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미 해군의 굴욕

천하의 미 해군도 이런 굴욕을 겪은 때가 있었다지요.

미해군의 전반적인 상황은 1880년대가 될 때 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1879년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해상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페루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페루의 패전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칠레 정부에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서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해군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 해군 태평양전대가 수 척의 구식 목조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칠레 해군은 영국에서 건조한 12인치 장갑과 후미장전식 포를 갖춘 두 척의 전함을 포함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칠레는 미국의 개입이 뜬금없고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뒤에 한 (미국)하원의원에 따르면 “(사절단을 이끈) 제독에게 미국이 쓸데없이 참견한다면 미국 함대를 바닷속에 처 넣겠다”고 말했다 한다. 한 함장은 이 말에 크게 분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칠레가 옆 동네와의 싱거운 싸움에서 승리한 것 가지고 미국의 강력한 힘에 맞설 수 있을것이라 기고만장해 하다니!”
물론 이 함장이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미국과 칠레가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보잘 것 없는 미국 함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그럴 경우 지상전의 결과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었다.

Stephen Howarth, 『To shining Sea : 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Navy 1775~19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9, p.223

과연,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의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훈훈한 옛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8년 5월 30일 금요일

베른

바로 전날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을 거쳐 슈투트가르트로 오는 동안 맥이 빠졌는지 늦잠을 잤습니다. 늦잠덕에 이날의 계획도 엉망이 됐습니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는 순간 맥이 쭈욱~ 빠지더군요.

왼쪽이 전날 묵었던 곳입니다

슈투트가르트역은 좀 답답하게 생긴것 같습니다. 크긴 큰데 너무 밋밋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더군요. 유럽의 기차역들은 나름대로 개성이 있는데 슈투트가르트 역은 밋밋한게 개성인 것 같습니다.



취리히행 ICE

어차피 일정대로 움직이기는 글렀으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스위스로 들어가면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했습니다. 스위스 국경으로 가는 길에 Singen이란 역이 있던데 참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에서 노래를 가장 잘하는 동네???

스위스로 접어드니 지형이 확 달라졌다는 느낌이 옵니다.


원래는 취리히에 도착해서 한 서너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하고 베른으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관계상 포기했습니다. 크. 역시 여행을 가도 부지런해야...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썰렁한 열차만 탈 팔자였나봅니다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가는 길도 경치가 일품이었습니다. 쓸만한 사진을 거의 건지지 못한게 아쉽더군요.


베른역 도착

베른에 도착한 뒤에는 그냥 걸어다녔습니다. 원래는 베른에 도착해서 뭘 구경할지 생각을 했었는데 맥이 빠지니 그냥 걷고 싶더군요.







구토하는 독수리



대충 시내를 둘러보고나니 해가 떨어졌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스위스로 놀러온 사람들의 필수코스(???)인 인터라켄으로 갔습니다.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강원도 평창쯤에 놀러간 기분이더군요.

오월의 밤 – 고골의 중단편 모음집

괴담은 怪力亂神인지라 진지하게 생각하면 정신건강에 해롭지만 재미는 있다는 점에서 술과 같습니다.

이 어린양은 대략 고등학교 초반까지 괴담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고골의 단편 “비이(Вий)”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것 입니다. 20년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주인공의 최후가 워낙 인상에 깊었고 책에 딸린 삽화도 제법 으스스 했던지라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생각의 나무에서 고골의 중편과 단편을 엮은 “오월의 밤”이 출간되어 있고 여기에 “비이”가 실려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됐는데 역시 재미있더군요. 주인공이 최후를 맞게 되는 이유는 다른 많은 괴담들에서 나타나듯 절대 보면 안 될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런 뻔한 이야기도 좋은 글 솜씨와 결합하면 결코 질리지 않는 떡밥이 됩니다. 번역을 담당하신 분은 조준래라는 분인데 번역이 꽤 재미있게 잘되어 있습니다.

“오월의 밤”에는 “비이”외에도 “무서운 복수” “성 요한제 전야” 등 다섯편의 작품이 더 실려 있는데 “비이” “무서운 복수” “성 요한제 전야”는 공포적 분위기가 강한 반면 나머지 세 작품은 개그가 적절히 섞여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실려있는 “오월의 밤 또는 물에 빠져 죽은 처녀”는 물귀신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전체적으로 개그더군요.

특히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작품의 배경이 우크라이나이다 보니 먹을 것에 대한 묘사가 많다는 것 입니다. 소설에 묘사된 여러 가지의 우크라이나 요리에 대한 묘사는 읽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 지더군요. “이반 표도로비치 스폰카와 그의 이모”는 특히 요리에 대한 묘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풍부한 요리에 대한 묘사를 보다 보니 히틀러가 drang nach Osten을 줄구장창 외친 이유가 우크라이나 요리가 아닐까 하는 망상도 덤으로 들더군요.

전체적인 감상은 20년전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어 아주 즐거웠다는 것 입니다. 앞으로도 기억의 한 구석에 흔적만 남은 다른 책들을 다시 읽을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리면서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제 기억력이 아주 엉망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사실을 발견했거든요.

2008년 5월 27일 화요일

위대한 기업가 정신

굿펠로우(Preston Goodfellow)와 스태거(John Stagger)는 1949년 10월 남한에 (자신들의 사업을 위한) “전진기지”를 세우기 위해서 이승만과 의논했으며 두 달 뒤 2차대전 이후 남한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무역 사절단을 조직했다. 1950년 2월에 그는 조선은행 총재인 최순주(崔淳周)의 미국 방문을 계획했으며 그 후 몇 달간 최순주에게 자신이 구상한 한-미 상호교역에 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얼마 뒤(1950년 4월) 최순주는 대한민국의 재무부장관이 되었다. 1950년 4월 굿펠로우는 통신부문 사업 계약의 일환으로 RCA 소속의 기술자 한 명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1950년 12월 굿펠로우는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서 그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철을 대량으로 매입하겠다는 고철상을 찾아 보도록 해, (중략) 한국에는 고철이 넘쳐나잖아.”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I :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136

미국인들의 냉철함은 종종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글도 그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과연, 정말로 위대한 기업가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굿펠로우는 미군정 당시 육군대령의 계급으로 하지 중장의 고문이었으며 동시에 이승만의 개인 고문이기도 했습니다.

2008년 5월 24일 토요일

2MB를 탄핵할 수 있는 방법

많은 분들이 현재의 청와대 주인을 쫓아내고 싶어하지만 마땅한 방도가 없어 고민하고 계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네. 확실히 현재는 법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만한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양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어떤 경우에 탄핵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봤는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은 개신교 장로입니다. 그리고 이미 서울 시장때 서울시를 주님께 봉헌한 바가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봉헌하는 것 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천국의 통치자인 여호와와 내통한 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국가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탄핵을 백만번은 하고도 남지요.

자. 장로님 부탁합니다.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며칠 전에 썼던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라는 글에 대해 배군님이 혁명군에서 대육군으로라는 아주 근사한 답 글을 써 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삼각편제와 사각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세기 후반 사단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보병사단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

2008년 5월 22일 목요일

독일공군의 조종사 부족사태

슈피겔 온라인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독일연방군이 조종사들의 퇴역 증가로 심각한 조종사 부족을 겪고 있다는 군요. 클린턴 시절에 미군도 군 조종사들이 의무복무기한만 채운 뒤 민간항공사로 대거 이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독일군도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네요. 특히 독일공군의 수송기 부대와 독일해군항공대의 경우 조종사의 30%가 부족한 실정이랍니다. 이거 굉장히 심각하군요.

Pilotenmangel bei der deutschen Luftwaffe - Spiegel Online

Luftwaffe laufen Piloten in Scharen davon - Hannoversche Allgemeine Zeitung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한국 공군 조종사들이 단체로 조기전역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는데 이건 전세계적인 현상같습니다. 과연. 시장의 힘은 위대하군요!

'육방부'에 절망해 떠나는 조종사들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금주의 신앙생활

오늘 책이 한 상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 책의 좋은점은 루블화의 낮은 환율입니다. 독일책이 이정도 가격이라면 더 바랄게 없겠는데...

도착한 책 들을 훑어보니 예상대로 만족스러운 것과 약간 실망스러운 것이 섞여 있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것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을 몇 권 꼽아보면


Ржев 42. Позиционная бойня - Светлана Герасимова : 1942년에 르제프를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42년 늦여름-가을의 전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Сталинград. За Волгой для нас земли нет - Алексей Исаев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나온 최근의 연구서적입니다. 독일측의 기록도 많이 활용해 신뢰도가 높아 보이며 42년 가을 내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의 외곽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벌인 격전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좀 재미있었던 녀석은...


1972년에 나온 코네프 동지의 회고록입니다. 1943~44년의 우크라이나 전역의 경험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1972년에 나온 이 책이 2007~2008년에 나온 위의 책 들 보다 종이의 질과 인쇄상태가 훨씬 좋다는 점 입니다.

채승병님의 블로그에서 종종 지적 되듯 러시아 책들은 너무 빨리 품절이 됩니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책을 몇 권 놓쳐서 아쉽습니다. 특히 브야즈마 전투를 다룬 연구서가 한 권 있었는데 그걸 놓친건 정말 유감이네요.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쾰른 - 최악(???)의 날

아르덴느 구경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가기 위해서 리에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리에쥬역의 매표소로 가니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쾰른행 국제선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습니다.

리에쥬역 국제선 매표소

결국 리에쥬에서 아헨으로 가는 단거리 열차를 타기 위해서 두 시간을 썰렁한 플랫폼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헨으로 가는 열차가 오지 않았습니다. 퇴근시간이 다 돼서 매표소는 모두 퇴근했고 야간 근무서는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영어를 못 하더군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Mons에서 왔다는 벨기에 친구가 자신도 아헨으로 친구만나러 간다면서 역무원에게 통역을 해 줬는데...

아헨행 열차가 없어졌답니다!

한동안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리에쥬역에서 밤 새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암스테르담 밤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군요.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간 뒤 다시 국경에서 아인트호벤으로 갔습니다.



아인트호벤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탔습니다. 대부분의 막차가 그렇듯 사람이 없어 조용하고 좋았습니다. 열차에서 잠을 보충했습니다.

막차는 언제나 썰렁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지만 야밤이라 문 연 곳은 맥도날드 하나 뿐이었습니다.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는 것도 기운이 빠져서인지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한 두어시간 돌아다니다가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썰렁한 암스테르담역


다시 암스테르담 역으로 돌아와서 첫차를 기다렸습니다.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고 정말 지겹더군요. 암스테르담에서 ICE를 타고 쾰른으로 들어왔습니다.


쾰른 중앙역

쾰른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로 소시지를 먹었습니다. 음. 언제나 그렇지만 이 어린양은 육식을 즐깁니다. Heil Currywurst!


아침을 먹은 뒤 쾰른 지도를 사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쓸만한 서점을 찾아 몇 시간 돌아다녔는데 허탕만 쳤습니다.


결국 시간도 부족한지라 쾰른대성당 구경이나 하고 슈투트가르트로 가기로 했습니다.

크다!






성당내부에는 다른 많은 성당들이 그렇듯 예수의 생애를 형상화한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로마군인을 중세기사처럼 묘사한게 아주 재미있어 보이더군요.


하지만 성당에서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성당의 거대한 크기가 아니라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들이었습니다. 유럽여행하면서 많이 구경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볼 때 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가 없습니다. 어린양 같은 무신론자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 예술에 있어서는 독실한 신앙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쾰른대성당 구경을 마친 뒤 슈투트가르트로 직행하려던 계획을 바꿔 먼저 코블렌츠를 들러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차피 쾰른에서 책 살 돈을 쓰지 못 했으니 코블렌츠에 가서 책을 산 다음에 슈투트가르트로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약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다시 코블렌츠로!


코블렌츠 시내버스 노선도

전에 갔던 서점에 가서 아주 쓸만한 책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이때 까지는 좋았습니다

책 사고 역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졸았습니다.;;;;; 그리고 버스 종점까지 그대로 가 버렸지요. 결국 코블렌츠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기차를 놓쳤습니다.;;;;;; 여기서 하루의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일단 낭패감을 안고서 코블렌츠 역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어쨌건 슈투트가르트로 가려먼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쾰른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쾰른역 구내서점 구경을 했는데 역시 이곳 또한 군사서적을 많이 비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德國人들의 훈훈한 尙武精神

쾰른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직행노선은 끊겨서 먼저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으로 갔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5년 전에 한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어서 이번 여행에서도 한번 쯤 들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스쳐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이 아쉽더군요.

프랑크푸르트 공항역

다시 이 역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한참 전에 도착해서 슈투트가르트에서 여유있게 저녁을 먹고 시내구경을 했었어야 하는데... 에휴~

슈투트가르트 도착....

슈투트가르트에 막차로 도착한 다음에는 피곤하다 보니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서 자기로 했습니다. 다행히도 적당한 가격에 아침식사를 주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샤워를 하고 TV를 틀어보니 낯익은 얼굴이 나오더군요. 윈터스 소령님이 독일어로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윈터스 소령님의 유창한 독일어실력에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