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이승만의 협상술에 대한 논평 하나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외교적인 협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항상 성공하진 못했어도 복잡한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가 트루먼 기념도서관에서 실시한 구술채록에서 이승만과 미육군부장관 로얄과의 회담에 대해 회고한 내용은 이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헤스(Jerry N. Hess) : 국무부의 관료로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이행기에 취했어야 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미군 지휘관들이나 국방부 관료들과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무초 : 예.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사례라면 1948년 말에 있었던 육군부 장관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의 방한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내했고 그 두 사람은 한국의 국방 문제에 대한 요구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낸 보고서도 우리가 이대통령의 군사적 요구에 대해 제안한 내용들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모두 “좋소, 좋소, 좋소”라고 한 것 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제안에 대해서 결코 “좋소” 라고 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싫소”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Muccio : Well, there were a few. A good example was the visit in late ‘48 of the Secretary of the Army, accompanied by General (Albert C.) Wedemeyer. I escorted the two to President Rhee and they presented to President Rhee U. S. thingking about the Korean situation with stress on Korean needs in defense matters.

When they reported in Washington, they proceeded on the assumption that Rhee had agreed to this U.S. proposal. My report was to the effect that Rhee had said, “Yes, yes, yes,” to all of the things that we offered Rhee for his military needs, but that he had never said, “Yes,” and he never said, “no,” to the suggestion that the time had come for the withdrawal of the U.S. military forces.

“Oral History Interview with Ambassador John J. Muccio”(1971. 2. 10~2.18) by Jerry N. Hess, Harry S. Truman Library, pp.9~10

이승만의 담화문이나 언론과의 회견을 보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매우 머리가 좋고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무초는 이 인터뷰 도중 이승만이 매우 지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승만을 상대한 인물들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우는 이승만의 교활함에 치를 떨 정도였지요.)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이 암울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가끔 이승만을 매우 무능한 인물로 보는 분들도 계신데 사실 저는 이승만이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파키스탄에 해군 기지를 둘 수 있다는 보도에 대한 로버트 카플란의 평

파키스탄이 중국에게 자국 내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제안했다는 보도에 대해 로버트 카플란(Robert D. Kaplan)이 매우 흥미로운 평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니 아직 안읽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시길.




카플란은 이 글에서 파키스탄의 불안한 국내 정세와 아프가니스탄 문제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파키스탄과의 관계에서 골머리를 앓는 것 처럼 중국도 파키스탄에 깊숙히 개입하는 순간 골머리를 앓을수 있다는 것이죠.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라도;;;;

2011년 5월 21일 토요일

한국의 ROTC제도 도입에 대한 잡담

한국의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ROTC제도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은 것 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 제도가 실시된 배경은 미국과는 조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ROTC제도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년 전인 1916년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미국은 평화시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던 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하면서 장교, 특히 초급장교를 대규모로 충원할 제도가 필요했고 그 결과 ROTC가 도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ROTC는 군대의 대규모 증강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제도는 1960년 도입되었고 1961년 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군의 증강이 완료되어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한국의 ROTC제도는 대규모의 군대, 특히 대규모의 육군이 만들어진 다음에 여기에 필요한 장교단을 육성하기 위해 도입된 것 입니다. 명칭과 기본적인 성격은 미국의 ROTC와 같지만 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은 미국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ROTC가 육군의 대규모 증강을 앞두고 실시된 선행조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국의 ROTC는 육군이 급속도로 팽창한 뒤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된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9년에 육군본부 인사국에 있던 손창규(孫昌圭) 대령은 육군대학에서 발간하는 『軍事評論』5호에 육군의 인사문제에 대한 글을 한 편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1년 뒤 도입될 ROTC제도의 성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몇 군데 있습니다.

현역병역의무연한을 무한정하고 넘어서 장기복무하게 되는 것을 꺼려하여 대부분의 대학졸업자들이 단기복무를 희망하지 장교복무를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국민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데 배치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원시에 대량으로 필요한 예비역 초급장교를 확보하는데 있어 대학졸업자는 병(兵)으로 있기 때문에 현역복무연한을 훨씬 넘어서 장기 복무하다가 도태당한 자들을 그 대신으로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비군의 건전한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단기복무제도와 공정한 병역의무의 의의와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제도를 발전시킬 상태에 놓여 있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시지탄의 감을 느끼는 상태로 전환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孫昌圭,「오늘의 淨軍과 내일의 淨軍」『軍事評論』5號(1959.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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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복무장교제도가 없으면 대학졸업자의 대부분이 장교희망을 안 할 것이다. 이러한 현황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교가 대학졸업한 병사를 거느려야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단기 현역복무장교제도가 없기 때문에, 즉 장교로 임관되면 전원이 장기복무자의 과정을 밟어야 되므로 경비의 난비(亂費)는 물론 많은 장교의 강제 도태 문제를 불가피하게 만들고만다. 사실인즉 우리는  휴전직후부터 이 제도를 수립했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양성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예비군의 장교양성비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기복무후 비교적 장기간 예비군의 장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孫昌圭, 위의 글 16쪽

손창규의 글은 당시 한국군이 직면한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된 만큼 장교단도 폭증했는데 이것은 장교의 진급적체를 사회문제로 만들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장교단은 많은수가 직업군인을 희망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을 정리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설사 장교단을 한번 정리한다 하더라도 장교 충원방식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군, 특히 육군의 감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병력 감축에 미온적이었습니다.(그리고 여기서 약간의 병력만 감축된 뒤 60만의 대군이 오늘날 까지도 유지되고 있지요.) 결국 장교인사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고려되기 시작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장교 처우는 매우 좋지 않았고 언론에서 “싸구려군대”라고 자조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필요로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은 군대에 장기복무하는 것을 기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장교 충원방식의 변화가 필요했고 ROTC 제도는 이점을 개선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 꼽혔습니다. 1950년대 말 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장교단의 교체가 실시되고 ROTC와 같은 개선된 제도가 도입됨으로서 1950년대 말의 심각한 장교 인사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ROTC 라는 미국의 제도가 한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되는 과정은 꽤 흥미롭습니다. 제가 인용한 이 짤막한 글에서는 그 과정의 단편적인 면을 보여줄 뿐이지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안보적 환경입니다. 사실 한국군을 논하는데 있어 이걸 빼면 전혀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지요.

2011년 5월 19일 목요일

이 책 꽤 재미있어 보입니다

캔자스 주립대 출판부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꽤 재미있어 보이는 신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황령의 군사사라!

사실 군사적으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근대 이탈리아 군사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도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엄밀히 말해서 이탈리아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근대 이탈리아어권의 군사사에 대한 신간이 나온다니 꽤 기대가 됩니다. 사실 영미군사학계에서 가끔 나오는 이야기가 학술적으로  심도 있는 이탈리아 군사연구가 드물다는 것인데 이 책이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11년 5월 15일 일요일

독소전쟁 참전 고려인 명단

2005년에 잠깐 KBS에서 일하면서 2차대전 당시 고려인의 활동에 대해 연구하던 드미트리 신이라는 분을 알게 됐습니다. 원래는 1945년 8월 소련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고려인들을 섭외하려했는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광복절 특집인지라 독소전쟁 참전자들을 다룰 수는 없었고 그대로 묻히나 했는데 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는 주제를 한다길래 드미트리 신을 소개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주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잠깐 웹서핑을 하다가 노르망디의 조선인을 다룬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 영상을 보고 다시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드미트리 신은 독소전쟁에 참전한 고려인 명단을 작성해서 웹사이트에 올려놓았는데 지금은 잠시 폐쇄된 페리스코프 포럼에 이 사이트를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생각이 난 김에 이 사이트를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2005년과 비교해서 크게 업데이트 된 내용이 없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비록 사진뿐이긴 하지만 고려사람(Корё Сарам)이라는 사이트에도 몇 명의 고려인 참전자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는 비교적 최근(2008~2009년)의 사진도 함께 올라와 있습니다.


강제규 감독이 재미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성공을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두어서 고려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현리전투와 리지웨이의 한국군 평가

중국군의 1951년 춘계공세는 UN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은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UN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5월 21일 육군부에 보낸 전문에서 미군 및 한국군 부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1. 본인은 모든 미군 군단, 미군 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을 방문하였고 이 모든 부대들이 사기가 높으며 전투를 훌륭히 수행했음을 특기하고자 한다. 나는 특히 적의 주공에서도 주요한 공격을 받은 러프너(Clark Louis Ruffner) 소장의 미육군 제2보병사단을 특기하고 싶다. 나는 제2보병사단이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자신들의 피해의 20배가 넘는 손실을 적에게 입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밴 플리트 장군의 미육군 제8군과 이를 지원하는 공군 및 해군의 탁월한 능력, 용맹성, 그리고 투지를 고취할 것이다.

1. Having visited all US Corps, all US Divisions, and the 1st ROK Division, I wish to cite all these units to you for superior spirit and conduct in battle. I particularly cite the US Army’s 2nd Infantry Division, Major General C L Ruffner, commanding, which has received the principal blow of the hostile main effort. It has inflicted losses, which conservatively estimated, exceed, I belive, 20 times its own. It would be an inspiration to our people to know of the professional competence, the gallantry, and the fighting spirit of General Van Fleet’s Eighth US Army and its supporting Air Force and Naval Forces.

2. 한국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은 적의 가벼운 공격, 그리고 때로는 강력한 공격에 맞서 매우 훌륭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아직 자세한 사항이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제3, 5, 7, 9사단은 형편없었고 막대한 양의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군 제1군단은 적과의 교전이 제한적이긴 했으나 잘 싸웠다. 이런 유감스러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 ROK 2nd and 6th Divisions have performed very creditable against moderate and in some cases strong enemy attacks. Although full details still lacking, it is clear that ROK 3rd, 5th, 7th and 9th Divisions have performed discreditably with loss of large amounts of equipment. ROK I Corps has done well though it has had little contact. We are continuing our efforts to correct this lamentable situation.

3.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8일 언론 회견에서 미국이 잘 훈련되어 있는 한국군에게 장비를 제공한다면 미군을 철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본인은 무초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말도 안되고 유해한 발언은 그만 둘 것을 권유하려 한다. 본인은 이 문제를 국무부를 통해 제기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강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President Rhee was reported to have stated to Press on 18 May that, if US would equip his already well trained Soldiers, American Troops could be withdrawn. I continue to seek through Ambassador Muccio to induce President Rhee to cease making such flagrant and damaging statements. I suggest consideration be given to presenting the matter through channels to Department of State with object of having strong pressure brought to bear to correct this situation.

4. 이 전문의 첫 번째 문단은 언론에 공개할 것을 요청함.

리지웨이

4. Recommend that 1st part of this message be released to Press.

Ridgway

CX62985(1951. 5. 21),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2번 항목은 현리 전투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군에 비해 화력이 부족하고 병력으로도 열세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긴 합니다만 1951년 초의 한국군이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국군이 중국군에게 약하다는 점이 수 차례의 전투로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현리전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패전이었습니다.

리지웨이가 3번에서 지적한 것 처럼 현리전투는 그동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한국군의 증강을 추진하고 있던 이승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한꺼번에 군단급 제대가 와해되고 장비를 대량을 상실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무작정 군사원조를 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승만은 1950년 말 부터 국민방위군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병력동원과 이를 위한 무기조달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무기조달의 경우는 미국이 원조를 해 주지 않을 경우 캐나다를 통해 소총을 조달하는 방안까지 고려되었을 정도로 이승만은 병력 증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는 이승만의 병력 증강 시도에 치명타였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현리 전투의 결과 한국군에 미군 지휘관을 배치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한국군 장교단의 지휘능력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랬다면 한국군이 태평양전쟁 이전의 필리핀군과 비슷해 졌겠지요.

에반게리온 Q는 언제쯤 개봉하려나...

영화표를 정리하다 보니 '에반게리온 파'의 표 몇장이 사라진 걸 알게 됐습니다. 솔직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화표를 모으는게 습관이 되어 영화표를 계속 모으고는 있는데 제가 좀 게을러서 영화를 볼 때 마다 영화표를 모아놓는 상자에 표를 넣어두는게 아니라서 표를 몇 장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에반게리온 파'는 2009년 연말과 2010년 연시를 정말 즐겁게 해준 애니메이션이었는데 표를 조금 잃어버려 아쉽군요.

'에반게리온 Q'에 대한 소문도 조금씩 들려오는데 언제쯤 개봉하게 될 지 궁금합니다. 이왕이면 2009년 처럼 연말에 개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반게리온 Q'는 사실상 완결편이라고 하니 연말에 개봉하는게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2011년 5월 7일 토요일

판처파우스트의 괴력;;;;

심란해서 책 몇권을 끄적이던 중 이사예프(Алексей Исаев)의 Берлин 45-го에서 재미있는 표를 몇 개 보게 되었습니다. 1945년 4~5월 소련군의 기갑장비 손실과 그 원인을 정리한 표 였는데 꽤 흥미로운 통계라 한번 올려봅니다. 완전손실이 따로 구분된 표만 올렸습니다.


1. 제3근위전차군(1945. 4. 15~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97/198
0/1
65/105
49
IS-2
2/6
2
ISU-122
6/19
1/3
0/1
8
SU-100
4/11
5
SU-85
4/11
1/6
0/1
9
SU-76
2/12
6/11
0/2
6
SU-57
3/6
3/4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681]


2. 제4근위전차군(1945. 4. 23~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20/50
14/16
1
6
IS-2
1/8
3
ISU-122
1/3
1
SU-100
3/11
2
SU-85
0/1
SU-76
0/7
2/1
1
SU-57
2/11
3/1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с.681~682]


3. 제11전차군단(1945. 4. 16~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42/121
0/1
23/13
1/3
IS-2
4/14
1/0
SU-85/100
2/16
2/2
SU-76
2/6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678]


제가 위에서 인용한 세 개의 표는 베를린 전투에서 소련군이 상실한 기갑장비 중 일부 만을 보여줍니다. 다른 소련군 기갑부대들의 손실/완전손실과 구체적인 손실원인에 대한 통계도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 세 개의 표 만으로도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가 보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판쩌파우스트의 성과입니다. 피해 원인으로는 포격(전차포/대전차포) 다음으로 많은 것이 판처파우스트인데 완전손실이 차지하는 비율을 놓고 보면 판쩌파우스트가 정말 엄청난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격에 비해서 완전손실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제11전차군단의 T-34의 경우 판처파우스트로 인한 완전손실이 파손의 두 배 가까이 될 정도입니다. 물론 이 표는 베를린 작전에 참가한 소련 기갑전력의 일부이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판처파우스트가 꽤 치명적인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맞으면 확실히 골로갈 확률이 높으니 말입니다.

소련 전차병들이 판처파우스트를 두려워 할 만하군요.

2011년 5월 5일 목요일

7년전쟁기 프로이센군 포병의 화력과 기동력 문제에 대한 잡담

오전에 민방위 교육 보충을 다녀온 뒤 책을 읽었습니다. 전에 읽다가 못 읽은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읽다가 말아 흐름이 끊어지니 잘 안읽히더군요.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쇼왈터(Dennis Showalter)의 “Weapons and Ideas in the Prussian Army from Frederick the Great to Moltke the Elder”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문제인 화력과 기동력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괜찮았습니다. 쇼왈터는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의 포병의 문제를 재미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 육군 야전포병의 화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2파운드포(12-pfünder Geschütz)였습니다. 이것은 야전 기동력을 위해 화력을 다소 희생한 것 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은 물론 기동력도 어정쩡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 소속된 대대포병의 3파운드 포 또한 기동력을 강조한 물건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거리도 형편없고 탄도도 불량한 졸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3파운드 포는 일선 보병들의 외면을 받아서 실전에서 보병들이 3파운드 포의 지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2파운드 포의 경우는 요새에 설치된 12파운드포를 야전용 포가에 얹은 것으로 대체되었고 보병대대의 3파운드 포는 조금 더 나은 6파운드포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후기로 가면서 화력에 대한 의존, 특히 중포병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기 때문에 포병의 규모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중요시한 야전 기동력이 감소했다는 것 입니다. 18세기의 비포장 도로는 기상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약한 날씨라도 만나게 된다면 많은 포병을 동반한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포병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이에 대한 보급도 늘어났는데 많은 화약과 포탄이 함께 이동하면서 포병의 대열은 더 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기동성을 위해 포병을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의 경험으로 새로운 야포를 개발하는 등 포병의 발전에 신경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이라는 견인수단에 의존하는 한 기동력과 화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 까지도 독일군에게 있어 기동력과 화력의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잡담 하나. 오늘 쇼왈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보불전쟁 이후 독일군 포병의 발전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고쳐서 써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좀 두서가 없어서^^;;;;

2011년 5월 2일 월요일

발상의 전환?

구글리더를 열어보니 오늘도 재미있는 소식이 한 가득 입니다. 빈라덴이 사살 됐다는 소식은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중요한 소식이지요. 빈라덴 사망 소식을 들으니 2001년에 책을 읽다가 친구로 부터 국제무역센터 건물이 불타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텔레비전을 켰다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이군요.

그런데 국내 언론쪽을 살펴보다가 동아일보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됐습니다.

[김순덕 칼럼]한나라당, 유시민 영입 어떤가


이거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 입니다. 주로 (친노를 혐오하는) 호남쪽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죽을 쑨 유시민이 한나라당으로 갈 수 있다는 농담이 돌던데 이걸 공론화 할 줄이야.

동아일보가 여러 모로 사람을 즐겁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