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30일 수요일

장군님의 감자혁명!

북조선의 력사과학 2003년 1호에는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라는 글이 하나 실렸습니다. 이 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0년대부터 감자 생산량 증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큰 성과를 거뒀다는 내용인데… 그 감자혁명의 시발점은 1998년이라고 합니다.

오늘 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비약이 나래치고 있는 내 나라, 내 조국땅우에 감자농사혁명의 새 력사가 펼쳐졌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지펴 주신 감자농사혁명의 불길은 온 나라 협동벌의 이르는 곳 마다에서 더욱 세차게 타 번지고 있다.
우리 인민의 식량문제해결에서 커다란 전환을 안아 오고 있는 감자농사혁명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원대한 구상과 선견지명, 빛나는 예지와 현명한 령도속에 펼쳐 지게되었다.
1990년대 후반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를 잘 하는 것을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보시고 감자농사혁명의 새로운 구상을 펼치시였으며 대흥단군을 현지지도하시면서 감자농사혁명의 장엄한 포성을 울리시였다.
주체 87(1998)년 10월 1일 선군혁명령도의 바쁘신 속에서도 머나먼 북방의 대흥단벌에까지 찾아 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킬데 대하여>라는 력사적인 담화를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감자농사에서 혁명을 일으켜 먹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우리 당이 내놓은 중요한 방침입니다. 우리 당은 농업생산을 추켜 세우기 위하여 감자농사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후략)

림영환, 「감자농사혁명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령도」, 『력사과학』, 2003년 1호

장군님의 력사적인 담화의 결과 북한의 감자 생산량은 1998년 헥타르 당 10.58톤에서 1999년 헥타르 당 7.88톤으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2008년 4월 27일 일요일

아른헴, Hartenstein 공수박물관

코블렌츠 구경을 마친 다음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다시 쾰른으로 왔습니다.

쾰른 중앙역

쾰른에서 ICE를 타니 아른헴까지는 금방이더군요. 잠깐 눈좀 붙였다가 일어나니 아른헴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도착!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호텔을 찿아 보니 싼 방은 모두 나가고 70유로대의 방만 남아 있었습니다. 뭐, 이럴땐 밤 바람을 쐬면서 해 뜨길 기다려야죠;;;;;;


다시 아른헴 역으로 돌아와서 배낭을 집어넣으려고 물품 보관함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른헴 역의 물품보관함은 독일과 달리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집어넣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새벽 2시가 되어 역무원들은 퇴근한지 오래됐으니.... 결국 배낭을 매고 밤을 새야 했습니다!

북유럽에서 가장 개념없는 네덜란드의 물품보관소.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쓰라면 새벽에 도착하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냐!

어쨌건 배낭을 매고 프로스트 다리(John Frost Bridge)로 가기로 했습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해뜨는걸 구경하는 것도 좋겠더군요.

프로스트 다리 가는 길에 발견한 아른헴 시가도. 알아보기 좋고 깔끔해서 좋더군요

중간 중간 내리는 비를 피하며 어슬렁 어슬렁 걷다 보니 공수부대광장(Airborne Plein)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프로스트 다리도 멀지 않았네요.



그리고 드디어 프로스트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프로스트 다리는 마켓가든 작전 당시 독일군에 맞서 이 다리를 방어한 프로스트 중령(John Dutton Frost)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아른헴 대교의 이름을 바꾼 것 입니다.

새벽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더군요

다리를 건너고 나니 겨우 네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다리 건너편에서 해가 뜨는걸 구경한 뒤 아른헴 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AM 04:30

AM 05:50

AM 07:40

AM 08:20

해가 뜨는걸 기다리는데 날씨가 흐려서 아무리 기다려도 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해를 기다리던 이 어린양은 다리 건너편에서 30군단의 전차들을 기다리던 프로스트 중령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 뜨길 기다리다간 네덜란드에 눌러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날이 대충 밝자 다시 다리를 건너 아른헴 역 쪽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독일군의 공격 방향쪽에서 바라본 아른헴

밤에 보지 못했던 표지판


다시 공수부대광장을 지나서...

아른헴 역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오스터벡(Oosterbeek)에 있는 공수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자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려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요금이 생각보다 싸더군요!(2유로)

오스터벡 도착!

박물관 가는 길

밤 사이에 비가 산발적으로 내려 땅이 조금 질더군요.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박물관까지 가는데 인적이 너무 드물어서 썰렁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나오는 것 같더군요.

박물관 도착!

오스터벡의 공수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매우 유명한 박물관이죠. 마켓가든 작전이 "머나먼 다리"로 유명해 진 덕분인지 이 박물관은 꽤 친숙한 느낌입니다. 이 박물관은 원래 호텔로 마켓가든 작전 당시에는 영국 제 1공수사단의 어콰트(Roy Urquhart) 소장의 지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박물관 앞에는 셔먼과 17파운드 대전차포를 전시해 놓았더군요.

마켓가든 작전 당시 영국 제 1공수사단장 어콰트 소장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17파운드 대전차포. 사진으로 볼 때 보다는 작게 느껴집니다

박물관 정문

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전시물이 매우 충실했습니다. 작은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관람객들의 이동 동선을 잘 짜 놓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실수로 관람순서를 거꾸로 구경했습니다.

어콰트 소장과 참모들


영국군을 환영하는 네덜란드 아가씨~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물은 야전병원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이었습니다. 비록 모형이지만 피로와 허탈감에 빠진 위생병이나 종군목사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했더군요.



지하에서 관람을 마친 뒤 위로 올라갔습니다. 위층의 전시물은 박물관의 규모 때문에 소화기나 개인 장비, 제복 위주였습니다. 작은 디오라마도 있었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더군요. 폴란드 망명정부의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

미 82공수사단의 강하병

네덜란드 망명군 조종사

독일군 마네킹도 흥미로웠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반격을 위해 투입된 잡다한 종류의 독일군 부대들을 잘 묘사해 놓았더군요. 무장친위대와 일반 육군은 물론이고 공군 지상부대와 해군보병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박물관 건물을 찍었습니다.

2008년 4월 25일 금요일

김구 = 테러리스트??? - (2)

만약 저에게 한국 현대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을 몇 명 꼽으라면 저는 김구를 반드시 포함시킬 것 입니다. 김구는 1948년의 남북협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임시정부 시절에는 반대파에 대해 살상을 일삼았고 해방 이후에는 요란하게 반탁투쟁을 벌여 이승만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죠. 어쨌건 김구는 한국내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1948년에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매우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만… 김구는 종종 신성시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하기란 참 힘듭니다. 얼마전에는 어떤 외국인이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요.

지금도 이러니 과거에는 김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게 더욱 힘들었을 것 입니다. 오늘 The Origin of the Korean War를 읽다가 한국어 판과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부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 부분 입니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국내의 치안을 맡는 내무부장에 선임된 것도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다.

Bruce Cummings,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上』, 靑史, 161쪽

원문은 이렇습니다.

Kim Ku’s reputation as a terrorist and assassin no doubt commended him for duty concerning domestic law and order

Bruce Cum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Vol 1 :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역사비평사, 1981, 2002, p.87

제가 번역했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김구는 테러와 암살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국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적임자라고 천거되었을 것이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는 풍기는 느낌이 뭔가 묘합니다. 김구가 테러나 암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처럼 읽히거든요. 일부러 불필요한 의역을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김구는 테러리스트...' 라고 옮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김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김구 = 테러리스트???

2008년 4월 23일 수요일

국개론과 그리스 찬미주의자들

채승병님과 Sonnet님이 ‘국개론’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광효과(halo effect)와 국개론의 망상 – 채승병

깨진 유리창 - Sonnet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개론은 상당히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표준적인 국개론은 ‘한나라당을 찍은 국민들은 다 개XX다’이고 좀 더 과격하게 발전된 국개론은 아예 제 2의 외환위기를 맞아 이명박을 찍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지요. 아마도 제 2의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국개론을 외치는 자들만 탈수 있는 방주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답하긴 마찬가지이고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도 국개론자들이 일부 있는데 이들은 늘 진보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다수의 힘을 찬미하곤 했지요. 이들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하던 이야기는 낯간지러우니 생략하도록 하고... 어쨌든 2002년에는 세상을 바꿀 것 처럼 들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독한 염세론자들이 되어 한때 그토록 찬양하던 다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이걸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국개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의식이 뚜렷한 편이고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가방끈도 긴 편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과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가끔씩은 아찔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다가 결국에는 ‘국개론자’로 발전하게 되더군요.
이런 ‘국개론자’들을 보면 과거 역사 속의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그리스 찬미주의자(philhellene)는 터키의 지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의 클레프트(Klepht)를 지지했다.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의 장교 출신이었던 이들은 1821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밀집 대형으로 훈련을 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노력 또한 비웃음과 조롱만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에서가 아니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략)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대오를 지어 터키 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만약 그들이 유럽식으로 대오를 지은 채 터키 인들의 소총 앞에 맨 가슴을 내어 놓는다면, 순식간에 전멸을 당하고 결국 전쟁에도 패배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가장 유명한 그리스 찬미주의자인 바이런은 ‘그리스 인을 위해서 부끄러움을/그리스를 위해서 눈물을’이라고 노래하며 다른 자유수호자들과 더불어 그리스의 편에서 서서 또 하나의 새로운 테르모필라이 전쟁을 희망했다. 그러나 바이런 역시 합리적인 전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지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유럽의 이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환멸과 절망을 느껴야 했다.(중략)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과 근대 그리스인이 같다는 믿음을 재빨리 내던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살아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자들은, 그리스 찬미주의의 역사가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가 쓴 대로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인들을 구역질을 내며 증오했고, 기만 당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저주했다.” 근대 그리스 인들의 용기를 찬미한 셸리의 순진한 시들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붙었던 전쟁에서 그랬던 것 처럼,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으로 “도보로 죽음과 맞서는 전장”에서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경로를 돌아서 서유럽의 전쟁에서도 그들만의 특징적인 전쟁 방식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최소한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 전술을 기꺼이 다시 배우려는 태도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것만이 터키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그럴 의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그리스인들 사이의 혈통상의 단절만이 이러한 영웅적 문명의 몰락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A History of Warfare)』, (까치, 1996), 28~30쪽

대충 글자 몇 개만 바꾸면 국개론자와 그들이 혐오하는 일반 국민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쨌든 저는 사회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국개론’ 따위의 염세적인 생각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정치인 하나 잘 뽑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어차피 5년 뒤면 말 안해도 물러납니다. 우리가 5년만 살고 세상 등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 정치를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하지만 정말 변화를 갈망한다면 겨우 몇 번의 선거 결과에 실망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그보다는 꾸준한 정치 참여를 통해 작은 변화라도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4월 20일 일요일

코블렌츠 - 독일연방군 국방기술연구박물관 & Buchhandlung Collectiana

브레멘에서 하루 묵은 뒤 코블렌츠로 출발했습니다. 늦잠을 잔 덕에 원래 예정 보다 두 시간 늦게 브레멘에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바로 네덜란드로 들어갈까 했는데 코블렌츠를 구경하고 가는게 좀 좋지 않을까 싶더군요. 기차안이 썰렁해서 여유가 있고 좋았습니다.

썰렁~

창 밖 경치를 감상하다보니 시간이 아주 잘 흘러갔습니다. 비록 겨울이지만 라인강변의 경치는 정말 좋더군요.


코블렌츠 역

코블렌츠에는 제목에도 달아 놓았듯 국방기술연구박물관(Wehrtechnische Studiensammlung)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애초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이 아니어서 건물의 외양은 아주 밋밋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밋밋하여라...

이 박물관이 좋은 점은 입장료가 1유로 50센트 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전시물이 제법 충실한 편이라 본전뽑기가 쉽습니다.

1층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화포들을 전시한 작은 전시실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군의 75mm 보병포

그리고 이 작은 전시실을 지나면 대형장비들을 전시한 큰 전시실이 나타납니다.


HS-30 자주박격포형


냉전 종식의 최대 피해자?

그리고 MBT-70의 실물을 처음 봤는데 커다란 머리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리가 커서 슬픈 짐승이여


VTS-1

그리고 꽤 재미있었던게 분해해 놓은 소련제 전차들이었습니다. 특히 T-72는 완전히 표본실의 청개구리 더군요.

표본실의 T-72

레오파르트 2 시제차량

Radkampfwagen 90

대형장비 전시실은 전시가 조금 두서없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용장비와 2차대전 장비, 1차대전 장비가 무작위적으로 전시되어 있더군요.



이 외에도 항공기 종류도 전시되어 있더군요. 메모리카드 용량 때문에 다 찍지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 전시실에는 차량과 대형 화포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 가장 작은 차량(?)



2층 부터는 소구경화포와 소화기, 개인 군장류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2층 부터는 좀 심하게 날림관람을 했습니다.



독일육군 원수 정복

그런데 원래 이 박물관을 방문한 가장 큰 목적인 가동상태에 있는 판터 G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물관 직원들에게 문의를 했더니만....

어린양 : 판터 어디 있나요?

이 놈 말입니다

직원 1 : 저 안에 있잖아요.

어린양 : 아뇨, 야크트판터 말고 그냥 판터요.

직원 1, 2 : (직원 3을 부르며) 이 친구한테 물어봐요

어린양 : 판터는 어디 있나요?

직원 3 : 엔진이 고장나서 트리어(Trier)로 수리하러 보냈어요.

어린양 : ;;;;;;;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나왔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박물관 옆의 군사서점, Buchhandlung Collectiana에 들어가 봤습니다. 오오. 꽤 멋진 서점이었습니다. 서적을 25,000권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Buchhandlung Collectiana




이 서점은 모형점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점의 쥔장인 Christine Wirtz 누님에게 인터넷 사이트는 없냐 물어보니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오프라인 서점으로만 운영한다는군요. 이 서점의 No.2(?) 인 Margit Witt 누님은 아예 컴퓨터를 쓰지 않는답니다. 쥔장 누님들께 블로그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독일어가 딸려서 포기했습니다. 블로그에 소개좀 하려고 Wirtz 누님께 사진 한장 부탁했더니 자신은 풍채가 좋다고(상상에 맡깁니다) 사양하고 대신 Witt 누님이 포즈를 취해주셨습니다.

포즈까지 취해주신 Margit Witt 누님

Wirtz 누님께서는 다음에 올때는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해서 오라고 하시더군요. 넵.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책을 한 권 산 뒤 주인을 기다리는 수만권의 다른 책들을 두고 비통한(?) 심정으로 물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