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데이빗 글랜츠의 인터뷰

『독소전쟁사』를 함께 작업했던 분들과 진행하던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1권 일부는 번역된 상태였지만 3부작이 아직 완결된 상태도 아닌데다 분량 자체가 많아서 접촉해본 출판사들이 약간 부담을 느낀게 큰 원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고 마지막 3부가 나온 뒤에 다시 협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스탈린그라드 3부작 대신 2차대전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새 프로젝트는 2013년 쯤 출간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는 지금 준비중인 책이 예정대로 2012년에 마무리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들 중에서는 이미 원서를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번역본을 기다리시던 분도 많으실 것 같아 더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직 원서를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World War 2, 2010년 5/6월호에 실린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David M. Glantz Fights for the Truth About Stalingrad)”라는 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짧은 인터뷰는 글랜츠가 3부작 중 앞의 두권의 핵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어떤 성격의 저술인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입니다. 인터뷰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퇴역 육군 대령 데이빗 글랜츠는 최근 공개된 소련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찬 책을 출간했다. 글랜츠의 목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이어진 신화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글랜츠가 최근 출간한 서사적인 대작, To the Gates of Stalingrad와  Armageddon in Stalingrad는 역사상 가장 장대했던 전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예를 들면, 글랜츠와 공저자 조나단 하우스는 붉은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잔혹한 비밀경찰 NKV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이다. “비밀경찰의 자료들은 사기의 저하라던가, 검열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탈영병의 숫자라던가 하는 것들을 놀랄만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 이 전투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추론에 의거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해 쓰여진 적은 없었지요.”

산토로(Gene Santoro) :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글랜츠 : 제 뜻은, 신화를 걷어내고 실제 사실의 복원을 시작하기 위해서 양측의 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입니다.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수행되었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작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군사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에 속한 것 입니다.

산토로 : 왜 스탈린그라드를 선택하셨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은 1950년대 초반 이래 수백권에 달합니다. 초기의 많은 저작들은 독일측의 회고록이나 특정한 독일측 인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저작들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독일측 자료에다 주로 소련 제62군을 지휘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회고록과 같은 제한된 소련측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저작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전체적인 측면과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 입니다.

산토로 : 예를 들자면?

글랜츠 : 한가지 일반적인 관점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달리 1942년 블라우 작전 당시 스탈린은 땅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련군을 매우 빨리 퇴각하게 했으며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선 까지 물러선 뒤에는 반격에 나섰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 입니다.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 전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전략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어디서건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붉은군대는 스탈린그라드로 밀려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했다는 것 인가요?

글랜츠 :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블라우 작전의 초기에는 소련군의 역습, 반격, 심지어는 대규모의 반격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반격은 7월에 독일군의 북익에 가해졌습니다. 스탈린은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군과 그 밖의 새롭게 편제된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이러한 반격에는 소련군이 500에서 1,000여대 정도의 전차를 투입해 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반격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글랜츠 : 최초의 반격은 매우 형편없이 지휘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소모를 강요한 것을 제외한다면. 7월 말에도 반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두개의 새로 편성된 소련 전차군이 돈강 만곡부에 투입되었고 새로 편성된 62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대규모의 전차전이 거의 3주간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산토로 : 왜 그랬습니까?

글랜츠 :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보병 전력이 1941년 보다 약화되어 있었으며 기갑 부대의 진격을 뒤따르는 많은 보병 부대가 루마니아군이나 이탈리아군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병력은 포위망을 벗어나 잠적하거나 나중에 붉은군대에 재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랜츠 : 독일 제6군이 진격하면서 양 측방, 특히 돈 강을 따라 이어진 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6군의 병력 중 진격에 투입할 수 있는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돈강 만곡부를 정리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이 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 입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돈 강을 도하한 뒤 기갑군단을 선봉에 세운 양익으로 볼가강까지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각각 북쪽과 남쪽방향에서 진입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점령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무엇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북익의 독일 기갑군단을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 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독일군 3개 사단이 40km에 걸쳐 방어에 묶여있도록 한 것 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시가전이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북쪽 외곽의 공업지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공세의 남익은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소련군이 취한 대응이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산토로 : 파울루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글랜츠 :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제압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었던 전력은 보병군단 1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약간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제6군 전력의 3분의1 정도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 기갑부대를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부대를 서쪽에서 부터 돌입시켜 블럭 단위, 도로 단위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갑사단들이 소모될 때 까지 공격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시가지 중앙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공격하려 했을 무렵 독일 기갑전력은 소모되었고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쯤되면 독일군의 연대는 대대규모가, 사단은 연대규모가 되었고 제6군은 기껏해야 군단 규모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지 않도록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양이었습니다. 1만명의 사단이 다음날이면 500명만 남곤 했습니다. 소련군의 많은 사단이 소모되고 남은 수준의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정예부대로 묘사되는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시가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절반정도의 훈련만 마치고 장비는 편제의 3분의1 만 갖춘채로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해진 제284소총병사단은 3개 연대 중 1개 연대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로프-어-도프(rope-a-dope : 로프에 기대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하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법) 전술과 같았습니다. 소련군 총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와 정치위원 흐루쇼프가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 이었습니다. 총사령부는 예료멘코와 흐루쇼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겐 고기 분쇄기였습니다. 투입하는 사단 마다 소모되었고 이때문에 측면에서 새로운 사단을 차출해야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의 손실규모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 초기에는 전투가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도 이 사단들은 약체화 되었거나 소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소모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입니다. 11월 초가 되면 독일군은 사단들이 소모된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진정한 소모전이었던 겁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공세를 계속해 나갔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은 B집단군에 소속된 공병대대를 모두 긁어모았습니다. 이들은 11월 11일의 마지막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을 제외하면 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선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헝가리군도 이미 최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B집단군의 좌익은 동맹군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던 셈입니다. 소련군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지점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산토로 : 스탈린은 어떠한 유형의 지도자였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이 전쟁 첫 해에는 사소한 부분 까지 간섭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역이 전개될 무렵에는 군지휘관들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에 따라 소련군 지휘관들은 큰 범주에서만 스탈린의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의 완고함과 반격에 대한 고집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붉은군대가 한번 패배를 겪으면 와해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중요한 가정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42년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겪고 난 뒤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자비하게 인력을 소모하더라도 계속 싸우면  숫적으로 열세인 적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대략 1400만명의 군 사망자(military dead)를 냈습니다. 이러한 댓가를 치르면서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전투로 단련된 우수한 독일 국방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댓글 23개:

  1. 지나가는사람10:51 오전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인터뷰이네요. 이 책들이 꼭 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에 예레멘코와 흐루쇼프를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이유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정말 인류사에 두번 없을 참혹한 전쟁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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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스탈린그라드 3부작은 앞으로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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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마왕3:30 오후

    <span>아쉬움이 약간, 그리고 궁금함이 더해지는 포스팅이군요.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면 좋겠습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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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프로젝트도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힌트를 조금만 드려도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언제 뵐일이 있으면 직접 말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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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igTrain8:17 오후

    마지막 강조점은 참 놀랍네요. 한 신화가 다른 신화에 의해 대체되고, 다시 신화화돼 다른 학설로 바뀌는 건지..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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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 새로 시작하는 건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비해서 부담이 적은 물건이라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문제라면 일정을 잘 맞추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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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글랜츠 씨는 독소전의 소련군 사망자를 1,400 만명 전도로 보는 모양이네요..독소전쟁사의 부록에 보면 완전손실을 1,130만 정도로 보고 있던데 말이지요..그동안 생각이 좀 바뀐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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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련군의 인명손실은은 캐면 캘수록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소련 붕괴직후 새롭게 시작된 연구에서 군인 사망자를 1400만명으로 높여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메르찰로프에 의해 제기되었지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소련 역사가 겔러는 군인 사망자만 2200만명으로 잡기도 했습니다. 소련의 공식 자료를 극도로 불신한 러시아 역사가 소코로프는 199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군인 사망자만 2640만명(!!!)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소련시절의 인명손실 통계에 대한 불신은 러시아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글랜츠도 새로운 러시아 연구 경향을 받아들여 사상자 수치를 조정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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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문기야2:50 오후

    또 새로운 사실이군요. 웹상에서 대전사 관련 가장 수준높은 사이트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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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어권 사이트 중에서 괜찮은 곳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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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마지막 문단의 서술리 놀랍군요. 스탈린이 끝까지 통제를 놓지 않았다라...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3부작 번역이 보류되었다니 아쉽군요. 내년이라도 재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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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아이아스8:11 오전

     정말이지 아쉽군요! 조만간 어린양님의 글을 서점에서 보는가 했더니 말입니다.
    뭐, 기다리는 만큼 나중에 더 좋은 것이 나오겠지요^ㅇ^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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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문기야9:59 오전

    그말이 아니고 어린양님 사이트가 최고라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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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Tretyakov6:43 오후

    1.항상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스탈린그라드 3부작도 기대되지만, 곧 출간될 다른 것도 기대되는군요.

    2. 저도 인터뷰 중에서 무엇보다 마지막 답문이 눈에 확 띱니다. 글랜츠는 스탈린과 주코프가
    소모전을 통해서 독일군을 묶어놓고, 종내는 궤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스탈린의 군사 능력은 주코프나 바실레예프스키 같은 장군들에게는 물론이고,
    스탈린과 같이 혁명을 했던 트로츠키나 카메네프, 오르조니키제 같은 사람들보다도 뒤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로버트 서비스 같은 사람이 쓴 소련 초기사를 보면, 폴란드-소련 전쟁이 있을 당시 스탈린은
    트로츠키-투하체프스키가 세운 전술을 망쳐서 제멋대로 날뛰고, 이 스탈린의 월권 행위가 소련을 참패로 이끌었다고
    서술이 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전술사를 잘 몰라서 이렇게 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소련 지도부가 전쟁 직후 스탈린을 거의 다굴한 걸 보면...심지어 레닌도 깠다지요.)

    그리고 이후에 스탈린이 군대를 운용한 경험이 없고, 투하체프스키 같은 사람을 숙청하면서
    장교들 대부분을 날린 걸 생각하면, 스탈린의 군사적 능력이 더 나아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스탈린이 처음부터 소모전을 노리고 군권을 꽉 쥐고 있었다기보다는,
    처음에는 자포자기에 빠져서 휘하 장교들에게 운용을 거의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독일군이 묶이기 시작하니까 다시 기어나와서 장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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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차대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좋아하실 만한 책입니다.

      2. 글란츠가 마지막 단락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스탈린이 소모전 전략을 채택해 너무나 막대한 인명손실을 가져왔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소련 장군들에 비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 격하운동 당시 지나치게 스탈린의 역량이 과소평가된감도 없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 연구 중 2006년에 출간된 Geoffrey Roberts의 Stlain's War는 2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스탈린의 군사적 위상이 높아진 것이 단순한 선전이나 우상화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완종 박사도 내전기간 중 스탈린이 전술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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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retyakov10:55 오전

    답변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책은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조만간 읽어보겠습니다.

    덧 : 혹시 이완종 박사님꼐서 어느 논문에서 지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러시아 내전에서 스탈린이 재능을 발휘했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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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내에 번역된 이완종 박사의 『10월 혁명사』에서 내전기 스탈린의 군사적인 활동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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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를 은근히 기다렸는데 아쉽지만 또 기다리면 되죠 ㅎㅎㅎ

    그나저나 마지막 답변이 걸작이군요. 지금까지 알고있던 통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답변을 보고서는 거짓말 안보태고 뒤통수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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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젠가는 재개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르죠. 다른 분들이 나서서 더 빨리 될 수 있을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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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위장효과5:13 오후

    프로젝트가 끝나심 그 결과를 꼭 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요즘 그렇잖아도 위시리스트는 늘어나는 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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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년 초에 한권 나오고 아마 2012년 말이나 2013년쯤 한권이 더 나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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