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미국쪽 기록

슈타인호프님이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글을 하나 써 주셔서 저도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1950년 4월 28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 사건은 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순 중위는 월남한 뒤 북한의 남침 의도와 북한 공군의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남침에 대한 경고가 많았지만 바로 남침 직전에 북한군의 장교가 월남해서 남침에 대한 정보를 알린 것은 파급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미국쪽 반응은 살짝 심드렁 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대리 드럼라이트(Drumright)가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말입니다.

1950년 5월 11일 오후 6시 서울.

대사관전문 683호. 대사관전문 675호 참조. 5월 11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북한의 군사력1)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한미대사관은 현재 북한의 군사력 수준에 대해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통계와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총 병력은 103,000명으로 여기에는 "인민군", 만주에서 귀환한 조선인 의용군 부대, 국경경비대, 공군 항공사단, 기갑부대와 해군이 포함됩니다. 여기에 대해 지방의 경찰력이 약 25,000명으로 판단됩니다. 북한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은 한개의 여단규모 부대로 총 6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은 소련제 T-34입니다. 북한군의 포병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76.2mm 보병포와 유탄포 224문, 122mm 유탄포 72문, 82mm 박격포 637문, 120mm 박격포 120mm문, 45mm 대전차포 356문, 경기관 총 및 중기관총 6,032정.

4월 28일 이건순 중위가 귀순하기 직전까지 북한 공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Yak 전투기 35대, 쌍발 폭격기 3대, 쌍발수송기 2대, 훈련기 35대.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F-3 등급2)으로 이 정보에 따르면 북한공군은 훈련용 전투기를 포함해 Yak 전투기 100대, IL-10 공격기 70대, PO-2 정찰기 8대, 미제 연락기 2대 입니다.

만약 본 대사관의 추정치가 정확하다면 한국측이 주장한 추정치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측이 정보를 과장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우방국, 특히 미국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군사력 격차를 납득하도록 만들어 군사원조를 더 받아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있었던 면담을 포함해 최근 면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추가적인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의 성명은 한국 언론인들을 외국 언론인들과의 회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 언론인들에게만 별도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보다 상세한 보고서를 제공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북한 군사력에 대한 일부 추정치가 한국의 일반 대중들의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게는 자세한 보고서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드럼라이트.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 VII. Korea(Washington, USGPO, 1976), pp.84~85

이건순 중위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문제는 미국측에서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전쟁이 임박한 시점이라 한국군의 증강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어쩔 방법이 없지만 말입니다.




1) 위에서 인용한 같은 책의 pp.83~84에 따르면 신성모가 발표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방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 병력 183,000명, 준군사조직을 합하면 30만명. 인민군 정규사단 6개 및 보안대 3개 여단 118,000명, 여군을 포함한 보조 인력을 포함할 경우 여기에 37,000명이 더 추가됨. 1개 전차 여단 1만명, 해군 15,000명, 공군 2,500명.

기계화 부대는 경전차 18대와 중형전차 155대 등 총 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30대, 오토바이 300대로 편성.

북한군의 포병전력은 76mm포와 122mm포를 합쳐 총 609문, 82mm 박격포와 120mm 박격포를 합쳐 총 1,16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627문,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9,728정.

해군은 총 32척의 함정 보유.

공군은 총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1개 항공사단으로 편성.

2) 위에서 인용한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 등급이 F-3 이란 것은 이건순 중위가 정보제공자로서의 신뢰도가 F, 아직 판단할 수 없으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정보로서의 신뢰도가 3,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1995년에 출간한 『미군정기정보자료집 1-3 : CIC(방첩대) 보고서(1945.9~1949.1)』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및 정보 등급 분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공원(Source)
A. 완전히 믿을 만함(completely reliable)
B. 통상 믿을 만함(usually reliable)
C. 꽤 믿을 만함(fairly reliable)
D. 통상 믿을 만하지 않음(not usually reliable)
E. 믿을 수 없음(improbable)
F. 판단할 수 없음(cannot be judged)

정보(Information)
1. 다른 원천에서 확인(confirmed by other source)
2. 아마 사실이다(probably true)
3. 사실일 수 있다(possibly true)
4. 사실인지 의심된다(doubtfully true)
5. 사실같지 않다(improbable)
6. 판단할 수 없다(cannot be judged)

MGFA 도서관

일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옛날 사진을 뒤적이던 중 2003년에 찍었던 독일군사사연구소(MGFA)의 도서관 사진을 한 장 찾아서 한번 올려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 독일에서 뒹굴거리던 2003년 여름은 정말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세 달 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책 읽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먹는 일만 했으니 말입니다.


구식 필름카메라로 찍어서 사진이 좀 별로입니다. 이때 디카가 있었다면 사진도 많이 찍고 복사비도 아낄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잡담 하나

아래 글에 달린 좀 기묘한 논쟁 때문에.

당연히 창군 초기~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장교단이 모두 부패하거나 무능하진 않았겠지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싸운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까지 한데 묶어 무능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훌륭한 분 들 보다 무능하고 썩어빠진데다 잔인한 인간들의 기록이 더 많이 눈에 띄이더란 말입니다. 좌익 토벌한다고 출동해서 민간인이나 학살하고 원조 받은 물자를 빼돌리는데 어찌나 지독하게 빼돌리는지 어떤 품목은 원조 받은지 1년도 안되어 80% 이상이 사라지질 않나. 전투에 나가서 병사들에게 자폭 공격이나 시키니 '북괴군'에 투항해서 개망신이나 당하고 부대가 무너지는데 장교들이 먼저 군복 벗고 도망가서 조롱이나 받고. 훈련할 때 병사들이나 구타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우회기동이건 뭐건 없이 닥치고 돌격이나 시켜 병사들이나 개죽음 시키고.

제정신이라면 이런 기록들을 접하고 국민당 군대나 남베트남 군대보다 낫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할겁니다.

제 블로그에 창군 초기 한국군의 문제점에 대한 글들이 가끔 올라가는데 관련 기록들이 많으니 앞으로도 계속 올라가게 될 겁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들도 포함되겠지요.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식민통치의 폐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계급이 높아질 수록 더 심해졌는데 한국군 장교단이 한국전쟁 이전 부터 급속하게 증가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게중에는 꽤 재미있는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장교단의 자질 부족의 원인을 식민통치의 악영향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The Korean Army does not have adequate leadership. The major factor to be considered here is the lack of potential leaders. Korea has had its position of leadershp filled by foreign elements for many years. Develpoment of indigenous leadership was forcefully discourged.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 미 제8군 부참모장에게(1951. 5. 25),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Korea Army

꽤 일리있는 말 같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겨우 세자리 숫자를 넘기는 수준이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량으로 양산된 조선인 장교단도 기껏해야 위관급이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처형당했으니;;;; 그 밖에 김석원 같이 제법 높은 지위로 올라간 장교들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은 야전에서 대대를 지휘한 정도가 고작이죠.

어쩌면 국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것이야 말로 식민통치의 가장 지독한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군대의 동성애 혐오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

Nimishel님의 블로그에서 미군의 동성애자 관련 규정에 대한 글을 읽고 생각난 글이 하나 있어서 불법날림번역을 조금 해 봅니다. 왜 군대가 동성애자, 특히 게이에게 적대적인가에 대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설명한 글인데 제법 재미있습니다.

군대가 동성애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원인은 아마도 적을 '여성화'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동성애자는 이 책의 3장과 4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게이들은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들고 체구가 크며 강한 존재들이다. 게이 군인들이 일반 군인들과 다른 점은 성과 지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군대 내의 게이는 군인을 군대 외부의 여성, 즉 고향이나 부대 인근의 사창가, 항구의 여성, 또는 핀업(pin up) 사진이나 지갑속 사진으로 존재하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에 대해 지배적인 성적 행위자로써 만드는 것을 애매하게 만드는 존재다. "남자간의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동성애자로 알려진 남성의 존재는 ... 남성이 아닌, 즉 여성으로 상징되는 적에 대해 폭력을 가해야 하는 ... 남자로 이루어진 집단의 사회적 동질성을 흔들어 놓는다." 오늘날 많은 나라의 군대는 계급을 넘어서는 친교에 대해 규제를 가하고 금지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병사들이 가져야 할 호전적인 '남자다움'에 대한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남성의 가치 중 으뜸으로 치는 정력은 "동성애자에게는 해당 되는 것이 아니며" 동성애자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여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남자, 즉 '두 영혼의 사람들(berdache)'이 전쟁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 평생을 여자 옷을 입고 여자의 역할(성적으로도)을 하는 남자들은 체구도 크고 강하지만 관습적으로는 여자로 취급받는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들은 생물학적 성에 따라 일반적인 전사로 취급 받았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는데 제약을 받았다. 두 영혼의 사람들은 보통 보급품과 무기를 운반했으며 전사자들을 매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17세기 일리노이 부족의 경우와 같이 두 영혼의 사람들이 전투에 참여하더라도 활과 화살은 사용하지 못 했으며 곤봉만을 써야 했다. 여자들이 전투나 사냥에 쓰이는 특정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영혼의 사람들은 전투에서 그들의 육체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여성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는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남성성과 반대되고 상무정신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자면 1967년 당시 반전 시위대들은 보통 절반 정도가 여성이고 나머지는 "남성적인 근육질의 사내"나 "긴 머리의 히피", 또는 언제라도 경찰과 맞서 싸울 "군복을 걸친 남자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거의 모든 반전시위에서" 남성 반대자들로 부터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faggot"나 "queer"라는 조롱을 받았다. 반전시위대가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들은 유약하고 여성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게이 군인들에게 덧씌워진 오늘날의 동성애 혐오자들의 인식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의 동성애자 혐오는 "동성애가 남성의 여성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문화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남자간의 동성애가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성을 강화하고" 이것을 통해 "군사적 동원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의 신성대(神聖隊)에서는 병사들간의 동성애가 공개적으로 장려되었다. 남자들을 그들의 애인들과 같은 열에 배치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있기 때문에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남자 병사들간의 성적인 관계는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기능을 했다. 이성애자인 병사가 자신의 전우에게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우를 위해 싸울 동기를 만들었고 그리스의 군인들은 이러한 동기에 성적인 결속을 추가했다.

테베의 경우는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흔치 않은 경우이다. 군대 내에서 게이 병사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은 각 나라의 군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20세기 미군은 전시(병사의 필요는 높지만 인적 자원은 부족한)에는 게이 병사들을 용인하고 평시에는 용인하지 않는 것을 반복해왔다. 이런 경향은 여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시에는 이상적인 군대에 부합되도록 규칙이 강화되었지만 전쟁이 되면 규칙은 유연해졌다. (현재 미군은 완전 지원병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병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병사의 필요성이 아주 절박한 것도 아니어서 어정쩡하다고 할 수 있다.)

간혹 게이 병사에 대한 불관용 정책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해 사형을 부과하는 것이다. 1942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 친위대의 장교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영국 해군에서도 19세기 초 까지 동성애 행위를 한 장교는 돛대에서 목을 매달았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중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놈의 해군 전통은 입에 담지도 말게. 해군의 전통이래 봤자 럼주나 처먹고 남색질에 채찍질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나?[Don't talk to me about naval tradition. It's nothing but rum, sodomy, and the lash])"

역 설적이게도 오늘날 서구의 전쟁에서 병사가 전우에게 느끼는 격한 사랑의 감정은 근대 사상에서 여성성으로 간주하는 정서적인 유대를 만들기도 한다.(이 경우에는 군대가 필요로 한다) 이러한 유대감은 쉽게 성적인 것으로 바뀐다. 1차대전 당시 시에서는 남자간의 사랑을 이렇게 찬양했다. "남자간의 사랑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네."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는 (자신의 자서전과 작품에서) 그가 21세 이전까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삭제했다. 히르쉬펠트에 따르면 1차대전 중 지휘관들은 군대내의 동성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동성애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면" 독일군 병사 중 게이는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1차대전 당시 "적지 않은 수의" 게이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독일의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를 피해 망명했던 사람들 이었다. 히르쉬펠트는 독일의 게이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되찾거나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1차대전 장시 영국 "젊은이들(lads)"에게 인기를 끌었던 동성애를 다룬 문학작품이 나타나지 않았다.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374-376

이 글의 저자인 골드스타인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전쟁이란 폭력적이 남성성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쟁 중 적군에 대한 강간이 자행되는 경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적군에 대한 동성애적 강간이 이루어지는 배경에도 적군에게 굴복시켜야 할 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문화적인 의미가 깔려 있다는 것 입니다.(대표적인 예로 들은 것이 잔뜩 발기한 성기를 곧추세우고 페르시아군을 뒤쫓는 그리스 병사를 묘사한 도기이죠) 꽤 잘 들어맞는 설명같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잡담 하나. 본문에 언급된 히르쉬펠트의 저작은 1934년에 출간된 The sexual history of the world war인데 2006년에 University Press of Pacific에서 복간해 쉽게 구해볼 수 있습니다.

북버지니아군의 보급 문제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Edward Hagerman의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origins of modern warfare가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미국 남북전쟁에서 소모전, 참호전과 같은 근대적 전쟁의 요소가 등장했고 남북 양측의 군대가 모두 새롭게 변화한 전쟁 상황에 맞춰 지휘구조와 전략 전술 등을 재정립해 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조금씩 읽고 있어서 이제야 게티즈버그 전역을 다룬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이부분이 아주 재미있는데 저자는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 야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이 챈슬러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보급품의 부족 뿐 아니라 철도, 마차와 같은 수송수단 자체의 부족이 북버지니아군의 공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북버지니아군의 보급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급에 필요한 마필의 부족입니다. 말의 부족이 심각하다 보니 1863년 봄에 대규모 편제 개편을 통해 보급부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그런 조치를 취하고도 편제를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상봉쇄 때문에 말을 수입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또는 멕시코를 통해 마필을 수입해야 했는데 이곳에서 조달하는 말은 질이 좋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전투에서 소모하는 말이 더 많았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말의 부족으로 정찰과 보급로 경비를 담당할 기병도 부족했으니 포병이나 기타 지원부대의 상황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지요. 다음으로는 남부연합의 고질적 약점인 철도 문제를 꼽고 있습니다. 1863년 봄이 되면 철도의 연장은 커녕 기존 철도의 유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을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작전 지역에서 대규모 야전군의 보급에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대도시가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향한 진격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보급에 필요한 대도시가 드문 만큼 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징발을 실시해야 하고 이 경우 마필 부족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때문에 리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철도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수행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극도로 제한적인 보급능력이 작전행동의 자유까지 제약하게 된 셈입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남부연합의 총체적인 전쟁수행 역량이 그야말로 안습이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엄청난 설득력

미국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어떤 군사사학자의 논평.

미국은 1941년 부터 1945년 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글자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엄청난 설득력이죠. 쇼왈터의 이 글을 읽으면 무신론자도 천조국의 힘을 숭배하는 물신론자로 바뀌게 된다는;;;;;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기분전환

어제는 너무 우울하다 보니 일이 잘 안되더군요. 할 일도 있고 하니 바람쐬러 나돌아다닐 팔자도 아니어서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기분전환을 할 방법을 찾아 봤습니다.

그래서 모니터 바탕화면을 이것으로 교체했습니다.




바탕화면을 교체하니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빨리 에바 파 DVD 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대원수 동지의 편지

스탈린이 다른 인간을 신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간혹 예외도 있었다고 합니다. 몰로토프가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지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일대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Annals of Communism Series 중에는 바로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낸 것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은 1936년까지의 편지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은 주로 1930년 까지의 편지에 많고 1931년 부터 1936년까지의 편지들은 매우 적은 분량만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가 편지들을 잘 선정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오늘 읽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봤습니다.

몰로트슈타인(Молотштейн)*, 잘 지내고 있나?

도데체 거기서 뭘 하고 있길래 아무 소식도 없는겐가? 자네가 있는 곳의 사정은 어떤가? 잘 돌아가고 있나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뭔가 좀 써서 보내주게나.

이곳은 잘 돌아가고 있네.

1) 곡물 징발은 꾸준히 진행중이네. 오늘 우리는 비상시를 대비해 곡물 비축량을 1억2천만 푸드(пуд, 1푸드는 약16.38kg)로 높여잡았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하리코프와 같은 공업도시에 대한 배급량을 높였다네.
2) 집단농장 운동도 급속히 고조되고 있네. 물론 농업용 기계와 트랙터가 부족해서 달리 방법이 없다보니 보통 농기구를 긁어모아 사용해야 했는데 파종 면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네.(어떤 지역은 50퍼센트나 증가했네!) 볼가강 하류 지방에서는 전체 농민 중 60퍼센트가 집단농장에 가입했네.(이미 가입했단 말이지!) 우리 당내의 우파 녀석들은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어.

3) 대외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중국 문제를 처리해야 하네. 우리 극동군의 동지들이 중국인들에게 충분한 경고를 주었을 거야. 얼마전에 장쉐량(張學良)이 차이(蔡)와 시마노프스키 동지가 만나서 합의한 사안에 동의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네.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서는 거칠게 대응하지 않고 그냥 거절만 했네. 우리는 이정도만 할 수 있었으니까. 볼셰비키가 뭘 원하는지 그들도 알게 해 줘야지! 중국의 지주들은 우리의 극동군이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내건 조건들이 이행되기 전에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네. 리트비노프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했던 연설을 한 번 읽어보게. 꽤 괞찮은 연설이었어.
4) 아마 자네도 신문을 통해 이번 인사이동에 대해 알고 있을것 같네. 이번 인사이동에서 새롭게 바뀐 것은 톰스키(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를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의 보좌역으로 임명한 것(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쿠이비셰프는 이 조치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슈바르츠를 석탄협회 회장으로 임명한 걸세.(이 경우에는 더 나은 사람이 없었네)
5) (세명의) 우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네만 별다른 진척을 거두지 못하고 있네. 릐코프(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는 야코블레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우리가 미리 손을 써 놓았지.

그래. 이제 때가 되었네.

1929 년 12월 5일

Lars T. Lih, Oleg V. Naumov, and Oleg V. Khlevniuk(ed.), Stalin's Letters to Molotov 1925-1936(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pp.183-184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부를때 쓴 애칭 중 하나로 몰로토프가 유태인이란 걸 농담삼아 비꼰 것 입니다.
** 세명의 우파는 편지에 언급된 릐코프와 톰스키, 그리고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입니다.

이 편지에서 역시 후덜덜한 부분은 농업 집단화의 성과를 자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지만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과 그의 정적들을 엿먹인 것에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초딩마인드이지요.

그런데 이게 도통 남의 일 같지만 않은게, 높은 자리에 초딩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들어앉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1954년에 제안된 어떤 한국군 해병대 개편안

한국전쟁 직후 한국군의 재편성 시기의 기록을 보면 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미국측이 검토하다가 폐기한 한국군 편제를 보면 아주 재미있지요. 여기서는 1954년에 검토되었던 한국군 해병사단 창설안 중 하나를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1954년 5월 17일자로 되어 있는 미해군 군사고문단 소속의 해병대 군수고문관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미군 해병사단의 편제에 근접하는 규모로 확대개편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편성할 경우 필요한 군수지원품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전투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빈(M2) : 876정
소총 (M1) : 2,206정
자동소총(M1918A2) : 212정
권총(M1911A1) : 1,247정
기관총 (M1917A1) : 118정
기관총(50구경 M2) : 87정
유탄발사기 : 1,400정
105mm 유탄포 : 42문
155mm 유탄포 : 18문
3.5인치 바주카포 : 320문
60mm 박격포 : 53문
81mm 박격포 : 89문
4.2인치 박격포 : 30문
75mm 무반동포 : 15문
화염방사기 : 188대
전차 (M26/M4A3 105mm) : 85대
40mm 대공포 : 32문
LVT-A : 18대
LVT-4 : 224대

이 안에 따르면 한국군 해병대를 사단급으로 확대개편하고 지원부대를 증편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총 2786만6452달러가 소요되었고 여기에 1년치의 군수품을 합하면 총 비용은 8500만3349달러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배정한 비용이 1천만 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아닐수 없었습니다.(그 사이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지원내역에 들어있는 장비를 보면 M-26전차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 육군에 배치되고 있던 전차가 M4A3E8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원조안 대로 한국 해병사단을 편성했다면 장비상으로 한국군 최강의 전력이 되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여기에 언급된 원조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 육군 20개 사단 계획에 필요한 예산만 해도 막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해병대까지 요란하게 무장시킬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실현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계획들은 실제로 실행되는 계획보다 근사한 법이지요.

*'Expansion Program for the Korean Marine Corps plus support for one(1) year, Cost of', RG 330, 330.2 General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OSD), 1941-87, 330.2.4 Records of Other Special Assistants, Entry 185, Van Fleet Report Files, Box 11, Korean War Corps Expansion Program

2010년 2월 8일 월요일

대북정책에 대한 융통성 있는 접근에 대한 희망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마디. 제가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보니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중에서 저를 한나라당 지지자로 오인하시는 사례가 종종있습니다. 제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특히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보수적인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와 노무현 정부 전기간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해서 극도로 부정적이긴 합니다만 한나라당 지지자는 아닙니다. 강인덕 같은 보수적인 인사를 통일부 수장에 임명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대북정책을 시사했던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꽤 기대감이 크기도 했지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원래는 작년 연말에 쓰려고 했는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다 보니 좀 많이 밀리게 됐군요.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면서 개별 정당은 물론 정당 지지자들 간에도 대립각이 극단적으로 날카로워진다는 느낌입니다. 상대 정당, 정파의 정책은 무조건 틀린 것이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주장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 입니다. 저와 같은 당을 지지하시는 분들은 불쾌하시겠지만 김대중의 대북정책이 무조건 옳은 것이며 그것을 계승해 발전시킨 노무현도 당연히 옳은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북정책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명백해 졌으며 민주당-열린우리당이 집권한 10년 동안 북한은 남한의 유화적인 정책에 상응하는 대응을 사실상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제한적인 이산가족 방문이나 제한적인 정치사회단체들의 활동같은 통일쇼를 예로 들진 맙시다) 한계점이 명백히 드러난 상황에서도 한나라당의 공세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느라 정책에 대한 반성을 거의 하지 못한 점은 부메랑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는 보수층의 파상적인 공세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화정책 만으로는 북한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개혁진영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북정책을 옹호하는데 주력했지만 이것은 한나라당에 비해 훨씬 적은 개혁진영의 고정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역할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대북유화정책이 조건만 갖춰진다면 충분한 효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통일을 고려하고 있다면 북한과의 교류 필요성을 절대 부정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공개적으로 실시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는 마당에 그것은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하는 식으로 어설픈 물타기를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낯뜨거운 것은 노무현 정부당시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했을 때는 미국의 압박정책이 문제라고 합리화하기 바쁘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들어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자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비슷한 사례는 셀수 없이 많습니다. 2002년 북한과의 교전으로 한국 해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을 때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옹호하느라 바쁘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객이 한명 살해당했을 때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지요. 북한이 유화정책을 해도 도발하고 강경정책, 또는 무시하는 정책을 해도 도발한다면 도데체 유화정책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의 대북정책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성적인 자기성찰이란 불가능해 지고 융통성마저 잃게 됩니다.

만약 북한이 개혁진영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준다면 대북유화정책을 굳건히 견지해 나간 것이 결과적으로 큰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개혁진영이 주도권을 쥐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할 것 입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경우 정치적으로 체력이 약한 개혁진영이 입게될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989~1990년 동독이 붕괴될 당시 서독의 사민당(SPD)는 동독과의 점진적 통일을 주장했지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치닫자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기민-기사당 측은 동독의 혼란이 가속화 되자 동방정책의 틀을 깨고 적극적인 흡수통일로 노선을 전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민당은 동방정책의 연장선 상에서 온건한 정책을 고수한 까닭에 동독의 붕괴를 일관적으로 추진한 기민-기사당이 외교안보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사태에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래는 불확실 한 것 입니다. 민주당 측이 원하는 것 처럼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 연착륙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북한이 체제유지를 고수하다가 갑자기 붕괴하는 급변사태를 맞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혁진영이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을 고수한 것이 치명적인 부메랑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지기반이 한나라당에 비해 취약한 민주당과 그 밖의 진보정당들이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흡수통일이라는 상황이 닥칠 경우 한나라당에게 수동적으로 말려들어가고 결과적으로 외교안보분야에서 장기적으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 입니다.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보수정당에게 수동적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했으면 하는게 저의 작은 기대입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10년 2월 2일 화요일

이것 저것

1. 지난번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 들 중에서 오프에 나오지 못한 분들께 책을 택배로 보내드렸습니다. (Matthias님, 데키에로님, 윤현철님, 이준교님)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메일을 보내주십시오.

2. 귀가하는 길에 책을 50% 할인해 판매하는 곳이 있길래 두 권을 샀습니다.


연초라 돈 들어갈 곳이 많아 책을 거의 못 사고 있던 터라 기분전환이 조금 되었습니다. 아마 3월쯤 되면 좀 여유가 생길 듯 하니 본격적인 지름질은 그때 가서나 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