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9일 월요일

미육군 제7군에 대한 1950년대의 전시 증원계획

넵. 땜빵 포스팅입니다.

1950년대 미육군의 전시동원계획 중 독일 방어를 담당한 제7군에 대한 증원계획을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1953년 12월계획
1954년 12월계획
D-Day
350RCT(오스트리아)
351RCT(오스트리아)
350RCT(오스트리아)
D+30
4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D+3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극동)
공수사단×1(미국)
보병연대전투단×1(카리브해)
공수연대전투단×1(미국)
기갑기병연대×2(미국)
D+60
3기갑기병연대(미국)
D+91
보병사단×3(미국)
보병사단×1(태평양)
기갑사단×1(미국)
공수사단×1(미국)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D+150
D+180

1955년 12월계획
1956년 12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3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기갑사단(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기갑기병연대×2(미국)
D+91
기갑집단×1(미국)
기갑기병연대×1(미국)
D+120
82공수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4기갑사단(미국)
D+150
4기갑사단(미국)
25보병사단(태평양)
3보병사단(미국)
D+180
보병사단×5(미국)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4(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1957년 12월계획
1959년 1월계획
D-Day
D+30
1보병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4보병사단(미국)
82공수사단(미국)
101공수사단(미국)
3기갑기병연대(미국)
D+31
D+60
2기갑기병연대(미국)
D+90
82공수사단(미국)
D+120
2기갑사단(미국)
1보병사단(미국)
D+150
3보병사단(미국)
2보병사단(미국)
2기갑사단(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2(미국)
D+180
주방위군 보병사단×5(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주방위군 보병사단×3(미국)
주방위군 기갑사단×1(미국)

이 표는 Ingo Trauschweizer, The Cold War U.S. Army : Building Deterrence for Limited War(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pp.245~248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 입니다.

표 에서 재미있는 점은 미군의 증원 속도가 갈수록 늦어진 다는 것 입니다. 1953년 계획만 하더라도 D+30~31일에 대부분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 있는데 1954년 부터는 D+30일에 3개 사단이 증원된 뒤 한참 뒤에 증원병력이 도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독일을 미 제7군 혼자서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NATO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독일의 재무장으로 독일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날 예정이긴 했으니 말입니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국방비를 후려치려는 독일 정부

독일의 군비 감축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마다 만약 소련이 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 위기가 왔다면 국방비 대신 뭘 줄였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깁니다. 독일 정부가 예산 문제로 무기 획득 사업에서 우선 순위를 조정하려는 모양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유로파이터, 차기 중거리대공요격시스템(MEADS, Medium Extended Air Defense System), T-125 프리깃, 공격헬리콥터 등 주요 무기체계의 도입 비용을 평가한 뒤 구매 우선순위와 규모를 조정할 계획인 모양입니다. 국방부에서 필요로 하는 예산과 실제 가용한 예산이 대략 2십억에서 3십억유로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니 별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기사를 보니 A400M의 도입규모도 축소되는 등 규모가 큰 프로젝트들이 된서리를 맞는 분위기군요.

뭐, 경제위기이니 만만한 곳에서 허리띠를 졸라야겠지요.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궁금한 점

그냥 개인적인 잡상입니다.

간혹 독일책이 영어로 번역되는 걸 보면 원판에 비해 면수가 확 줄어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됩니다. 예전에 몇몇 출판사들이 괴악한 번역을 내놓은 걸 경험한 일도 있고 해서 이런 경우에는 축약번역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예전에 Tiger der Division Das Reich의 영어판을 보니 독일어판에 비해 면수가 거의 200쪽 가까이 줄어든걸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 영어판을 사 볼 형편이 안되니 도데체 영어판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호기심만 쌓이더군요. 물론 판형이 더 커져서 면수가 줄어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차피 수입이 갑자기 확 늘어나거나 로또를 붙을 것도 아니니 이럴 땐 그저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길 기다리는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발상의 전환? : 모스크바 전투당시 소련군의 영국제 전차 운용

미국과 영국의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승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렌드-리스로 원조된 물품 중에서 전차와 항공기 같은 전투장비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중 소련이 생산한 전차의 대수와 렌드-리스로 제공된 전차의 대수를 비교해 본다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입니다. 소련이 생산한 기갑차량을 모두 합치면 11만대에 달하는데 영국이 원조한 전차는 4,542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게 그렇게 당연하다면 세상은 정말 심심하겠지요.

캘거리 대학 교수인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관점을 살짝 바꿔 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 전 기간 동안 원조된 전차의 대수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의 전차가 원조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기준을 그렇게 바꿔본다면 의외의 결론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힐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호 2권(2006)에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for Moscow, November-December 1941—A Research Note라는 제목의 짤막한 논문을 기고 했고 이어서 22호 4권(2009)에 이것을 수정 보완한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of Moscow, November-December 1941 — Revisit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힐이 이 두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영국이 원조한 영국제 전차는 소련군 기갑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주요 공업지대에서는 생산설비의 소개를 시작했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군수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위해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각종 군사장비를 원조했고 여기에는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750대의 전차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이 중 466대가 12월까지 소련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 원조된 영국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발렌타인으로 총 259대가 보내졌고 마틸다(A12)는 187대, 그리고 나머지는 테트라크(Tetrarch, A17) 경전차 였습니다. 이중 소련군 부대에서 인수한 것은 발렌타인이 216대, 마틸다가 145대 였습니다. 영국제 전차가 처음 소련군에 인도된 것은 10월 28일로 이날 20대 가량의 발렌타인이 카잔 전차학교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영국제 전차를 인도받은 부대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목전으로 쇄도하고 있던 11월 20일에 영국제 전차를 장비한 소련군 부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대
마틸다
발렌타인
146전차여단 137전차대대
21
146전차여단 139전차대대
21
131독립전차대대
21
132독립전차대대
2
19
136독립전차대대
3
9
138독립전차대대
15
6

이 중 132독립전차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총 96대가 투입된 셈인데 이것을 당시 소련군이 모스크바 축선에 투입하고 있던 기갑전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은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해 11월 말에 모스크바 방면에 배치된 소련군의 기갑전력은 영국제 전차를 포함하여 670대, 그리고 이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중형 이상의 전차는 205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방면 소련군의 중형전차가 205대로 집계되었던 것이 정확하게 11월 20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결정적이었던 시점에서 영국제 전차는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영국제 전차들은 신통치 않은 성능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렌타인이나 마틸다는 최고 35~40cm의 눈이 덮인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었는데 이건 고작 T-60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T-34는 70cm 정도의 눈이 덮힌 야지에서도 거뜬히 움직였으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죠. 게다가 2파운드 포는 전차포로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고약한 물건이었고;;;; 하지만 당시 소련측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소련은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T-30이나 T-40 같은 경전차도 12월까지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국제 전차들이 T-34나 KV 계열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소련이 생산하고 있던 경전차들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제 전차를 받은 부대는 15일 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선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성능 고약한 영국 전차에 훈련 부족한 전차병들이 탔으니 뒷 이야기는 대략 상상이 가능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의 전차 운용 방식은 영국제 전차들의 운용방식과도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기갑부대는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때문에 대규모 전차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거나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 당시에는 전차여단이나 독립전차대대 단위로 분산 운용되면서 보병부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와 발렌타인은 바로 '보병전차'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영국이 제공한 전차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중요한 '머릿수'를 채우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동부전선에서 운용하기에는 성능도 부족하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은데다 승무원들의 훈련 수준도 낮았지만 있어줘야 할 시점과 장소에 존재했다는 것 입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책 몇 권

지난주에 주문한 책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유로화가 비싸서 독일 책은 많이 사지 못하는 터라 책 상자를 받아 드니 즐겁더군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라면 포장이 부실했다는 겁니다.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을 때 완충제 대신 종이를 구겨넣은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집어 넣은 게 아니라서 상자 아랫 부분은 모두 젖어 있었습니다. 책들은 비닐로 밀봉포장 해 놓아 전혀 상하지 않았지만 영수증이 젖어서 너덜너덜해 졌더군요.


그런데 영수증이 걸레가된 와중에도 포도주 광고가 실린 전단지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신기하여라...


 이번에 받은 책 중 군사사와 관계된 것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의 두 녀석 중 오른쪽에 있는 Österreich-Ungarns Kraftfahrformationen im Weltkrieg 1914-1918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1차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차량부대의 편성과 장비, 운용을 다루고 있는데 방대한 1차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책의 뒷부분에서 장갑차 부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단순히 오스트리아군의 장갑차 부대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적국이었던 이탈리아군과 동맹군이었던 독일군의 장갑차 운용에 대해서도 비교해서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산업화 시대의 전쟁, 특히 1차대전 시기의 기계화이다 보니 아주 좋은 물건을 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 있는 Österreicher in der Deutschen Wehrmacht: Soldatenalltag im Zweiten Weltkrieg는 2차대전 중 독일군에 복무한 오스트리아 인들의 군사 경험에 대한 내용인데 예상했던 것 보다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군들의 군사경험, 전쟁범죄, 나치 체제에 대한 순응 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한데 서술하고 있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그런지 서술의 밀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통독을 해 보면 평가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Pflicht zum Untergang: Die deutsche Kriegs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은 Schönigh 출판사가 내고 있는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네번째 책 입니다. 2차대전 말기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수행을 분석하고 있는데 특히 전쟁 말기 부대편성과 병력수급, 장비문제를 다룬 3장 1절과 전쟁 말기 서부전선의 경험이 전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부분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Der Schlieffenplan: Analysen und Dokumente은 역시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작년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이란 글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서구 군사학계의 논쟁에 대해쓴 일이 있지요.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 다소 산만한 글이 되었는지라 독일쪽 견해도 참고해서 다시 쓰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이책을 그 이유에서 사게 됐습니다. 이책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문과 슐리펜 계획에 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테렌스 주버의 슐리펜 계획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논문은 주버의 논문과 주버를 반박하는 논문을 합쳐 네편이 실려있고 나머지 논문들은 슐리펜 계획에 관련된 다른 주제의 논문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꽤 근사한 부록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서 언급된 작전안의 지도입니다.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한 글을 쓰려면 자주 봐야 할 테니 같은 크기로 복사를 할 생각입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서부전선으로의 차출에 반대한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들

동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면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기 위해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1차 대전 때는 그랬다는군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들은 반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많은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명령을 자신들의 부대에 대한 처벌행위로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바깥에 "플랑드르에서 도축할 소떼"나 "동부에서 온 죄수들" 같은 낙서를 했다. 약삭빠른 병사들은 서부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미 1917년 중반 부터 독일군 사령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병력의 10% 가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소규모 수송부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것, 수상한 병사들을 체포하는 것, 병사들을 무장해제해서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기차안에서 총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열차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강제적인 조치는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렸다. 1918년, 드빈스크에서는 5천명의 병사가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거부해 처벌 받았고 같은해 10월에는 하리코프에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명령을 받은 2천명의 병사가 폭동을 일으켰다. 예비병력을 필요로 하던 최고사령부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병사들이 한참 뒤에 신뢰하기 어려운데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볼셰비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 까지는 이들을 다시 서부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제 동부전선에는 나이 많은 예비역이나 향토방위대,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되는) 알자스 출신이나 폴란드계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Vejas Gabriel Liulevicius, War Land on the Eastern Front : Culture, National Identity and German Occupation in World War I(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213

2차대전때는 이야기가 살짝 달라져서 동부전선이 딱히 인기가 없었다죠.

2010년 3월 7일 일요일

土産品

어떤 결혼식 때문에 대구에 다녀왔는데 대구까지 간 김에 그냥 오긴 그래서 토산품을 조금 사왔습니다.


대구지역에서 발행되는 어제 일자 일간지들입니다. 가판대에서 지역언론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게 꽤 마음에 들더군요. 물론 논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마침 제가 산 신문들은 모두 가카의 대구 R&D특구지정을 대서특필하고 있군요.

요즘은 지역색이라는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지역색이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랄까. 정론지를 자칭하는 소위 중앙일간지들만 지역 신문가판대까지 점령하고 있다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소위 중앙일간지들은 서울이라는 중심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언론의 논조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할수 있는 언론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어떤 학자의 연구노트

어떤 책의 서문에 있는 구절입니다. 아마 여기에 공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꽤 많을 듯 싶군요.

나는 얼마전에 내가 아직 학부생이던 15년 전에 작성한 아직 끝내지 못한 연구 과제들의 목록을 찾아냈다. 목록의 열 번째 줄에는 "성과 전쟁"이라는 주제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렇지만 내 경력을 말아먹을 수 있다. 테뉴어를 받을 때 까진 기다리자"라고 적혀있었다.

Recently, I discovered a list of unfinished research projects, which I had made fifteen years ago at the end of graduate school. About ten lines down is "gender and war", with the notation "most interesting of all; will ruin career -wait until tenure."

Joshua S. Goldstein, War and Gender : How Gender shapes the War System and Vice Vers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xiii

저도 이 구절을 읽고 살짝 웃었답니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1/48이 아닌게 아쉽군

조만간 발매된다는 타미야 신제품 중 꽤 근사한게 있더군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35...




물론 저는 얼빵하게 생긴 75mm 탑재형 셔먼을 선호합니다만 76mm 탑재형들도 나름 좋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개량한 셔먼만 빼면 셔먼은 거의 다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을 1/48로 뽑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장의 미식가들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인류학과 관련된 글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관찰자들이 자신들이 보기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특이한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쓰는 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류학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학문인 만큼 관찰자인 '우리'와는 다른 뭔가 특이한 것을 잡아내는게 특출나죠. 그리고 후진적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창기의 인류학자들은 그런 경향이 아주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올리는 불법 날림 번역글도 특이한 대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데 이 글에서는 피지, 그리고 볼리비아의 카우카 계곡(Valle del Cauca)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특이한 식성을 가진 전쟁터의 미식가들에 관한 이야기 이지요.

이 절에서 살펴보게 될 피지와 카쿠아 계곡 지역에서 일어나는 관행은 아마 전쟁 중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일 것이다. 바로 식인 풍습이다.

식인행위는 전쟁에서 부터 다른 생활 양상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윌리엄스(Thomas Williams)는 피지인들을 관찰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식인 풍습은 피지인들의 관습 중 하나이다. 식인 풍습은 사회의 여러 요소들과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다. 식인은 피지인들이 추구하는 일 중 하나이며 그들 대부분은 식인 풍습이 고상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의 식인 풍습은 이미 유럽인들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오래된 관습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이 지역에서 식인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가 없다. 그렇지만 잡아먹는 대상이 주로 증오하는 적이라는 점을 보면 식인 풍습이 처음에는 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이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피지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주된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시체를 먹음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적을 잡아 먹는 것 행동 보다 더 증오와 경멸감을 보여줄 수 있는 행동도 없을 것이다. 이제 두 사회에서 일어나는 식인 풍습의 양상을 살펴보자.

카우카 계곡 지대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갈 때 포로들을 묶기 위해 특별히 밧줄을 준비해 간다. 물론 사로잡혀 꽁꽁 묶인 포로들이 목숨이 붙은 채로 그들을 잡은 자들의 마을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사들은 포로를 묶을 밧줄과 함께 목을 벨 돌칼을 함께 가지고 나가며 종종 전장에서 곧바로 적을 요리해 먹었다.
반면 피지인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포로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잡아먹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전사들은 바콜로(bakolo - 잡아먹을 사람)가 있을 경우 마을에 들어서기 전 북을 쳐서 포로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북소리를 듣는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주로 여자들)은 북 소리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즐거움에 겨워 광란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숙이고 정신을 잃을 때 까지 곤봉으로 얻어 맞은 뒤 목이 잘렸다. 그 다음에는 요리를 위해 잘게 토막이 났다. 피지에서 포로를 도살할 때는 칼질에 숙달된 남자가 희생자를 '관절 별로 여러 토막을 냈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종종 더 끔찍한 방법도 사용됐는데 희생자가 살아있는 상태로 토막을 내고 희생자가 보는 상태에서 갈비살을 베어 먹었다. 이것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은 희생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그의 몸 일부, 특히 갈비뼈를 잘라내서 희생자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 먹어치우거나 때로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두 지역 모두 희생자의 피를 받아 마셨다. 카우카 계곡 지방의 어떤 군장국가에서는 시체의 지방을 녹여 광산용 램프를 켤 때 쓰는 연료로 만들었다고 한다.

피지인들은 바콜로를 요리하기 위해 주로 특수한 화덕을 만들었으나 동시에 삶아 먹는 경우도 많았다.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시체를 굽거나 삶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 고기를 날 것으로 먹기도 했다. 피지인들은 사람 고기를 날로 먹는 경우가 없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시체를 통째로 화덕에 넣어 요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 모두 시체를 토막 내서 요리했다.

두 지역 모두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사로 잡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먹어치웠다. 카우카 계곡 지역의 여자들은 종종 남자들과 함께 식인 축제에 참여했으나 윌리엄스에 따르면 피지에서는 "여자들은 바콜로를 잘 먹지 않았다."

시체는 대부분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는 사람의 갈비살을 가장 즐겨 먹었지만 내장, 예를 들어 심장, 간, 창자도 먹었다. 내장을 발라낸 몸통은 그냥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피지인들은 "심장, 허벅지, 팔꿈치 윗 부분의 팔을 진미로 여겼다." 피지인들은 사람을 먹을 때 그 유명한 '식인용 포크'를 사용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피지의 한 추장은 적의 해골로 그릇이나 컵을 만들고 정강이 뼈는 바늘로 쓰게 했다. 그렇지만 피지에서는 카우카 계곡 지역의 뛰어난 전사들이 잘라낸 적의 시체를 전리품으로 잔뜩 쌓아둔 것과 달리 시체를 전리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추장들은 적의 해골이나 말린 머리를 대나무 장대에 꽂아 자신의 집 밖에 세워두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장식품은 가까운 방문객들이 그 추장의 위대한 힘을 느끼고 공포와 존경심을 가지도록 했다.

최소한 카우카 계곡의 한 군장국가에서는 적의 시체를 통째로 훈제해서 장기간 보관했다. 이 집단의 가장 강한 추장은 시체를 훈제하기 위해 아주 큰 건물을 만들었는데 스페인 인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건물에는 약 400명의 적 전사들의 시체가 무기를 손에 쥐고 다양한 자세로 훈제된 채 빽빽하게 차 있었다.

이 두 지역에서는 식인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 졌을까? 그 규모가 상당했음은 확실하다. 윌리엄스는 1860년대에 피지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전사자는 1,500명에서 2,000명 정도라고 추산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솥이나 화덕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피지보다 인구가 더 많았던 카우카 계곡에서는 잡아먹힌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정복 초기 스페인 연대기 작가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인 치에자 데 레온(Cieza de Leon)에 따르면 1538년의 대기근 당시 포파야얀의 주민 중 상당수는 "죽은 사람을 자신의 위장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그 해에 약 5만 명이 살해되어 먹혔다고 한다. 트림본(Hermann Trimborn)은 이 추정치가 과장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한 특수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식인 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헤레라 (Herrera)에 의하면 카우카 계곡의 집단 중 하나인 아르마(Arma) 에서는 1년 동안 8천명이 잡아먹혔다. 트림본은 역시 이 추정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으나 설사 희생자의 숫자를 줄여 잡는다 하더라도 대규모 식인 행위임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정확할 가능성이 높은 치에자의 기록에 따르면 카라파(Carrapa)와 피카라(Picara) 두 부족은 그들의 숙적인 포조(Pozo) 족을 무찌른 뒤 300명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뒤에 전세가 역전되어 포조족이 카라파, 피카라, 그리고 파우쿠라(Paucura) 족을 무찔렀을 때는 페레키타(Perequita)라는 포조족의 추장과 그의 수하들은 단 하룻동안 100명의 적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사람을 잡아먹는 잔치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주로 참여한 것은 바로 추장들이었다. 피지의 추장들은 그들이 먹어치운 사람 고기의 무게로 유명했다. 이 중에서 라 운드로인데(Ra Undreundre)라는 추장은 다른 추장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 추장은 자신의 집 뒤에 먹어치운 사람의 숫자 만큼 돌을 쌓았는데 돌 한개 당 사람 한 명을 먹은 것 이었다. 당대의 한 목격자에 따르면 라 운드로이네의 집 뒷 마당은 쌓인 돌이 232 걸음에 돌의 숫자는 872개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돌이 중간에 없어졌다고 하니 이것들 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가 먹은 사람의 수는 900명은 되었을 것이다.

Robert Carneir, 'Warfare in Fiji and the Cauca Valley', Jonathan Hass(ed), The Anthropology of War(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p.202~205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미식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