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외장하드를 하나 샀습니다

경제난으로 책을 사지는 못하고 카메라로 찍기만 하다 보니 전에 산 외장하드가 금새 다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1테라 짜리 외장하드를 하나 구매했습니다.


연결해 보니 내용물은 히다치 제품인데 꽤 시끄럽고 진동도 조금 심한 편 입니다. 그래도 이걸로 1테라의 여유 공간이 늘어났으니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겠군요.

현재 이것 말고 필수적인 자료만 넣어 다니는 80기가 외장하드와 500기가 짜리가 하나 있는데 500기가에 있는 자료를 새로 산 1테라 짜리로 옮기고 500기가 짜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어떤 자료를 얻게 됐는데 이게 용량이 상당하더군요. 외장하드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 바쳐야 할 판입니다.

그러고 보니 500기가 짜리를 산게 딱 1년전 이었습니다. 아마 빠르면 올해 안에 1테라 짜리를 하나 더 사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최근의 논쟁에 대한 단상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 들 중 상당수가 이글루스 분들이실테니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논쟁에서도 역시나 '팩트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멋진 발언이 나왔습니다. 당연하죠. 팩트는 일부일 뿐입니다. 그거 누가 모릅니까?

문제는 '팩트'라는게 '기본'이라는 거죠. '기본적인' 논리를 구성할 정도의 '팩트'는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그냥 망상 아닙니까. 기본도 안된 주장을 하면서 '팩트가 다냐!'라고 포효하면 제3자로서는 당혹스럽죠. 그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딱히 논리를 뒷받침 할 만한 '팩트'가 없으면 그냥 인정하면 될 일 입니다. 세상이 무너질 듯 광분하는 모양이 보기 좋지는 않죠.

인터넷에 목숨걸 일도 없을텐데 왜 그리 넷 상에서의 '명성'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ps. 논쟁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던져주는 재미있는 글 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건 확실히 긍정적인 면이로군요.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데자뷰? - (4)

sonnet님의 ‘가카론(論)’을 접하니 예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스탈린은 각 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탈린은 거의 모든 회의를 주관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했다. 스탈린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국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거의 모든 정치국원은 동시에 각 부의 구성원이기도 했기 대문에 행정부처의 회의가 끝난 뒤 정치국 회의가 열리는 것이 관례화되었으며 이 회의는 다섯명(스탈린, 보즈네젠스키,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말렌코프) 이외의 국원들도 참여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정치국과 각 부처는 스탈린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협의 체제로 기능을 했다.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에 대한 핵심 문제의 결정권은 스탈린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수없이 많은 부차적 문제에 개입했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242-243

이 이야기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시다면 당신은 한국인 입니다.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릴레이] 독서론

[릴레이] 독서론 - sonnet님


저는 딱부러지게 정리하는 데 소질이 없다 보니 제가 생각하는 '독서'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란 일종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 입니다.


가장 많이 쓰는 기능은 오락(?)이 되겠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하는 독서는 여름날의 여행 다음으로 즐거운 일 입니다. 특히 일요일이나 연휴 기간에 밀린 빨래나 방청소를 끝내고 소설이나 비사(秘史)류의 논픽션을 읽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그리고 읽는 것 만큼이나 책을 사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경제적인 부담이 조금씩 커진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요즘 돈 안들어가는 취미를 찾는다는게 쉬운것은 아니지요. 인쇄소에서 바로 나와 접착제 냄새를 풍기는 새 책 부터 누군가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했던 헌 책 까지 모두 사 모으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새 책 한 꾸러미가 도착할 때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경험을 하신 분들이라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유용한 기능은 생각을 가다듬는 도구라는 점 입니다. 생각이 막혀 답답할 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발견하고는 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기도 하고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점을 깨닫기도 하면서 조금씩 생각의 틀이 넓어진다고 느낍니다. 또 다른 사람의 좋은 문장을 통해 저 자신의 표현력을 다듬기도 합니다. 물론 재주가 부족해 독서의 효율은 낮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받는 분들께서 부담되지 않으신다면 진화심리학과 생물학 쪽으로 즐거운 서평을 올려주시는 漁夫님과 유익한 조언을 주시는 B군님께 바톤을 넘겨보고 싶습니다. 굽신굽신^^;;;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떡밥춘추 감상

얼마전에 自重自愛님을 통해 이글루 역사밸리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떡밥춘추TM'를 한 부 입수했습니다. 한 부 생겼으니 리뷰를 바로 올렸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이제야 올리게 됐습니다.

내용은 재미있었는데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판형이 조금 크지 않은가 하는 것 입니다. A5 정도 판형에 약간 두툼했으면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2호도 출간된다니 기대가 됩니다.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관대한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의 관대함(???)을 엿볼수 있는 일화 하나입니다.

기묘하게도 스탈린이 중국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대부에 동의한 뒤 중국이 이것을 환불하는 문제와 환불 방법에 대한 문제는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상환은 이루어 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국은 무기 도입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했으나 어떤 경우에는 스탈린이 그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스탈린은 중국이 인민군 2개 사단(1950년 초 북한군에 합류한 2개의 조선계 사단과는 별도로)에 장비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련이 전쟁 중 공급했던 64개 사단 분량의 장비 가격 중 20개 사단 분의 가격을 면제해 주었다. 중국은 나머지 무기에 대한 비용은 분할해서 지급했다. 모든 차관은 연간 10억 위안의 비율로 상환되어 1965년 말에는 모두 청산되었다.

중국 공군의 항공기들은 제4차 전역(1951년 1월 25일-4월 21일)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그 후 인민해방군은 (총 22개 중) 10개 전투기사단을 교대로 전쟁에 투입했다. 초기에 소련 당국자들은 소련군의 장비에 MiG-15가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는 MiG-9 전투기만을 판매하는데 동의했다. 중국측이 구식인 MiG-9 전투기는 미군의 최신예 항공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항의하자 소련 당국자들은 중국측이 소련제 무기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마침내 스탈린에게 까지 알려지자 스탈린은 중국에게 372대의 MiG-15를 판매하도록 지시했다.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201

사실 스탈린 동지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땜빵 포스팅입니다.;;;;;

2009년 6월 8일 월요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군 교육 문제

뉴욕타임즈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증강 문제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Erratic Afghan Security Units Pose Challenge to U.S. Goals

사실 이 기사는 미국이 1945년 이래로 꾸준히 겪어왔던 이야기들의 재탕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교육시켜왔습니다. 한국과 같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던 반면 베트남과 같은 끔찍한 실패도 있었지요. 이라크의 경우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미국 고문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여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낮은 교육수준, 유능한 현지인 장교의 부족 문제 등등.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교육은 같은 이슬람권이었던 이라크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지만 사정은 더 나빠 보입니다.

이라크는 중동국가 치고는 양호한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후세인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국가와 군대체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초기에 저지른 삽질만 아니었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안정화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보다 사정이 더 열악한 곳 입니다. 소련의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역대 군사고문단 활동 중 아프가니스탄이야 말로 최대의 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러나 저러나 뉴욕타임즈가 인터넷 기사를 유료화 해 버린다면 정말 재앙일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이상 공짜로 읽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2009년 6월 7일 일요일

救職의 決斷!

통계는 어떤 문제에 대해 긴 글 보다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아래의 표는 1961년의 육군 장교 전역 통계입니다.


이 통계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가

윤민혁님이 댓글에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표를 하나 더 올립니다. 1962년도의 육군 장교 전역에 대한 자료는 제게 없어서 1960년의 통계만 올립니다. 1960년 또한 4ㆍ19로 인한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해 입니다. 1960년의 통계 또한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감군 계획에 따라 1960년도에 감축할 장교의 숫자입니다. 재미있게도 4ㆍ19이후 원래 예정에 없던 장군 전역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관급과 위관급에서도 원래 계획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교가 전역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9년 6월 5일 금요일

서동만 교수님 별세

슬픈 소식입니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 별세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05년에 출간된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의 저작비평회였습니다. 북한 자료를 이해 하는 문제 부터 대북 정책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군요. 저작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제 어설픈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해 주신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격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가시는군요.

서동만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퍼레이드용 군대

1949년 8월 19일,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육군부 계획작전국(Plans and Operations Division)의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는 광복절 기념식에 대한 로버츠 준장의 짤막한 감상이 실려 있는데 꽤 의미심장합니다.

(광복절도) 다른 “중대한”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열병식은 굉장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치 베테랑 군인들 처럼 보였습니다. 장비, 군복, 차량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열병식을 하는 것 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As is usual on these “critical” days, nothing happened.* The Army parade was a knock-out. They looked like veterans – equipment, uniforms, vehicles all spotless. If they can only fight as well as they parade, we are “in”.

로버츠 준장이 볼테 소장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는 내용.

미국인들은 한국군 장교들이 겉치레를 중시하고 위세를 부리는데 신경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고문관들의 불평 중 하루 종일 훈련은 하지 않고 대대 전체를 동원해 사열준비만 하는 경우도 있는걸 보면 한국 장군들은 사열식 페티쉬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죠.

박정희가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해 사열식을 하는 등 요란한 전역행사를 했던 걸 보면 정말 한국 장군들은 폼 잡는걸 너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