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8일 수요일

오늘의 농담

어떤 "인터넷 신문"에서...

통일만 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살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영원히 이 땅에서 전쟁은 사라진다.

통일만 되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우리민족이 막아낼 수도 있다.

통일만 되면 일제와 서양세력들에게 빼앗긴 문화재도 되찾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국을 이룰 수 있다.

통일만 되면 착하디착한 우리 민족의 인정 많은 성품과 고상한 문화, 그리고 강인한 기상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아름답게 물들일 수가 있다.

나머지 부분은 여기로...

망상하는 꼬라지 하고는....

2007년 2월 27일 화요일

[번역글][재탕]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예전에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코럼은 제가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군사사이기도 하지요.

=================================================

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독일공군은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고도로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전 세계는 독일 공군이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폴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은 급속도로 발전한 지상군 지원 교리와 전술을 선보였다. 1941년 소련 침공은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또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이 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독일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은 전쟁 초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공군과 육군 항공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성공은 물량이나 기술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교리와 훈련에 의한 것 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간략하게 어떤 방식으로 독일 공군이 지상 지원 교리를 발전 시켜 왔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어떠한 면이 이것을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만들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오늘날 급강하 폭격기를 조종했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회고록이나 독일 공군의 항공기와 장비를 다룬 책은 매우 많지만 상대적으로 독일 공군의 교리와 이것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물었다. 독일어로 된 저작 중에서 교리 문제를 다룬 훌륭한 서적이 소수 존재하는 실정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와 편제 발전에 대한 좋은 글로는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n Weltkrieg 제 2 권에 실린 클라우스 마이어(Klaus Meier)의 글이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상군 지원 작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가 담당한 같은 책 제 4권에 실린 독소전 초기의 항공 작전에서는 지상 작전에 대해서 잘 서술하고 있다. 영어로 된 자료로는 The Conduct of the Air War에 실린 미첼 포겟(Michel Forget)의 “Co-operation between Air Force and Army in the French and German Air Forc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이 1940년 전역 당시 독일 공군의 전력과 구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의 “The German Air War in Russia”는 독일 공군의 항공 작전에 대해 훌륭한 분석을 하고 있으나 근접 항공지원 보다는 일반 폭격기 부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윌리엄슨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Case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lose Air Support에 실린 “The Luftwaffe Experience 1939~1941”에서 전쟁 초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나 그 분량은 적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는가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머레이는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가 대부분 1930년대 말에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1930년대 초기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고 보고있다.
본 필자는 머레이의 가설과는 반대로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 말기부터 독소전 발발시 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고 있다. 비록 독일공군의 교리에서 근접 항공 지원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필요성은 독일 공군의 장비와 조직, 항공기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에서 본 필자는 지상군 지원(Army Support), 근접 항공 지원(CAS, Close Air Support), 근접 저지(Close Interdiction)등의 용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 공군의 개념 정의는 비교적 모호한 편 이었으며 이러한 융통적인 면은 근접 항공 지원을 전력 폭격 만큼이나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초기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

1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 육군 항공대(Luftstreitkäfte)는 매우 수준 높은 근접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을 발전 시켰다. 플랑드르의 제 4 야전군 항공대 지휘관 이었던 헬무트 뷜버그(Helmut Wilberg)대위는 중무장한 하노버와 할버슈타트 2인승 전투-정찰기를 이용하여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지상 공격기 부대를 편성했다. 지상공격기 부대는 흔히 보병(지원) 항공대(Infanterie-Flieger)로 불렸는데 이들은 조종사, 연료탱크,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력을 강화한 항공기를 이용했다. 1918년에 이르자 독일 육군 항공대는 융커스 J-1 이나 C1.I 같은 완전 금속제 항공기를 개발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두 기종 모두 5정의 기관총과 크롬-니켈 합금제인 5mm 두께의 방어 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며 J-1의 경우는 폭탄 탑재량이 150kg에 달했다. 1917년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중 10.5%가 지상지원 전용 항공기로서 그 당시로서는 가공할 전력이었다.
1917년 말 독일 육군 항공대는 매우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교리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운 항공 전력의 운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는 중요한 지점을 선정하여 최대한 집중 운용하는 것을 강조 받았다. 1917년 11월의 깡브레 반격 작전을 예로 들면 이전투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반격에 투입된 돌격대를 지원하여 영국군의 방어진지를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1918년에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이른바 공격기(Schlachtflugzeug)가 돌파 작전에서 매우 유용한 화력 지원과 충격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진지와 포병대, 지휘소, 예비대였다. 1918년 2월 육군항공대 사령관 폰 회프너(von Hoeppner)장군은 지상 공격기 부대는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운용하지 말고 최 전방의 지상군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융통성있게 운용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1918년 1월의 공군 교범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고 지상군의 공격 훈련시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1918년 봄의 대공세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육군 부대에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공세 초기 단계에서 주공을 맡은 3개 야전군은 총 27개 항공 중대로 편성된 지상공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지상공격기 부대의 임무는 적의 방어 거점과 포병, 예비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상댕수의 항공 중대가 예비대로 대기하면서 육군의 지원요청이 떨어지고 30분 이내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발달

전쟁 직후인 1919~20년 사이에 독일 육군 항공대는 130명의 노련한 항공 지휘관과 참모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공 교리를 수립할 자료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 계획은 헬무트 뷜버그가 주도했다. 헬무트 뷜버그는 1920년부터 1927년 까지 독일군 내에서 항공부대에 관한 고위 간부였으며 또한 그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유능한 지상공격기 부대 지휘관 이었다. 전술 및 기술 위원회에 속했던 간부들 중에는 뒤에 독일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장교들이 속해 있었는데 밀히(Erhard Milch), 슈투덴트(Kurt Student), 예쇼넥(Hans Jeschonneck), 슈페를레(Hugo Sperrle), 우데트(Ernst Ude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 중점이 주어진 것은 항공력을 지상작전 지원에 사용하는 문제였다. 네 명 에서 여섯 명으로 구성된 많은 소 위원회가 정찰 항공, 근접 항공 지원, 전방 지역에 대한 차단 작전 등의 임무를 연구했다. 독일 공군의 전술 공군으로서의 성격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1차 대전 당시 전술 항공 부대의 성과에 대한 분석과 당시 독일군 내의 항공 병과 간부인 뷜버그, 펠미, 슈투덴트, 밀히 등이 전투기 조종사나 정찰기 조종사로서 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 혹은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군이나 1930년대의 독일 공군 간부 중에서 폭격기 부대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독일군 내의 항공 교리는 육군 항공 참모부에 의해서 발전 되었으며 곧 간부 및 참모 본부 간부 훈련에 항공 교리 학습이 추가 되었으며 육군의 기본 작전 교리에도 포함 되었다. 육군 규정 487호 제병 합동 지휘와 전투(Führung und Gefecht der Verbundenen Waffen)에서는 항공력의 사용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서는 1차 대전 당시의 근접 항공 지원 경험을 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이라는 장에 설명해 놓았다. 지휘관들은 항공력을 분산 운용하지 말고 집중 운용할 것을 강조 받았다. 여기에서는 지상 공격 항공 부대는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심적 물리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설명했다.
독일군의 근본적인 항공 교리는 1920년부터 26년 까지 육군 사령관을 맡았던 젝트(Hans von Seeckt)상급 대장에 의해 기초가 닦였다. 젝트는 양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항공 교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폰 젝트는 항공 부대를 독립된 병종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항공력이 전장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적을 패배시키는 것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항공대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의 공세 작전이었다. 첫째는 적의 항공력을 격멸하여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 이었으며 두 번째는 적 지상군에 대한 차단 임무로서 적의 철도 교통망, 창고, 군기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과 전장에 대한 차단 임무는 부차적 임무로 취급 되었으며 이것은 제공권을 획득한 이후에야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의 전술 교범은 젝트의 전쟁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항공력은 지상군 지원에 있어서 차단과 지상군 타격을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폰 젝트는 항공력의 임무를 지상군과의 합동 작전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항공전의 승리는 신속히 기동하는 지상군이 적 지상군을 격파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의 중점은 적 방어선의 돌파 지원에 맞춰졌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항공지원은 순전히 이론적인 연구에 머물렀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군은 러시아의 레뻬츠끄에 시험 및 전투 조종사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다. 리뻬츠끄에서 폭탄과 기관총을 사용한 지상공격 훈련은 전투기 조종사의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전술과 기술의 발전 : 1934~1939

독일 공군은 대규모 징병과 재무장, 육군으로 부터의 간부 전입 등에 힘입어 1934년에 실질적으로 창설되었다. 지상군에 대한 항공지원의 기초적인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공군의 기본적인 작전 교리는 헬무트 뷜버그가 이끄는 위원회에 의해 1934년에 작성되고 1935년에 배포된 공군 규정 제 16호, 항공전 지휘(Luftkriegführung)에 잘 나타나 있다. 규정 제 16호 에서는 항공전력을 기본적으로 제병 합동 작전의 틀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적의 인구 및 산업 밀집지구에 대한 전략 폭격은 중요한 임무였지만 공군의 최 우선 임무는 아니었다. 공군의 전시 주요 임무는 적 군사력의 격멸이었다. 규정 제 16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서 군의 임무는 적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 이다. 국가의 의지는 그 군대의 의지와 연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는 것은 전쟁 수행의 근본적 목적이다.”

공군 규정 16호 에서는 지상군 지원 임무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정의했다.

“지상군과 해군에 대한 직접 지원은 전체적인 전쟁 전략의 틀 내에서 중요한 작전인가의 여부에 따라 수행 되어야 한다.”

독일 공군 사령부는 독일 육군과 합동으로 공군은 “결정적 지상 작전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육군의 요청과 공군의 다른 작전, 지상 작전에 투입될 전력의 비율에 대해서 연구했다. 1930년대에 공군내의 주요 논점은 공군이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항공 작전에 필요한 전술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 과 지휘 통제에 대한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지휘와 통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1차 대전 당시 지상군을 지원한 항공대는 각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항공부대 지휘관은 야전군 사령관의 직할로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독립된 병종이었으며 지상군의 지휘하에 움직일 수 있는 항공 부대를 지휘할 지휘 통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 했다.그 대신 공군은 장군 한 명을 육군 총 사령부에 배속 시켜서 연락 장교의 역할을 하게 하고 육군에 소속된 정찰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공군에서 육군에 배속시킨 장교들은 공군 지휘관(Kommandeure der Luftwaffe, 약자로 Kolufts)으로 불렸다. 이들은 각 야전군과 군단에 배속된 정찰 항공대를 통제하고 육군에 배속된 항공 부대의 군수 지원 문제를 담당했다. 각 군단과 야전군에 배속된 상급 공군 장교는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항공 작전에 관련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Kolufts는 자신의 지휘선을 통해 지상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요청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요청에 따라 육군 지휘관은 공군에 지원 요청을 했다. 그러나 Kolufts는 독자적으로 공군 지휘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접 항공 지원 임무 수행에는 효과적이지 못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군 본부는 육군의 상급 제대와 공군 부대간의 직접 연락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군의 관점에서 볼 때 Kolufts는 육군 지휘관에게 직접 배속 되어 있어서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부적합 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Kolufts에 더해서 독자적으로 각 지상군 부대 지원에 배속된 항공대 소속 장교에서 차출되고 공군과 연락 체계를 갖춘 연락 장교(Fliegerverbindungs Offiziere)를 배치했다. 1936년에 독일 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대장은 연락 장교가 원거리에서도 배속된 군단과 지원 공군 부대를 연결 할 수 있는 통신팀을 배속 받도록 했다. 베버 대장은 공군 연락장교의 훈련에 매우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실행했다.

1930년대 중반의 공군 연락 장교 체계는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연락 장교 양성에 있어서 공군은 물론 육군의 작전 체계를 이해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교육 이었다. 공군 참모 대학은 1930년대 중반에 육군 교리와 육군 지원을 강조하는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1937년에 공군 참모 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공군 지휘관, 공군 연락장교, 전선 후방 차단 임무, 방어와 공격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 등 이었다. 1935년의 훈련 보고에서 베버 대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육군의 훈련 방식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도입해서 공군 장교들이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략) 공군은 훈련 시작부터 대규모 독립 작전이 육군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을 수행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육군과의 직접적인 협력은 불필요한 행정 수요를 감소 시킬 것 이며 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들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육군과 공군과의 협력은 독일 공군내에 지상군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군의 장교 훈련 규정은 공군 장교가 타 병종의 훈련과 워 게임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군 장교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들의 작전 수행 방식을 익힐 것이 강조 되었다. 육군과 공군의 합동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육군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의 기초를 익히는데 중점을 두었다. 1937년 가을의 기동훈련에는 차단 작전과 근접 항공 지원이 연습 되었다. 새로이 창설된 기갑 부대는 육군의 다른 병과 보다 공군과의 합동 작전을 더 강조했다. 1936년에 기갑 부대 사령관(Kommandeur der Panzertruppen)이었던 루츠(Oswald Lutz)대장은 기갑 사단 지휘관 들에게 공군과의 합동 작전, 특히 무전기 사용과 정찰 훈련을 강조했다. 루츠는 정찰기 조종사들이 효과적인 전술적 보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루츠는 성능이 충분한 항공기만 갖춰 진다면 정찰 임무를 훈련 받은 조종사가 훌륭한 지상 공격기 조종사도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루츠는 또한 항공관구(Luftgau)사령부에 육군 참모를 둘 것을 요구 하기도 했다.


장비의 도입

공군은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 훈련 등을 발전 시키는 동안 교리에 적합한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흔히 독일 공군에 대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 중에는 슈투카가 에른스트 우데트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채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데트는 1936년에 독일 공군 기술감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두 대의 미제 커티스 호크 급강하 폭격기(XF-11 C-2)를 조종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커티스 호크에 매우 매료되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데트는 이 때문에 그의 전임자인 리히토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중단 시킨 것에 대해 의견 충돌을 보였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실제로 리히토펜과 우데트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해서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육군과 공군 참모본부는 그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가 목표물에 대한 정밀 타격에 크게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28년 초에 융커스 J u-47 단엽 전투기는 지상 공격기와 급강하 폭격에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1930년에 항공 참모부는 경 급강하 폭격기와 중 급강하 폭격기의 성능에 대한 기본 안을 내놓았다. 경 급강하 폭격기는 중 전투기의 역할도 겸하며 2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중 급강하 폭격기는 완전히 급강하 폭격전용 으로서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두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 모두 전방 기지의 임시 활주로 에서도 운용 가능해야 했다. 1932년에 육군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 계획은 He-50 복엽기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e-50은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3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He-50은 본격적인 급강하 폭격기가 등장하기 전 까지 임시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양성에도 사용되었다. 1934년에 국방군 재무장 위원회는 중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중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이 Ju-87 이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은 Hs-123 이었다.
밀히가 작정한 독일 공군의 제 1차 항공기 생산 계획에서는 항공기 3,820대 중 473대를 급강하 폭격기로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34년에 항공 참모부는 1938년 까지 각 90대의 슈튜카로 편성된 3개 급강하 폭격 비행단을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급강하 폭격 비행단은 예비대로서 공군 사령관의 직할로 중점 지구에 집중 투입될 것 이었다. 벡(Ludwig Beck)대장이 편집한 육군복무규정 300(Heeresdienstvorschrift 300), 부대 지휘에서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장이 따로 있었으며 급강하 폭격기는 “특정 목표 타격이 가능한 무기”로 설명 되었다.
1936년 이전에 육군과 항공 참모부는 급강하 폭격기를 파괴력이 강력한 폭탄을 목표에 정확히 투하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일이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에서 슈투카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 주된 근거는 슈투카가 대공포와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급강하 폭격기의 개념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제 2 세대 급강하 폭격기인 Ju-87과 Hs-123은 매우 튼튼하고 일정한 타격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슈투카의 설계상 장점으로는 전방 전진 기지의 비포장 비행장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는 점이고 활주 거리가 불과 400m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1934년에 재무장 위원회는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주었고 급강하 폭격기를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긴 항속거리를 가진 기체로 파악했다. 계획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를 전략 폭격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Ju-87의 초기 양산형은 매우 짧은 항속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Ju-87 B 형의 행동 반경은 최대 폭탄 탑재량일 경우 111~124 마일에 불과했다. 항속거리 문제와 전방 기지에서도 작전 가능한 능력은 슈투카를 근접 항공 지원 병기로 쓰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 육군의 전투 교리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1차 대전의 경험을 반영한 것 이었으며 주적으로 설정된 프랑스는 국경지대에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육군의 기본 교범이던 육군 규범 487은 항공 전력의 주 임무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적의 요새 방어선을 파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형 폭탄을 이용한 요새선 격파는 Ju-87이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잘 수행한 임무였다.
그러나 Ju-87은 불과 2정의 7,92mm 기관총 만을 장비하고 있어서 지상 공격기로서 이동 목표를 타격하는데는 큰 효과가 없었으며 실질적 타격 보다는 심리적 위력이 더 컸다. 독일 공군은 상대적으로 느린 급강하 폭격기의 속도와 약한 방어력에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37년에 독일 공군은 지상 공격 전용의 항공기의 요구 성능을 발표하고 입찰을 시작했다. 이에 필요한 항공기는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충분한 고속에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 결과 Hs-129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기종은 약한 엔진 출력과 기술적 복잡함, 그리고 좋지 못한 조종성 때문에 독일 공군의 실패작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소련은 충분히 무장을 갖추고 방어력도 강력하고 기술적으로도 단순하고 양산에 적합한 IL-2를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Hs-129는 독일 공군의 교리의 실패로 인한 것은 아니었으며 설계와 생산에 큰 문제가 있었다. 독일 공군은 1937년에 지상 공격기를 발주하면서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발전 시켜 나갔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 공군이 얻은 작전 경험은 그 동안 잘못 이해 되어 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 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했으며 “콘도르 군단이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근접 항공 지원은 리히토펜 같은 선구자들이 열성적으로 발전 시켰으며 공군 사령부는 이에 무관심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봤듯이 독일의 육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공군 파견 장교 체제는 1935~36년을 거치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스페인 내전에서 He-51 복엽 전투기를 근접 항공 지원에 사용한 것은 새로 생긴 독자적인 교리가 아니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은 1920년대 이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제 2차 적인 임무였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에서 달성한 것은 기존에 발전시켜온 교리를 성공적으로 실전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는 근접 항공 지원은 제공권을 달성한 뒤에 행해져야 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은 대량으로 운용될 때 적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이 내전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작전을 통해 입증 되었다.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은 1937년과 38년의 작전에서 돌파 작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 되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에 처음에는 콘돌 군단의 참모장으로 나중에는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근접 항공지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독일 공군에서 근접 항공 지원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리히토펜이 예상했던 근접 항공 지원에서의 항공기 손실은 실제로는 매우 적게 나타났다. 1938년 5월부터 공화국 군이 20mm와 45mm 대공포를 투입한 이후에도 지상 공격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히토펜의 감독하에 독일 공군은 최신예 항공기들의 실전 시험을 했다. 이 중에는 8대의 Ju-87 과 6대의 Hs-123이 포함 되었다. 리히토펜은 내전 후반기에 콘도르 군단에 제공권을 장악하자 새로운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을 시험해 볼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기갑 부대와 차량화 부대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기술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1938년 3월 콘도르 군단은 에브로 강 전선에 서 프랑코 군의 기갑 부대를 지원하는 작전에 투입 되었다. 공세 첫 단계에서 콘도르 군단은 공화국군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뒤 전선 후방의 도로와 철도를 타격함 으로서 적 예비대의 증원을 차단했다. 그리고 콘도르 군단은 근접 항공 지원에 집중하여 공화국군의 거점과 야전 축성을 무력화 시켰다. 항공기와 전차는 돌파에 매우 유용한 전력 이었으며 1938년 3월 12일에 콘도르 군단은 프랑코 군이 36km의 전진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외에도 독일 공군은 다른 여러 교리를 시험했으며 대부분 성공적 이었다. 콘도르 군단은 집중 공격뿐 아니라 제파 공격도 함께 행했다. 중점 지역에는 6대로 구성된 1개 편대가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고 바로 뒤에 다른 편대가 공격을 반복했다. 적을 계속적인 항공 공격으로 타격함 으로서 적의 사기에 대한 영향은 더 증대 되었다. 이러한 계속적인 공격은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전매 특허” 처럼 되었다.
한편 공군과 육군과의 통신 문제는 내전 기간 중 큰 문제로 남았다. 당시까지 지상과 항공기간의 교신을 확실하게 해줄 무전기가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는 사전에 세밀하게 준비 되었으며 아군에 대한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부터의 표지판, 연막, 신호탄, 불빛 등에 의해 조정되었다. 콘도르 군단의 첫 지휘관 이었던 슈페를레와 그의 후임자 였던 리히토펜은 중요한 지상 공격 임무는 전방 작전 지휘소 에서 직접 지휘했으며 비행장과의 직접 연락 체계를 갖추었다. 중요한 지상 지원 임무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 공군 고위 장교들의 관행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경험들은 베를린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되었다. 예쇼넥 대령은 1939년 6월에 “근접 지원 임무는 공군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임무”라고 지적하고 이런 임무는 “공군과 공군이 지원하는 육군 부대 간에 밀접한 연락이 뒷 받침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공군은 1939년 여름에 슈투카 전력의 절반을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특수 항공단에 집중 시켰다. 스페인 내전은 독일에게 대규모의 전문화된 근접 지원 전력을 만들도록 했을뿐 아니라 근접 지원을 체득한 우수한 조종사와 근접 항공 지원 작전을 수립하고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을 얻게 해 주었다. 스페인 내전 말기에 많은 독일 공군의 고위 장교 – 슈페를레, 드룸, 폴크만, 플로쳐, 자이데만, 폰 리히토펜 등 – 들이 지상군 지원등의 실전 지휘 경험을 쌓았으며 기갑 부대 작전에 대한 항공 지원 등의 현대적 전술을 체득하게 되었다.


폴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기와 지상공격기 부대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공군은 366대의 Ju-87과 40대의 Hs-123이 가동 가능했으며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지상 공격을 위해서 Hs-123과 Ju-87은 각 야전군을 지원하는 항공사단들에 분산 배치되었다. 1개 항공대(Gruppe)의 Ju-87 30대가 동프로이센에 배치되어 있던 항공 사단에 배속 되었으며 3개 항공대와 1개 항공 중대(Staffel)의 Ju-87 112대가 제 1 항공사단(1. Flieger-Division)에 배속 되었다. 나머지 지상 공격기와 슈투카는 폰 리히토펜의 특수 항공단에 집중 되었다.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4개 슈투카 항공대(160대)와 1개 Hs-123 항공대(40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1개 정찰 항공 중대와 2개 전투기 항공대가 호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다. 폰 리히토펜의 임무는 주공을 맡은 제 10 군을 지원하는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은 폴란드군의 부대 집결지를 타격하는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슈투카의 500kg 폭탄은 대형 공성포의 역할을 대체했으며 모들린의 요새를 포함한 폴란드군의 요새들을 무력화 시켰다. 슈투카 부대는 교리에 따라 대량으로 집중 운용 되었다. 보통 1개 항공대가 기본 단위로 투입 되었다. 9월 26일과 27일에 폰 리히토펜은 모들린 공격에 약 1천 소티의 출격을 해서 지원했다. 모들린은 항공 공격만으로 항복했다.
스페인에서 입증된 교리와 전술은 폴란드에서 그 위력을 입증했다. 근접 항공 비행대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이것은 1939년 에는 다른 어떤 나라의 공군도 할 수 없었던 지휘력 이었다. 리히토펜의 특수항공단은 제 4 항공함대로 이동했으며 별다른 문제 없이 작전했다. 슈투카와 지상공격기들은 폴란드 전역의 지상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작전 초기에 슈투카 부대는 폴란드 공군의 무력화에 집중했다. 9월 7일부터 12일 사이에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라돔-데블린 지구의 폴란드군을 섬멸하는데 투입되었다. 13일부터 17일 까지 리히토펜은 Byzura 강의 폴란드군 방어선을 공격하여 제 10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라이헤나우 상급 대장은 특수 항공단이 전장의 전황을 결정 지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한 제파 공격은 폴란드 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슈파이델은 “슈투카 공격은 적의 사기를 꺾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일 공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은 상당 부분 기동성 있는 지상 지원 부대와 보급 조직의 효율성에 기인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전투기 부대는 그 임무를 위해서 최대한 전방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작전해야 했다. 특히 Hs-123의 경우 최대 무장 탑재시 행동 반경이 70 마일 이었으며 Ju-87의 경우는 110마일에 불과했다. 전방 지역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 공군은 1939년에 117개 차량화 보급 수송대를 편성했다. 폴란드 전에서 제 2 항공 함대와 리히토펜의 부대에는 총 11개 비행장 지원 중대가 배속되었다. 이러한 지원 부대들은 수시간 안에 임시 활주로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전방 기지로부터 작전하는 슈투카들은 하루에 보통 4~5회의 전투 출격을 했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전력을 배가 시켰다.
폴란드는 기갑-항공 합동 작전을 최초로 대규모로 실시한 전역이 되었다. 공군 연락 장교는 각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 참모진과 함께 이동했으며 때때로 전방까지 가서 정확한 상황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의 급속한 진격은 종종 전방 지역에서 식별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부족한 통신 문제와 결합하여 종종 슈투카가 독일군을 공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폴란드전에서 얻은 경험은 신속히 공군 본부에 의해 부석 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방에 대한 종심 타격은 슈투카 부대가 대공포에 심한 피해를 입어서 중단 되었다. 폴란드전 직후 대부분의 슈투카 비행대와 Hs-123 비행대는 폰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집중 되었으며 이 부대는 제 8 항공군단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폰 리히토펜은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을 맡으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지휘 통제 체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각 기갑사단과 군단에 배속된 공군 연락 장교는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로 직접 연락을 취했으며 더 이상 육군측에 항공 작전 참모 역할을 하거나 항공 지원 요청을 부탁하지 않았다.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 에서는 항상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 사령부와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사단 사령부의 상황 보고가 접수되면 바로 수분내에 일선 항공대에 공격 명령이 하달 되었다. 제 8 항공 군단은 항시 1개 슈투카 비행대와 1개 전투 비행대를 출격 시킬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출격 명령이 하달된지 45분에서 75분 내에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슈투카 부대는 네덜란드에 대한 세계 최초의 공수 작전을 지원하는데 투입 되었다.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네덜란드 공군 기지와 대공포 진지, 그리고 기타 목표를 파괴하여 제 7 항공사단 병력이 네덜란드의 주요 목표를 점령하는 것을 지원했다.
폰 리히토펜이 1940년 전역에서 일으킨 최고의 혁신은 항공 전력을 지상 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든 것 이었다. 대규모로 집중된 슈투카 공격은 1940년 5월 14일 스당(Sedan)의 프랑스군 방어를 붕괴 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슈투카는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에는 타격을 별로 입히지 못 했으나 후방의 포병을 타격함 으로서 프랑스 포병이 도하하는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사기에 미친 영향 역시 캐우 컸다. 이날 밤에 프랑스 제 55 사단은 무너졌으며 이들의 퇴각에는 특히 항공 공격이 큰 도움을 주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초기에 제 8 항공 군단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스당 방면 돌파등을 지원했다. 작전 초기에 리히토펜은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에 제 8 항공 군단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고 상급 부대에 건의했다. 5월 16일에 리히토펜은 괴링을 만나 바다로 진격하는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아 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너무나 신속한 진격에 당황했으며 5월 14일 이후 맹진격 하는 기갑사단과 보병사단간에 큰 간격이 생겼다. 5월 16일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늦춰서 보병 사단이 따라 붙도록 명령했다. 리히토펜은 예하 부대에 보병사단이 따라 붙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기갑집단의 측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 때문에 기갑사단에 대한 지원은 2차적인 임무로 돌려졌다. 육군측은 리히토펜이 측면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8시간 뒤에는 프랑스군이 제 2의 마른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 했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최고 사령부는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그동안 리히토펜은 육군의 측면을 잘 방어해 냈다. 8 항공군단의 정찰기들은 반격을 위해 이동하는 프랑스군 사단을 발견했으며 끊임 없이 프랑스 지상군을 공격하고 도로망을 타격했으며 프랑스 기갑부대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제 9 군은 항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제 8 항공군단은 5월 17일 드골의 제 4 기갑사단이 몽꼬르네(Montcornet)에 가한 반격을 격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월 20일에 제 8 항공군단의 주력은 뒤아-라-샤토(Douai-la-Cateau)에 집결한 연합군 기갑 부대를 공격했으며 롬멜의 제 7 기갑사단이 아라(Arras)에서 영국군 전차 부대의 반격을 받았을때도 지원했다.
그러나 Ju-87은 전차에 명중탄을 잘 맞추지 못 했으며 Hs-123은 중 기관포가 없어서 공군의 공격으로 직접 격파한 전차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항공 공격은 전차 부대를 후속하는 지원-보급 부대로부터 분리 시키고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과 포병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자료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8 항공군단의 지상군 측면 보호와 근접 항공 지원 임무는 매우 성공적 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전역 전체를 놓고 볼 때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독일의 대 승리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요인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러시아 전역

독일 공군은 프랑스에서 처럼 소련 침공에서도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의 기갑사단에 항공 지원을 수행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러시아 전선에서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41년 전역에서 독일공군은 지휘 통제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으로 인해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넓게 분산되어 운용되었으며 전장의 확대로 인해 각 기갑 군단과 항공 군단, 항공 함대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 많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가 6월부터 10월 사이에 편성 되었다. 1942년 초에 그동안 유지되었던 Koluft는 완전히 폐지 되었으며 이것은 공군 장군에게 배속된 1개 항공 정찰 사령부로 변경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술적 혁신은 리히토펜이 가져왔다. 그는 소련 침공 당시도 제 8 항공 군단장으로 있었으며 그는 경험많은 슈투카 조종사를 항공기와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장비한 3호 전차에 탑승시켜서 이동 지상 관제관으로 활용했다. 이 때부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최 전선의 지상 부대와 직접적으로 합동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의 교훈으로부터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공기 무장을 강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1940년 전역에서 슈투카의 위력은 물리적 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컸다. 슈투카가 장비한 무기 중 전차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은 폭탄 뿐 이었다. 그리고 전차에 폭탄이 직접 명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독소전 개전 당시 독일 공군은 여전히 Ju-87 B-2형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그 무렵부터 Ju-87 D 형이 양상 배치되고 있었으며 D 형은 늘어난 탑재량과 행동 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독소전을 치루면서 J u-87은 37mm Flak 18을 탑재하여 대전차 공격기로 활용 되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을 수행하던 Hs-123은 1942년에 가서 대전차 공격 임무도 수행하기 위해 20mm 기관포로 무장을 교체했다.
1941년에 독일 공군은 SD-2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 폭탄은 특히 보병 집단과 경장갑 목표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SD-2는 원시적인 집속 폭탄으로 각 폭탄 본체는 각 3파운드 무개의 자탄 96개를 넣고 있었다. 폭탄 본체는 공격시 열리면서 자탄을 살포했다. SD-2 하나는 차량 대열 전차나 보병 집결지 전체를 초토화 시킬 수 있었다. SD-2는 매우 효과적 이어서 미국 공군도 이를 복제해서 수년간 사용했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혁신은 우수한 다목적 폭격기인 Ju-88의 대량 사용이었다. 폴란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의 경험으로 개발된 신무기 중 특이한 것은 보조 로켓 추진에 장갑 목표를 관통할 수 있는 탄두를 가진 1,000kg 폭탄(PC 1000)이었다. 이 폭탄의 사용으로 대부분의 요새 시설은 항공 공격에 무력해 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1941년의 러시아 전역을 정점으로 해서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0년 전역을 치룬 이후 독일 공군은 전해 보다 더 적은 숫자의 항공기를 가지고 소련 침공에 들어갔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꾸준히 장비와 전술을 개선 시켜 나갔지만 더 이상 확실하게 제공권이 장악되지 못 했다.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더 이상 적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 했다. 비록 독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러시아 전선의 인적, 물적 소모는 매우 심각했으며 결국은 독일 공군의 지상 공격 부대를 무력화 시켰다. 독일 공군의 우수한 교리와 전술은 물량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스페인과 폴란드, 프랑스에서 얻은 교훈은 근접 항공 지원은 최대한 집중해서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는 점 이었다. 독일 공군이 1940~41년 사이에 조종사 양성과 항공기 증산에 실패했다는 점은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과 함께 독일 공군이 더 이상 1940년 5월 스당에서 했던 것과 같이 대규모의 집중을 달성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 론

독일이 항공력을 지상군 작전 지원에 간접, 직접적으로 사용한 사실은 군사 교리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39년에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독일 공군의 임무 우선 순위에서 제공권 달성과 원거리 차단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지원은 좀더 우선 순위가 높아 졌으며 제 8 항공군단이 창설 되었다. 폰 리히토펜이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의 돌파와 측면 보호에 큰 역할을 수행하자 이제 작전 수행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41년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원거리 차단과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게 되었다.
독일이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더 우수한 지상군 지원 세력과 교리를 가지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독일 공군과 육군은 교리면에서 특정 사상이나 개념에 구속 받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교리를 보면 전략 항공 공격이나 항공력의 작전 단위 사용에 명확한 구분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은 Ju-87을 전략적 임무에 투입하는 것이나 Bf-110이나 Ju-88 같은 중형 항공기를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법은 전략 임무와 전술 임무를 명확하게 구분한 영국공군이나 미국 육군 항공대와는 매우 다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참모 조직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 보다도 1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각 전역이 끝날 때 마다 독일 공군은 그 교리를 각 전역의 교훈에 맞춰서 수정해 나갔다. 이것은 영국 공군과 미 육군 항공대가 1차 대전 당시 근접 항공 지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근접 항공 지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은 독일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경험 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어 내지 못했다. 심지어 폴란드 전역의 교훈 조차도 이들 국가들에서는 무시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별다른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독일 공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강조한 것 이었다. 1930년대부터 독일 공군과 육군은 제병 협동에 기초한 양 병종간의 합동 작전을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합동 기동 훈련과 연습이 행해졌다.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2차 대전 이전에 육군과의 합동 작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독일 공군은 매우 효과적인 참모 조직을 발전 시켰으며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은 각 전역 마다 대규모 항공 부대를 특정 구역에 집중 투입 할 수 있었다. 또한 참모 조직은 독일 공군의 이동시 보급과 지원 문제에도 큰 효율성을 발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전선에 인접한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보급 조직은 부대의 전투력을 배가 시켰으며 공군 비행대가 하루에도 4회 혹은 그 이상의 전투 출격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우수한 지휘관들이 독일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뷜버그, 밀히, 슈페를레, 예소넥, 폰 리히토펜 같은 지휘관들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그 교리를 형성하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야 말로 독일 공군이 육군 지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데자뷰? - (2)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이지스함 1척을 하기 위해서 드는 돈이면 400~500억 하는 차기고속정 25척 이상 건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지스함 1대면 그 정도의 배 200척도 만들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임종인 의원, 2004년 10월 12일 해군본부 국정감사 회의록

그리고.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해군은 유럽대륙의 지상군 위주의 군사 전략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다. 해군력은 유럽의 대륙국가간의 관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고 마한이 역설한 이야기는 유럽 대륙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해군 전략은 대륙국가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즉 대륙국가들은 열세한 해군 전력으로 해양국가의 해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국가의 해군 이론가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주력함의 열세를 만회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함의 우월적 지위와 거함거포주의자들에 첫 번째로 도전을 한 것은 “어뢰정”이었다. Jeune Ecole의 수장인 Theophile Aube 제독은 어뢰정이 강력한 해양국가의 해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저렴한 대응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어뢰정으로 전함으로 이뤄진 함대를 무찌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전함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Emily O. Goldman, Sunken Treaties : Naval Arms Control between the War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p91-92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읽으면서 자꾸만 임종인 의원이 생각나더군요.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Lothar-Günther Buchheim 사망...

Das Boot의 작가 Lothar-Günther Buchheim이 사망했습니다.

Lothar-Günther Buchheim ist tot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수 있는 전쟁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2월 22일 목요일

진정한 이라크전 특수

이라크전 특수가 있긴 있었습니다.

Oil States Plan Weapons Buying Binge

이라크 문제가 꼬여가고 여기에 이란 문제까지 겹치니 중동 국가들이 불안한 모양인지 열심히 무기 수입을 하고 있다는 군요.

네.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던 사람들이 주장하던 이라크전 특수가 있긴 확실히 있군요. 약간 난감한 형태로 나타나긴 했습니다만...

2007년 2월 21일 수요일

징병제와 미국 스포츠계

징병제가 실시될 무렵 미국 스포츠계의 이야기랍니다.

(전략)

언론과 대중은 운동선수와 영화배우들의 군 입대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징병제가 실시된 초기에 야구 구단주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 자신의 애국심을 과시했다. 신시내티의 워렌 가일스(Warren Giles)는 스타들의 군 입대는 “배트 보이들이 (경기장에서 하듯) 최대한 신속해야”하며 야구계는 징병 문제에 있어 특별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화이트 삭스의 해리 그라비너(Harry Grabiner)는 전쟁중이긴 하지만 대중들에겐 오락거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레드삭스의 톰 야키(Tom Yawkey)는 야구계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돔 디마지오(Dom DiMaggio)와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팀에서 차출되는 것은 걱정하고 있었다. 구단주들은 12월 11일 회의를 열어 군대에 입대하는 선수들은 군복무 리스트에 넣고 군대에 입대한 선수들의 방출이나 영입에 관심을 가진 구단이 참고하도록 하자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군복무 리스트에 오른 선수들은 각 구단의 선수 보유 제한에 해당되지 않도록 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밥 펠러(Bob Feller)와 양키스의 필 리주토(Phil Rizzuto)는 1-A(현역)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슬러거의 행크 그린버그(Hank Greenberg) 만큼 많은 관심을 끈 선수는 없었다. 그린버그는 군 입대와 관련된 첫번째 인터뷰에서는 결코 군 입대 유예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한 기자에 의해 그린버그가 징병당국에 생계에 따른 징병유예 또는 한 시즌 더 뛸 수 있도록 징병을 늦춰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밝혀냈다. 징병당국은 언론 보도를 전면 부인했으며 연봉 55,000달러를 받을 예정이었던 그린버그는 30세의 나이에 징집됐다. 권투선수인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Joe Louis)는 아내와 이혼 수속을 밟는 바람에 “부양자 징집유예” 대상에서 제외됐다. 루이스는 그의 팬 중 한명에게 “난 언제든지 군대에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어떤 대우라도 받을 겁니다”라고 밝혔다. 이보다 좀 웃기는 일 중에는 미네소타주 오스틴의 스타 고등학교 축구팀의 풀백이 실제로는 23세로 가명을 쓰고 고등학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지역에서 추방됐다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스타들이 징집되자 야구 구단주들은 초기에 징병제도에 열렬히 찬성했던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래리 맥페일(Larry MacPhail)은 징병제도는 소득을 떨어트리기 때문에 야구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언론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맥페일은 야구선수들도 과학자나 의사들 처럼 특별 대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Washington Senators의 구단주인 클라크 그리피스(Clark Griffith)는 루즈벨트의 군사보좌관인 왓슨(Edwin M. Watson) 장군에게 서한을 보내 각 구단마다 훈련을 담당할 교관을 보내 선수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대신 야구 경기를 계속하게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리피스는 서한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야구 구단은 준 공공기관(semi-public institution) 입니다.”

(후략)

George Q.Flynn, The Draft 1940-1973, Universtiy Press of Kansas, 1993, pp.27-28

그리피스 선생. 왜 군대에 야구팀을 만들자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역시 대한민국의 "상무"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대한민국 만만세.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합리적 수익분배 유형 - 1944년 동유럽 분할 문제

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무리 다급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만드는 독일인들

아래의 이야기는 1944년 겨울 부다페스트에 포위된 독일군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독일계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뒤 독일군이 Solymar에 주둔하게 됐다. 하지만 독일군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성들이 징집됐던 터라 독일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독일 병사들은 장작을 패거나 추수를 도왔고 마을 사람들은 독일 병사들을 매우 좋아했다. – 물론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서 같은 침대에서 재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줬다. 병사들 중 한명은 Erzsebet에게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줬다고 한다. 그 병사가 적은 것은 아돌프 헤르만 라인플루스라고 돼 있는데 Erzsebet은 라인플루스가 병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병사의 고향 마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병사 한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포위망 안에 갇히네요.”

소련군은 Solymar를 점령하자 독일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은 마을 광장에 카츄샤를 배치하고 Varhegy(부다에 있는 성채언덕, 독일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를 포격했다. 나중에 포위된 독일 무장친위대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을 때 이들 중 일부가 Solymar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들에게 식량을 주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옷을 빌려줬다. 하지만 도망치던 독일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그리고 소련군이 Solymar를 다시 점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도 사로잡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살된 독일군들을 마을 묘지에 매장했다. Erzsebet도 일년에 한번 라인플루스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Cecil D. Eby, Hungary at War : Civilian and Soldiers in World War II, The Pennsylvan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p201

포위망에 갇혀 오늘 내일 하는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2007년 2월 16일 금요일

전통도시의 식민지적 근대화 - 허정도

이런 말을 하면 분개하실 분들이 더러 있으실 것 같은데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 쓴 역사서적 중 여태까지 제가 읽은 거의 상당수는 형편없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외국의 경우는 역사학이 아닌 다른 분야 전공자들도 매우 멋진 역사서적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은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외국과 한국의 고등교육 수준을 잘 반영해 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허종도의 “전통도시의 식민지적 근대화 : 일제강점기의 마산”은 이런 점에서 아주 즐거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현직 건축가이고 이 책은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 입니다. 저자의 전공의 영향인지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일반적인 역사학 전공자와는 다른 느낌이 듭니다. 건축가답게 마산이라는 도시의 물리적 공간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시 공간에 대한 분석에서 저자가 건축 전공자라는 장점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원래 논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문장은 딱딱하지만 마산이라는 도시가 1945년까지 어떻게 발전, 형성돼 갔는가를 분석하는 과정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산이라는 도시에 대한 멋진 가이드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마산이라는 도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해당 지자체가 편찬한 “마산시사” 같은 상당히 좋은 자료도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다양한 일차 사료를 동원해 기존의 문헌(마산시사를 포함한)들의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공계열 전공자가 집필한 역사서적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입니다. 저자가 마산 토박이여서 그런지 딱딱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마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추전하고 싶은 책 입니다.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데자뷰?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그리고 4년 후.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흔히 싸우면서 닮아 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독일쪽은 전쟁 전에 준비한게 있다보니 전쟁 말기까지도 쓸만한 지휘관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만 하위 전술제대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하지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

마른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람 잡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독일인들은 뭔가 화끈한 한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후세에 음흉한 이미지를 남긴 전쟁상 팔켄하인은 1914년 10월 초에 화학전을 위한 연구를 지시하고 재주 좋은 독일 엔지니어들은 150mm 유탄포로 발사하는 가스탄 시제품을 2주도 안되는 시간에 완성해 10월 27일 첫번째 실전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27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의 누브-샤펠(Nouve-Chapelle)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스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과는 조금 기묘한 것이 연합군은 독일군이 화학무기를 썼는지 전혀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은 이날의 성능시험에 만족했는지 바로 17,000발의 가스탄을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입니다.

독일군은 1915년 1월 15일에 동부전선의 볼리모프 전투에서 가스탄을 보다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즉, 본격적인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독일군은 공격준비사격 동안 15,000발의 가스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탄의 문제 때문인지 놀랍게도 가스탄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발사한 가스탄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 화학무기 사용은 독일군 고위지휘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은 도덕적으로 꺼림칙 한데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실전 시험에서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프르 전투에서는 전투 초반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는데 전과 확대에 필요한 예비대가 없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프르 전투에 투입된 화학전 부대는 바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해서 5월 31일 Humin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의 기후나 지형이 화학전에는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일단 사방이 평야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은 이날 220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1만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가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완강하게 저항해 독일군은 크게 고전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Humin 전투 뒤 동부전선에서 세 번에 걸쳐 독가스를 시험했는데 두 차례는 매우 난감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히 한번은 독일군이 가스탄 발사를 끝내고 얼마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가스가 그대로 독일군 방향으로 밀려왔고 이 황당한 상태에 처한 독일군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러시아군은 가스전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인 대응책을 고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가스 공격을 시작하면 해당 지역에 큰 불을 질러 독가스가 높이 올라가도록 만들어 독일인들에게 엿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론 1916년 이후 가스 사용 기술이 점차 세련돼 가면서 이런 임시적인 대응의 효과는 감소했고 러시아는 1차 대전기간 동안 50만 명을 가스 공격에 잃게 됩니다.

독가스는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여름에 걸친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믿고 쓰기엔 문제가 많은 물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 효과가 바람에 좌우된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욕을 먹어가면서 독가스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15-1916년 기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가스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연합군 병력은 연합군 전체 사상자의 0.85% 였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는 이것 보다는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창의력 넘치는 어떤 장군

Conrad C. Crane의 Bombs, Cities and Civilians를 읽고 있는데 아놀드(Henry H. Arnold)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뭔가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하더군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놀드는 전문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는 것을 좋아했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은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였다. 아놀드의 초기 저작들을 읽으면 그에게 폭격기만 충분했다면 어떤 일이든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는 도쿄 주변의 화산을 폭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연안의 물고기를 몰살 시키는 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독일의 V-1과 유사한 무인비행폭탄에 열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부비트랩을 사용하는데 대해 만년필이나 작은 책으로 위장한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참모진은 일본인들 보다 먼저 풍선에 소이탄을 매달아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구상했다.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35

B-29들이 후지산 분화구에 폭탄을 쏟아 넣는걸 생각하니 뭔가 난감한 느낌이 드는군요.

2007년 2월 13일 화요일

[妄想大百科事典]체 게바라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20세기 최고의 패션 아이콘.

티셔츠 도안으로 매우 인기있는 인물. 특히 저작권료가 없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애용되고 있다. 살아있을 때 혁명가였다는 사실 때문에 입고 있으면 나름대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 있으나 예수만큼 유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 효과가 항상 큰 것은 아니다.
게바라 본인은 살아 있을 때 미국 주도의 서방세계에 맞서 싸운 투사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티셔츠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은 서방세계 국가들이다.

체 게바라 티셔츠를 가장 잘 입는 방법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 것이다. 패션 전문가들은 이런 복장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부조화의 멋을 낼 수 있는 좋은 조합이라고 추천하고 있다. 단, 군복바지에 군화는 구질구질한 복학생 이미지를 풍겨 반경 100m 이내의 모든 XX염색체 보유자를 구축할 수 있으니 무조건 피해야 한다.

2007년 2월 12일 월요일

이덕일, 텍스트 계의 김성모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갔다가 또 이덕일씨의 “신작”, 그 위대한 전쟁이라는 물건을 봤습니다. 이건 뭐 김성모 화백도 아니고…. 대중적인 역사서를 표방하면서 책을 붕어빵 찍듯 찍어내는걸 보면 정말 이 양반도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학자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습니다. 글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글을 몇 명 안되는 전문연구자들만 읽는 것 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소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랄 것 입니다.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해서 농담 따먹기 수준으로 놀면 안되겠지요.

이덕일씨는 종종 언론을 빌려 폐쇄적인 학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나 믿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덕일과 비슷한 문제를 하소연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의 글을 쓸 경우 그 방면의 전문가들로부터 사이비 취급을 받게 되지요. 국내에도 번역된 “블랙 아테나”의 저자인 마틴 버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략) 이집트학 전공자들은 잡다한 지식을 통해 어설프게 공부한 비전문가들이 이집트 연구에 뛰어드는 것을 매우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수의 이집트학 전공자들은 나를 이런 어설픈 돌팔이로 분류하고 있다. 내가 미국 이집트학 연구센터(ARCE,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의 연례 세미나에 내 저작에 대한 토론을 위해 갈 때마다 누군가의 빈정거림을 듣게된다. “이야. 황당한 만화 같은 소리로군!”
Black Athena Revisited에 글을 기고한 학자들은 그나마 나의 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하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 연구가 어설픈 돌팔이들, 특히 아프리카 중심주의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Martin Bernal, Black Athena writes back : Martin Bernal responds to his cr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1), p23

이덕일과 버날은 주류학계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버날은 주류학계에서 진지하게 대응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덕일은 완전히 무시당하는 잡글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최소한 버날은 블랙아테나를 집필하기 위해서 해당 언어를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일은 그야말로 무책임하게 환단고기 따위나 들먹이고 있지요.

서점에서 아마존 파괴의 직접적인 원흉을 대하고 나니 약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덕일 같은 돌팔이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관심을 끊어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 뿐 입니다.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진정한 대인배 니키타 흐루쇼프

(전 략)

(핵병기의 등장) 이전에는 전략적으로 적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병종을 동원해 여러 차례의 연속적인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제는 적국의 전략적 목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있다. 그것들은 바로 장거리 항공기와 원자탄, 또는 열핵병기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 그리고 같은 무기를 장비한 잠수함이다.
N. S. 흐루쇼프 동지께서는 미국의 언론 및 출판기업인 허스트(W. R. Hearst)와 가진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만약 미국의 호전적인 집단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전장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한정되지 않을 것 입니다. 전쟁은 바로 직접 미국 본토에서 치러 질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지구의 어떤 곳이든 타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인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비롯해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할 것 입니다.”

(후 략)

П. Ротмистров, О современом советском войеном искусстве и его характерных чертах(현대 소련의 전쟁술과 그것의 특징), 1958(영어번역본), Harold S. Orenstein 번역

가끔 생각하는 것이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야 말로 진정한 공갈협박의 본좌가 아닌가 합니다. 북한같은 변방의 오랑캐들이야 백날 불바다 타령을 해 봐야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양반은 정말로 서방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형적인 약소국 외교

895A.00R/1-2050

동북아시아국의 존 Z 윌리엄스의 면담록.

대외비, 1950년 1월 20일 [워싱턴]

참석자 : 주미한국대사 장면(John M. Chang), 극동담당차관보 W. 월튼 버터워스(W. Walton Butterworth), 존 Z 윌리엄스

국무부 장관이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알렸기 때문에 장 대사는 대신 오후 5시 30분에 버터워스 차관보와 만났다.

장면 대사는 먼저 어제 경제협력처의 대한 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어제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장면 대사는 국무부 장관이 최근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극동지역의 이익선(line of U.S. interest in the Far East)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자신에게 질문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이 미국의 이익선 바깥으로 분류된데다 어제 하원이 한국에 대한 원조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한국을 존중해서 UN의 다른 회원국들과의 협조하에 한국의 정통성(cause)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위치는 어떤 선을 설정하던 간에 그 것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어제 하원의 행동에 대해 한 발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업무문제 때문에 최근 장면대사가 한국의 재정문제에 대해 보낸 서신을 검토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정부에 최근 버터워스 차관보가 한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표명한내용을 한국 정부에 보냈으며 한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에게 의회는 결국에는 1950년 회계연도 한국에 대한 ECA 원조 금액 중 나머지를 승인할 것이지만 1951년 회계연도의 원조 프로그램은 매우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며 이 때문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면 대사는 기자들이 문 밖에서 자신의 발언을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국무부가 하원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발언은 국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예기치 못한 부담을 줄 수 있으며 하는 일 마다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응은, 특히 언론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미국측이 한국을 걱정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장면 대사는 자리를 뜨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와 백악관이 한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각료들에게 확신시키고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국무부장관을 면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부장관의 일정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음주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무부장관 면담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확답했다. 장면박사는 국무부장관과의 면담은 5분 이상 끌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면대사는 버터워스 차관보가 떠난뒤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지고 버터워스 차관보와 대화한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도중 국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going to do something)”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면대사는 기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질문하지 않도록 그 사본은 주미한국대사관과 프레스클럽에 있다고 말을 돌렸다.

FRUS 1950 Vol. VII Korea, pp11-14, USGPO 1976

뭐, 지금도 어떤 경우 구걸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건 별반 차이는 없을 듯 싶습니다만.... 요즘은 미국이나 중국같은 강대국 뿐 아니라 북한같은 동네에도 구걸을 한다지요.

2007년 2월 6일 화요일

[妄想大百科事典]US Dollar

skyhawk님의 지적에 따라 일부 수정 했습니다

US Dollar

세계의 유일신.

달러신은 중세 중부 유럽에서 신앙의 대상이었던 탈러(Thaler)신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달러신 숭배가 시작된 것은 1785년 7월 6일의 일이라고 알려져있다.

달러신이 전 세계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7월 브레튼우즈(Brettonwoods) 종교회의 이후이다. 이 회의에서 세계 44개국의 종교학자, 율법학자들이 모여 그 동안 세계를 타락시킨 근본 원인이었던 황금신에 대한 유일 숭배를 타파하고 달러신이 황금신이 가진 신성을 고루 갖췄다는 이위일체론을 채택하여 달러신 숭배를 전 세계의 공식 신앙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브레튼우즈 종교회의 이후 뉴욕과 워싱턴은 전 세계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60-70년대를 거치면서 달러신의 영향력이 점차 퇴락했고 마침내 닉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달러신에 대한 이위일체론에 대해 불신을 표명하면서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

1976년 1월에 열린 킹스턴(Kingston) 종교회의 이후 달러신 숭배는 상당히 퇴락했으나 아직까지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신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섬기던 소련과 동유럽권에서도 달러신은 공공연히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달러신 숭배는 일반적이었다. 아랍권의 여러 토후국들도 공식적으로는 알라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달러신을 숭배하고 있다.

1998년 5월, 유럽의 개혁성향 종교인들은 새로 유로(Euro)신을 섬기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이후 유로 신앙이 동유럽과 중동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신 숭배는 여전히 굳건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평화를 선사하고 있다.

2007년 2월 5일 월요일

최고의 육상영화 아포칼립토

되는 일도 없고 잠도 안오는 지라 야심한 시각 외출하여 아포칼립토를 보고 왔습니다.

일단 이 영화는 중반 부터 열심히 달리기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달립니다.

네. 정말 열심히 달립니다. 느리게 달리면 죽을 판이니 주인공은 정말 열심히 달립니다. 이런식으로 한 천 명 정도 모여서 한 달정도 달리면 아마존에 8차선 고속도로 하나쯤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주인공은 돌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마야 전사들에게 쫓기고 시커먼 표범에게 쫓겨 다닙니다. 표범보다 빨리 뛰는 걸로 봐선 100m 단거리에 내보내도 좋을 것 같더군요.

달리기를 하다가 나무에 오르고 또 수영을 하고 독침을 쏘고 몽둥이 대결을 펼치는 걸 보니 이걸 가지고 마야5종 경기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잡상이 들었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아주 피가 흥건한 영화라는 점 입니다. 첫 장면의 짐승 사냥에서 후반부의 인간 사냥(?)에 이르기 까지 베고 찌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피를 튀깁니다. 뭐, 그래도 잔인한 장면은 적당히 편집하면서 잘 넘어 갔습니다. 만약 심장 꺼내기까지 직접 보여줬다면 비위가 약한 관객들이 난리가 났겠지요.
이 전에 멜 깁슨이 만들었던 The Passion of the Christ도 그랬던 걸 보면 이 양반 피 보는걸 즐기는 듯 싶습니다. 위험한 인물이군요.

꽤 재미있었습니다. 소재도 특이했고 다루는 방식도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한 줄로 요약하면

불의 전차 이후 최고의 육상영화


가 되겠습니다.

2007년 2월 3일 토요일

각하의 말씀

일 때문에 대구에 내려갔다가 남산동에 있는 책방골목에 들렀습니다. 그곳에 있는 월계서점에서 다음의 물건을 입수했습니다.

바로.

두둥!




각하의 말씀!




각하의 친필 서명!


아아아! 이 어린양. 10년은 더 싸울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