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8일 화요일

I support PETA, too.

I support PETA


우와. 이런건 따라해야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아. 연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금보니 거의 두달 가까이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지난 번 글에서는 로버트 폴리의 “The Real Schlieffen Plan”에 나타난 주버의 설에 대한 비판을 살펴봤습니다. 제가 지난번 글에서 밝혔던 것 처럼 “The Real Schlieffen Plan”은 주버가 사용한 핵심 사료에 대한 비판 등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 많은 흥미로운 글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테렌스 주버는 2007년  War in History, 14-1호에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라는 논문을 기고해 재 반론을 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


  테렌스 주버는 로버트 폴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은 소홀히 한 채 테렌스 홈즈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비판한 뒤 본격적인 반론에 들어갑니다.

 주버가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그의 핵심 사료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것 처럼 로버트 폴리는 참모부연습은 실제 작전을 반영하는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버는 1차대전 초기 전역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의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예로 든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동부 참모부연습 → 탄넨베르크 전투
1904, 1905, 1906, 1908년 서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15일 제5군에 대한 명령
1897, 1899,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24일 동부전선에 대한 증원명령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가을 우치(Lodz) 방면 공세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전은 모두 슐리펜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공세를 맏받아치는 역습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폴리는 1903년에 출간한 Alfred von Schlieffen’s Military Writings라는 저작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전략개념을 시험해 보는 수단”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가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이 슐리펜계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한 부분도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독일육군 총참모부가 1938년 슐리펜의 동부 참모부연습 다섯개를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을때도 역시 서문에서 참모부연습이 슐리펜의 전략개념을 시험하고 작전구상을 가다듬는 것이었다고 밝힌 점도 지적합니다. 그러니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서 주장한 내용은 기존의 주장을 갑자기 180도 바꾼 것 이라는 겁니다. 또한 만약 참모부연습이 단순한 훈련 목적에 불과하다면 베를린 근처의 지역에서 실시하지 않고 최전선지역인 동프로이센과 로렌에서 실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1905년의 서부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도 상이합니다. 폴리는 이 연습에서 ‘슐리펜계획’의 기본요소가 등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입니다. 주버는 루덴도르프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1904, 1906, 1908년 참모부연습과 동일하게 로렌을 향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한 역습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폴리는 이 무렵 슐리펜이 프랑스와의 일대일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당시의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계된 공세를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단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만 베르덩-벨포를 잇는 요새선을 우회하여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폴리와 슐리펜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리터 모두 슐리펜 시기의 군사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시에 확립한 교리는 철도망이라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부대를 신속히 기동하고 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재빨리 맞받아치는 것 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다양한 돌발변수에 맞춰 시험해 보는 것이 바로 참모부연습의 기능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참모부연습의 기밀 등급이 낮았고 일선부대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실제 작전과 거리가 먼 ‘교육용’이라는 폴리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단순한 교육용 자료에 기밀 등급이 붙여져 일선의 각 부대에서 수년간 보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냐는 겁니다.

  참모부연습의 사료적 가치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연구의 방법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 서 사료인용의 문제를 지적한 것을 강하게 의식한 듯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자신의 주 사료인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두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고 연구를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이 이용한 사료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재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인용한 사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이 두가지 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즉 빌헬름 디크만이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한 계획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슐리펜계획의 실재여부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 논점을 슐리펜계획에 필요한 병력으로 돌립니다. 지금까지 여러번 강조했지만,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에 투입될 독일군 병력은 96개 사단인데 실제 독일군 병력은 최대 72개 사단이 한계였습니다. 주버는 이 점을 들어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독일의 심각한 병력 부족문제였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폴리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이 새로이 6개 군단을 편성한 점을 들어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병력의 부족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독일이 1914년 8월 급히 편성에 들어간 22~27예비군단은 자원한 학생등의 인력으로 편성된 것이지 사전에 계획된, 훈련된 예비병력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성한 6개 군단은 10월 중순까지도 전선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슐리펜계획’에 따라 동원할 수 없는 부대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1차대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뒷받침하는 계획은 무엇인가? 주버는 베젤러(Hans-Hartweg von Beseler)가 1900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는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을 뿐 슐리펜이 유사한 계획을 구상했다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와 슐리펜계획의 연관성을 강조한 부분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폴리의 주장 역시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폴리가 제시한 자료는 독일군 총참모부가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한 내용 정도이기 때문이란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에서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계획이 발전했다는 내용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게 주버의 논지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급속히 강화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베르덩, 에피날, 툴, 벨포르 등 핵심적인 요새들에 근대적인 방어시설이 보충되었을 뿐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상당수는 독일군의 군단급 장비인 210mm포로 쉽게 무력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까지 우익을 확장한 원인은 프랑스군의 좌익이 메지에흐까지 확장된 것에 대한 대응조치일 뿐 ‘슐리펜계획’이나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잡담하나. 주버는 이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사료는 워낙에 부족해서 마치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점은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한방에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사료가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

오전에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을 잠깐 훑어보니 재미있는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제목하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들(The World's Most Dangerous Borders)'.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여 한번 읽어봤습니다.

 재미있게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가 한반도에 두 곳이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휴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북중국경이더군요;;;; 휴전선은 200만이나 되는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곳이니 선정되는게 당연하지만 북중국경은 좀 의외입니다. 포린 폴리시에서는 북중국경은 탈북자가 너무 많아서 북한의 안정성을 흔들지경이기 때문에 북중국경을 선정했더군요.

포린 폴리시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에는 다음과 같은 곳이 들어가 있습니다.

1. 수단과 남수단의 국경
2.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
3.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4.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5.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
6. 콩고민주공화국과 앙골라의 국경
7.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경
8. 한반도의 휴전선
9. 베네주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
10. 차드와 수단의 국경
11.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12. 북한과 중국의 국경
13.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

 한반도에 이어 인도와 수단이 2관왕을 차지한 것이 눈에 띄입니다. 한반도가 인도와 수단같은 막장의 반열에 올라있다니 참 묘합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데나워, 그리고 동맹에 대한 잡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국무부장관 두 사람의 발언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둬왔습니다. ... 자유 세계의 사람들은 성공 사례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Communists have won victory after victory in the post-war years. …  success for the free peoples is badly needed.”

미국무부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954년 5월 8일 백악관 솔리리엄룸 회의석상에서.
Robert R. Bowsie and Richard H. Immerman, Waging Peace : How Eisenhower shaped an enduring Cold War Strategy,(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124


그리고 32년 뒤


“반면, 우리는 승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훨씬 앞서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는 패배했습니다.”

“On the contrary, we are winning. In fact, we are miles ahead. Their ideology is a loser.”

미국무부장관 조지 슐츠(George P. Shultz), 1986년 5월 14일 레이건에게,
David E. Hoffman, The Dead Hand : The untold story of the Cold War arms race and its dangerous legacy, (Anchor Books, 209), p.253

현리 전투 경험담 하나...

현리전투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한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분석이 이루어져 왔고 많은 경험담이 활자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쪽으로 매우 극적인 사건인 만큼 관련된 기록을 읽으면 읽을 수록 끌리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꽤 많으시겠지만 현리전투를 육군 신병으로 경험한 인물의 경험담입니다. 현리 포위망 내에서 겪은 경험을 제법 자세히 서술해 놓아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글 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 첫 전투로 맞이한 현리전투에서 겪은 공포와 공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라서 좀 길게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런 병영생활일망정 그런대로 익숙해 가던 1951년 5월 중순, 그 곳(9사단 보충대)에 배치된 지 스무 날 쯤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새벽 천막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연병장에 뛰쳐나온 우리들 신병 셋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장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사단 앞의 연병장은 말할 것도 없고, 냇가 건너편의 골짜기까지 군인들로 꽉 찬 것이 아닌가.

내가 속했던 사단만의 병력은 분명 아니었다. 당시는 개개인의 부대인식표가 없어서 다른 사단의 병력이 섞인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어림짐작해 보건대 1개 사단 병력은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활기찼던 군인이 아니고 지칠 대로 지친 참담한 몰골의 패잔병들이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대기 하나 없는 이등병 주제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잔뜩 주눅 든 채 취사반에서 밥을 타다가 배식하면서 귀동냥한 결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 포위되었다는 것 이었다.(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의 포위가 유명한 현리전투라고 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낭을 챙긴 뒤,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중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한쪽엔 쌀, 한쪽엔 ‘씨레이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포위망 돌파에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각자 지닐 만큼의 식량을 휴대하라는 것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들 이등병은 한쪽 얻어먹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씨레이션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니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 이어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참들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별일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고참들은 이런 포위는 항용 있어온 일이라는 듯 2~3일분 식량만 챙겼는데, 그 이상은 짐스럽기만 할 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셋은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것이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배낭속을 몽땅 비우고 7일분 씨레이션을 짊어졌다.

(중략)

그 동안 부대 앞의 냇가를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트럭들의 질주행렬이 이어졌으나, 출발한 지 1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기총소리가 났고, 이어 피격당한 흔적이 완연한 트럭들이 다시 돌아왔다. 말은 질주행렬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차량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사단본부 앞 연병장 정도나 될까, 그 밖에는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임간(林間) 도로였기 때문에 남쪽 길목만 막으면 우리 사단 뿐만 아니라 같은 골짜기에 있던 다른 사단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독안의 쥐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사단 본부가 진주하면서 길이 만들어졌지만, 북쪽은 그것조차도 없는 오지였다. 지금은 국도가 아닌 웬만한 지방도로도 포장이 되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지만, 당시 강원도 산간의 도로는 포장은 커녕 간신히 일방통행이나 가능할까, 마음대로 오고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니 희생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부대 앞의 연병장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서 105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박격포 등을 배치하여 사격을 개시하였고, 사격이 끝나자 포들을 분해하여 땅속에 묻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적군이라는 말없는 설명인 셈이었다. 그 많은 씨레이션과 쌀더미, 퇴로가 막힌 트럭들엔 휘발유가 뿌려졌고, 우리들은 불길을 뒤로 하고 방향도 모른 채 고참병의 뒤를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정양섭, 『어이없는 참전기 : 어느 북파공작원의 회상』(지식산업사, 2004), 76~79쪽

그야말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현리”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아직 패주의 초반이기 때문에 그냥 고참병들의 분위기에 따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이 포위망 속의 1주일은 방향은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앞사람만 따라다녀야 했던 1주일 이었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후퇴, 그것도 포위망 속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방황이라고 해야 옳았다.

웬놈의 피리소리는 그렇게도 처량하던지, 다른 군인들은 그 피리소리가 공격 시에도 울렸다고 했으나 내가 듣기엔 밤중, 그것도 유독 달밤에만 울린 것 같았다. 처음엔 처량하기만 했으나 날이 가면서 피리소리만 나면 소름이 끼쳤다.

(중략)

어차피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포위망 속이라면, 그럴수록 분산되어 3~4명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습격받을 기회도 적어서 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심정은 흩어지면 꼭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자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무리가 커질수록 공격받을 가능성은 늘어나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참모 등 서슬 퍼렇던 그 많은 고급 장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포위 첫날 부터 볼 수 없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눈에 띄던 위관급 장교들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오를 이룬 후퇴로 지휘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가는 사람은 앞선 대로, 뒤쳐지는 사람은 뒤쳐진 대로 뒤섞이다 보니 완전한 오합지졸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뭇가뭇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무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도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앞사람의 뒤만 따라갔다. 살 길을 찾아서가 아니고 그 밖에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막연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기습을 받을수록 우리들의 몰골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철모는 불편해서 벗어버렸다 해도 작업모조차 쓰지 못한 맨대가리가 있는가 하면,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는 그만두고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춘 군인보다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점차 늘어났다. 나 자신도 세 번째로 당한 밤중의 기습에서 M1 소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이어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데다가, 넝쿨 때문에 총을 지닌 채로는 도저히 숲 속을 해쳐 나갈 수 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들은 말이 있어서 방아틀뭉치만은 빼내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총기를 그대로 버리는 것과는 달리 방아틀뭉치를 뽑으면 그 총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버릴 때는 총기 대신 방아틀뭉치만은 지니고 돌아와야 처벌을 면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방아틀뭉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양섭, 위의 책 79~82쪽

포위된 상태가 길어지면서 점차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특히 훈련과 전투경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한국군이었던 만큼 공황상태가 지속되면서 모든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몇몇 부대는 상당한 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양섭의 회고에 따르면 현리 포위전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석 달 가까이 방위군에서 고생한 끝에 입대한 것 이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때문에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어서 행렬의 뒤끝에서 빨리 오라는 고참들의 재촉을 받으며 따라가던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뒤쳐졌던 나를 뒤에서 쫓아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앞지르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전투태세로 산개하고는 빨리 가라고 호통쳤다. 장교고 사병이고 모두가 쥐구멍만 찾는 판국에 자신들의 반격에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라고 소리치다니 도데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너희들같이 도망이나 다니는 패잔병들도 군인이냐는 투였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공용화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개인화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적지 않은 판에 그들은 개인장비는 물론 60밀리 박격포까지 갖춘 완전한 전투부대였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공수된 특전사 병력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 추격해 오는 적군과 일전을 준비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신기하기 조차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해볼 때, 그들도 연대나 대대 같은 상급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설사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작전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반격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소대 자체의 자의에 따른 반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속했던 사단의 경우 신설 사단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사(지금의 상병)면 분대장, 중사(하사)면 선임하사 급인데 견주어, 그들은 중사가 분대장 급으로 나 같은 이등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최하가 하사 급이었다.

그들은 18연대라고 했다. 18연대면 사변 전 옹진전투에서부터 용명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같은 한국군이라도 ○○연대는 아무리 공격해 보아야 고지점령은 커녕 당하기만 한다고 해서 ‘○○연대 공격하나마나’. ××연대의 경우 아무리 보급품을 줘 보아야 모두 적군의 손에 빼앗기기 때문에 ‘××연대 보급 주나마나’였는데 반해, 18연대는 아무리 포위당해도 모두 빠져나온다고 해서 ‘18연대 포위당하나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연대나 ××연대에 견주면 18연대야 말로 전투부대였다.

정양섭, 위의 책 86~88쪽
하지만 이런 양호한 사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포위망 내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정양섭이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이야기는 부대 단위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옆의 동료 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용감한 고참병이 몇몇 사병과 함께 기습하는 적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보니, 불과 10여명도 안 되는 분대 단위의 기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할 때마다 희생자는 늘어났고 앞뒤로 흩어졌던 병사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게 되어 또 습격을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7일분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아쉬운대로 기아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지니지 못했던 군인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지 사흘만에 만난 여군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그것이었다. 말은 여군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군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부대인식표는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계급장은 커녕 군인다운 징표가 전혀 없는 달랑 군복뿐인 여자였다. 당시의 전투사단 편제에 여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신분이 수상한 여자였다.

남자들은 각자 배낭 속에 적으나마 비상식량을 지녔고 또 작업복 위에 ‘판초’를 갖추어 웬만한 안개비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군은 먹을 것은 둘째로, 우의조차 갖추지 않은 입은 옷 그대로의 단벌인 채로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려 지나가는 길섶에 누워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장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끝장이었다. 모두가 굶주린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씨레이션은 바닥이 날 것이 뻔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배가 고프면 숲 속에 혼자 쳐져서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작업복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그것마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뒤쳐져 우물우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내 수통속의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시고 나면 허리에 찬 수통에선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고, 그렇게 되면 한 모금 달라는 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을 것 이어서,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아예 물통이 빈 것 처럼 행세해야 했다.

그 래서 운 좋게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을 만날때 까지는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냇물이 있어 물통을 채울 수는 있었으나 당장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를 적군이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낙오될지도 모르는 것이 더 겁이 났다.

정양섭, 위의 책 90~91쪽

이 책의 저자인 정양섭은 원래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현역으로 빠진 경우인데 하필 처음으로 경험한 전투가 현리전투이다 보니 당시의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18연대와 같이 긍정적인 사례도 있긴 합니다만 현리전투 자체가 작은 미담으로 덮기엔 너무나 큰 참사지요. 정양섭은 장교들의 부정부패, 고참들의 폭력, 형편 없는 군기문제 등 삼류군대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을 때 마다 씁슬하기 짝이 없습니다.

2011년 6월 15일 수요일

책에 대한 잡담

오늘 목격한 어떤 책들에 대해서...



먼저 1번. 유명한 볼프강 슈나이더의 책이죠. 업무 때문에 어디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숨어있는 군사사 애호가가 많다는 증거죠.



그리고 2번. 일 끝나고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책을 사러 들렀다가 발견했습니다. 이재오가 쓴 책중 가장 유명한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가 아직도 남아있는걸 보니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아마 어딘가에 들렀다가 셔먼 탱크가 현역인걸 목격한다면 비슷한 느낌이 들 것 같군요. 이재오의 저 책은 굉장히 인기를 끌어서 엄청나게 찍혔는데 2011년에도 '새책'으로 구할 수 있을 정도라니 덜덜덜합니다.

2011년 6월 6일 월요일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전차 무용론

전차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전차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제4차 중동전쟁이 가져온 충격이 있겠지요.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전력에 쓴맛을 보자 전차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방어력과 기동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일련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목소리들이 다시 사그러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던 것 같습니다.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라는 글은 대전차화력의 강화로 전장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빅맨의 이 글은 미국이 유럽전선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상전을 펼치기 이전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2차대전 초반에 전차가 잠시 맹활약하면서 전차의 시대가 오는 듯 했지만 결국 대전차 화력의 증대로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 입니다. 글에서는 몇몇 실전 사례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붉은 군대는 나치의 우세한 기갑전력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대응책을 찾았다. 러시아의 언론들은 전쟁 첫해, 그리고 몇 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둔 뒤 여러차례 포병을 “전장의 신”으로 불렀으며 대전차포와 일반 야포를 핵심적인 대전차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포병으로 전차를 상대하여 저지하고, 격퇴할 수 있다는 점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드러났다.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 가장 많은 전차와 기타 기갑장비를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군대는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치가 열등한 수단으로 간주한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베르너(Max Wern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결과 나치의 기갑군은 “무력화 되었으며 글자 그대로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2년에 들어와 소련군이 독일군을 보다 잘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게 된 원인은 대전차전을 위해 개발된 많은 수의 향상된 기동력과 향상된 성능을 가진 신형 야포와 같은 포병을 강화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 데 있다.

1942년 11월 19일 시작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는 나중에 원수로 진급한 보로노프(Никола́й Н. Во́ронов) 대장의 지휘에 따른 강화된 포병의 대규모 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물론 전쟁 중이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자료가 극히 제한되기는 했겠지만 저자는 소련이 1942년에 전차군을 편성하는 등 기갑전력의 강화에 주력했다는 점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공세에서 소련 기갑부대의 공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은 꽤 놀라울 정도 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전역을 바라보든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나치의 전차 및 급강하폭격기가 영국의 아프리카 주둔군에 초반의 패배를 안기기는 했지만 영국군이 중근동 전역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포병을 중시하고 전차의 활용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942년 6월 13일, 영국군의 1개 여단이 독일군 88mm의 매복에 걸려 난타당한 기갑 부대의 참패 이후 전차를 앞세우는 전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다. 주포의 양각이 제한적인 전차에 대해 야포의 우세함이 뚜렷하다는 것은 거의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2)

만약 영국군이나 미군이 1944년 이전에 동부전선과 같은 규모의 독일군 기갑전력과 맞서야 했다면 이런 판단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군단급에 불과했습니다. 1942년 하반기 이후로는 독일군의 소규모 기갑전력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기갑전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차 무용론은 미국에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1943년 4월 21일 뉴욕타임즈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영국 포병 병과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기존의) 우세를 되찾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신형 전차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상의 공격 작전에 있어 포병은 기갑에 비해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3)

언론 뿐만 아니라 미군 고위층 또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경험을 통해  기갑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1942년 12월 14일 부터 1943년 1월 25일 까지 전선을 시찰하고 일선 기갑부대의 실태를 조사한 디버스(Jacob L. Devers) 장군이 내린 결론이란게 “M4는 전장에서 가장 우수한 전차다”라는 정도였다니 말입니다.4)  영국군의 전투경험은 미군에게 매우 악영향을 끼쳤는데 맥네어 장군은 북아프리카 전투 이후 대전차대대의 상당수를 견인식 3인치포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될 무렵 영국에 배치된 미군의 30개 대전차 대대중 11개 대대가 견인식 대전차포를 장비했다고 하지요.5)

다시 빅맨의 글로 돌아가 보지요. 빅맨은 이 글에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기동력 자체는 타격력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동력의 가치는 필요한 때와 장소에 화력을 기동력 있게 제공해 줄 수 있는데 있다. 그러나 사용되는 것은 기동력이 아닌 화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기동력과 장갑에 중점을 둔다면 화력이 애매해 지게 된다. 전차의 화력이란 전차가 본질적으로 기관총에 대한 대응병기라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의 장갑, 기동력 그리고 화력은 1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 밀집된 소총과 기관총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차의 문제점은 대전차 무기를 동원해 전차에 맞서기 전 까지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6)

이 글이 쓰여질 무렵 미군은 아직 프랑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차포의 우세를 점쳤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Fred K. Vigman, “Eclipse of the Tank”, Military Affairs, Vol. 8, No. 2 (Summer, 1944), p.103
2) Fred K. Vigman, ibid, p.103
3) “Germany's Gamble on Tank And Dive-Bomber Held Lost” New York Times(1943. 4. 21)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0
5)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p.72~75
6) Fred K. Vigman, ibid, p.107

2011년 6월 2일 목요일

美風良俗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지요.

전두환 정권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워커는 대한민국의 미풍양속에 꽤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이 도를 지나쳐 표출될 때도 있었다.

청와대의 대형 커피 테이블에서 열리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전씨가 담배를 꺼낼라치면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이 서로 먼저 라이터로 전씨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기 위해 올림픽식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 중 군용 텐트에서 김윤호(金潤鎬) 당시 한국군 합참의장이 전씨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김 의장을 ‘학자 장군’이라 부르곤 했다. 전씨의 자리는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보다 30cm 정도 높은 연단에 마치 옥좌와 비슷하게 마련돼 있었다. 이를 본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존 위컴 장군은 나를 쳐다보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같은 자리 배열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와 한국군 의전 참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리처드 워커 지음/이종수ㆍ황유석 옮김, 『한국의 추억 :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한국문원, 1998), 31~32쪽

저도 이 부분을 읽고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서구화(?)되어 전래의 미풍양속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