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4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 - 계속되는 논쟁

제가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썼을때 논쟁과 관련된 주요 논문 몇 개를 빠트렸기 때문에 자료를 보강해서 새로운 글을 쓰겠다고 이야기 했었지요.

그런데 슐리펜 계획이 실제 독일군의 작전 계획이 아니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면서 논쟁을 촉발시킨 테렌스 주버가 이 논쟁의 주 무대인 War in History 2010년 2호에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주버의 새 논문은 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으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새로운 독일 자료를 가지고 그를 비판한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Gross)의 논문을 반박하는 논문입니다. 이제 게르하르트 그로스가 주버의 반박을 재반박할 차례로군요. 이로서 이 논쟁은 10년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버는 자신의 밥줄인 이론을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쓸 글에서 이야기 하겠습니다만 주버는 1905년의 Generalstabsreise West에서 실시된 워게임이 슐리펜 계획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그로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그로스가 새로 발굴했다는 자료들이 기존에 알려진 것들을 보다 세부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그치고 있을 뿐 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슐리펜 계획" 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이 당시 편성되어 있지 않던 부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반박이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주 버의 새로운 논문은 제가 앞으로 쓸 예정인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쓸 글은 지금까지 발표된 주요 논문을 최대한 소개하는 방향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어쨌든 논쟁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기세입니다.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문화대혁명 시기 학살의 유형

문화대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은 혼란과 광기일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초기 단계 부터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도 이른바 '사류분자(四類分子 :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에 대한 학살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류분자에 대한 학살은 1966년 8월 하순 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 학살이 시작된 다싱(大興)현의 경우 8월 27일 부터 9월 1일 까지 325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1) 문혁이 종결 된 뒤 정부차원에서 문혁 당시의 인명피해에 대한 공식 조사를 하긴 했습니다만 문혁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앞으로도 불가능 할 것 입니다.

문혁당시 학살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몇몇 연구자들은 학살 피해를 집계하기 위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집계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던 Roderick MacFarquhar와 Michael Schoenhals의 저작에 인용된 Andrew Walder와 Yang Su의 공동연구는 1,500여종의 지역 신문에 실린 학살 관련 기사들을 집계해서 이 시기에 약 75만명에서 150만명 사이가 학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2) Yang Su는 문혁당시의 학살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데 200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세곳의 성(省)을 사례로 학살의 유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Yang Su가 2006년의 논문에서 사례로 든 지역은 광시(廣西), 광동(廣東), 후베이(湖北) 등 세 곳인데 광시성의 경우 1966년 행정구역 기준으로 83개 현 중 65개 현이, 광동성은 80개 현 중 57개 현이, 후베이성은 72개 현 중 65개 현이 조사 대상이었습니다. Yang Su는 살해당한 인원이 10명 이상인 경우만 학살로 분류해서 집계하고 있습니다. 조사 대상이었던 세 지역 중 학살이 가장 지독했던 곳은 광시성으로 조사 대상 65개 현 중 43개 현에서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 중에서도 15개 현은 1천명 이상이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밍(武鳴)현의 학살이 가장 심해서 문화대혁명 중 2,463명이 학살되었고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 6월 중순 부터 같은해 7월사이의 두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1,546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광동성에서는 28개 현에서 학살이 일어났으며 6개 현에서 1천명 이상이 살해되었습니다. 후베이성은 특이하게도 학살이 드물게 일어났으며 조사대상 중 4개 현에서만 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3)

이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학살이 일어난 현은 많은 경우 성도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편이었다는 겁니다.4) 다음으로 특징적인 것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방식이 많았다는 것 입니다. 광시성의 림구이(臨桂)현에서는 1,991명이 학살되었는데 절반에 달하는 918명이 이른바 '사류분자'와 그 자녀였습니다. 더 골때리는 것은 농민도 547명이나 포함되는 등 학살대상이 사류분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당간부도 무려 326명이나 살해되었습니다. 심한 경우 사류분자의 자녀가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빈농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5)

마지막으로, 지방에서 학살이 심화된 시기는 1968년 여름 이후로 이 시기는 바로 문혁 초기 난립하던 수많은 분파들이 정리되고 지방에서 혁명위원회의 형태로 사태가 일단 정리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혁명위원회의 수립 과정에서도 이에 반발하는 분파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위원회들은 지역 안정 차원에서 수많은 계급의 적들을 만들어 소탕했는데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뻔한 것 이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학살 대상은 주로 '사류분자와 그 가족'이었지만 이밖에도 다양한 계층이 피해자였습니다. 저자의 표현 대로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밖에요.

잡담 하나. 저자는 집계 과정에서 분파간의 상호 투쟁으로 사망한 경우는 제외했습니다. 각 파벌간의 투쟁으로 인한 사망자도 집계해 본다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1) 산케이 신문 특별취재반/임홍빈 옮김, 『모택동 비록』上(문학사상사, 2001), 187쪽
2) Roderick MacFarquhar and Michael Schoenhals, Mao's Last Revolution(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262
3) Yang Su, "Mass Killing in the Cultural Revolution : A Study of Three Provinces", Joseph W. Esherick(ed.),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as History(Standford University Press, 2006), pp.98~103
4) Yang Su, ibid., p.106
5) Yang Su, ibid., pp.107~109

2010년 4월 19일 월요일

부도수표들...

대충 오늘 할 일을 정리하다가 블로그에 뭘 쓸까 끄적여 놓은 것들을 읽어 봤는데 이것들을 수습하려면 시간좀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진 주제들이라서 정리하는 차원에서 블로그 글로 만들어 보려는 것들인데 먹고사니즘의 압박으로 차분하게 자료를 읽고 정리할 여유가 줄어들었습니다. 다른 분들과 한번 이야기 해보고 싶은 주제들, 다른 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글들이 많은데 생각만큼 안되는군요.

블로그의 방명록에도 써 놓았듯 즐거운 주말저녁의 맥주집 같은 분위기에서 떠들고 싶은 것들을 느긋하게 써보고 싶습니다. 궁색한 변명이긴 합니다만 요즘 제 생활은 월화수목금금금이 된 것 같아서. 여행 계획들은 계속해서 파탄나고 갑갑하군요.

2010년 4월 15일 목요일

우울한 아르헨티나 공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의 문제점에 대한 글을 읽는 중인데 참 안습한 이야기가 많더군요. 대표적인 사례 하나....

(해군이 단독으로 해상의 방어를 담당한다는) 1969년의 결정에 따라 공군에 소속된 항공기들은 해상항법에 필요한 장비를 가질 수 없었고 이때문에 공군 조종사들은 해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의 스카이호크는 항법장비라고 할 만한게 없었다. 아르헨티나 공군 조종사들은 칠레와의 전쟁에 대비해 열악한 계기 대신 지표물을 숙지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이런 방식은 공해상에는 쓸모가 없었다. 공군 항공기들은 대부분 현대적인 전자장비가 없었으며 대부분은 가장 단순한 항법 레이더 조차 없었다. 스카이호크들의 경우 해결책으로 보다 나은 항법장치를 가진 다른 비행기들의 유도를 받아야 했다. 만약 어떤 문제가 발생해 비행기 중 일부가 편대 대형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문제는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미라지와 대거의 경우 민간 리어젯(Learjet)이 유도기의 역할을 했는데 이런 해결책은 민간기가 최대한 먼저 출발하고 군용기들이 최대한 느린 속도로 비행하는 상황에서도 속도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Rene De La Pedraja, "The Argentine Air Force versus Britain in the Falkland Islands, 1982", Robin Higham and Stephen J. Harris, Why Air Forces Fail : The Anatomy of Defeat(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6), pp.246~247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의 주요 공군 기지 중 리오 갈레고스(Rio Gallegos)는 포클랜드에서 750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산 훌리안(San Julian)은 700km, 리오 그란데(Rio Grande)는 690km 떨어져 있었다고 하니 이 거리를 제대로 된 항법장치 없이 날아가야 했던 아르헨티나 공군 조종사들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르헨티나 해군 항공대가 있긴 했지만 실질적인 전력이 스카이호크 11대(개전 당시 운용 가능했던 것은 8대)에 슈페르 에탕다르 5대에 불과했으니 공군이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1969년에 아르헨티나의 해군이 단독으로 해상의 방어를 담당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주된 원인은 육해공군간의 갈등에 있다고 하는데 이건 그야말로 무능한 윗대가리들 때문에 일선의 군인들이 생고생한 사례가 되겠군요;;;;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약간 난감한 증언들....

현대사는 다루고 있는 시기의 특성상 글 쓰기를 할 때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키보드를 잘못 치거나 혓바닥을 잘못 놀리면 바로 고소가 날아오니 말입니다.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연구자나 언론인이 있으면 바로 고소를 때리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자료가 굴러들어와도 함부로 쓰긴 어렵습니다. 이런 종류의 자료로는 구술자료가 대표적입니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비사는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떠돌고 구술자료의 형태로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종종 문서로 기록되지 못할 만큼 난감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료가 문서의 공백을 메꿔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거나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글쓰는 사람들을 갈등에 처하게 합니다. 욕 좀 먹더라도 이걸 쓸 것이냐 왠지 불길한데 그냥 쓰지 말 것이냐.

한국 현대사는 기묘하게도 자료의 공백이 많은 편입니다. 일단 한국전쟁으로 많은 문서를 잃어버린 것이 첫번째 이유 겠지만 현대사의 당사자들이 뭔가 구린 구석이 많다 보니 자신에게 불리할 법한 기록은 최대한 회피하지요. 간도특설대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이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사자들이 민감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다보니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있다 보면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임시정부나 만주국과 관련해서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증언들은 기존에 남한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한국측 기록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일본 항복 직후 만주로 파견되어 한인들을 보호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김홍일은 만주 일대의 조선족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보내졌지만 조선족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게 되자 그의 상관인 두율명(杜聿明)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두율명이 만주의 조선족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다고 보고하자 분노한 장개석이 김홍일을 파면해서 난징으로 소환했다는 게 조선족들 사이에 떠도는 버전입니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 같은 경우는 나은 편이고 간도특설대와 같이 악명(!!!) 높은 곳에서 복무한 이들에 대한 조선족들의 증언은 좀 더 난감합니다.

이 와는 조금 다른 경우가 196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증언록입니다. 국방부가 1960년대에 한국전쟁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채록 작업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증언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실 책으로 나와 있는 증언록은 민감한 이야기들이 삭제된 축약본입니다. 1960년대에 채록한 원본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문이 필요하며 군사편찬연구소장의 결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게다가 복사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요. 받아 적는건 허용되는데 이 방대한 증언록을 노가다로 쳐 넣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도 미공개된 증언록의 일부를 읽은 일이 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더군요;;;; 조선족들의 증언 처럼 신뢰도가 크게 의심되는 것도 아닌 당사자들의 증언이지만 좀 곤란한 내용이 많다보니 역시나 함부로 쓰기가 곤란합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자료는 많습니다만 잘못 썼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쓸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이런 민감한 자료들을 자유롭게 쓸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기묘한 인생역정

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육탄 10용사와 정신전투법

슈타인호프님이 '육탄 10용사'에 대한 글을 한 편 쓰셔서 엮인 글을 하나 써 볼까 합니다.

선전 도구로서 육탄 10용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당시 육탄 10용사는 정부의 매우 좋은 선전대상이었습니다. '북괴'에 비해 물질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정신력과 자기희생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원동력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방부가 발간하던 『國防』1949년 6월호에는 육탄 10용사를 찬양하는 특집 기사가 여러 편 실렸는데 그 중 재미있는 글 하나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호라 장재(壯哉)여! 오호라 비재(悲哉)여 육탄십용사!

그대들은 세계전사에 볼수없는 쾌거를 감행하였나니 이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전투력의 극치를 세계에 선양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극도발달에 의하여 원자력 내지 우주선(宇宙線) 이용이 가능하다고 하는 금일에 있어서 그러한 신비력을 발양한 것은 다만 한국용사의 아름다운 희생에서만 수긍되는 것이니 이것은 세계만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전투정신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 기념비가 않일 수 없다.

과학의 힘을 믿고 싸우는 민족! 무기의 위력 만을 의지하고 싸우는 군대! 그것은 언제나 정신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니 과학 보다도 무기 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군인의 정신 그것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시픈 소이(所以)다.

대동아전쟁, 이른바 동양평화를 위하고 싸왔다는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도 원자탄의 히로시마 폭격이 제아모리 인간살생을 혹독히 하였다 하드라도 좀더 강렬한 전투력과 필사의 정신력이 대비하고 있었다면 원자력쯤은 문제밖에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과학을 무시하는 전쟁, 무기를 소홀히 하는 전법은 20세기 현금(現今)에 있어서 용인될 수 없는 지론일른지 모르지만 원자력이나 무기 역시 인간의 정신활동의 범위권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임으로 나는 정신 제일주의를 고집하고 싶은 것이다.

세계전사를 들추어볼때 저 불란서의 쨘다-크의 기책도 오로지 정신에서 출발하여 정신에 끝이였고 나폴레온의 알프스 정복도 과학력이나 무기력(武器力)이 아니였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에 있어서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것은 물론 무기력, 과학력의 소치라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앞서는 것은 전국민의 정신쇠퇴에 기인함이 더욱 컷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군인만이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민족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쟁에 임함으로써 언제나 필승을 기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통해서 어느나라의 역사를 들추어 보드라도 잘 알수있는 것이니 용사를 길러낸 총후의 지성이 없다면 제아모리 출중한 군인이라고 하드라도 목숨을 나라에 받칠 동기를 맨들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패망한 영웅이 되어 있는 독일의 히틀러나 이태리의 뭇소리니를 보드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과학력과 무력을 위주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신력에 입각한 민족혼의 규합이였고 정신전투의 신봉자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전투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유물론적 이념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찬미하는 우리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절대이념인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인 것이다.

李鍾泰, 「꽃으로 떠러진 十柱花郞」, 『國防』(1949. 6), 6~7쪽

당시 한국군의 궁색한 상황과 안보적 불안을 고려하면 이렇게 정신력을 극도로 강조하는 것도 이해를 못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정신력으로 원자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긴 좀 심하죠... 그나저나 민주주의 국가의 군인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니 이것도 참;;;;;

2010년 4월 4일 일요일

국공내전 시기 인민해방군의 대전차전투 사례 하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을 정리해놓은 『승리』라는 책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말단 사병에서 간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계급의 회고담이 있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그중 북평전투 당시 전차를 앞세운 국민당 군의 포위망 돌파를 대전차팀으로 격퇴하는 내용이 하나 있어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제가 보기에 오타로 생각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949년 1월 14일, 인민해방군 모 부 제3영(대대)의 전사들은 북평시 광안문 밖의 곽공장 재묘신 일선에서 북평시안에 포위된 적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지초 단장은 적들이 풍대를 탈취하고 천진을 증원한 다음 당고를 거쳐 남쪽으로 뺑소니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3영 지휘부에 전화로 알린 다음 다른 부대와 배합작전하여 풍대를 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단장은 적들의 땅크를 까부시기 위하여 로케트발신관(바주카포)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교도원 마부증은 지휘소에 있다가 9련 진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련은 조선족들이 비교적 많은 련이었다. 9련의 진지는 재묘신에 있었다. 북평으로 부터 풍대로 가는 신작로가 재묘신의 옆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곳을 잘 지키면 적들은 천진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전사들은 어두움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투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1패(排, 소대)의 전사들은 괭이로 대피호를 파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힘차게 괭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조선인 전사 리윤태였다. 교도원은 리윤태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마디 던졌다.

"땅이 대단히 얼었군."

"그래도 우릴 당해내지 못하지요."

리윤태는 괭이끝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비벼 떨구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한창 궁금해 있는데 전사들 앞에 교도원이 나타났으니 물어볼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욱- 모여들었다.

" 교도원 동지, 담판을 한다던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적들이 투항 했습니까?"

어둑시근한 곳에서 서툰 한어로 한 전사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교도원은 "적들은 투항은 고사하고 풍내를 탈취한 다음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적의 이러한 동태를 전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망을 친다! 놈들은 꿈을 꾸고 있구만."

"내 생각 같아선 담판이고 무엇이고 걷어치우고 답새겨야 해(때려야 해)."

교도원이 1패의 작업현장을 떠나 9련 련부에 이르자 리윤태가 따라왔다. 그의 뒤에는 조선인전사 박현길이 따랐다. 리윤태가 교도원을 보고 청을 했다.

"교도원 동지,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저희에게 주십시오."

"땅크를?" 교도원의 반문이다.

" 그렇습니다" 하고 리윤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적의 땅크가 우리의 엄폐호를 파괴할 뻔 했습니다. 놈들의 위풍을 꺾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리윤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참군한지 오래서 로전사들처럼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였다. 교도원이 리윤태, 박현길에게 단부에서 이미 로케트발신관을 발급했으며 땅크를 까부시는 임무를 꼭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무척 기쁜 심정이였다.

15일 이른 새벽이다. 자욱한 안개가 넓은 벌을 뒤덮었다. 적들은 옹근 하루동안 준비하더니 또 발악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광안문 안에서 련이어 3영 진지로 날아와 터졌다. 약 10분 가량 발광적으로 포를 쏘아대더니 뒤이어 땅크를 내몰았다.

로케트발신관 반장 진봉상은 로케트 발신관으로 땅크를 겨누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땅크가 신작로 굽인돌이(커브길)에 나타났다. 진봉상의 로케트발신관 아구리에서 "씽" 하고 불줄기가 뻗어나갔다. 땅크의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땅크는 신작로에 박힌채 꼼짝 못했다.

"명중이다, 명중이다."

전사들은 좋다고 소리쳤다. 적의 땅크 웃뚜껑이 열리더니 한놈이 상반신을 내밀다가 리윤태의 총에 맞아 거꾸러졌다.

적은 그래도 전진을 중지하지 않았다. 아군의 화력권안에 기여든 적을 발견하자 9련 련장이 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각종 무기가 적들을 향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아군의 포탄들도 수구자와 련꽃못쪽 적진지를 향해 연거퍼 날아갔다.

3영의 정면에는 10여대의 땅크와 장갑차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적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적들은 9련 1패 리윤태네 앞까지 접근하였다. 전사들에게는 반땅크 무기가 없었다. 사태는 대단히 위급했다. 이때 리윤태와 박현길이 교도원에게 달려갔다.

"교도원 동지, 제가 가서 저 땅크를 폭파해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리윤태의 손에는 수류탄묶음이 쥐여져 있었다.

"좋습니다! 동무들은 잠시 저 작은 다리에 가서 엄폐하고 있으면서 저놈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시오!"

교도원의 말이 끝나자 리윤태와 박현길은 탄우를 맞받아 다리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적의 땅크도 거의 다리 가까이에 다가왔다. 앞에서 오던 땅크가 다리우에 오르자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만 연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연기가 흩어지자 그놈의 땅크는 계속 이쪽으로 움직였다. 리윤태와 박현길은 어느사이에 땅크 우에 올라섰다. 리윤태가 땅크 웃뚜껑을 열다가 박현길과 함께 땅크에서 떨어졌다.
적의 땅크는 기관총과 대포를 마구 갈기면서 덮쳐왔다. 두번째 땅크도 다리를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이때 리윤태는 힘겹게 첫번째 땅크 뒤로 부터 기여오고 있었다. 적탄은 사정없이 그의 앞뒤에 박혔다. 그의 솜옷에서 솜이 삐죽삐죽 나왔다. 그는 계속 기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땅크 우로 올라갔다.
갑자기 첫번째 땅크에서 불기둥이 일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터졌다. 땅크는 폭파되어 불덩이로 변했다. 뒤따라 오던 땅크와 장갑차는 앞길이 막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였다.

비록 적들의 땅크는 길이 막혔으나 적의 보병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놈들은 제1패 진지앞에 덮쳐들었다. 7련과 8련도 적과 백병전을 벌렸다. 이때 단부에서는 1련을 보내왔다. 1련은 오른켠에 있는 개천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덮쳐오는 적들의 길을 차단하였다. 앞의 놈들이 물러가지 못하자 뒤의 놈들도 전진할 수 없게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대포가 노호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포탄들이 적의 땅크무리에, 돌격해오는 적 보병들 속에서 터졌다. 힘찬 나팔소리가 울렸다. 돌격이다. 전사들은 엄폐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하면서 도망치는 적을 족쳤다. 적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전사들은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잔뜩 메고 진지로 돌아왔다.

지휘원과 전사들은 리윤태와 박현길이 보이지 않아 속을 태웠다. 진지에서 떨어져 있는 몇 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한창 안타깝게 찾고 있는데 리윤태와 박현길이 서루 부축하고 쩔룩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다리를 상했다. 특히 리윤태의 상처는 더욱 심했다. 그의 솜바지가 선지피에 시뻘겋게 물들었고 심한 동통으로 해서 얼굴은 해쓱해졌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없었고 머리칼은 새노랗게 그을었다. 교도원이 그의 앞에 다가오자 리윤태는 신작로에 박혀있는 땅크와 늘어져있는 적들의 주검을 가리키며 힘겹게 이렇게 말하는 것 이였다.

" 교도원동지, 보십시오. 적들은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녁노을은 마치 래일의 맑은 날씨를 알려주기나 하듯 서켠 온 하늘을 피빚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진해방소식이 날아왔다. 북평성 안에 포위된 적들의 환상이 부서졌다.

1949 년 1월 16일, 중국인민해방군 평진전선사령부에서는 적의 북평수비사령 부작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였다. 아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 밑에 부작의는 저항을 그만둘 결심을 내렸고 북평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중국조선족역사족적 편집위원회편,『승리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5』 (北京, 민족출판사, 1992), 637~640쪽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장비 부족을 반영하는 것인지 바주카포 팀을 단(연대)에서 예하 부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바주카포는 연대급 단위로 운용되고 있고 소대 단위에서는 변변한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게 안습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군이 공여한 M5 같은 경전차들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국민당군의 전차 종류를 명시하고 있지 않아 아쉽군요. 결국 리윤태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가 없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전차에 대해 집속수류탄을 사용한 육박공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집속수류탄은 1차대전 부터 사용된 꽤 유서깊은(???) 대전차 무기죠. 본문에서 리윤태의 용맹성을 강조하는 것 처럼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보병 개개인의 전투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력 타령만 하면 곤란하겠습니다만.

국공내전기의 대전차 전투 양상을 잘 보여주는 꽤 재미있는 글 입니다.

미육군의 인사적체와 주방위군, 그리고 대공황

미국은 1차대전에 승리한 뒤 육군을 대규모로 감축합니다. 미육군은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도 육군 병력을 50만명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본 것 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유력한 가상 적국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주로 해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4일에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은 육군 병력 상한선을 장교 17,726명으로 포함한 28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법에서 명시한 병력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시 유지할 수 있는 육군의 최대 규모를 명시한 것이었을 뿐 육군의 규모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법이 제정될 당시 미육군 병력은 약 20만명이었는데 1921년 1월에는 의회가 이것을 175,000명으로 줄이도록 했고 다시 같은해 6월에는 150,000명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장교 12,000명과 부사관 및 사병 125,000명으로 줄여 버립니다.1) 한편, 정규군을 보조할 주방위군의 병력 상한선은 435,800명 이었는데 이것 또한 실제로는 180,000명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2)

미 육군은 이렇게 평화시의 병력이 큰 규모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인사적체 문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자리를 늘리는 것이 어려웠고 이것은 장교는 물론이요, 사병들이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 까지 매우 어려워 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군대라는 것이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가진 조직이니 말입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소위는 1,184명, 중위는 2,783명 이었는데 대령은 509명이었습니다.3) 하지만 그나마 장교는 나았던 것이 사병들의 경우 진급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했습니다(;;;;)  1926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부사관 이하 계층의 구성비에서 사병(이등병~일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74.1%였는데 상병에서 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2.7%, 중사에서 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했습니다. 육군항공대의 경우는 사정이 눈꼽만큼 나아서 사병이 71.5%, 상병에서 하사가 23.0%, 중사에서 상사가 4.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4) 소위가 대령으로 진급할 가능성 보다 이등병이 상사로 진급할 가능성이 더 낮았던 셈입니다. 아무래도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대인 만큼 사병들도 진급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1차대전 직후의 미육군은 그 점에서 문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의 진급문제가 당시에는 꽤 심각했는지 이와 관련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5)

한 보병중대의 중대원들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의 진급공고를 읽기 위해 부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병사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놈의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호건은 일등병이 됐는데 이녀석은 겨우 '6년' 복무했단 말이야. 다른 좋은 데로 옮겨야 겠어."

이당시 미육군에서는 상사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2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육군항공대는 조금 더 사정이 좋아서 16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대전 직후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에 미육군은 급여 면에서도 민간보다 못했습니다.6) 진급도 잘 안되고 박봉이니 군대가 인기있는 직장일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미육군의 재입대율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 0.47로 신병 두 명이 입대할 때 복무기간을 마친 병사가 제대하지 않고 군대에 남는 것이 한 명도 채 못되었다는 것 입니다.7)

하지만 대공황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진급이 안 되는 것은 대공황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바가 없었으나 군대는 불황기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장이었습니다. 미육군 장교들은 심각한 진급적체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계속 남는 방향을 택했습니다.8) 사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대공황 전에는 1도 넘지 못하던 사병의 재입대율이 높아져 1931년에는 1.24, 1932년에는 2.99가 되었고 특히 육군항공대의 경우 1931년에는 1.69, 1932년에는 3.35가 되었습니다.9) 주방위군도 마찬가지여서 대공황이 밀어닥치자 주방위군 자원자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주방위군의 훈련 참석율은 평균 90% 이상을 상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에 참석할 경우 훈련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가 국방비를 삭감한 덕분에 1934년에는 매주 훈련 수당을 지급하던 것을 1년에 36주만 훈련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10)

어쨌거나 끔찍한 인사적체와 대공황을 견뎌낸 군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그때까지 군대에 남아있던 소수의 장교들은 특별히 무능하지 않은한 군 내에서 한자리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Richard W. Stewart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II : The United States Army In A Global Era, 1917~2003(Washington, 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 pp.53~59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88
3)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11
4) Mark R. Grandstaff, Foundation of the Force : Air Force Enlisted Personnel Policy : 1907~1956(Washington,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1997), p.21
5) Victor Vogel, Soldiers of the Old Army(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p.3
6) Grandstaff, ibid., p.23
7) Grandstaff, ibid., p.31
8) Davis, ibid., p.12
9) Grandstaff, ibid., p.31
10) Doubler, ibid., p.191

2010년 4월 1일 목요일

울화통이 터진다.

천안함 침몰과 관련된 소식은 어지간 하면 신경을 끄고 싶은 심정입니다. 새로운 소식이 들릴 때 마다 억장이 무너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블로그에서도 천안함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았는데 구글리더를 확인하던중 정말 울화통이 터지는 기사를 하나 읽게 됐습니다.




기사 전체가 울화통 터지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미 부실한 장비와 현장의 가혹한 환경 때문에 사망자가 한명 발생한 마당에 계속해서 초인적인 의지만 발휘해야 하다니 도데체 이게 대한민국 군대인지 황군인지 알 수 가 없군요. 이 빌어먹을 황군의 전통은 정말 끈질기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저도 사람인 만큼 이런 엿같은 상황에서 진짜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는 UDT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사태가 정리될 때 까지 작업에 투입된 모든 분들이 무사하시기만을 빕니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을 미담으로 선전하는 국방부의 태도는 정말 울화통이 치밉니다. 제발 사람 좀 소중하게 생각합시다. 특히나 UDT 대원이라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