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29일 토요일

'영광의 탈출'이 될 뻔한 어떤 사건

Peter Schmoll의 Die Messerschmitt Werke im Zweiten Weltkrieg, 134~135쪽에는 전쟁말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실려있습니다.

1944년 2월 중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남동쪽 오버트라우블링(Obertraubling)에 있는 메서슈미트사의 시험비행장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련군 포로 두명이 독일공군에 인도되기 위해 시험비행을 기다리던 Bf-109 한 대를 탈취해 탈출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독일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오전의 시험비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할일이 없어진(?) 시험비행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한대의 Bf-109가 활주로로 진입해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사인 그로스(Ludwig Groß)는 시험비행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지할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이륙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기는 제때 고도를 높이지 못해서 비행장의 담에 랜딩기어가 걸리면서 추락했습니다. 당장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이 달려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련군 포로 두 명을 체포했고 이 두 명의 포로는 군사재판에서 독일국방군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혐의로 총살형을 언도 받았고 2월 14일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소련군 포로는 바실리 야레쉬(Васи́лий Яреш)소위와 드미트리 우테비코프(Дмитрий Утевиков) 소위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메서슈미트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명 중 한명이 조종사여서 독일 비행기를 훔쳐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들의 활극은 비극으로 끝났고 이 두 포로는 총살된 지 이틀 뒤인 2월 16일에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성공했다면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남았을 법한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울한 사실이지만 모두가 영화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요.

2008년 3월 26일 수요일

함부르크, 킬, 플렌스부르크

일요일에 드레스덴을 얼렁뚱땅 구경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친구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이 어린양은 낯짝이 두껍거든요.)
편히 푸욱~ 쉰 뒤 아침에 길을 나섰습니다. 일요일에도 비가 올것 같은 날씨였는데 월요일 부터 비가 주룩 주룩 내리더군요.

베를린 안녕~

함부르크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는 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책을 사기 위해서 였습니다. 함부르크에는 군사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몇 곳 있지요. 물론 시간과 돈이 부족해 다 갈 수 는 없었습니다만.

함부르크 중앙역

중앙역에서 Holstenstrasse로 가는 S 반으로 갈아탔습니다.



이날 찾아간 서점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게시판에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지요.

바로 여기!

5년만에 뵌 주인장 아주머니는 귀여운 아들이 하나 생기셨습니다. 오호. 그러나 5년전 문을 열면 우렁차게 울리던 사이렌은 고장이 난건지 잘 안울리더군요.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항상 돈 보다 책이 많다는 것

비가 내려서 그런지 거리는 썰렁~ 했습니다.


책을 몇 권 산 뒤 함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가 킬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의외로 킬 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킬 중앙역

킬 중앙역은 좀 평범하게 생겨서 별다른 인상이 없었습니다.


중앙역은 물론이요 시가지도 평범했습니다.


그렇다면 킬에는 뭐하러 왔느냐?

항구 보러 왔습니다!

그러나 킬은 좀 썰렁한 항구더군요. 시끌벅적한 함부르크와는 분위기가 반대였습니다.



물론 그냥 항구를 보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킬 하면 독일해군을 대표하는 곳이니 독일해군 기지 구경을 해야지요!

해군기지로 가는 길에 자그마한 수족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사중이라 어수선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썰렁한 부두를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비와 함께 맞는 북해의 겨울 바람은 정말 좋더군요!(진짜로요)


보통 도시에 비둘기가 있다면 항구 도시에는 갈매기가 있다!

계속 걷다 보니 기념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무엇인가 살펴보니 1차대전 당시 전사한 독일 해군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더군요.


그리고 기념비에 뭔가 덤으로 붙어있는게 있었으니...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 돌격대대 병사들을 기리는 표식이었습니다. 어쩌다 1차대전 기념비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건지.

그리고 계속 걸어 해군기지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관광객이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배를 구경할 수는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100년 전 쯤에는 최고의 오타쿠 빌헬름 2세의 위풍당당한 전함들이 위용을 뽐냈을 이곳에는 밋밋하니 멋이라곤 없는 군함들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군항을 대충 구경한 뒤 다음 목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킬 운하였습니다. 킬의 거의 유일한 관광명소(?) 라더군요.

조금 더 걸어 운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야밤이라 사진을 찍어봐야 시커먼 바닷물 밖엔 안보이고 또 기념사진을 찍으려 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하긴, 버스 종점에다 저녁이고 비까지 내리니 사람이 있을리가 없겠지요.)

돌아오는 길에 헌 책방 몇 곳을 발견했습니다. 한 블럭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더군요.

은은한 전등 아래 놓인 책들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처음 들어간 이 책방의 쥔장은 우아하게 생긴 여자분이었고 주로 소설류를 많이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장 한 구석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취급하고 있었고 10유로 이하의 쓸만한 책들이 가득 있더군요.

헌 책을 몇 권 산 뒤 킬 중앙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 구내서점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독일의 많은 역 구내서점이 그렇듯 군사서적을 여러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다시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플렌스부르크 같은 독일 끄트머리의 촌동네는 뭘 하러 가느냐?
2차대전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플렌스부르크는 제 3제국이 실질적으로 최후를 맞은 동네입니다. 되니츠 제독의 임시정부가 피난한 곳이지요. 늘 제 3제국이 최후를 맞은 플렌스부르크라는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 궁금해 하던 차였으니 킬 까지 온 김에 덤으로 구경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 정말 촌동네였습니다.

플렌스부르크역

역에서 내려 시내를 돌아다녀 봤는데 정말 아무도 없더군요. 하긴. 야밤에 비까지 내리는데 특별한 일도 없이 싸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리가 있나요...

썰렁~

작은 여관이라도 잡고 다음날 아침에 답사를 해 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요.

다시 플렌스부르크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썰렁한 역 안

킬로 돌아가는 썰렁한 기차 안

킬로 돌아가는 기차는 정말 썰렁했습니다. 어쩌다 한 두명 타는 정도여서 너무나 조용하더군요.


킬 역에 도착해서 다시 함부르크로 가는 막차를 기다렸습니다. 역시 킬 역도 썰렁~ 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막차도 썰렁~ 했습니다. 조용하니 잠자기에 딱 좋더군요. 너무 편안하고 아늑해서 이대로 아침까지 달렸으면 싶었습니다.

끝까지 썰렁~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을 넘긴 1942년 12월 12일,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꼬여가던 이 시점에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는 皇國臣民 함상훈(咸尙勳), 홍익범(洪翼範), 류광렬(柳光烈), 이정섭(李晶燮) 등이 모여 제국의 앞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류광렬과 이정섭이라는 양반들의 대화가 참 감명 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몇몇 표현은 현대어에 맞게 고쳤습니다.)

류광렬 : 지금 미국의 생산력 확장이라는 것은 금년 1월 6일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교서에 의하면 천문학적 숫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설사 그 숫자에 가깝게 생산이 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생산된 군수품의 전부가 태평양전에 쓰이는게 아니고 세계 각국에 수송되어 영국, 소련, 또는 중경으로 가는 것이 있으니까 실제로 태평양에 오는 것은 그 중의 몇 분의 일 밖에 아니 될 겝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그들의 유일의 위안은 생산력에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대동아전(大東亞戰) 전에 처칠이 일본은 강철의 생산이 빈약한데 어떻게 이기겠느냐고 한 것을 보아도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전쟁은 무기다소(武器多小)에 좌우되는 것 만은 아닙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시로도(素人)’가 돼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정부나 군 당국자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렇고 전번에 한 스즈끼(鈴木)총재의 말에도 전쟁은 天地人을 갖추어야 하나 결국은 사람에 있다 했고 해군 당국자도 적의 생산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되나 과소평가해서도 아니 된다는 말을 했고 도고(東鄕)원수도 백발일중(百發一中)의 포 백문을 가지는 것 보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의 포 일문을 가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백발일중의 포 백문을 만드는 동안에 여기서는 백발백중의 포 일문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수준을 확보해 가야만 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도 무제한으로 군수품을 확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1944년도까지 보아 확장계획이 완성되면 반격해보겠다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군기확장만은 못할 겝니다. 한도가 있을 게니까요. 군기확장과 같은 비밀에 속하는 것을 신문에 공개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분히 선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은 군확(軍擴)이란 것도 그것이 무한량이 아닌 한 년한(年限)이 있을 때 까지 튼튼히 대비만하고 있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적의 심중과 계획을 잘 토도(討度)하여 여기에 대비할만한 생산력 확충에 주력하여 만전을 기할 것 뿐입니다.

투혼에 불타는 황군의 百發百中의 포 일문

VS

정신박약 양키들의 百發一中의 포들


이정섭 : 적국측의 곤란은 물질보다 인적자원에 있겠는데 제아무리 저희들 말대로 1944년까지 400만 兵을 확충한다 치더라도 남는 것은 병의 기술문제이지요. 가령 비행기를 완전히 조종하려면은 적어도 2년 동안 맹훈련을 받지않고는 쓸만한 것이 못되고 함선도 240만톤이나 만들어 내겠다 장담하지만 완전한 선상생활을 하려면 적어도 20년은 지나야 한답디다. 사관학교를 나와 20년 지나서 함장격이 될 수 있으니 전쟁 나기 전에 얼마나한 인원을 길러뒀는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많은 기술자가 없을 줄 알어요. 설혹 기술이 있다쳐도 가장 요긴한 투혼이 아군에게 따르지 못하고 정(신)력이 박약해놔서 아까 류광렬씨 말씀같이 기계력이 충실해 진다 쳐도 일본 반공은 못할 것입니다.

조광 1943년 1월호, '世界政局의 前望', 31-32쪽

과연 이 양반들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황국신민으로서 습득한 정신력(?) 중시의 전통은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날에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2008년 3월 24일 월요일

드레스덴

베를린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인 일요일은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드레스덴 가는 IC에서 치즈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습니다. 드레스덴은 예전에 프라하에 놀러갈 때 시간이 없어 잠깐 들러 점심만 먹었던 곳 입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시간이 별로 없어 구시가지 일부만 날림으로 구경해 아주 아쉬웠습니다.

이게 볼품없어 보여도 예상외로 맛있었습니다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드레스덴역에 도착했습니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걸어갔습니다. 가는 길에 드레스덴 시청이 있더군요.


시청 앞에는 사회주의의 흔적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시청에서 조금 더 가니 테아터플라츠(Theaterplatz)가 나옵니다.

작센의 국왕 요한의 동상

젬퍼오페라하우스(Semperoper)

오페라까지 볼 시간은 없어서 바로 쯔빙어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쯔빙어 궁에는 아주 좋은 볼거리가 두개 있지요.

하나는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 박물관 입니다.

일단 미술관 부터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미술관은 그림이 많아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찍은게 없습니다. 대신 원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많아 시간을 여기서 엄청나게 잡아먹었습니다. 돈내고 들어간 것이다 보니 전시된 그림을 모두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기껏 찍은 거라곤 이런 사진 정도입니다. 이곳을 구경했다는 생색내기용이죠. 중간에 지난 2002년 대홍수로 손상된 그림들을 복구하는 과정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는데 꽤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경비원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어 사진은 못 찍었습니다.


잠깐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겨울이라 썰렁해 보이더군요.

사진은 못건지고 시간만 잡아먹은 미술관 다음으로는 무기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미술관에서 끊은 표로 이곳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기박물관은 돈을 내면 사진촬영이 허가가 됐습니다.

아. 역시!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전시실을 가득메운 15~17세기의 화려한 갑옷들!








이 갑옷은 유일하게 바보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도검, 총기류 등 다양한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수발총이 전시되어 있어 좋더군요. 문제는 쓸만한 사진을 제대로 못 건졌다는 것 입니다.


오스만 투르크군의 개인화기와 군장류

그러나 역시 기사의 갑옷은 말갑옷과 한 세트여야 뽀대가 나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멋졌던 전시물입니다

무기박물관을 구경한 뒤 궁의 안뜰을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테아터플라츠로 돌아나와서 시내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Hofkirche

드레스덴 투어버스. 이게 너무 타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중간에 왠 발굴현장이 하나 있더군요. 규모가 제법 큰 발굴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교회(Frauenkirche) 까지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우. 한시간만 더 일찍 일어날것을!


성모교회는 1945년 공습의 흔적이 아주 잘 남아있었습니다. 복원한 부분과 공습에서 남은 부분이 뚜렷이 구분되지요.
1945년의 대공습으로 파괴된 성모교회의 잔해

유럽을 피바다로 몰아넣으신 루터선생...

겨울이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바로 어둠이 깔렸습니다. 당장 다음날은 함부르크로 떠날 계획이라 어쩔수 없이 이 멋진 도시를 떠야 했습니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밤이 됐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린행 기차가 연착되어 잠시 역에서 머무르며 군것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