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29일 일요일

보불전쟁 이전 프랑스군의 기강 해이 문제

계속 해서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프랑스군은 전반적으로 프로이센군과 달리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트로슈(Louis Jules Trochu)장군은 1864년 메츠(Metz)의 포병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센군은 말단 사병들 까지도 애국심과 명예를 알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가장 사기가 높다.”

트로슈는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남긴 프로이센 장교는 프랑스군의 신형 소총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에 주목했다. 한 부사관이 소총을 보여주고 분해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동안 병사들의 잡담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마침내 한 장교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라! 여기는 내무반이 아니다!(Silence! Vous n’êtes pas à la foire!)”

파리 근교의 부대를 방문한 다른 프로이센 참관인은 프랑스 군의 훈련은 매우 늦게 시작되고 종종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 장교들은 부대 근처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쪽에서 남긴 기록도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육군의 감찰관은 1896년 7월 엑스-앙-프로방스(Aix-en-Provence)의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한 뒤 소총, 총기 수입도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며 병사들은 체육시간에 여기 저기 늘어져 빈둥거리며 군악대원은 군가를 모르고 펜싱 교관은 펜싱을 제대로 못 하며 또 많은 수의 부사관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병들을 잡아 넣느라고 영창이나 군교도소를 들락 거린다고 지적했다. 앙드레라는 상병은 감옥에서 도둑 한명을 탈옥시켜 주둔지에서 그 도둑과 함께 훔친 돈으로 술을 마시다 적발됐다. 감찰관은 제 99보병연대의 시찰을 마친 뒤 장교들이 “건달”들의 기강을 바로 잡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감찰관이 제 99보병연대를 시찰하고 기록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사병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적인 프랑스군 병사들이 유일하게 군대에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격 뿐이었다. 장기간의 군복무와 믿고 본받을 만한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은 제멋대로에 기강이 엉망이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요소가 없었다. 그러니 1840년대에 프랑스군의 개편을 주도한 뷔고(Thomas Bugeaud) 원수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한 점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명령 받는 것은 오랫동안 참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것은 못 참는 다는 점이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43~44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광경을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볼 수 있지요.

2007년 4월 26일 목요일

소련의 대독 선제공격론에 대한 반론 : 1941년 5월 계획안을 중심으로

오늘도 역시 불법 날림 번역글 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과 소련 고위 장성들이 남부 지구에 병력을 집중 시킨 이유가 독일을 선제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남부 폴란드의 평원은 동 프로이센의 강과 호수, 습지와 숲으로 둘러쌓인 지형 보다 공세 작전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소련이 독일을 선제공격하려 했다는 이론의 주요 근거는 1941년 5월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이다. 러시아에 많은 논쟁을 불러온 이 문서가 어느 정도의 자료적 가치가 있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이것은 당시 작전국 부국장으로 있던 바실렙프스키가 필기로 작성한 문서이며 주코프와 티모센코의 서명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서명은 없다. 그리고 스탈린이 이 문서를 검토했거나 여기에 대해 언급했는가도 확실치 않다.
1941년 5월에 작성된 이 문서는 이전의 전쟁 계획들과 비교하면 개괄적이며 대략적인 개요정도에 불과하다. 로버츠(Cynthia A. Roberts)는 1941년 5월 계획안은 “실제 계획안이라기 보다는 구상 초기단계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는 총 240개 사단을 투입하고 이중 주력인 독일군 100개 사단은 코벨, 로브노, 키예프 축선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군은 동원 단계에 있으며 아마도 “아군 보다 먼저 배치를 완료해 언제든지 기습을 감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독일군의 기습을 방지하고 (또 독일군의 전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독일군에게 주도권을 줘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보다 먼저 동원을 완료한 뒤 독일군이 아직 병력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각 집단군 및 병종간 협동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일 때 선제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 붉은군대의 주요 전략 목표는 데블린 남쪽에 전개한 적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다. (중략) 주력인 남서전선군은 크라쿠프-카토비체 지구의 독일군을 공격해 독일군을 남부의 동맹군과 절단시킨다. 그리고 서부전선군 좌익은 조공으로 세들레츠-데블린 방면으로 공격, 바르샤바 지구의 적을 포위해 남서전선군이 루블린 지구에 전개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핀란드, 동 프로이센, 헝가리, 루마니아 지구에서는 능동방어를 실시하고 우세한 환경이 조성되면 루마니아에 대한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갖춘다.]

이 문서는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병력 배치를 실시하고 총 사령부 직할 예비전선군들의 동원을 비밀리에 실시하도록 허가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전에 작성된 전쟁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1941년 5월 문서를 읽는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다. 붉은 군대가 남부 지구에 전개할 독일군 주공을 타격해야 한다는 내용은 기존 계획안의 연장선 상에서 자연히 도출될 수 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이 문서에서 주장하고 있듯 전개 완료 단계에 있는 독일군에 대해 선제 공격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1941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이동이 감지되어 전쟁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폴란드 남부에 대한 선제 공격의 형태로 (적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자는 것은 기존의 계획안들과 같은 것 이었고 예비 야전군의 비밀 동원역시 기존에 실시하고 있던 병력 증강의 연장선에 있는 것 이었으며 비밀 동원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 문서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가장 먼저 이 문서에는 선제 공격 시점이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독일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 목표라면 가장 좋은 공격 시점은 독일군이 동원과 전개를 완료하지 못하고 집중과 부대간 조율이 원활하지 못한 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두 번째 문제는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하면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어 여전히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계획은 실천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 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련 군부내에서 선제 공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근거도 없다. 1941년 6월 22일 전쟁이 개시된 뒤 다시 전쟁이 종결되고 또 스탈린이 숨을 거둔 이후에야 소련의 고위 군장성들은 방어 준비에 좀더 심혈을 기울여 독일의 기습에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Geoffrey Roberts, Stalin’s Wars :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 (Yale University Press, 2006), pp.76~77


요즘도 가끔씩 스탈린이 독일을 선제 공격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설들은 위에서 Roberts가 지적 했듯 핵심적인 근거로 내세우는 것들이 오히려 그 가설이 잘못 됐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41년 5월 계획안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사관학교 연설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요.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인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25일 수요일

[妄想大百科事典]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2004년 새롭게 여의도 차트에 진입한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밴드

여의도 차트 진입 당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성공 신화가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메이저 진출 이후 계속되는 부진으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민노당의 부진이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국제 연예계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철 지난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민노당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고정 팬이 적었기 때문에 일종의 신비감이 작용했으나 메이저로 진출한 이후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신비감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밴드도 위기를 맞고 있다.

민노당은 대중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스타일을 고수할 계획이다. 연예계 소식통에 따르면 일부 멤버는 과거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시기 북조선의 4류 그룹 “조선로동당”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민노당의 음악적 수준이 낮은 이유가 언더밴드로 활동하면서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하지 않고 이런 저급한 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연예 분야 전문가들은 민노당의 스타일은 이미 20세기 초중반 동유럽과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 시도되다 대중의 철저한 외면으로 소멸된 “민주적 집중제”로서 대중성은 물론 예술적 가치도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자신들이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할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당분간 고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민노당이 메이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악적 기초를 튼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The God Delusion - 리처드 도킨스

이 책은 채승병님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지른 물건인데 읽을 책들이 밀려 있어 한동안 못 읽다가 도착한지 한달이 넘어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도킨스의 책 중에서는 국내에 번역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이 있는데 특히 눈 먼 시계공은 제법 유쾌(???) 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처음 책을 훑어 보니 속 표지에는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는 문구를 넣은 것을 보니 이거 엄청 웃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31쪽을 보니 아주 멋진 구절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in arguably the "most unpleasant character in all Fiction".

철십자 훈장에서 슈타이너 선생이 말씀하신 "I believe God is a sadist."라는 대사와 쌍벽을 이룰만합니다. 흐흐흐.

현재 2장을 읽는 중인데 제법 배꼽 빠지는 구절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삐딱한 종교문화를 혐오하는 터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게 국내에 번역되면 출판사 하나가 불타는건 아닐까 걱정(???)이 듭니다.

2007년 4월 23일 월요일

폴란드군의 하노버 점령 통치 계획 - 1971년 들소작전 계획 중

전선군 사령부는 하노버 수비대의 항복에 따라 제 5군 사령부에 도시 기능의 회복을 위한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폴란드군은 제 5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서 다음의 인력을 배속받는다.

1.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동독군) 헌병 1개 중대
2.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군 방첩부대 1개 중대
3.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 (20명)
4. 독일민주공화국의 방송 언론인 (8명)
5. 타자 및 통신 담당 (12명)
6. 특별 선전대 (장교 및 부사관 24명)

이상의 인력은 오늘 오후 6시를 기해 제 5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다음날부터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 요원이 하노버에 투입될 예정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요원이 하노버에 도착하는 것은 사전에 통보될 것이다.

제 5군 사령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a.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 6전차사단의 선임장교를 주둔군 사령관으로 둔다.
b. 위에서 언급한 인력과 필요한 장비는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의 통제하에 둔다. 국가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 정규 경찰을 편성한다.
c. 인민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언론 보도를 한다.
d. 항복한 적군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건설한다.
e. 병기고 및 물류시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f. 상수도, 발전시설, 난방시설을 정상화 한다.
g. 식량 및 필수품 배급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
h.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일공산당(DKP)과 사회민주당(SPD)으로 합작 지방 정부를 만든다.
i. 파괴된 공장을 복구해 최대한 빨리 생산을 재개 할 수 있도록 한다.

(중 략)

하노버 시의 민간인과 포로에게 공급할 식량 비축량 및 의약품 재고량을 확인한 뒤 1971년 4월 29일 오전 11시까지 전선군 참모부에 보고할 것.

실롱스크 군관구 정치국 문서 152448/74/42

Vojtech Mastby and Malcome Byrne,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380-381

1971년 4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 실시된 들소작전에 포함된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폴란드군이 하노버를 점령한 후 취해야 할 행동 이라는군요. 이 시기의 바르샤바 조약군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령지역에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리고 합작 대상으로는 서독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이 언급 돼 있고 우익 정당은 언급이 없습니다. 독일공산당은 서독에서 불법화 된 이래 아주 세력이 죽었고 이 시점에서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걸 읽다 보니 60~70년대 북한애들은 서울을 확보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남쪽에는 합작할 만한 진보적 정당이 없었으니 합작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통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요. 통일이 될 때 까지 살아야 겠습니다.

2007년 4월 20일 금요일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 언론의 히스테리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언론의 반응은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주요 일간지들이 웹사이트의 대문에 큼지막하게 특집 기사를 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즐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도하게 이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서 미국 영주권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미국의 살인사건인데 이게 과연 한국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중국계가 이 사건을 저질렀다면 이 정도로 요란하게 다룰지는 의문입니다. 말 그대로 한국계가 살인범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이정도로 난리를 치는 것 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내문제인데 한국계가 개입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언론들이 이 사건을 울궈 먹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점 입니다. 사실 미국에서 터진 사건이니 별도로 취재할 필요 없이 미국내 반응, 한국내 반응, 네티즌들의 반응 이런 것들로도 충분히 지면과 웹사이트를 도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군요. 물론 '민족'이라면 반사적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 소비자들의 성향도 여기에 한 몫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나마 사건이 터진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언론 마다 자성(?) 적인 기사를 하나 씩 싣고 있긴 하지만 그나마 이것도 구색 맞추기로 집어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국내의 소위 유명인사라는 자들이 기고하는 칼럼은 왜 이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지.

[시론] '조승희 개인' 문제 라곤 하지만…

이 정신나간 교수는 주요일간지에 사과를 하자고 난리를 치는군요. 이런 멍청한 논리로 따지면 9.11 테러 때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 공식 사죄를 했어야 겠지요. 이런 교수에게 교육받는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갈수록 글발이 떨어지고 계신 이문열 선생께서도 한마디 하십니다.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 예수 흉내냈지만 종교성 빈약`

참 할일이 없으시군요.

김지하 시인께서는 추모시를 바치셨답니다.

김지하 시인 참사 추모시

이래서 이 어린양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 사건에 대해서 국내 언론에 실린 글 중 그럭 저럭 쓸만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인은 한국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보다 한국이 더 시끄럽다` `천박한 민족주의` 논란

그나마 한겨레가 나은 편 입니다. 솔직히 이번 사건으로 가장 놀랐던 건 그동안 매우 중립적이고 쓸만한 기사를 싣던 한국일보가 맛이 갔다는 점 입니다. 한국일보가 사옥을 옮기더니 이상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이 사건을 우려먹을지 궁금합니다만 6개월 쯤 지나면 언제 이런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잠잠해 질 것입니다. 뭐, 모든 일이 다 그렇지요.

덤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최악의 만평은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입니다. 조선일보의 만평이 주요 일간지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허접하다니. 도데체 이렇게 수준낮은 사람에게 만평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

계속해서 날림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쓸만한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시간도 잘 안나고 그렇습니다. 당분간 쓸만한 저작들에서 발췌한 날림 번역글이 계속 올라갈 듯 싶습니다.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The legacy of failed mobilization)

1차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를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사상 – 즉 우익사상이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전후 20년간 이탈리아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었다. 우익사상은 국민동원의 실패에 대한 반동이었고 특히 1920년 이후 시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전무했으며 이탈리아 정부가 전시동원을 통해 만들려 했던 국민적 단합을 우익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개인에게)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바로 국가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박멸하는 것 이었다. 독일과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1920년대 독일의 우익 “호교론자”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1918년 11월에 노동자들이 “등 뒤에 칼을 꽃았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등 뒤의 칼”에 대한 주장이 이미 전쟁 중인 1916년에 등장했는데 전쟁 초반부터 연달아 터진 참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적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충원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은 이런 소문을 더 부채질 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군사적 전통이 일천한 까닭에 수준 높은 장교집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의 분열은 상처로 남았다. 전쟁으로 각인된 야심과 적개심은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에서 얻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쳐부숴야 했지만 쳐부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총력 동원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처럼 비춰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극성을 부린 지역은 전쟁 중에 동원체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새로우며 진정한 동원체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이 꿈꾸는 이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용맹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완벽하게 동원된 전사였다.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패배주의자, 탈영병, 병역기피자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사실 “믿음, 복종, 투쟁”은 파시스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따르게 하려 했던 것 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쟁을 수행할 때와 같은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창설될 당시부터 군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자본가들이 구사대로 고용하던 깡패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파시스트들은 “행동대(squadrismo)”의 폭력행위에서 전우애 같은 안도감과 참호전투 같은 흥분을 전시 보다 “훨씬 안전한” 조건에서 체험했다. 파시스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병대(Milizia Volontaria di Sicurezza Nazionale)를 만들었고 이와 유사한 준군사조직이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됐다. 제복, 경례, 제식훈련, 목총(으로 하는 총검술) 그리고 행군은 이런 조직의 하루 일과였다. 파시즘은 이렇게 전쟁을 흉내내면서 전쟁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 냈다. 이러한 영속적인 동원체제는 결코 동원해제 될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이 만들어낸 전쟁에 대한 패러디였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많아졌다. 파시즘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이것을 “전투”라고 칭했다.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밀과의 전투”, 1927년의 화폐 개혁은 “리라와의 전투”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미래의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출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군사적 비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계속해서 언급됐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문제였다. 파시즘은 그 특성 대문에 평화시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의 사상에 전쟁의 심리적 긴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이유는 단지 전쟁이 평화시에는 얻을 수 없는 심리적 의무감을 불어넣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 환기해야만 파시즘이 가지는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들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애국적이고 국가적인 목표가 있으면 사회에 대한 억압과 전제적인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의 적”들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호한 수단을 통해 박멸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박멸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지속적인 전시 체제 속에서 박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강요된 애국심”은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변혁기에 “강요된 애국심”은 사회적 투쟁과 기술적 진보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는데 이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규율, 사회의 위계질서, 가부장적 질서, 애국심 등의 사회적 가치들은 전쟁 그 자체를 재정의 함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도 “총력전” – 제대로 말하면 “총력전”을 펼치는데 실패한 – 의 트라우마는 평화에 대한 관념을 제약했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분열돼 있었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전에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은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었으나 전쟁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보다 체계적이고 극도로 조직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을 통해 국가총동원의 경험으로 드러난 이탈리아 사회의 분열과 나약함을 극복하려 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약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번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적, 애국적 이상은 무솔리니의 통치기간 동안 파시즘의 지배 원리로 작용했다. 애국심은 정권의 목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가 가진 정당성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동적으로 국가와 국가적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파시스트들이 1차세계대전의 국가 총동원 경험을 통해 만든 파시즘의 내부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러 면에서 전쟁을 위한 “총동원”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개념의 어설픈 전주곡이었다. 전쟁 시기에나 일어나야 할 일들이 평화시에도 일어난 것 이었다.

Paul Corner and Giovanna Procacci,『The Italian experience of ‘total’ mobilization 1915~1920』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237~239

2007년 4월 17일 화요일

1주일 전에 커트 보네것이 사망했었군요

회원으로 가입한 어느 북클럽의 뉴스레터를 받고야 커트 보네것이 1주일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Kurt Vonnegut dies at 84

이상하게도 요 몇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부흐하임도 그렇고.

보네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제 5도살장을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2007년 4월 16일 월요일

Die Walküre

잠시 유튜브에서 동영상 구경을 하던 중 꽤 재미있는 영상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으실법한 독일의 전시 선전물입니다.


이 선전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슈투카의 전투장면이 있는데 배경음악이 Die Walküre입니다.

슈투카의 전투장면에 Die Walküre를 배경음악으로 집어 넣으니 분위기가 훨씬 낫습니다. 어쩌면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의 전투장면에 Die Walküre를 집어넣은 이유가 독일의 선전필름에서 영향을 받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어쨌건 바그너는 천재가 맞는 모양입니다. 저런 근사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2007년 4월 15일 일요일

입시교육의 폐해

중등학교 입학시험공부로 말미암아 한창 발육기에 있는 어린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폐단이 적지않아 서울시 이승재(李承宰) 학무국장은 21일에 시내 각 국민학교 직원 생도 및 일반 학부형에게 다음과 같이 입학시험 준비교육의 폐해점을 지적하여 이의 폐지를 경고하고 있다.

첫째, 발육기에 있는 아동으로 하여금 과중한 부담을 받게 하여 신체가 허약해질 염려가 있고
둘째, 준비교육에 있어서는 특수과목에 한하여 그것을 암기식으로 해답식으로 치중 지도하게 되는 관계상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학교 교육을 완전치 못하게 되며
세째, 개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교육에 배치되는 주입식 교육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부모의 명예와 욕망을 위하여 무리로 준비를 시키어 아동 개성에 맞지 않는 학교로 진학시키어 그 장래를 그르치게 하며 한편 6학년 담임에 대한 부형의 특수한 사례 등으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한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이에 학무국으로서는 입학시험제도에 대하여 방금 각 관계당국과 연락을 하여 가장 적합한 고사방법을 연구하여 준비교육이 무용이 되도록 최선의 방법을 강구중에 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22일자, 자료 대한민국사 6권 123쪽에서 재인용

결국 이렇게 해서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그 다음에는 고등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그리고 나서는 대입제도가 여러차례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제도가 나아질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뭐랄까. 60년째 별 발전이 없는걸 보면 참 무시무시한 일이지요.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때 부터 문제였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문제고 우리의 아들 딸에게도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나아지는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암울하지요.

2007년 4월 12일 목요일

어떤 영국 장군의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 : Hubert Gough의 사례

뭐랄까, 게으른 데다가 이런 저런 일들의 압박으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습니다. 결국 또 번역입니다. 고프라는 대인관계가 불량한 장군의 이야기이긴 한데 영국 육군 장교단의 골치였던 파벌 문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프와 동료 장교들간의 관계(Relations with Fellow Officers)

1차 대전 이전의 영국 장교단은 매우 소규모 집단이었고 몇 개의 파벌(cliques)로 나뉘어 있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프(Hubert Gough)는 이미 나중에 그와 함께 서부전선의 고급 지휘관이 될 장교들과 (좋건 나쁘건 간에)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프가 참모대학에서 교관으로 있을 때 참모대학장은 훗날 제 4군 사령관이 되는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소장이었다. 고프의 동료 교관으로는 전쟁 당시 군단장을 역임한 헤이킹(Richard Haking)과 두케인(John du Cane), 그리고 고프의 바로 전에 제 7사단장을 지낸 ‘토미’ 캐퍼(Capper)가 있었다. 이 외에는 나중에 고프의 참모장이 된 키젤(Launcelot Kiggel)이 있었다. 고프는 말년에 키젤에 대해서 별다른 이유 없이 “약해 빠지고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참모대학의 학생으로는 고프의 동생 조니(Johnnie Gough)가 있었다.
1914년의 커래이(Curragh) 사건은 육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커래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 3기병여단 소속을 포함해서 더블린에 있던 대부분의 장교들은 얼스터의 신교도들과 충돌할 것을 우려해서 직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여기에 강력히 저항한 장교들 중에는 고프 형제가 있었다. 뒤에 영국육군 총사령관(Chief of the Imperial General Staff)을 지낸 ‘울리’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 선 장교로는 프렌치(Sir John French)원수, 제 4경기병 연대(4th Hussar)의 하웰(Phillip Howell) 중령이 있었다. 고프는 1915년 말 프렌치 원수가 영국원정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건방지고 보잘 것 없는 바보(an ignorant little fool)”라고 조롱하며 즐거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프 형제와 절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윌슨(Henry Wilson)이 있었다. 윌슨은 커래이 사건에서 약간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윌슨은 1916년 10월 제 4군단장으로 임명돼 당시 예비야전군을 지휘하고 있던 고프의 명령을 받게 됐다. 비록 윌슨은 특별히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고프는 약간은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윌슨의 지휘 능력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프는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제 3차 이프르 전투의 책임 문제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양이 된 것은 모두 윌슨이 뒤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프는 윌슨에 대한 적대감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고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 장(chapter)를 할애해 윌슨을 비난했고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출연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는 윌슨에 대해 이렇게 빈정거렸다.

“(한때) 윌슨이 내 지휘하에 들어온 일이 있었지. 그는 나를 철저히 기만했어. 뭔가 쓸만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고.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서 자신과 친한 높은 신분의 여자들에게 편지만 쓰고 앉아 있었지.”

영국 육군이 배출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군인”이었던 윌슨과 비교하면 고프의 정치적 능력은 보잘 것 없었다. 1918년 3월, 윌슨은 육군 총사령관으로 진급해서 고프에게 받은 빚을 갚아줬다.

나중에 야전군 사령관이 된 고프, 바잉(Julian Byng), 버드우드(Willian Birdwood)는 1900년의 보어전쟁에서 같이 복무했다. 이 무렵 고프는 자신의 일기에 바잉에 대해 혹평을 늘어놓았다. 훗날 바잉의 전기 작가는 고프는 괴상하고 의심많은 성격 때문에 친밀한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확실히, 고프의 바잉에 대한 질투는 1차 대전이 끝난 뒤에 그의 언행을 통해 잘 드러난다. 고프는 바잉의 능력은 (1915년부터 1917년 까지 캐나다 군단을 지휘했을 때를 지적하며) “식민지 친구들과 죽이 잘 맞는 것이었을 뿐이며 그 친구는 군사 지식이 빈곤한데다 뇌를 가졌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혹평했다. 그리고 1918년 독일의 춘계 대공세에서 바잉이 후퇴한 것에 대해서는 “병신같이 무능했다”고 비난했다. 1916년에 바잉의 캐나다 군단은 고프의 지휘하에 들어왔고 두 사람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잉이 고프의 말대로 뇌가 있건 없건간에 1917년 4월 바잉이 지휘한 비미 계곡 전투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1918년 춘계공세에서의 퇴각 역시 바잉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은 지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바잉이 명예와 부를 얻고 마침내 1920년에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자 고프는 이것을 아주 신경 썼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고프는 나중에 야전군을 지휘하게 된 기병장교 “황소” 알렌비(Edmund Allenby)와는 어정쩡한 관계였다. 고프와 알렌비는 부하들을 극도로 긴장시키는 공통점이 있었다. 본(John Bourne)은 두 장군에 대해서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폭군”이었다고 평했다. 고프는 1차대전 이전에 알렌비의 휘하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고프는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한 반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고프는 서부전선에 복무하던 당시 알렌비는 “특별한 이유없이 융통성 없는 명령만 남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알렌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매우 공정했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부하들에게도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최소한 알렌비는 1차 대전당시의 기병병과 출신 장군들 중에서는 가장 평이 좋은 편이었다. 고프는 또 다른 기병출신 장군인 체트워드(Philip Chetwode)에 대해서는 “게을러 터졌으며 얼간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고프는 보어전쟁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던도날드(Dundonald)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앵글시(Anglesey)는 고프의 이런 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고프가 인정했듯이 그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진급한 것이 (대인관계에) 가장 큰 원인이 됐다. 고프는 46세에 야전군 사령관이 됐는데 롤린슨이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은 53세였다. 군단장으로 복무할 당시 고프는 키치너가 하는 말 때문에 자신이 부하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고프의 지휘스타일은 고프가 자신과 동기이거나 더 선배인 장교들을 다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졌다고 보고 있다. 이야기를 좀 더 공정하게 하기 위해 한 초급장교의 경험을 소개하겠다. 그 장교는 서부전선에서 고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고프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기 때문에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전쟁 뒤에 고프가 한 발언들은 그가 1918년에 지휘관 직위에서 면직된 것 때문에 느낀 실망감과 분노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고프는 그다지 훌륭한 지휘관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Gary Sheffield, An army commander on the Somme : Hubert Gough; Command and Control on the Western Front : The british army’s experience 1914-18, Spellmount, 2004, pp74-76

역시 어디건 간에 인간 관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2007년 4월 11일 수요일

게으른자를 위한 레시피

요리를 매일 만들어 먹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삭막하게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기가 귀찮을 때는 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찿아야 합니다.

결국 한 3년 전 부터 적당한 물건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즉 돼지고기와 막대한 양의 양파, 마늘을 대충 볶은 뒤 고추장, 또는 카레가루 또는 기타 성분이 의심스러운 소스로 볶는 것 입니다.

이때 소스는 매우 진하게 넣습니다.

왜냐 하면 이렇게 대충 볶은 돼지고기 야채볶음을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먹을 일이 있으면 꺼내서 적당한 양을 덜은뒤 양배추 같은 신선한 야채를 잔뜩 썰어 함께 바싹 볶는 것 입니다.

아니면 적당한 양을 덜어서 밥과 함께 볶아 먹기도 하도 라면 사리를 넣어서 볶음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단, 춘장은 매우 느끼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때 기분에 맞춰 소스를 사용하는데 역시 가장 무난한 것은 고추장이더군요.

한번은 닭고기를 사용해 본 적도 있는데 아무래도 돼지고기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오늘은 매운 카레로 볶았습니다.

2007년 4월 10일 화요일

타조 머리 박기

얼마전 채승병님의 페리스코프 개장이래 최고의 인기글이 나왔습니다.

위키피디아는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댓글을 보면 이 글의 발단이 된 네이버 카페의 글을 작성한 사람의 댓글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열심히 댓글을 달아 놓긴 하는데 읽을 줄도 모르는 독일어 글을 퍼오는건 아주 안습입니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독일어 글을 퍼와놓고는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강변하니 구경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아니 슬프겠습니까?

이 글의 발단이 된 글은 바로 네이버에 실린 이 글 입니다.

구스타프와 도라도 구분 못하는 바보들에게...

이 글을 쓴 사람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군요.

2차 대전사를 좀 있다가 쓸까? 아니면 내년에 쓸까?

도움되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을 저글링으로 폄하하는군요. 고등학생이라는데 가정교육부터 제대로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사람을 보는게 한 두번은 아니지만 자신이 명백히 실수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군요. 자신만 인정하지 않으면 남들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타조는 도망치다가 더이상 도망치는게 힘들면 땅에 머리를 박는다는데 이번 사례를 보면 사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8일 일요일

마오주석의 향기

조선일보에 꽤 흥미로운 기사가 났습니다.

오세훈시장 한강 헤엄쳐 건넌다

이 기사를 읽자 뇌리에 떠오른 것은 노익장을 과시하시던 마오주석이었습니다.



오오. 아무래도 오시장께서 이 행사를 통해 청위병(?)이라도 만드시려는 모양입니다. 이 양반 하는 일이 갈수록 깜찍해 지고 있습니다.

2007년 4월 6일 금요일

2차 자료에 근거해 글을 쓰는 경우의 문제점

채승병님의 글 "위키피디아는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에는 2차 자료에 근거해 글을 쓸 경우의 문제점에 대해서 잘 지적돼 있습니다. 저 역시 항상 저런 문제점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독일이나 미국에 갈 여건이 안되는 이상 결국은 2차 자료에 근거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제약에 봉착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2차 자료라도 최대한 활용해서 교차 대조를 해야 하는데 이럴 때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고 있으면 매우 골치가 아픕니다.

제가 지난 달에 썼던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역시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이 Neumann의 "Die 4. Panzer-Division 1938-1943"과 Gunsberg의 "The Battle of the Belgian Plain"인데 이 Neumann의 경우 4기갑사단의 자료까지 충실히 활용한 반면 Gunsberg는 독일측의 경우 거의 제 16군단의 작전일지만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맥락은 두 저작 모두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Neumann의 저작과 Gunsberg의 저작은 제 4기갑사단을 후속한 제 3기갑사단의 이동에 대해 서술하는데 대략 1시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만약 4기갑사단에 대한 부분이라면 Neumann의 저작을 좀 더 신뢰하는 방향으로 나가겠지만 제 3기갑사단의 경우라면 아무래도 Neumann의 저작이 잘 못 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Gunsberg의 글은 제 3, 제 4기갑사단의 상급사령부인 제 16군단의 일지를 바탕으로 했으니 만큼 군단의 전체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Neumann 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기술 할 때는 프랑스측의 문헌을 활용한 Gunsberg의 저작이 상대적으로 유용했습니다. Neumann의 저작도 그렇고 독일측의 입장을 반영한 Jentz의 Panzertruppen의 Hannut전투 부분도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확하게 기술돼 있지요. 그래서 이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도 혼동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결국은 확실한 1차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2차 자료에 의존해 글을 쓰면 쓰는 사람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게 되고 만약 이게 또 웹을 통해 다른 곳에 인용된다면 또 조금 꼬이겠지요. 정말 골치 아픕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1차 사료만 있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문제는 1차 사료를 구하기가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차 사료도 사료간에 상이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최대한 많은 자료를 활용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닉슨 총통

아랫 글에 달린 윤민혁님의 댓글을 보니 이게 생각났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반전운동가들이 만들었다는 물건입니다. 확실히 그럴싸 해 보이는군요.

촛불 시위 대처법

1969년 11월 13일부터 15일 까지 전개된 대규모 반전 집회, “죽음에 반대하는 행진(march against death)” 중 폐제 닉슨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군요.

(전 략)

11월 15일, “죽음에 반대하는 행진”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최대규모의 반전시위가 됐다. 약 50만명의 시위대가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 주위에 모여 미군 철수와 베트남의 평화달성, 그리고 미국의 정의 회복을 기원하는 노래나 연설, 침묵 증언을 했다.

백악관에서는 14일 밤 촛불 시위를 위해 운집한 군중을 보고 닉슨과 그 측근들 조차 그 규모에 위압감을 느꼈다. 할더만(Harry R. Haldeman)에 따르면 닉슨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시위대의 촛불을 끄는 것 등등의 상상’을 하며 즐거워 했다고 한다. 할더만은 15일 시위에 대해 “정말 엄청났다”고 기록했다.

(후 략)

Jeffrey Kimball, Nixon’s Vietnam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8, p.175

이런 망상이나 하고 있었으니 폐위를 당한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2일 월요일

시청 앞의 충무공 동상?

미국인 기부금으로 충무공 동상을 서울시청 앞에 건립할 예정

이대통령은 현 서울 PX관리인 윌리암 버든씨가 약 5,000불의 예산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겠다고 정부에 자진 요청하여 왔기에 그렇지 않아도 정부로서는 충무공 동상건립을 계획 중이던 바, 이를 쾌락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정부 및 요로에서는 충무공 동상건립을 추진키 위하여 대한민족문화협회를 조직 결성하고 동 협회에서 일체를 추진하게 되었다 하며,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씨가 동상을 조각하기로 되었다는데 이미 모형이 완성되었고 오는 11월 말까지에 건립을 완료할 것이라고 한다.

동상 건립장소는 시청 앞 로터리이며 오는 30일에 기공식을 거행할 예정이라 한다. 그리고 동 동상은 높이 31척이며 동양에서 최대의 동상이라고 하는데 총 공사비는 약 3,000만원이 걸릴 것이라 한다. 윌리암씨는 금년 32세의 젊은 실업가로서 씨의 독지(篤志) 에 일반은 크게 감격하고 있다.

경향신문 1950년 3월 18일자, 자료 대한민국사 16권 690-691쪽에서 재인용

만약 수령님이 6월 25일에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충무공 동상은 서울 시청 앞에 있었겠군요. 나름대로 명물이 됐을 듯 싶습니다. 아마도 충무공 동상을 중심으로 시청 광장이 조성됐을 지도 모르지요.
1950년도 공군 예산이 2억5000만원 이었으니 충무공 동상 건립에 3000만원이 소요된다는 것은 그만큼 충무공 동상 건립이 중요한 문제로 간주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007년 4월 1일 일요일

28 weeks later 예고편

28 weeks later 예고편

올 여름에 개봉하는 모양입니다.

예고편 내용을 보니 쑥대밭이 된 영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미국"이 개입하는데 뭔가 꼬여버리는 모양입니다. 런던 시가지를 폭격하는 미군 비행기도 나오는 걸 보면 좀비와 미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내용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흐흐흐.

1편의 주인공들은 나오지 않는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는 피 튀기지 않는 이런 형식의 좀비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꽤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