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30일 수요일

난감한 민간인 사망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약간 황당한 민간인 사망사고가 일어났습니다.

Box of leaflets dropped from RAF plane kills Afghan girl

영국공군 소속 비행기가 전단지를 살포하던 중 전단지 상자 하나가 그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소녀 한명이 그 상자에 맞았는데 결국 그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이탈리아군의 일상적인(?) 굴욕

Karl-Heinz Golla의 'Der Fall Griechenlands 1941'을 읽는 중 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침공 직전 배경 설명을 위해서 1940년 이탈리아군의 그리스 침공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대략적인 흐름은 알고 있지만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초장 부터 돈좌되는 묘사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침공군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이탈리아군 25군단은 공세 초기에 주력이 격파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군단에 소속된 첸타우로(Centauro) 기갑사단은 L3/35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공세 초반에 상당수의 전차를 진창에 빠트려 상실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Ian W. Walker의 'Iron Hulls, Iron Hearts' 58쪽에 약간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는데 첸타우로 사단은 10월 28일 공세를 시작했으나 진창으로 인해 사단의 선두 전차대가 이틀동안 24km(;;;;) 진격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무리하게 공격만 거듭하다가 공세역량을 소진했고 그리스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진창에 빠진 전차들을 내버리고 패주했다고 합니다. 이 단 한번의 전투로 첸타우로 사단의 전력은 큰 타격을 받아서 12월 9일에는 재편성을 위해 예비대로 돌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Golla에 따르면 역시 같은 군단에 소속된 산악부대 줄리아(Julia) 사단도 그리스군이 후방으로 침투하자 큰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고 하는군요. 이탈리아군의 알피니 사단은 이탈리아군 중에서도 나름 정예인데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명색이 산악사단인데 산악지형에서 일반 보병사단에게 우회 포위를 당하질 않나;;;;

뭐랄까. 이탈리아군이 모두 엉터리인 군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실전기록들을 보면 압도적인 황당함을 선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니 나쁜 인상을 벗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이탈리아군이 못 싸운 걸까요 아니면 그리스군이 잘 싸운 걸까요?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공수표 남발;;;;

그러고 보니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쓰겠다는 이야기만 하고 안 쓴 글이 꽤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나씩 정리하긴 해야 할텐데 정말 공수표를 마구 찍어냈다는 느낌입니다. 당장 기억나는 것 만 하더라도 sonnet님께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몇몇 논쟁에 대해서, 라피에사쥬님께는 동독군에 편입된 나치시기 군인들에 대해서 써 보겠다고 했었는데 아직까지 안 쓰고 있군요;;;;

신용을 잃으면 안되니(;;;;) 차근 차근 정리를 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제가 발행한 공수표에 대해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하도 많이 남발해서 기억이 안납니다;;;;

Inside Hitler's High Command 한국어판 출간

간만에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재미있는 책을 몇 권 발견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Geoffrey P. Megargee의 'Inside Hitler's High Command'의 한국어판인『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였습니다. KODEF의 안보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는데 출간일을 확인해 보니 9월 7일이었습니다. 그동안 KODEF의 안보총서는 주로 개설서 위주로 출간되었기에 이런 심도깊은 서적이 출간되었다는데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깊히 관여한 것이 패전의 큰 원인이라는 전후 독일 장군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독일 고위 장교단은 히틀러의 집권 초기에만 어느 정도 저항을 했을 뿐 2차대전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히틀러의 전략적 방침을 그대로 수용했으며 그때문에 패전의 책임을 히틀러와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고위 사령부는 보급과 정보에서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2차 대전 초기 부터 전략적으로 형편없는 상태에서 작전적, 전술적인 우위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소련에 대한 침공등 심각한 전략적 오류를 저질렀으며 결국 패전으로 다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001년 초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통념들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제 한국어판도 나오게 되었다니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마치 'Blitzkireg Legende'의 한국어판, 『전격전의 전설』이 출간되었을 때 처럼 즐겁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2만5천원으로 매우 착하더군요. 많은 분들이 이 저작을 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KODEF에서 출간한 (별로 좋은 책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의 경우 '리더쉽' 이라는 측면을 강조해서 경영서적(???)으로도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도 조직의 실패사례로 경영인들에게 꽤 많은 시시점을 줄 수 있을테니 잘만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조직이 재앙적인 실패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이지요.

※ 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국어판도 구입해서 원서와 대조해 보고 싶은데 지갑이 가벼워서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분이 군사사적을 전문적으로 번역하신 분이니 번역은 훌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번째는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의 'Geschichte der Kriegskun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의 번역판인『병법사-정치사의 범주 내에서』였습니다. 이 책이 번역된다는 소식은 2007년 말에 처음 들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출간되었더군요. 방대한 저작이라 한국어로 완역되어 소개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원서에 맞춰 총 4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문제라면 각 권의 가격이 후덜덜하다는 것 입니다. 각권은 3만원에서 4만원대를 오가는 데 아무래도 개인이 구매하여 소장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울 듯 싶습니다.
델브뤽은 제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 뛰어난 군사사가 일 뿐 아니라 군사평론가로서 군사사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언제 한번 짤막하게 정리해서 소개를 해 보고 싶은데 그러고 보면 예고만 해 놓고 아직 쓰지 못한 글이 많군요;;;;

두 권 모두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강력히 추천하는 바 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저작들이 한국어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또 어떤 저작이 소개될지 기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왕이면 제가 읽지 못한 것으로 번역되면 좋겠습니다만.

요가학원

토토로사에서 요가학원을 다운 받아 봤습니다.

천원이라도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정말 돈 아깝습니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Cat Shit One 80

오늘은 만화책을 한 권 샀습니다. 사실 만화책을 돈 주고 산 것이 너무 오랫만이라 얼마만에 사는 것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어쨌든 오늘은 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러 뭘 살까 고민하다가 Cat Shit One 80, 1권을 샀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내용은 심각한데 그것을 동물들이 나와서 하고 있으니 웃기는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련군으로 나오는 곰들이 도열해서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은 정말 웃기더군요. 저작권 문제로 그 장면을 블로그에 올릴 수 없는게 아쉽습니다.

다음달에 용역비를 받으면 2권도 마저 사야겠습니다.

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김명철의 책이 여전히 돌아다니는군요

얼마전 자주 가는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희대의 괴서, 조총련계 군사평론가(???)라는 김명철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출간 이후 내용이 문제가 되어 판매 금지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서점에는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세권이나 있더군요. 아실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미국이 북한에 굴복하고 한국은 김정일에 의해 통일'당한다'는 것 입니다. 종북저능아들의 단골 메뉴인데 근자에 이글루스에서 비슷한 바보들을 목격했는지라 기묘한 느낌이더군요.

참고로 이 서점에는 역시 괴서인 도서출판615의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팔리는 모양입니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손님 접대?

10월항쟁의 여파로 경상북도가 어수선하던 1946년 10월 14일, 경찰 고문관으로 있던 태프트(John L. Taft) 중위는 고령군으로 파견된 서울 경찰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령면 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태프트 중위는 서울 경찰대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부근의 해인사로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인사에 도착한 태프트 중위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 1946년 10월 14일 1500경에 서명자(본인)는 고령면에 도착해 고령면 경찰서에서 서울에서 파견되어 1946년 10월 6일부터 고령에 주둔해 있던 45명의 경찰관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점검을 했다. 경찰서장은 본인에게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모두 50명의 폭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폭도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온 해인사(1129-1403)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서명자(본인)가 1630경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경찰들과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지도자라는 지역 유지들이 기생(customary female entertainer)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폭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태프트 중위는 즉시 다음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습니다. 태프트 중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a. 1946년 10월 9일을 즈음하여 고령면 경찰서장이 해당 지역 관리들과 만나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을 대접하고 ‘위문(comfort)’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때 보리 세 가마가 경찰에 넘겨졌다.

b. 다음날인 10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지역 관리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면의 유지 60명이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서울 경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50,000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에서 즉시 30,000원이 모금 되었으며 추가로 17,000원이 금융조합을 통해 대출되었다. 고령면에 10,000원 (모금)이 할당되었으며 (고령)군의 다른 면들에는 각각 5,000원이 할당되었다.

c. 1946년 10월 12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면장을 만나 고령면이나 고령군 차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기생 40명 정도를 불러 잔치를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잔치는 1946년 10월 14일에 열리기로 되었으며 소요 비용은 15,000원 이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가뜩이나 국립경찰에 대한 평판이 나쁘던 차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미군정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직후 경상북도 경찰청은 고령 경찰서장을 해임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는 다시 진상 조사를 위해 대구의 99군정단(Military Government Group)에 특별조사를 명령합니다. 99군정단은 1946년 12월 10일, 리치먼드 소령(Fred C. Richmond)을 고령군에 파견했습니다.

조사단은 특별 조사를 통해 고령 경찰서장에게 전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단이 면담한 증인들은 경찰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령 경찰서장이 나서서 서울 경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이 면담한 경상북도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묘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령 경찰서장이 직위에서 해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울 파견대를 위한 기부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능하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해임되었습니다.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1946. 12. 2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공식적인 조사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값

중앙도서관에 가는 길에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의 '터미널 21문고'에서 책 두권을 샀습니다.


두 권 모두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정가는 각각 2만원, 2만5천원이었는데 할인이 되어 두권을 2만2천원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횡재했다는 느낌이더군요.

이 외에 '터미널 21문고'에서는 꽤 많은 학술서적들을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들이 많더군요. 중앙도서관 가시는 분들은 한 번 들러 보십시오. 필요하신 책을 반 값에 구할수 있을지 모릅니다.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트란지스터 걸'

옛날 속어 하나...

(전략)

위에 든 예로 보아 대개 일본어와 영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많이 범람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물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없을 경우 우리는 흔히 외래어로써 표현한다.

가령 학생들이 사용하는 속어 가운데 '트랜지스터 걸'이라는 것을 우리 말로 표현한다면 "진지하게 함께 토론이나 할 만한 위인(爲人)이 아니라 임시적인 노리개(즉 '트란지스터 라디오'와 같은)로 잠간 놀기에 편리한 여학생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트란지스터 걸'이라고 표현한 데에 학생다운 기지(機智)와 유모어가 담겨있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좀 더 언어 표현을 강하게 새롭게 하기 위하여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姜信沆, 「對話속의 '노랑머리'」, 靑脈 第3號(1964. 11), p.52
※ 본문에서 '트랜지스터 걸' '트란지스터 걸' 등으로 다른 표기를 하고 있는데 원문 자체가 이렇습니다. 교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더군요.

당대의 지식층이 읽던 잡지에서도 이렇게 여성비하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하긴 변한 모양입니다. 요즘 저런 글을 썼다가는 당장 여성 단체의 공격에 곤욕을 치를테니 말입니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MRE에 대한 유명한 일화

C 레이션에 대한 아래의 글에서 MRE(Meal Ready-to-Eat) 이야기가 나왔군요. MRE 이야기가 나온 김에 MRE에 대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91년 초, 걸프전 직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구호활동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서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것 같네요.

병사들은 피난민들에게 MRE를 공급했는데 대부분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쿠르드족들 또한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쿠르드 피난민들은 MRE의 내용물을 낯설어 했으며 또한 그 맛에 대해서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아사의 위험을 피한 뒤에는 더 이상 그것을 먹기를 거부했다. 그 무렵 위생과 건강상태가 개선되었고 병사들은 감자, 밀가루, 설탕, 쌀, 그리고 식용유와 같은 식재료들을 보급받아 배급했다. 피난민들은 그 뒤로 자신들의 요리를 만들어 먹을수 있게 되었다.

Robert H. Scales. Jr, Certain Victory : The U.S. Army in the Gulf War, Brassey, 1994/1997, pp.345-347

과연 Meal Rejected by Ethiopians, Meal Rejected by Everyone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일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09년 9월 9일 수요일

한국전쟁 중 미군 전투식량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한국전쟁이 2년 차로 접어든 1951년 8월, 1년 간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의 전투식량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 졌습니다. 재미있는 내용 일부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1. 먼저, C형 전투식량 중 여러 품목이 다양한 이유 때문에 전투 부대로 부터 기피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품목의 전투 식량은 폐기되거나 노무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a. C형 전투식량 중 대부분의 부대에서 기피하는 품목은 다음과 같다.

Corned beef hash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should be deleted)
Beef stew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Beef & Noddle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Meat & Beans : 전투식량에서 제외할 것.
Ham & lima Beans : 지나치게 짜다.
Hamburgers & Gravy : 차가울 경우 (먹기가 곤란함).
Sausage Patties : 차가울 경우 (먹기가 곤란함).

b. 갑작스러운 이동과 일부 전투 상황에서는 항상 식량을 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 그렇기 때문에 Hamburgers & Gravy, Sausage Patties, 그 밖의 기름기가 많은 종류의 식량은 극도로 추운 날씨에서는 먹을 수가 없다.

c. 일부 C형 전투식량 생산업자들이 낮은 질의 식재료(특히 고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로 인해 전투식량의 질이 저하되고 전투식량 중 기피되는 품목이 늘어나게 된다.

Troop Acceptability of Type "C" Rations(1951. 8. 14),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제 관심을 끄는 것은 "should be deleted"라는 평가를 받는 전투식량입니다. 어느 정도 맛이 뭐 같았기에 대부분의 전투 부대에서 만장일치(?!?!)로 퇴출을 요구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먹어 볼 수 만 있다면 정말 먹어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c항목의 내용입니다. 군납업자들이 뭐같은 고기를 써서 맛이 없다는 지적인데 이부분은 꽤 의외더군요. 미서전쟁 당시 불량 통조림이 납품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까지도 이런 불량업자들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덤으로. 미군 병사들이 선호한 전투식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2. C형 전투식량 중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품목은 다음과 같다.

Frankfurters & beans
Beans w/pork & tomato sauce
Ground meat & spaghetti

Troop Acceptability of Type "C" Rations(1951. 8. 14),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기피 식품들과는 달리 왜 선호되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하긴, 맛있다는데 달리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이 보고서가 올라가자 얼마 뒤 육군부에 근무하는 장교들을 대상으로 위의 보고서에서 언급한 전투식량들의 시식회가 열립니다. 이 시식회에 참여한 장교들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습니다.

4.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평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식회에 참석한 장교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제기하였다.

a. Beans with pork and tomato sauce: 뻑뻑한 감이 있다. 토마토 소스를 더 넣어야 한다.
b. Hamburgers with Gravy: 육즙(Gravy)이 너무 많으며[육즙을 먹지 않으면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할 수 없다.] 맛이 형편없다.[양파를 더 넣으면 맛이 좋아질 지 모른다.]
c. Sausage Patties with Gravy: 육즙이 너무 많다. 그러나 맛은 매우 좋다.
d. Meat and Beans with Tomato sauce: 고기가 너무 질기고 불규칙하게 썰려있다. 매우 맛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e. Chicken and Vegetables with Broth: 피망(Bell Pepper)맛이 너무 진하다. 닭고기 살은 너무 가늘고 걸쭉하다.
f. Ham and lima Beans: 맛이 너무 짜고 햄은 지나치게 기름지다.

Military Operations Office "C" Ration Luncheon Test(1951. 8. 17), Food and Container Institute. R&D Project Case Files; RG 92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Quartermaster General

전투부대가 퇴짜를 놓은 일부 품목은 육군부의 장교들도 비슷한 평을 하는 것으로 봐서 정말 맛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맛이 없었던 것인지 호기심이 생길 지경입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미 육군 최강의 기갑 장비

우리가 가진 최고의 기갑병기는 P-47이다. 이 친구는 우리를 여러번 구해주었다.
(Our best tank weapon, and the boy that has saved us so many times, is the P-47.)

- 미 육군 제 2기갑사단 병장 해롤드 풀턴(Harold E. Fulton)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9

2차대전 중 미 육군의 기갑 장비가 과연 낙후된 것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The Best Tank Weapon Of The U.S. ARMY!!!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가 기대되는군요

北京で建国60年軍事パレードの予行演習

이번 10월 1일은 중국 건국 60주년이지요.

지난 6일 천안문 광장 일대에서 전차와 자주포를 동원한 대규모 예행연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이었던 2007년에 베이징에 놀러가서 99식 전차를 구경한 뒤로 인민해방군의 기갑장비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지라 이번 행사가 꽤 기대됩니다. 군사 퍼레이드에서 전차처럼 위용을 과시하는데 적당한 장비는 드물지요.

대량학살의 요건

씁슬한 이야기 하나...

르완다는 서구지정학에 대한 비백인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별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인의 목숨의 가치를 서방 또는 백인들의 목숨과 비교할 때 이중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적어도 서방의 일부에서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의 기준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실체가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의 요람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바다를 건너 접하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는 항상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 보다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략)


워싱턴은 르완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 사태의 정치적 결과로 이미 충분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최대한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담당관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의 전임자들이 보스니아 문제를 담당할 때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르완다 사태를 대량학살(Genocide)라고 칭하는 것 조차 꺼렸다. 4월 28일, 한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셀리(Christine Shelly)에게 국무부는 르완다의 폭력사태를 대량학살로 보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기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비록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법률적 개념이 아니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확한 법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요인들도 포함됩니다."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은 관료적 발언의 놀라운 사례로서 어떤 발언을 하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대량학살의 징후는 더욱 더 명확해 졌고 UN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은 물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UN군이 르완다를 이동할 수 있도록 보병수송장갑차가 보내질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물자의 대여 조건, 장갑차의 도색, 그리고 어떠한 표시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천천히 지연되고 있었다. 한 주가 지날 때 마다 사망자가 늘어만 갔다. 어느 순간 사망자의 추정치는 50만명이 되었고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으나 워싱턴에서는 논의만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태가 대량학살이라면 행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은 대량학살이 아니라 '대량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크리스틴 셀리는 국무부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믿을수 있는 모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한 기자는 얼마나 많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야 대량학살이 되는지 질문했다. 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 직위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국무부가 대량학살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대량학살의 앞 부분에 "~적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게 사실입니까?"

셀리의 답변은 정부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반영했다.

"제가 받은 지침은... 즉... 즉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저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데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절대적인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의(定義)는 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선정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지 오웰이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봤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p.273, 276~277

이 당시 미국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비난'만' 받았습니다. 세상일이 대개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 씁슬한 일이지요.


잡담 하나. 크리스틴 셀리는 2005년 1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Brummbär

얼마전에 친구로 부터 모형 하나를 받았습니다. 드래곤에서 예전에 발매한 브룸베어였습니다. 동네 문방구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걸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원고도 대략 마감해서 보냈고 금요일에 급한 업무도 처리해서 주말에는 모형이나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준 브룸베어가 있으니 이 녀석을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옛날 물건이어서 그런지 부품 구성도 상대적으로 단촐하고 복잡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런데 몇몇 부품은 밀핀이 황당한 위치에 나 있어서 신경끄고 조립하기로 했습니다.


전투실이 큼지막 해서 밋밋한 감이 적지 않게 있는데 그래도 가분수(?)적인 맛도 나고 나름 육중한 느낌도 있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예전 제품들에 딸려 있는 트랙은 좀 귀찮아 보이더군요.




다듬다가 귀찮아서 이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대략 주포만 달아 놓고 다시 가조립을 한 번 해 봤습니다. 딱딱 잘 맞는게 느낌은 좋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윤민혁님이 주신 타미야의 1/48 헤처도 조립했습니다. 타미야의 1/48 제품 중 만드는 재미가 가장 쏠쏠했던 물건 같습니다. 한 번 더 만들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흥미로운 가정

오늘은 쉬는 시간에 결론 부분을 남겨두고 거의 2년 가까이 방치해 둔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를 마저 다 읽었습니다.


저자인 Jay Luvaas는 남북전쟁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열강의 군사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남북전쟁 발발부터 1차대전 발발직전 까지의 시기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미국에 파견된 각국 무관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유럽에서는 미국의 내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북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 대규모로 활용되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군사교리에 있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군사교리 면에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인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모두를 아마추어 군인들로 한수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고 거의 동시기에 유럽에서도 보불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낮은' 미국으로 부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나마 미국의 경험이 유럽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북독일연방과 프랑스의 기병 전술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차대전이라는 전례없는 소모전을 경험한 이후였습니다. 1차대전에서 유럽국가들이 경험한 전략적 문제는 바로 50년전의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1차대전 이후 유럽, 특히 영국의 군사사상가들이 남북전쟁의 교훈을 재평가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풀러와 리델하트의 남북전쟁 연구인데 특히 리델하트가 기동전 이론을 연구하면서 남북전쟁 당시의 대규모 기병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이 부분에서 꽤 재미있는 추론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Luvaas는 짤막하게 리델하트와 독일 장군들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리델하트의 많은 저작들이 2차대전 이전에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만난 독일 장군들도 번역된 것 중 일부를 읽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비록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당시의 기병전술이 독일 장군들의 기동전 사상에 '미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 책은 1959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도 1988년에 나온 것이라 리델하트가 독일의 군사사상에 끼친 영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근래의 연구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90년대 이후에 이 책을 썼다면 이런 재미있는 추론을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제 이런 추론을 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상 자체는 꽤 참신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