다 지워버렸지요. 하여튼 진명행이 글을 다시 쓴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2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새로 옮긴 블로그에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올렸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 뿐이라 김이 새긴 합니다만 2년전에 지적하지 못한 오류들이나 지적해 보지요.

먼저 진명행이 북한군의 국공내전 참전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들고 나온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조선인민군 총정치국, 1950)을 살펴보지요. 진명행-무명이 저보고 글을 잘라서 왜곡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을 해대니 진명행의 원 글을 통짜로 올리겠습니다.


누르시면 커집니다

 진명행은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당이라는 용어가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그럴리가 있나요. 이건 전형적인 진명행-무명의 사기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왜나하면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은 북한측이 중국공산당의 문헌을 번역한 자료집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전에 관한 제문헌』에는 세 편의 번역글이 실려있습니다.

1. 자위 전쟁으로써 장개석의 진공을 전승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지시
2. 적을 각개 섬멸할데 관한 지시 :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1946 8 16
3. 중공중앙 1948 7, 8, 9 삼개월간의 경험에 관한 총결

글 세편 모두 성주체가 중국 공산당이죠. 한마디로 진명행-무명은 중국공산당을 지칭하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예시를 조금 들어볼까요.


상식적으로 중공중앙이 작성한 문건에 나와있는 '우리당'을 조선노동당으로 읽는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진명행-무명은 작성주체는 살짝 잘라먹고 저걸 조선노동당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죠.

궁금하신 분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을 제공하고 있으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짧은 팜플렛이니 금방 읽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충격적인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진명행의 추종자들은 눈꼽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쯤되면 사이비 교주가 따로없죠;;;;

사실 외국어자료를 왜곡하는 것이야 외국어를 모르는 분들도 있으니 통할 수 있겠지만 한글로 된 자료까지 잘라서 왜곡하다니 진명행의 사기치는 방식은 참 조잡하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냥 '중국내전에 관한 제문헌'만 치면 나옵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약간 난감한 증언들....

현대사는 다루고 있는 시기의 특성상 글 쓰기를 할 때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키보드를 잘못 치거나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바로 고소가 날아오니 말입니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언론인이 있으면 바로 고소를 때리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자료가 굴러들어와도 함부로 쓰긴 어렵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로는 구술자료가 대표적입니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비사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떠돌고 구술자료의 형태로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종종 문서로 기록되지 못할 만큼 난감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문서의 공백을 메꿔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거나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글쓰는 사람들을 갈등에 처하게 합니다. 욕 좀 먹더라도 이걸 쓸 것이냐 왠지 불길한데 그냥 쓰지 말 것이냐.

한국 현대사는 기묘하게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편입니다. 일단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서를 잃어버린 것이 첫번째 이유 겠지만 현대사의 당사자들이 뭔가 구린 구석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불리할 법한 기록은 최대한 회피하지요.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사자들이 민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다보니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있다 보면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임시정부나 만주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증언들은 기존에 남한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한국측 기록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일본 항복 직후 만주로 파견되어 한인들을 보호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김홍일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게 되자 그의 상관인 두율명(杜聿明)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두율명이 만주의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다고 보고하자 분노한 장개석이 김홍일을 파면해서 난징으로 소환했다는 게 조선족들 사이에 떠도는 버전입니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고 간도특설대와 같이 악명(!!!) 높은 곳에서 복무한 이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증언은 좀 더 난감합니다.

이 와는 조금 다른 경우가 196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증언록입니다. 국방부가 1960년대에 한국전쟁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채록 작업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증언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실 책으로 나와 있는 증언록은 민감한 이야기들이 삭제된 축약본입니다. 1960년대에 채록한 원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문이 필요하며 군사편찬연구소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게다가 복사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요. 받아 적는건 허용되는데 이 방대한 증언록을 노가다로 쳐 넣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도 미공개된 증언록의 일부를 읽은 일이 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더군요;;;; 조선족들의 증언 처럼 신뢰도가 크게 의심되는 것도 아닌 당사자들의 증언이지만 좀 곤란한 내용이 많다보니 역시나 함부로 쓰기가 곤란합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자료는 많습니다만 잘못 썼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쓸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이런 민감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4월 4일 일요일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의 대전차전투 사례 하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을 정리해놓은 『승리』라는 책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말단 사병에서 간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계급의 회고담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그중 북평전투 당시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 군의 포위망 돌파를 대전차팀으로 격퇴하는 내용이 하나 있어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제가 보기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949년 1월 14일, 인민해방군 모 부 제3영(대대)의 전사들은 북평시 광안문 밖의 곽공장 재묘신 일선에서 북평시안에 포위된 적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지초 단장은 적들이 풍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증원한 다음 당고를 거쳐 남쪽으로 뺑소니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3영 지휘부에 전화로 알린 다음 다른 부대와 배합작전하여 풍대를 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단장은 적들의 땅크를 까부시기 위하여 로케트발신관(바주카포)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도원 마부증은 지휘소에 있다가 9련 진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련은 조선족들이 비교적 많은 련이었다. 9련의 진지는 재묘신에 있었다. 북평으로 부터 풍대로 가는 신작로가 재묘신의 옆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을 잘 지키면 적들은 천진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어두움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패(排, 소대)의 전사들은 괭이로 대피호를 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힘차게 괭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조선인 전사 리윤태였다. 교도원은 리윤태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마디 던졌다.

"땅이 대단히 얼었군."

"그래도 우릴 당해내지 못하지요."

리윤태는 괭이끝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비벼 떨구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한창 궁금해 있는데 전사들 앞에 교도원이 나타났으니 물어볼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욱- 모여들었다.

" 교도원 동지, 담판을 한다던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적들이 투항 했습니까?"

어둑시근한 곳에서 서툰 한어로 한 전사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교도원은 "적들은 투항은 고사하고 풍내를 탈취한 다음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적의 이러한 동태를 전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망을 친다! 놈들은 꿈을 꾸고 있구만."

"내 생각 같아선 담판이고 무엇이고 걷어치우고 답새겨야 해(때려야 해)."

교도원이 1패의 작업현장을 떠나 9련 련부에 이르자 리윤태가 따라왔다. 그의 뒤에는 조선인전사 박현길이 따랐다. 리윤태가 교도원을 보고 청을 했다.

"교도원 동지,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땅크를?" 교도원의 반문이다.

" 그렇습니다" 하고 리윤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적의 땅크가 우리의 엄폐호를 파괴할 뻔 했습니다. 놈들의 위풍을 꺾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리윤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군한지 오래서 로전사들처럼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였다. 교도원이 리윤태, 박현길에게 단부에서 이미 로케트발신관을 발급했으며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꼭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무척 기쁜 심정이였다.

15일 이른 새벽이다. 자욱한 안개가 넓은 벌을 뒤덮었다. 적들은 옹근 하루동안 준비하더니 또 발악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광안문 안에서 련이어 3영 진지로 날아와 터졌다. 약 10분 가량 발광적으로 포를 쏘아대더니 뒤이어 땅크를 내몰았다.

로케트발신관 반장 진봉상은 로케트 발신관으로 땅크를 겨누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땅크가 신작로 굽인돌이(커브길)에 나타났다. 진봉상의 로케트발신관 아구리에서 "씽" 하고 불줄기가 뻗어나갔다. 땅크의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땅크는 신작로에 박힌채 꼼짝 못했다.

"명중이다, 명중이다."

전사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적의 땅크 웃뚜껑이 열리더니 한놈이 상반신을 내밀다가 리윤태의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적은 그래도 전진을 중지하지 않았다. 아군의 화력권안에 기여든 적을 발견하자 9련 련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각종 무기가 적들을 향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아군의 포탄들도 수구자와 련꽃못쪽 적진지를 향해 연거퍼 날아갔다.

3영의 정면에는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적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적들은 9련 1패 리윤태네 앞까지 접근하였다. 전사들에게는 반땅크 무기가 없었다. 사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때 리윤태와 박현길이 교도원에게 달려갔다.

"교도원 동지, 제가 가서 저 땅크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윤태의 손에는 수류탄묶음이 쥐여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무들은 잠시 저 작은 다리에 가서 엄폐하고 있으면서 저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시오!"

교도원의 말이 끝나자 리윤태와 박현길은 탄우를 맞받아 다리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적의 땅크도 거의 다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앞에서 오던 땅크가 다리우에 오르자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만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연기가 흩어지자 그놈의 땅크는 계속 이쪽으로 움직였다. 리윤태와 박현길은 어느사이에 땅크 우에 올라섰다. 리윤태가 땅크 웃뚜껑을 열다가 박현길과 함께 땅크에서 떨어졌다.
적의 땅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마구 갈기면서 덮쳐왔다. 두번째 땅크도 다리를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리윤태는 힘겹게 첫번째 땅크 뒤로 부터 기여오고 있었다. 적탄은 사정없이 그의 앞뒤에 박혔다. 그의 솜옷에서 솜이 삐죽삐죽 나왔다. 그는 계속 기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땅크 우로 올라갔다.
갑자기 첫번째 땅크에서 불기둥이 일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땅크는 폭파되어 불덩이로 변했다. 뒤따라 오던 땅크와 장갑차는 앞길이 막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였다.

비록 적들의 땅크는 길이 막혔으나 적의 보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제1패 진지앞에 덮쳐들었다. 7련과 8련도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 이때 단부에서는 1련을 보내왔다. 1련은 오른켠에 있는 개천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덮쳐오는 적들의 길을 차단하였다. 앞의 놈들이 물러가지 못하자 뒤의 놈들도 전진할 수 없게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대포가 노호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들이 적의 땅크무리에,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 속에서 터졌다.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돌격이다. 전사들은 엄폐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하면서 도망치는 적을 족쳤다. 적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사들은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잔뜩 메고 진지로 돌아왔다.

지휘원과 전사들은 리윤태와 박현길이 보이지 않아 속을 태웠다. 진지에서 떨어져 있는 몇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창 안타깝게 찾고 있는데 리윤태와 박현길이 서루 부축하고 쩔룩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다리를 상했다. 특히 리윤태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의 솜바지가 선지피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심한 동통으로 해서 얼굴은 해쓱해졌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었고 머리칼은 새노랗게 그을었다. 교도원이 그의 앞에 다가오자 리윤태는 신작로에 박혀있는 땅크와 늘어져있는 적들의 주검을 가리키며 힘겹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다.

" 교도원동지, 보십시오. 적들은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녁노을은 마치 래일의 맑은 날씨를 알려주기나 하듯 서켠 온 하늘을 피빚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진해방소식이 날아왔다. 북평성 안에 포위된 적들의 환상이 부서졌다.

1949 년 1월 16일,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의 북평수비사령 부작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였다. 아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 밑에 부작의는 저항을 그만둘 결심을 내렸고 북평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조선족역사족적 편집위원회편,『승리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5』 (北京, 민족출판사, 1992), 637~640쪽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장비 부족을 반영하는 것인지 바주카포 팀을 단(연대)에서 예하 부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바주카포는 연대급 단위로 운용되고 있고 소대 단위에서는 변변한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게 안습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군이 공여한 M5 같은 경전차들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국민당군의 전차 종류를 명시하고 있지 않아 아쉽군요. 결국 리윤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전차에 대해 집속수류탄을 사용한 육박공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속수류탄은 1차대전 부터 사용된 꽤 유서깊은(???) 대전차 무기죠. 본문에서 리윤태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병 개개인의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력 타령만 하면 곤란하겠습니다만.

국공내전기의 대전차 전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꽤 재미있는 글 입니다.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오늘 도착한 책 몇권

얼마전 중국 아마존에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습니다. 발송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뒤 9일만에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선박편으로 주문했던 것 중 가장 빨리 도착한 것 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빨리 도착한 게 10일 걸렸고 보통 2주정도 걸렸는데 드디어 배송기간이 한자리수로 내려갔군요.


뭐 언제나 그렇듯 군사서적 위주로 주문했는데 이번에 도착한 서적 중에서 가장 반가운 녀석은 이놈입니다.

『국민당군사제도사(国民党军事制度史)』는 예전에 조금 썼던 국공내전 후반기 국민당군에 대한 글을 이어서 써볼 생각으로 샀습니다. 겨울에 간단하게 써보고 싶은 글 중에 중공군이 3대전역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국민당군이 재편되는 과정에 대한 글이 있거든요. 이 책은 상하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은 육해공군의 전투부대의 편제와 전투서열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고 하권은 후방지원부대, 헌병, 준군사조직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권을 조금 훑어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육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시기별로 잘 정리해 놓아 베껴써먹기 좋은것 같습니다.


『국민당 역사상의 158개군(国民党历史上的158个军)』은 중화민국 수립부터 국공내전이 종결될때 까지 편성된 국민당군의 군(군단급)단위 부대들의 부대사를 간략히 정리한 서적입니다. 역시 국민당군의 재편성 과정에 대한 글을 쓸때 참고하려고 샀습니다.
예전에 글을 쓸때 국민당군의 편성에 관해서는 주로 『국민당군간사』를 참고했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이 늘어나는건 괜찮은 일이지요.

이것들 말고는 모두 인민해방군에 대한 책인데 나중에 따로 소개를 하던가 하겠습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회해전역 패배에 대한 장개석의 반응

장경국이 쓴 장개석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해전역이 종결될 무렵 장개석의 반응을 서술한 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회해전역은 국민당 직계 군이 대규모로 괴멸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 계기를 만든 중요한 전역인데 장개석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는 꽤 궁금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장경국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담담했던 모양이더군요. 과연 실제로 그랬을지는 조금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구청천(邱淸泉) 사령관이 오늘(1월 9일) 전쟁터에서 전사 했다. 지난해 11월 22일 황백도(黃伯鞱) 장군이 서방회전에서 전사한 이래로 우리 군의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두율명(杜聿明) 부대 역시 근일 정세가 몹시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군이 서주에 저장해 두었던 화학포탄을 미리 폐기하지 못한 관계로 공산군이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 진지를 파괴하고 많은 장병들을 참살시켰으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영성(永城)과 숙현(宿縣) 사이의 청룡집(靑龍集)과 진관장(陳官莊) 지구의 두율명 부대는 이미 반격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버렸다. 아버지는 두(杜), 구(邱) 사령관의 전보를 받고는 전국이 절망 상태임을 판단하고 그들을 데려올 비행기를 보냈다.
두율명 부대가 격파를 당한 뒤 아버지는 일기에 그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율명 부대가 오늘 아침 태반이 공산군에게 격멸된 모양이다. 보고에 따르면 그래도 3만 명이 진관장 서남에서 포위망을 뚫고 있다는데 무사히 탈출했는지 말할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내가 여태 남들의 강압 때문에 인퇴를 할 수 없다고 버텨 온 것도 실은 이 두율명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내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어야 하고 근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면, 한편 마음이 태연해 지기도 한다.

蔣經國 著/金學主 譯, 『풍운 80년의 나의 아버지 蔣介石』, 澈文出版社, 1976, 183~184

주력군이 붕괴되어 남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되었는데 마음이 태연해 진다니(;;;) 확실히 장 총통 각하도 대인배는 대인배인 모양입니다. 장경국이 인용한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장개석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짧은 글을 두 편 썼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하얼빈지방검열부 통신검열월보' 1942년 11월호를 읽다보니 좀 재미있는 단체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天津猶太國復興運動結成委員會


중국에도 유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시오니즘 운동이 없지는 않았겠습니다만 2차대전이 발발한 와중에 독일 동맹국의 점령지역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건 좀 깨더군요.

예전에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를 읽다가 국공내전 와중인 1948년에 만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독일인들을 독일로 송환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을 읽고 재미있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그것 보다 약간 더 특이한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문제에 대한 반론

이젠 배가 산 꼭대기로 올라간 느낌이지만 진명행님의 반론이 있었으니 거기에 대한 답을 할까 합니다. 진명행님의 반론은 지난번 글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1. ISNK nr.28에 대한 반론

진명행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논점흐리기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 문제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지 미군이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아니었거든요. 제가 지적한 문제와는 다른 성격의 문제로 저를 비난하고 계십니다. 진명행님의 블로그에서 캡쳐한 아래 부분을 보시지요.


진명행님은 이상하게도 저의 핵심 주장이 담긴 윗 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있습니다. 굳이 반론을 하고 싶으시다면 아래와 같이 잘라야 정상이죠.


앞으로 계속되는 진명행님의 비난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제가 원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의 문제점은 비켜가고 엉뚱하게 미군의 분석으로 이야기를 돌리고 있습니다.


2. ISNK nr.30에 대한 반론

저는 진명행님이 이 글을 언급하시기에 그 동안 쭉 해왔던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가 nr.30을 오역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반론글을 보시죠.


아니. 제 해석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해석이 틀리지 않았으니 이 부분은 어물쩡 넘어가고 엉뚱한 꼬투리를 잡아 비난을 하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진명행님은 제 해석이 틀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실토하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분은 처음 봅니다.;;;;

다음으로, 제가 고의적으로 뒷 문장을 잘라내 내용 왜곡을 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저는 고의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아님의 글 “다른 해석의 가망성”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뒤의 문장 “A 2,000,000 man goal was evidently intended as propaganda since both soviet and peoples Committee officials have stated privatelly that an army of 500,000 was the actual goal”을 언급했습니다.


이 문장을 은폐할 거라면 왜 다른 분의 블로그에 가서 이 이야기를 꺼냅니까? 저는 그런 한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본문에 넣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똑같은 신뢰성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진명행님은 북한이 이미 1947년 초에 50만을 징병하려 했다는 것은 믿으십니까?

그나 저나 진명행님께서는 그 동안 제가 ISNK nr.30을 오역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시더니 이제는 아무 해명도 없이 저와 같은 해석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동안 제게 했던 공갈은 다 거짓말 이었군요.

궁금한 것이 진명행님께서는 예전에 ISNK를 읽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오역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 입니까? ISNK를 읽었다면 오역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예전에 읽었다는 것도 거짓말 입니까?


3. ISNK nr.35에 대한 반론


아니. 결국 또 원점으로 돌아오는 군요. 이미 1947년에 훈련병을 포함해 125,000명이 있었다면 왜 1949년 여름까지도 북한군 병력이 8만 수준밖에 안 됐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ISNK의 내용을 ISNK로 검증합니까?


4. ISNK nr.36에 대한 반론


별표까지 쳐 놓은걸 보니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아주 기쁘셨던 모양입니다. 이 부분에서 진명행님께서는 1947년 5월에 제8종대 소속의 22, 23, 24사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진명행님의 글에 댓글로 지적했듯 제8종대는 1947년 8월에서 9월에 걸친 부대개편 기간 동안에 편성되었습니다. 5월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부대를 억지로 가져다 맞추시는군요. 그리고 Column을 어떻게 종대로 해석하냐고 하시는데 ISNK nr.36에 나오는 23rd Column에 대한 설명을 보지요.

23rd Column – This unit has been held mainly in reserve. It is up to its full strength of 90,000 and is at present engaged in training and rear area guard duty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병력이 90,000명이나 되는 사가 있습니까? 저런 문장이 나온다면 보다 상위 제대인 종대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1947년 5월 동북민주연군에는 병단(兵团)이나 군(军)급 편제가 없었으니까요.

다음으로는 다시 제8종대의 실재 여부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먼저 중국국방대학에서 출간한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解放军出版社,1983/2003)의 부록에 실린 1947년 6월 당시 동북민주연군의 전투서열에는 소속 부대가 다음과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종대 - 1종대, 2종대, 3종대, 4종대, 6종대
동북민주연군 직할사 - 독립1사, 독립2사, 독립3사, 독립4사
동북민주연군 직할대 - 기병사령부, 포병사령부

ISNK nr.36이 나오고 한달이 지난 뒤에도 제8종대는 편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张明金, 赵功德의 『中国人民解放军 历史上 70个军』(解放军文艺出版社, 2006), 328쪽에 따르면 제8종대는 7, 9, 10종대와 함께 1947년 8~9월에 걸쳐 편성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으니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진명행님은 바로 삭제하더군요. 이유는 본인의 마음이랍니다.;;;;;;


어쨌건 제가 위와 같이 반론을 달았더니 진명행님 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셨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시는군요. 그런데 진명행님 본인의 블로그에서는 제 댓글을 삭제하고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다시더군요.


그것 참.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게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겠다는 것 이었습니까.;;;;; 진명행님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입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진명행님의 “북한군 국공내전 참전...국내, 해외 신문자료”라는 글에 진명행님이 다신 댓글입니다.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기뻐하시는 진명행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진명행님이 예측하셨듯 저는 신문기사는 오보가 많으니 당연히 신뢰도를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진명행님이 인용하신 언론보도들의 내용을 입증해 줄 직접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진명행님이 퍼오신 신문보도의 신뢰도는 급강하합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심심하니 관련보도들의 신뢰성을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는 방법도 써봐야겠지요. 진명행님이 북한군의 중국내전 참전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문기사의 신뢰도를 평가해 보지요.

저도 할 일이 많으니 진명행님이 퍼온 자료 중 웹에서 간단히 퍼올 수 있는 동아일보 기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검색창에 임표를 넣고 검색하면 자료의 종류별로 분류가 됩니다. 연속간행물에는 173건의 정보가 있군요. 이제 연속간행물을 클릭해 보지요.


몇 번 클릭하면 진명행님이 퍼 온 동아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확대해 보지요. 아하.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로군요.


자. 그러면 진명행님이 퍼온 동아일보의 기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침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의 바로 밑에도 임표 관련 기사가 있군요. 이 기사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으앗! 정말 충격적입니다.

林彪將軍被殺!!!



확대해도 몇몇 글자가 잘 안보이긴 합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한편, 중공 측 임표(林彪) 장군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반전적(反戰的) 부하에게 사살(射殺)되였다는 보●는 사실이다.”

아앗! 국민당군의 정보부 발표를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임표는 벌써 1946년에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971년에 사망한 임표는 가짜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당시의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던 동아일보의 기사는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정보력이 취약해 국민당 정부측의 선전에 의존하던 당시 한국 신문들의 국공내전 기사의 신뢰도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신문들은 회해전역 초반에는 국민당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내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단편적인 신문기사들이 역시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ISNK의 정보를 입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진명행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아래의 글과 관련해서 내용 보충을 하지요.

우선 진명행님이 토론중에 하신 주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세기와 더불어』에 수록된 북한의 중국 지원관련 내용을 아무 근거 없이 김일성의 허풍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관련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북한식 표현 그대로 입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주보중을 몇 번 만났습니다. 두 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 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 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 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 무렵 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 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261~262쪽

이 뒤에는 왕일지가 북한을 방문해 부상병의 피난과 전략물자의 소개 문제 등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신발을 보내줬다는 내용도 있지요.

진명행님은 이종석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나와 있듯 1946년에 이미 25만에 달하는 조선계가 국공내전에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만약 김일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명행님이 주장하신 것 처럼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의 북한군이 참전했을 경우 국공내전에서 싸운 조선계 군인은 총 35만 명에 달하게 됩니다.

※ 참고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계 군인의 규모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63,000명 수준입니다.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니 『세기와 더불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실린 내용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입니다.

다음으로, 역시 북한이 국공내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지금 중국의 정치정세는 좋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중국인민은 장개석 국민당군대와 반혁명세력의 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에서 성과를 확대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조만간에 승리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방 후 수차에 걸쳐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으며 무기를 비롯하여 필요한 전략물자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방조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 입니다.

「북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대표들과 한 담화」(1947년 9월 3일) , 261쪽, 『김일성전집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한 구체적인 시기도 모호하고 몇 명이나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그리고 이게 전투병력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지원이라는 표현 그대로 의료인력 등 전투지원을 위한 인력을 보냈는지도 모호합니다. 이런 몇 줄의 문장으로 수 만명 규모의 전투병력이 파병됐다는 ISNK의 정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진명행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종석이 아무 근거 없이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진명행님께서는 어떤 점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증언을 신뢰하십니까?

국공내전에 "조선의 아들딸"들을 지원했다는 김일성의 발언

아래의 글에 이어지는 추가 글 입니다.

진명행님께서 그만 하기를 원하시지만 진명행님께서 ISNK의 북한인민군 파병의 근거로 김일성의 발언을 인용하셨으니 여기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92년에 간행된 김일성 전집 8권에 실려있는 관련 내용을 올려 보겠습니다. 이것은 김일성이 북한인민군을 지원했다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글 입니다.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들은 중국 동북해방전투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금주, 사평 해방전투들에서 조선의 아들 딸들이 피를 흘리며 숭고한 국제주의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장춘 해방전투에서 박락권 동무가 지휘하는 부대가 커다란 공훈을 세운데 대하여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락권 동무는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나와 만난 주보중 동무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조선인 부대들은 동북민주련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전투업적은 중국인민들 속에서 훌륭한 모범으로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인민해방군 부대 내에 있는 조선동지들이 전투에서 돌격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인민은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주고 있는 조선인민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국제주의적 임무이다. – 림춘추와 한 담화 1948년 10월 23일」, 『김일성전집』 8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385쪽

여기서 장춘 해방전투에서 전사한 박락권(朴洛權)이 국제주의 위업에 충실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 딸의 대표 사례로 인용됩니다. 그런데 박락권의 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박락권은 장춘 전투에서 길동 경비 1려의 제1단 단장이었습니다. 즉 연대장이었습니다. 길동 경비 1려는 연변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로 북한 인민군과는 관련이 없는 부대인 것 입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마치 박락권의 부대가 북한에서 만들어진 부대인 것 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길동 경비 1려는 뒤에 동북군구의 독립 1사 1단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47년 8월에는 30사 89단으로 개편됩니다. 이 연변조선족 부대는 마지막으로 47군 141사로 통합됩니다. 47군 141사는 임표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소속 부대였습니다.

예. 진명행님이 북한군 참전설의 근거로서 언급한 임표 지휘하의 조선인 부대가 바로 이 부대입니다.

북한공산군이 아닌 연변조선족부대…

하지만 김일성 전집의 김일성 발언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는 점에서 좀 나은 편입니다.

김일성의 공식 발언이 나오고 나니 북한 당국에 의한 역사 왜곡이 시작됩니다.;;;; 다음의 글을 보시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 부대 장병들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데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장춘, 길림, 사평, 금주, 심양 해방전투들에서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주체35(1946)년 4월에 있은 1차 장춘해방전투에서 박락권이 인솔한 2만여명의 조선인 사단은 적의 대부대를 견제하고 있던 최광 부대의 후원 하에 장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 도당이 위수사령으로 틀고 앉아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1만 수천명의 적을 살상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 련대장은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오의 앞장에서 부대의 공격을 지휘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 19 – 세계혁명의 새로운 길 개척』,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155

박락권이 지휘한 부대가 졸지에 2만명의 사단으로 둔갑했습니다.;;;;;

김일성이 국공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의 아들딸들을 보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구자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김일성은 박락권 부대와 같이 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를 마치 북한에서 만들어 보낸 것 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역사서는 1개 단으로 정규편제의 연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선족 부대를 『김일성 동지의 의도를 높이 받드는 2만명의 사단』으로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ISNK의 신뢰성도 문제인데 진명행 님께서는 신뢰성이 의심되는 ISNK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역시나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찬 북한의 주장을 근거로 세우신 겁니다.

진심으로 유감스럽지만 역시 아래의 글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1.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부분 인용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2. 진명행님은 김일성 전집 등을 읽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김일성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을 발췌했다.

둘 중 어떤 것이던 진명행님은 블로그의 방문자들을 속이신 겁니다.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북한인민군의 만주 파병에 대한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의 정보문제

요 며칠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의 블로그에서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 주장을 하고 있어서 뭔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나 했더니 역시나 거의 20년은 된 쉰 떡밥이더군요.

처음에는 간단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론하면 이해를 하시려나 했는데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관련 자료라고 글을 하나 올려 주셨는데 당시의 동아일보 같은 신문기사더군요;;;; 군사정보의 내용을 당대의 카더라 통신 수준의 신문기사로 검증하겠다는 사람은 정말로 처음 봤습니다. 정말 진담입니다. 학술대회에 진명행님 같은 자료를 들고 나간다면 개그콘서트가 된다에 500원 걸겠습니다.

물론, 중국측이 북한인민군의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당연히 제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인정할 것 입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제한적 자료의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 해 보지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요.

결국 배가 산으로 가고 말았으니 원점에서부터 정리를 해야 겠군요.

진명행이라는 분이 처음에 북한인민군의 국공내전 참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주한미군정보참모부에서 발간한 북한정보요약(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이하 ISNK)의 내용이었습니다. 진명행이라는 분 께서는 북한정보요약에 실린 북한군 관련 내용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논지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ISNK에 실린 북한의 군사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해당 정보 보고서에 실린 북한군 병력현황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진명행님께서는 ISNK가 추산한 북한군의 참전 병력규모를 신뢰하고 계시니 ISNK의 북한군 병력관련 통계가 높은 신뢰도를 보인다면 그만큼 진명행님의 주장도 신뢰도가 높아지겠지요.

ISNK는 주한미군의 정보참모부가 작성했기 때문에 군사문제에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군사력 항목은 소련군과 북한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나뉘며 북한군은 다시 정규군(Peoples Army), 철도경비대(Chol To Kyung Bi Dai) 등 세부 항목으로 나뉩니다. 각 항목에 해당되는 정보는 엄격히 분류되어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명행님의 주장에 나타나듯 북한군의 대규모 만주 파병이 시작되었다는 1947년의 북한군 병력 통계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당시 미군이 수집하던 병력 관련 정보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먼저 들지요.

Information received during the period has tended more than ever to fall into two types, that from comparatively reliable source indentifying those individuals groups which are definitely CCP, and the more alarmist type of statement concerning huge concentrations of Communist Troops. An example of this latter type was the report that an army of 86,000 men had been concentrated on the 38th parallel alone and of this number, 50,000 wore named as CCP troops.

본 보고서의 분석 기간 중 접수된 정보들은 양 극단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정보에서는 중국공산당임이 분명한 개별 집단이 나타나며 보다 기우에 가까운 정보는 대규모의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정보 중에는 86,000명에 달하는 공산군이 38선 인근에 집결했으며 이 중 50,000명이 중국공산군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28 For Period of 01 January 1947 to 15 January 1947, p.4

1947년 1월에 중국공산군 5만 명이 38선 인근에 집결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이렇게 극과 극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관련 정보분석은 최대한 신중히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NK의 북한군 병력 현황 분석은 황당한 수준입니다. 이제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지요.

c. Conscription : The initial conscription program called for the drafting of a force to be taken from various sections of the population as follows : city dwellers – 800,000; farmers – 500,000; students – 400,000; labor unions – 300,000

징병 : 다양한 계층을 징집하는 최초의 징병 계획이 선포되었으며 내역은 다음과 같다. 도시 거주자 800,000명, 농부 500,000명, 학생 400,000명, 노동조합 300,000명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0 For Period of 1 February 1947 to 15 February 1947, p.13

1947년 2월에 북조선 정부가 200만명의 징병계획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경천동지할 일 입니다!

다음은 조선인민군(!) 이야기입니다.

General Comment on Peoples Army

(중략)

This Army, consisting of three major commands each containing from three to seven subordinate “Divisional” level units, has a strength which in conservatively estimated at 125,000

인민군에 대한 총평

인민군은 각각 3개에서 7개의 사단 급 부대가 소속된 세 개의 주요 사령부로 구성되어있으며 병력은 신중히 평가하더라도 125,000명으로 추정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5 For Period of 15 April 1947 – 30 April 1947

1947년 4월 시점에서 “인민군”만 125,000명이라고 신중한(conservatively) 분석결과를 내 놓고 있습니다. 참고로 1947년 5월 경 인민군의 전신인 인민집단군은 제1 경보병사단, 제2 경보병사단, 제3 독립혼성여단의 세 개 부대 뿐이었습니다. 의문이 나시거든 장준익 등 인민군에 대한 국내 연구를 참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보고서를 보시죠.

e. Strength of North Korean “Army”

(중략)

There is no doubt that a total of 125,000 trained man has been reached and possibly far surpassed, however the present location of these trained men is admittedly obscure

4-e. 북한군의 병력

훈련받은 병력이 125,000에 달하는 것은 틀림없으며(no doubt)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병력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아!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된 북한인(North Koreans)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Percentage of North Koreans in CCP units

As of 1 April, all columns, ie, 22d, 23, and 24th, of the CCF in Manchuria had in their ranks 15~25% Soviet trained North Koreans.

4월 1일 기준으로 만주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의 22종대(纵队), 23종대, 24종대를 포함한 모든 종대는 각 부대별로 소련이 훈련시킨 북한인 15~25%가 포함되어 있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 May – 15 May 1947, p.12

이야. 드디어 나왔군요!

그런데 22종대, 23종대, 24종대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에는 없는 “유령 부대”입니다.

아하! 북한 인민군은 존재한 적도 없는 인민해방군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것이로군요. 그래서 10만 명이나 참전했는데 그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제 다음 보고서로 넘어가지요.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1947년 5월까지 인민군은 총 125,000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의 보고서는 충격적인 정보분석을 내 놓습니다.

3. The Total Strength of the Forces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These figure were also furnished by Source PUKTO

Bo An Dai (including the Chol To Bo An Dai) : 30,000
Chol To Kyung Bi Dai(Railway Constabulary) : 20,000
Soo Sang Kyung Bi Dai (Coast Guard) : 12,000
Total : 62,000

Note : PUKTO did not have figure available on the Fire Brigade, but estimated that they did not exceed 5,000
Total : 67,000 Dept. Int. Affairs.

Total Force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Bo An Kan Boo Hul Yun So : 306,000
Force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Affairs : 67,000
Total : 373,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36 For Period of 15 June 1947 – 30 June 1947, Incl #1, The Evolution of the Armed Forces of the 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August 1945 – June 1947 p.16

이거 정말 충격적입니다. PUKTO라는 암호명의 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의 무장력은 내무성 산하 부대를 제외하고도 무려 306,0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병력이 18만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자. 다음에는 다시 북한 인민군의 만주 파병 건입니다.

1. CCF-North Korean People’s Committee Mutual Assistance Pact

(중략)

(d) 60,000 North Korean troops to be shipped to Manchuria by the end of July

1. 중국인민해방군-북조선인민위원회간 상호조약

(중략)

(d) 60,000만 명의 북한군을 7월 말 까지 만주로 파병한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4 For Period of 1 September 1947 – 15 September 1947, p.18

보시다시피 60,000만명의 북한군이 7월까지 만주로 파병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북한군의 병력이 약 30만명이니 이후의 보고서에는 북한 인민군의 병력이 24만명은 되어야 정상입니다.

북한군 병력에 대한 다음 번 보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 Strength of the People’s Army

(중략)

It is not believed possible at this time to alter the estimate of 125,000 People’s Army troops under the control of or available to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현재로서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통제하에 있는, 또는 동원가능한 인민군의 숫자가 125,000명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5 For Period of 15 September – 30 September 1947, p.13

네. 결국 6월의 보고서에 나온 인민군 30만명은 틀렸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만주로 파병된 병력에다가 7월에 파병되었다는 6만 명을 빼면 북조선에는 도데체 어느 정도의 인민군이 있는 걸까요?

자. 이제 다음달의 보고서를 보지요.

3. People;s Army Fiscal Matters

(중략)

First Center (Division) – 65,000
Second Center(Division) – 55,000
Third Center(Independent Mixed Brigade of Division) – 45,000
Pyongyang Academy – 3,000
Staff School – 3,000
Central Guard Unit – 2,000
Battalion Department – 2,000
Total – 175,000

Intelligence Summary Northern Korea Nr.46 For Period of 1 October – 15 October 1947, p.10

네. 전투서열은 정확하게 1사단과 2사단, 3독립여단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력은 1사단이 65,000명, 2사단이 55,000명, 3여단이 45,000명이고 총 병력은 175,000명입니다. 한 달만에 인민군의 총 병력이 5만명이나 늘어났군요.

지금까지 제가 간단히 정리해 놓은 북한인민군 병력 통계에 대한 ISNK의 분석을 보셨다면 제가 왜 여기 나온 정보들에 대해 극도로 의심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병력 통계가 한 달만에 5만, 많으면 15만씩 바뀌는데 이걸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북한군이 포함되었다는 중국군 부대는 실재하지도 않는 보고서 상의 부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점을 검증할 중국 자료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외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글에 대한 토론에서 제가 진명행님께 북한군 총 병력이 17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진명행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자. 그런데 진명행님의 답 글을 주목하십시오. 이 답 글은 진명행님이 ISNK를 직접 읽고 분석한 것이 아니라 백학순의 논문 「중국내전시 북한의 중국공산당을 위한 군사원조 – 북한군의 파병 및 후방기지 제공」에 달린 각주 38번을 그대로 올린 것 입니다. 백학순의 논문에 달린 각주 38번을 한번 보실까요?

북조선 인민위원회 재정국 소속으로서 1947년 6월까지 북한군 주요 부대의 월별 지출표 작성을 담당하였던 한 미군 정보원에 의하면, 지출표에 의한 북한군의 숫자는 1947년 2월부터 6월까지 173,000명이었다고 한다.(ISNK, no.46. p.10) 이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때까지 만주에서 중공군과 함께 북한으로 퇴각한 조선 의용군 병사들의 숫자(약 50,000 내지 70,000명, ISNK, no.30 p.6)와 북한에서 같은 해 4월부터 만주로 파병하기 시작했던 북한 병사들의 숫자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커밍스는 만주 파병 북한 병사의 숫자를 100,000 내지 150,000명으로 잡고 있다.

이 각주 38번에서 언급하고 있는 ISNK, no.46. p.10의 통계는 제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보고서에 나와 있는걸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보고서의 통계 변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백학순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자신의 상상으로 저 통계를 해석한 것 입니다. 백학순의 연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죠. 그리고 진명행님께서는 ISNK의 통계는 전혀 보지 않고 백학순의 각주에 달린 해석을 그대로 베낀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1. 진명행님은 실제로는 ISNK는 읽지도 않았고 그냥 백학순의 글만 베꼈다.

2. 진명행님은 ISNK의 통계를 모두 검토했으나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백학순의 해석만 인용했다.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 진명행님께서는 대놓고 거짓말을 하신 것 입니다.

제가 왜 진명행 님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당대의 정보문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이글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습니다. 미국측의 정보문서를 토대로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글의 토대가 된 미국측 정보는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당대의 단편적인 정보문서들은 정확한 것도 많지만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도 역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1급기밀문서인 NSC 8에는 1948년 4월 당시 북한 인민군이 125,00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은 불과 2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에 불과했지요;;;

당대의 정보문서를 읽을 때는 다른 자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데 미국측 정보문서를 제외하면 북한 인민군 10만이 국공내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당장 국공내전 전 기간 중 인민해방군에 참여한 조선계는 모두 합쳐봐야 63,000명 수준입니다.;;;; 그리고 10만이나 되는 인민군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국공내전에 대한 중국쪽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조선족 참전이 아닌, 북한 국적의 인민군이 대규모로 참전했다는 중국측 기록은 없습니다. 10만명이 참전했다면 당연히 부대단위로 참전했을 텐데 당장 동북지역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전투서열을 분석하더라도 북한에서 유입된 인민군 부대를 찾아볼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부정확한 정보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이 글은 지난 번에 올렸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을 보충하는 글 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간단히 전체 사단 중 몇 개 사단이 중앙군 계열 이냐만 이야기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단이 어떤 계열인지는 설명하지 않아서 여기에 궁금증을 가진 분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리한 표를 하나 올립니다. 지난번 글에서 중앙군 직계 부대를 분류할 때 약간의 오류가 있었는데 그것도 덤으로 수정했습니다.

아래의 표는 지난번 글에서도 인용했던 曹剑浪의『国民党军简史』,下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 입니다.


위의 표에서 112, 152师는 반직계 사단이기 때문에 기타로 분류했습니다. 112师는 원래 동북계, 152师는 광동계 부대였는데 중앙군으로 편입된 사단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글 에서는 제6병단의 8师, 99师를 기타로 분류했었는데 다시 찾아 보니 이 두 사단도 중앙군 직계 사단이더군요.

사단급 제대에 비해 군단급(军) 제대의 계통은 간단한 편 입니다.

원래 사천계에서 중앙군으로 넘어온 반 직계의 44군과 사천계의 41, 47군, 서북계의 55, 68, 59, 77군을 제외하면 모두 중앙군 직계 军입니다.

※ 덤으로, 1945년의 독일군 전투서열도 나름 막장으로 알고 있는데 국공내전 말기의 국민당군 전투서열도 만만치 않더군요. 사단장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단이 수두룩 하니 말이 안나올 정도입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그냥 잡담입니다. ^^

첫 번째 잡설. 국민당군의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에 대한 것 입니다. 원래 sonnet님의 글, “회해전투 당시 사단 무장”을 읽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트랙백 해야 겠다 하다가 건망증으로 잊어 버리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는 군요.

1947년 중순 3각 편제로 편성된 일반적인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인민해방군의 군단급 부대인 종대(纵队)의 장비현황도 같이 올려 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의 한 등급 높은 부대 조차 장비와 화력에서 국민당군 사단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인데 50mm박격포와 경기관총에서는 격차가 그나마 적다는 점 입니다. 국민당군에 비해서 중화기는 부족하지만 경장비는 그럭저럭 충실한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국민당군 보다 장비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인민해방군은 차량 같은 경우는 아예 보유하고 있질 못 합니다.

두 번째 잡설. 회해전역(淮海战役)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사단급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2병단 : 사령 구청천(邱淸泉)
-제5군 : 45사, 46사, 200사
-제70군 : 32사, 96사, 139사
-제74군 : 51사, 57사, 58사
-제12군 : 112사, 238사
-제72군 : 34사, 233사, 122사
-제116군 : 287사, 288사
기병 제1여
독립여

제6병단 : 사령 이연년(李延年)
-제99군 : 92사, 99사, 268사
-제39군 : 103사, 147사
-제54군 : 8사, 198사, 291사
-제96군 : 141사, 212사

제7병단 : 사령 황백도(黃百韜)
-제25군 : 40사, 108사, 148사
-제63군 : 152사, 186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00군: 44사, 63사
-제44군 : 150사, 162사

제13병단 : 사령 이미(李彌)
-제8군 : 42사, 107사, 237사
-제9군 : 3사, 166사, 253사
-제115군 : 39사, 180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6병단 : 사령 손원량(孫元良)
-제41군 : 122사, 124사
-제47군 : 125사, 127사

제12병단 :사령 황유(黃維)
-제10군 : 18사, 75사, 114사
-제14군 : 10사, 85사, 83사
-제18군 : 11사, 49사, 118사
-제85군 : 23사, 110사, 216사

제4수정구(绥靖区) : 사령 류여명(劉汝明)
-제55군 : 29사, 74사, 181사
-제68군 : 81사, 119사, 143사

제3수정구 : 사령 풍치안(馮治安)
-제59군 : 38사, 180사
-제77군 : 37사, 132사

독립 제107군 : 260사, 261사
독립 제20군 : 133사, 134사

이상의 전투서열은 중국 국민당군의 구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개석 직계부대와 군벌 계통 부대가 뒤섞여 있는 잡탕이란 점이죠.
회해전역에 투입된 국민당 군의 총 77개 사단 중 장개석 직계, 즉 중앙군 직계 사단은 46개 사단입니다. 원래 동북군계에서 장개석 쪽으로 넘어온 112사와 광동계에서 넘어온 152사를 중앙군 계열로 분류하면 48개 사단이군요. 여기에 기병 1여가 중앙군 직계이니 장개석 직계의 부대는 총 48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됩니다. 나머지 32개 사단은 국민당이 아니라 다른 군벌 소속 부대로 장개석 쪽에 붙은 사단이 되겠습니다.
다시 각 병단 별로 중앙군 직계 사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병단 : 총 16개 사단, 2개 여단 / 중앙군 직계 13개 사단, 1개 여단
제6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9개 사단
제7병단 : 총 11개 사단 / 중앙군 직계 5개 사단
제13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7개 사단
제16병단 : 총 4개 사단
제12병단 : 총 12개 사단 / 중앙군 직계 11개 사단
제4수정구 : 총 6개 사단
제3수정구 : 총 4개 사단
독립 제107군 : 총 2개 사단 사단 / 중앙군 직계 2개 사단
독립 제20군 : 총 2개

중앙군 직할 사단의 숫자로 보면 구청천의 제2병단과 황유의 제12병단이 실질적인 주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병단은 중앙군에 광동계(粤)와 사천계(川) 사단이 뒤섞여 있었고 16병단은 4개 사단 전체가 사천계, 그리고 제3수정구와 제4수정구는 모두 서북계, 독립 제20군은 모두 사천계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자체도 국민당 직계에 잡다한 군벌 부대를 긁어모아 완성한 것이었고 이런 난감한 구조는 중일전쟁을 거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롬 첸(陳志讓)이 재미있게 지적한 것 처럼 중국의 상황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했는데 장개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었던 것 이죠.

다시 회해전역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민해방군의 제 1단계 공격으로 괴멸당한 황백도의 제7병단은 서북군벌인 풍치안의 제3수정구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해방군에 가담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됩니다. 제3수정구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동성에서 우위에 있었던 제7병단은 어이없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도보로 추격해온 인민해방군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만약 제3수구의 반란이 없었다면 제7병단은 예정대로 철수를 마쳤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퇴로가 차단된 제7병단은 서주방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합니다만 서주에서 증원 나온 제2병단과 제13병단의 지원공격도 반란을 일으킨 제3수구에 인민해방군 산동병단 소속의 3개 종대가 증원되면서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제7병단은 그대로 전멸해 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벌부대가 다수 섞여 있어 전투력이 떨어졌던 것이 제7병단이 돌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 2단계 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정예부대인 황유의 제12병단이 섬멸된 문제입니다. 1948년 11월 24일, 장개석은 숙현(宿懸)을 탈환해 진포철도를 개통한 뒤 주력부대를 회남으로 철수시켜 방어에 임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원래 숙현지역을 방어하던 것은 제4수정구 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4수정구도 제3수정구와 같은 서북계 부대였습니다. 제4수정구는 11월 15일 인민해방군 주력의 1단계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면서 숙현을 넘겨줬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숙현 탈환을 위해 북상하는 황유 병단을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짰는데 숙현이 제대로 방어됐더라면 이런 덫이 놓이진 않았겠지요. 황유의 제12병단이 예정대로 숙현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인민해방군은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수했고 이를 추격한 황유 병단은 그대로 포위되어 섬멸됩니다.

그리고 회해전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두율명이 지휘하는 제 2, 제 13병단이 포위되어 섬멸된 것이었습니다. 두율명 집단이 포위된 것은 황유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니 결국은 제3, 제4수정구가 문제였던 셈 입니다. 서북군벌계의 이 두 수정구는 장개석의 이탈리아군(?)이 된 셈 입니다.

국공내전시기의 다른 전역에 대해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군벌계 사단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참고문헌
中国人民革命军博物馆 编,『中国人民解放军战史图集』,中国地图出版社, 1990
曹剑浪,『国民党军简史』下, 解放军出版社,2004
国防大学 “战史简编” 编写组,『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1983/2003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1996
陳志讓, 박준수 옮김, 『軍紳政權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1993

2008년 3월 12일 수요일

국공내전 후기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

얼마전 페리스코프에 올라온 집결호와 관련된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관심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던 국공내전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래서 책장 구석에 박혀있던 中国人民寄放军 历史上的 70个军이란 책을 꺼내 훑어 봤습니다.

이 책에는 국공내전후기인 1949년 2월의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습니다.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 치고 전투서열에 관심없는 분은 없을 것 입니다. 전쟁이란 좀 조직화된 패싸움이니 그 조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전쟁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지요. 그러나 국공내전 같이 규모가 큰 전쟁은 사단급 제대만 해도 세기 귀찮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마 당시의 중국인들도 부대가 너무 많으니 부대 이름 붙이는 걸 귀찮아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1949년 2월의 전투서열을 보니 중화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군의 경우 군단급 제대인 1개 군(军) 예하에 사단급 제대인 3개 사(师)가 배속되는데 1949년 2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1군 : 1사, 2사, 3사
2군 : 4사, 5사, 6사
3군 : 7사, 8사, 9사
4군 : 10사, 11사, 12사
5군 : 13사, 14사, 15사
6군 : 16사, 17사 18사
7군 : 19사, 20사, 21사
8군 : 22사, 23사, 24사
9군 : 25사, 26사, 27사
10군 : 28사, 29사, 30사

(중 략)

67군 : 199사, 200사, 201사, 독립53사
68군 : 202사, 203사, 204사, 독립25사
69군 : 205사, 206사, 207사
70군 : 209사, 210사

이거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가끔 독립사단을 배속받는 군이나 변경 군구의 2개 사단으로 편성된 독립군 등 변칙적인 편제가 있긴 합니다만.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