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기대되는 스카이보우의 신제품

자주 가는 1/48 스케일 모형 사이트를 갔다가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현재 AFV클럽에서 발매중인 1/48 스케일 AFV를 원래 생산한 곳이었던 스카이보우가 신제품을 내놓은 모양이군요. 티거1 초기형에 치머리트 코팅이 된 형식이랍니다.




스카이보우에서 대략 20종 정도의 제품을 설계해 놓았다고 알려졌고 실제로 파이어플라이는 신제품 공고에도 실렸었는데 티거와 Sd.kfz 251 이후로는 소식이 없던 차에 매우 반갑습니다.
국내에도 입하되면 좋겠군요. 안되면 해외주문이라도 해야겠습니다.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잡상

1990년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각급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라서 학교에서 500원씩 내고 재미없는 반공영화를 봐야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반공교육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내용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에도 워낙 멍청한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나이를 먹은 뒤 실제로 북한 문헌을 보면서 이런 멍청한 짓을 확인하면서 비웃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것 저것 주워듣다 보니 지도자 숭배라는 역겨운 문화가 북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찝찝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당선될 때 마다 반복되는 당선자 찬양은 표현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첨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 밥맛떨어지는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소위 ‘國父’라는 이승만 우상화는 가장 정도가 심한 것이어서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즐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글을 심심치 않게 읽게 되더군요.

특히 이런 우상화는 195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집니다. 특히 1960년 선거를 앞두고는 이기붕에 대한 선전과 엮여서 더욱 눈뜨고는 못 볼 수준이 되지요. 최근에 읽은 것 중에서 해군의 정훈잡지였던 월간 『해군』 1959년 8월호에 실린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1959년 8월호에는 이승만에 대한 특집과 함께 이기붕에 대한 특집이 함께 실렸는데 적당히 참고 읽어줄 만한 글도 있지만 「豫言者로서의 李承晩 大統領」처럼 민망한 글도 있습니다. 8월호에 실린 글을 한편 인용해 보겠습니다.(문장이 비문 투성이인 것은 넘어가죠)

배달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며 정의의 천사이신 우리 국부 리승만박사님 께서 조국의 자주 독립과 국제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싸워오신 형극의 길은 그대로 대한민국 중흥의 혈사이고 세계인류 평화의 건설자이시며 님께서 앞으로 실현하시려는 그 원대한 포부는 바로 겨레와 인류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서는 반듯이 따라야 할 거룩한 정경대도이다.
겨레와 민국의 자유번영을 위하여 90평생을 아낌없이 헌신하여 오신 국부 리승만 박사께서는 유엔한국위원단 감시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케하고 초대 국회의장이 되시였고 헌법을 제정공포한 제헌국회에서 절대다수의 득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시였다.
초대 대통령의 중책을 맡으시고 내각조직과 정권이양을 완료한 ‘리’대통령께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시였다. 표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식에서 선포문을 낭독하시는 국부 리승만 대통령의 감격어린 모습이다.

「표지설명」,『해군』(1959. 8)

글자만 몇개 바꾸면 북쪽에서도 쓸만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정권재창출의 필요가 높아진 자유당, 특히 자유당의 강경파들은 이승만 우상화를 강화하고 여기에 이기붕 끼워팔기를 시도하는데 이것은 마치 김일성-김정일을 세트로 끼워파는 방식을 연상시킵니다. 다행히도 전자는 실패했지요. 사실 지도자에 초월적인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권위를 얻고 이것을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는 방식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 단지 막연한 이미지를 팔아먹으면서 집권을 꿈꾸는 오늘날 과거의 망령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요.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블로그의 정치 관련글을 삭제하면서...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시간이 날 때 마다 블로그에 있는 정치관련글을 삭제하는 중 입니다. 특히 분노한 상태로 마구 써내려간 글들은 무조건 삭제하고 있는데 읽다 보니 한편으로는 제 가벼움에 부끄러움이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몇년이 지났건만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일들이 여전히 현재진형형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약간의 논쟁(?)이 있었던 몇몇 글들은 일단 남겨뒀는데 블로그를 다시 공개로 전환하기 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삭제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댓글이 달린 글들을 삭제한다는게 찝찝하긴 합니다만 나중에 블로그를 공개로 돌렸을때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정리를 하긴 해야될겁니다.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에 대한 개괄

지난번에 쓴 “Rurfront 1944/45 - Hans Kramp”에 서 푸펜도르프 전투 이야기를 꺼낸 김에 이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독일 자료를 보강해서 독일쪽의 시각도 반영한 글을 쓰고 싶은게 욕심이지만 필요한 자료를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미국의 시각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해 보지요. 차후에 만족할 만한 독일측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새로 한편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는 1944년 11월 17일 미군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선 독일 제47기갑군단 소속의 제9기갑사단과 제506중전차대대가 미군 제2기갑사단과 격돌한 기갑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이 처음으로 독일군의 쾨니히스 티거를 전장에서 맞딱드리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군의 11월 공세의 일부였으므로 전반적인 상황을 먼저 설명하고 푸펜도르프 전투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공세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미육군 공간사 The Siegfried Line Campaign에 잘 되어 있으므로 배경 설명은 이 저작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작전명 퀸Queen으로 명명된 11월 공세에서 미 제2기갑사단은 제9군 예하 제19군단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미 제9군의 목표는 윌리히Jülich를 포함하여 뢰어Roer강에 도하점을 확보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 방면으로의 공세에 제19군단과 제13군단을 투입했는데 맥레인Raymond S. McLain중장이 지휘하는 제19군단은 제2기갑사단, 제29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질렘Alvan Cullom Gillem, Jr.소장이 지휘하는 제13군단은 제84보병사단과 제102보병사단, 제113기병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제9군의 예비대로 제7기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중 제19군단은 제9군의 주공으로서 윌리히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제13군단은 제19군단의 좌익에서 공세를 시작해 리니히Linnich를 점령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미 제9군은 윌리히와 리니히를 확보하고 뢰어강을 도하하면 뒤셀도르프 방면으로 공세를 계속할 예정이었습니다.1) 이 지역의 지형은 라인강 유역의 전형적인 평야로 많은 도시와 마을이 산재해 있는게 특징입니다.(독일 서부의 라인강 유역을 가 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실 겁니다.)

이 공세의 문제라면 공세 초기에 좁은 지구에 병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공간 확보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 이었는데 이때문에 주공인 제19군단이 진격하면서 제13군단이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또한 가을비와 10월 말 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인해 평야지대가 진창으로 돌변했습니다. 아직 10월이어서 지면이 얼어붙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2)  때문에 전차를 포함한 기동장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습니다. 특히 공세를 앞두고 전차의 궤도에 장착하는 “덕 빌Duck Bills”을 집중적으로 장착해서 제2기갑사단과 각 보병사단에 배속된 독립전차대대들은 공세 직전까지 셔먼의 4분의 3에 덕빌을 장착했다고 합니다.3)

미 제9군의 정면에는 독일 제15군 소속의 제12SS군단(제176보병사단, 제183국민척탄병사단)과 제81군단(제246국민척탄병사단, 제3기갑척탄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예비대로는 뤼트비츠Heinrich Diepold Georg Freiherr von Lüttwitz 기갑대장이 지휘하는 제47기갑군단(제9기갑사단, 제15기갑척탄병사단)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미군의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윌리히 방면으로 진출하는 주공을 상대하기 위해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을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퀸 작전은 악천후로 인해 연기된 끝에 1944년 11월 16일 개시되었습니다. 기상 문제로 인해 항공지원이 약간 축소된 규모로 실행됐고 이어서 공격준비포격이 실행되었습니다. 포격이 끝나자 주공인 미 제19군단의 제29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정면이 매우 좁았기 때문에 제2기갑사단은 B전투단CCB, Combat Command B만을 투입했습니다. B전투단은 공격 첫날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의 방어를 격파하고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Floverich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푸펜도르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제2기갑사단 B전투단이 입은 손실은 4대의 전차가 진창에 기동불능이 되고 6대의 전차가 지뢰로 파손된 것 이었습니다. B전투단은 푸펜도르프와 플로버리히를 점령한 뒤 푸펜도르프 북쪽의 압바일러Apweiler 방 향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복한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전차 7대(3대 완파, 4대 기동불능)와 다수의 보병을 상실했습니다.4) 첫날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 제183국민척탄병사단 제330척탄병연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B전투단이 독일 제330척탄병연대로 부터 잡은 포로만 570명에 달했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첫날 공격에서 전사 21명, 실종 18명을 포함해 196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차 35대를 잃었습니다.5)
반면 미 제2기갑사단의 우익, 즉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제29보병사단은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진격도 부진했습니다.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보병들은 포격에 노출될 경우 공격을 제대로 할 수 가 없었으며 배속된 제747독립전차대대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병을 지원하는 전차들은 보병 때문에 신속하게 돌진하지 못했고 전차에 포격이 집중하면서 전차의 엄호를 바라던 보병의 피해만 속출한 것 입니다. 제29보병사단이 공격에 투입한 제115보병연대와 제175보병연대는 1km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115보병연대 C중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공격 첫날 중대원이 2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습니다.6)

이렇게 미 제19군단의 공세 첫번째 날이 지나갔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매우 신속히 반응했는데 11월 16일 오후 예비대인 제47기갑군단에 출동명령이 내려진 것 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부대인 엘버스펠트Harald Freiherr von Elverfeldt 소장이 지휘하는 제9기갑사단에게는 미 제2기갑사단의 돌파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미 제2기갑사단은 독일군이 기동예비를 투입한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11월 17일 다음 목표인 게레온스바일러Gereonsweiler를 공격하기로 했고 양측의 기갑부대는 이렇게 격돌하게 됩니다.

1944년 11월 17일, 독일 제9기갑사단은 푸펜도르프와 이멘스도르프Imensdorf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푸펜도르프 방면은 제11기갑척탄병연대가,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는 제10기갑척탄병연대가 공격을 담당했으며 여기에 제33전차연대와 제506중전차대대가 배속되었습니다.
이멘스도르프 방면으로 공격한 제10기갑척탄병연대는 이곳을 방어하던 미 제406보병연대와 제771대전차대대에 의해 비교적 간단히 격퇴되었습니다.7) 그러나 푸펜도르프 방면의 전투는 좀 격렬하게 전개됐습니다.
독일군 제33전차연대와 제11기갑척탄병연대의 푸펜도르프 공격은 이곳에서 공격을 위해 전개중이던 미 제2기갑사단 B전투단 제1임무부대에게는 기습이었습니다. 독일군이 먼저 미군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고 이어 미군도 대응포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양측의 보병들은 기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8) 결국 전투는 글자 그대로 순수한 기갑전투로 진행되었습니다. 미군 전차들은 공격을 위해 전개하던 중에 기습을 받은데다 진창으로 인해 기동력이 저하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미국측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 전차(판터)의 폭 넓은 궤도는 “얕은 자국만을 남기는데 미군의 전차 궤도는 참호를 만들지경”이었던 것 입니다. 게다가 독일군 전차의 강력한 방어력은 미군을 경악시켰습니다. 특히 제2기갑사단은 처음으로 쾨니히스티거와 교전을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한 전차장은 자신의 전차가 쾨니히스티거에 14발을 명중시켰음에도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B전투단은 18대의 셔먼과 7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완파되었고 16대의 셔먼과 12대의 스튜어트 경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여기에 A전투단이 4대의 셔먼을 잃었습니다.9)  B전투단은 11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했다고 추산했는데 미 제2기갑사단이 공세기간 중 격파한 판터가 5대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장된 보고라고 생각이 됩니다. Tiger in Combat에 따르면 쾨니히스티거는 이날 전투에서 네대가 격파되었는데 3대는 제67포병연대의 야포 사격으로 파괴된 것 입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미 제2기갑사단의 전차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1945년 3월 20일 미 제2기갑사단장이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한 “독일군과 미군의 기갑장비 비교평가에 관한 제2기갑사단의 장교 및 사병들의 의견(Personal Convictions of Individual Officers and Enlisted Men of 2nd Amrored Division as to Comparison of German and Aerican Armor and Equipment)”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실린 많은 증언들이 푸펜도르프 전투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10) 그리고 이 전투의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인지 미국 공간사에서도 이 전투를 다루는 저작이 두권이나 있을 정도입니다.



1) Charles B. MacDonald, The Siegfried Line Campaign, (USGPO, 1993), pp.516~517.
2) Donald E. Houston, Hell on Wheels : The 2nd Armored Divison, (Presidio, 1977), p.302.
3) Charles B. MacDonald, ibid., p.518.
4) Donald E. Houston, ibid., pp.307~309; Charles B. MacDonald, ibid., pp.526~527.
5) Charles B. MacDonald, ibid., p.530.
6) Harry Yeide, Steel Victory : The Heroic Story of America’s Independent Tank Battalions at War in Europe, (Presidio, 2003), p.161; Charles B. MacDonald, ibid., p.528.
7) Charles B. MacDonald, ibid., p.531.
8) Hans Kramp, Rurfront 1944/45 : Zweite Schlacht am Hubertuskreuz zwischen Wurm, Rur und inde, (Verlag Fred Gatzen Geilenkirchen, 1981), p.247; Charles B. MacDonald, ibid., pp.531~532.
9) Lida Mayo, The Ordnance Department : On Beachhead and Battlefront, (USGPO, 1991), pp.325~326; Donald E. Houston, ibid., pp.310~313.
10) Thomas L. Jentz의 Germany’s Panther Tank :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 pp.154~156에는 이 보고서에서 인용한 증언들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면도를 해야 하는 이유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이 1949년 1월 필리핀에 파견된 변영태 대통령특사를 수행했을 때의 일이랍니다.

변(영태) 특사는 20여년 동안 계속 아침 저녁으로 아령 운동을 한다고 했다. 마닐라 시절에도 아령을 구하여 어김없이 그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57세인 그는 30대인 나보다 건강하고 단단했다.

“김 변호사, 기운이 있으면 내 배를 한 번 힘껏 쳐 보시오.”

나는 몇 차례 망설이다 힘껏 그의 배를 쳐 보았다. 과연 변 특사의 배는 시멘트 벽과 같았다.

그런데 그의 배 못지않게 그가 자랑하는 것이 그의 콧수염이다. 그러나 그 수염 때문에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은 백화점 앞에서 벌어졌다. 몇 가지 물건을 사 가지고 내가 막 백화점 문을 나서는데, 먼저 나간 변 특사가 사람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형세가 험악해 보였다. 변 특사는 나에게 “이들이 나를 일본 장교로 아는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변 특사를 콧수염 때문에 일본인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사람의 수가 불어나면서 분위기는 자꾸만 험악해지는 것 이었다.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던 마닐라 신문이 생각났다. 그 신문에는 우리의 기사와 함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모여드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그 신문을 보이면서, “보시오, 우리가 바로 여기 실린 한국 대표요”하고 말했다.
그제야 팔을 휘두르며 욕설을 하던 그들은 물러서고, 그중 한 사람이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에 겪은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을 몇 해가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었다.

김용식, 『새벽의 약속 : 김용식 외교 33년』, (김영사, 1993), 40~41쪽

이래서 깔끔하게 면도를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응?

2012년 7월 8일 일요일

Rurfront 1944/45 - Hans Kramp

얼마전 부터 푸펜도르프Puffendorf 전투에 관심이 생겨서 관련 자료들을 모으는 중 입니다 푸펜도르프 전투는 1944년 11월 18일 미군의 공세에 맞서 역습에 나선 독일 제9기갑사단과 제506중전차대대가 푸펜도르프에서 미육군 제2기갑사단과 격돌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쾨니히스 티거와 판터가 압도적인 성능을 발휘해 미 제2기갑사단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육군 공간사에서도 이 전투를 다루는 단행본이 두권이나 있을 정도입니다. 푸펜도르프 전투에 대한 미군의 시각을 보여주는 자료는 미육군공간사와 미 제2기갑사단사 등 상대적으로 구하기가 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독일쪽의 시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뒤지던 도중 한 외국 포럼에서 1981년에 나온 Hans Kramp의 Rurfront 1944/45 : Zweite Schlacht am Hubertuskreuz zwischen Wurm, Rur und inde가 독일측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라 해서 구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이 도착한 뒤 살펴보니 영 실망스럽습니다. 서지사항만 봤을때는 600쪽에 육박하는 저작이라서 상당히 디테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살펴보니 3분의 2정도는 무의미한 도판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매우 유용한 지도가 있습니다만 도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사진들은 시기와 장소가 완전히 틀려있는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심지어는 노르망디 전역이나 아르덴느 공세당시 촬영된 유명한 사진들도 그냥 올라와 있을 정도로 도판 선정이 엉망입니다. 텍스트는 읽을만 하지만 엉터리 도판들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잡아먹고 있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고 납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텍스트의 경우는 독일군의 시각, 미군의 시각, 독일 민간인들의 시각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등 괜찮은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푸펜도르프 전투를 다룬 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 부분에서는 전투내내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제9기갑사단의 제11기갑척탄병연대 2대대의 기록을 중심으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내용은 제9기갑사단의 제33전차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제506중전차대대의 전투 기록이었으니 허탕인 셈이죠. 물론 미국쪽 기록에서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은 제11기갑척탄병연대의 작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있었습니다만 필요로 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으니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2011년에 출간된 Edgar Christoffel의 두권으로 이뤄진 단행본, Krieg am Westwall 1944/45도 이 전투를 다루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구해볼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을 먼저 구입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도판은 제대로 넣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2012년 7월 4일 수요일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잡상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처음 출간된 것이 2009년 이었습니다. 놀랍게도 1부와 2부가 2009년에 출간되어 2010년 에는 3부작이 완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2012년 7월이 된 지금도 마지막 3부 소식이 들리지 않는군요. 1부와 2부 사이의 출간 간격이 그다지 길지 않아서 일찍 완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했는데 의외로 늦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왜 마지막 3부가 늦어질까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답은 단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1974년에 출간된 만프레드 케리히Manfred Kehrig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만프레드 케리히의 Stalingrad는 독일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뒤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3부와 똑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것 입니다. 케리히의 저작은 당시 접근 가능한 독일사료에 최대한 접근하였고 이 책은 분량의 방대함 만큼이나 포위전의 주요 국면에 대해 미시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나온 저작이어서 소련측 사료의 이용이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 작전사로서 오늘날까지 유효한 표준적인 저작이라 할만합니다.

그러므로 소련 군사사에 정통한 글랜츠가 케리히의 저작에서 부족한 부분인 소련의 움직임을 보충한다면 글자 그대로 표준이라 할만한 저작이 나올 것입니다. 글랜츠의 3부작이 스탈린그라드 전역 전체를 커버하는 역작이 되는 것 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서술하는 것이 글랜츠의 저작에서 줄곧 약점으로 지적되던 부분이란 점입니다. 당장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서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다룬 2부만 하더라도 글랜츠 스스로가 독일군에 초점을 맞춰 스탈린그라드 전역을 연구하는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도움을 크게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지요. 전통적인 서술에서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후 이야기의 중심은 포위된 독일군에 집중되었고 사실 그 부분이 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소련군이 11월까지 계속된 독일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낸 이후로는 관심의 초점이 공격자에서 방어자로 바뀐 독일군으로 이동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에서 서술한 케리히의 걸작이 버티고 있습니다. 글랜츠의 입장에서는 거의 40년 이전에 나온 이 걸작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입니다.

굳이 케리히의 저작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글랜츠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쓸때 소련군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독일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취약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를들어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st 1943에서 소련군의 1942년 동계 공세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은 상당부분 1985년에 나온 에버하르트 슈바르츠Eberhard Schwarz의  Die Stabilisierung der Ostfront nach Stalingrad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의 역작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흥미롭습니다.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 : 바실리 자이체프 영웅화의 희생자

마이클 존스Michael K. JonesStalingrad : How the Red Army Survived the German Onslaught(Casemate, 2007)는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한 제62군에 초점을 맞추어 소련군이 초기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시적인 전황을 서술하는 대신 일선 전투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의 집단 심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유명한 바실리 자이체프의 영웅화를 비판하는 것 입니다. 저자는 전쟁 중 바실리 자이체프가 영웅화되면서 왜곡된 진실들을 조명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실리 자이체프와 같이 제284소총병사단의 저격수였던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Александр Калентьев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자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소속 부대였던 제284소총병사단 1047소총병연대의 참모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악쇼노프Николай Аксёнов의 회고록에 주목합니다. 악쇼노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실리 자이체프에 대한 널리 알려진 사실 중 상당수가 소련의 선전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입니다.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는 바실리 자이체프 보다 먼저 저격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0월 중순이 되면 이미 제284소총병사단의 진중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기사화될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재미있는 점은 칼렌티예프가 시베리아의 오지 출신으로 문맹이었다는 점 입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묘사하는 바실리 자이체프의 모습과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 입니다.

칼렌티예프가 저격수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많은 병사들에게 저격기술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칼렌티예프에게서 저격을 배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바실리 자이체프였다고 합니다. 바실리 자이체프는 1942년 12월에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칼렌티예프에게서 저격기술을 전수받았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좀 더 각색하면서 자이체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저격술의 선구자였던 것 처럼 만들었습니다. 전후에 자이체프가 회고록을 저술했을때 소련 정부는 검열을 통해 몇몇 내용을 왜곡했고 이를 통해 자이체프가 스탈린그라드의 저격수들을 육성한 선구자로 둔갑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검열을 당한 자이체프의 회고록에서는 칼렌티예프와 자이체프의 관계가 뒤집혀버립니다. 그리고 칼렌티예프라는 인물도 시베리아의 문맹 농부에서 모스크바 저격학교를 수료한 저격수로 둔갑해버립니다. 소련의 선전매체가 쾨니히라는 가공의 독일 저격수를 만들어 낸 것 처럼말입니다.

실제 인물인 알렉산드르 칼렌티예프는 1942년 11월 18일 전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소련 정부의 검열과 왜곡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남았다면 그의 이야기가 다른 이를 거치지 않고 조금 더 일찍 알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