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Popy의 架空戰記 시리즈, Projekt Panzer 001.

외출했다가 이 녀석들을 사 왔습니다.

Panzer IV/70(A) 두 놈 입니다.




나름대로 주포도 조금 움직 일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일 AFV는 단포신 3, 4호 전차나 이런 돌격포 종류인데 두 놈이나 걸리니 즐겁군요. 그런데 이거 001 이후로는 안나오는 건지 웹사이트에서도 검색이 잘 안되네요.

덤으로 인형도 들어 있습니다. 같이 붙어있는 장비들을 보니 판쩌슈렉, MP40, StG44, MG34(?) 등등인 것 같습니다. 잘못 잘라내면 사람 하나 잡겠군요.



이러다가 1:144 스케일에 푹 빠질 것 같습니다. 히히히.

2006년 12월 30일 토요일

[번역글]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삼탕!)


재탕을 거친 삼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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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99년 2호에 실린 Alexander Statiev의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미운 오리새끼 - 루마니아 기갑 부대의 발전 1919-1941  

루마니아 육군 총사령부는 연합군이 1차 대전에서 거둔 성과를 분석한 뒤 기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1919년에 72대의 르노 FT-17 전차를 수입해서 1개 기갑대대와 기갑학교를 창설했다. 2년 뒤에 기갑대대는 약간의 전투 지원 부대를 배속받아 기갑 연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힘찬 출발은 곧 정체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35년에도 루마니아군의 기갑전력은 여전히 72대의 르노 전차였고 이제는 형편없는 구식으로 전락한데다 대부분 고장으로 가동 불능 상태였다. 전차에 대한 교리 역시 전차 만큼이나 발전하지 못했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루마니아의 국방 정책은 매우 보수적 이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의 전략적, 경제적 측면을 분석해 보면 단지 보수적인 정책만이 루마니아의 기갑 전력을 낙후 시킨 요소는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루마니아 내각은 국방비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기갑전력은 이러한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대 본영은 국방예산 문제로 압박을 받아서 새로운 기갑 장비를 도입 할 수가 없었다. 기갑 사단 한 개를 편성하는데는 보병사단 15개에 해당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갑전력은 매우 사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루마니아 군 수뇌부는 무리하게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느니 제한된 예산을 차라리 보병과 포병화기의 표준화와 근대화에 쏟아 넣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이 루마니아군 전체에 일반적 이었다.
또한 루마니아의 낙후된 공업 또한 기갑 전력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이었다. 1937년에 루마니아의 군사 이론가인 라두 다비데스쿠(Radu Davidescu)는 기갑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1. 수입은 비용이 많이 든다 2. 기술발전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외국에서 최신 전차의 시제품을 도입하더라도 그것이 인도될 무렵에는 구식화 될 것이다 3. 기갑 장비는 지속적으로 부품 지원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장비 교체가 필요하고 4. 전쟁이 시작되면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다비데스쿠는 문제 제기만 했을 뿐 해결책은 내 놓지 못 했다. 루마니아는 전차 공업을 일으킬 시설과 이에 수반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루마니아 육군은 기계화에 있어서 전차 보다는 차량 획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2차 대전 발발 이전에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일일 트럭 생산량 6~10대에 불과한 공장 한곳 뿐이었으며 이것 조차 수입 부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차 생산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전쟁이전에 루마니아가 이룬 가장 큰 발전은 프랑스로부터 면허를 얻어 126대의 무한궤도식 수송 차량을 생산하고 부분적으로 국산화에 성공한 것 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기간동안 루마니아는 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용 엔진은커녕 전차용 장갑판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 했다. 사실 루마니아 군 수뇌부 역시 첨단 무기의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오직 수입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기갑전력이 낙후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이를 따라가지 못 하는 점에 위기를 느꼈으며 루마니아의 기갑전력은 “낙후와 되고 (현대전에) 불 충분하며 (주변국에) 압도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갑전력의 근대화는 소총이나 야포에 비해 훨씬 복잡한 것 이었다. 그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수입에 의존해서라도 전차를 수입하느냐 아니면 자국의 수준으로 감당 가능한 재래식 전력에 의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는데 당연히도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루마니아군의 뒤떨어진 군사 사상 역시 기갑전력의 현대화를 가로 막았다. 전차는 공격용 무기였지만 전쟁 이전의 루마니아군 교리는 거의 방어적 이었다. 참모본부의 전쟁 계획중 공세를 가정하고 세워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교리는 “적을 준비된 종심깊은 방어선에서 고착시켜 전력을 고갈 시킨 뒤 단계적인 반격으로 격퇴하는”것 이었다. 이 때문에 전차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기갑부대 인력들은 다른 병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교관과 프랑스 교리에 의해 교육 받았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그들의 프랑스인 교관들 처럼 전차를 전략적 공세에 필요한 무기가 아니라 전술적인 제한적 반격에 필요한 무기라고 인식했다. 루마니아군의 교범은 “보병 운영의 성공이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며” “전차의 기본적인 임무는 보병의 지원이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전차의 공격 종심은 포병의 지원 사격이 가능한 범위에 한정되었다. 즉 수 km에 불과했다. 전차는 “이동 포대로서 …. 적의 거점 파괴”를 통해 보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이나 소련의 교리와는 정 반대의 것 이었다. 
루마니아의 교범은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루마니아군의 전차 교범은 단지 보병 지원을 위한 중대, 대대규모의 운용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독립된 기갑 부대 또한 없었다. 기갑 연대는 창설 초기에 보병 기술감 예하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포병감 예하 부대로 배속 변경 되었다. 그리고 연대 예하의 기갑 중대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기갑 중대들은 전술적으로 보병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영국의 전차 운용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독일이나 소련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1930년대의 급속한 기갑 교리 발전은 루마니아군 내부에서 소수의 기갑 장교가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주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30년에 라두 디눌레스쿠(Radu Dinulescu)소령은 미래의 전쟁은 근접 항공 지원 및 수많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지원을 받는 완전 궤도화 된 운송차량에 탑승한 보병과 포병으로 이뤄진 군대간의 전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체계화된 교리로 발전하지 못 했다. 기갑 교리는 육군의 전반적인 교리에 따랐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루마니아 기갑부대는 나머지 지상 병과의 교리에 전술을 맞춰야 했다. 
사실상 루마니아의 환경에서 다른 기갑교리란 불가능 한 것 이었다. 다른 열강들의 진보된 기갑 교리는 그 국가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큰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기갑 사단은 종심 깊은 돌파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 이었다. 이 개념은 공격자가 방어군의 후퇴 속도 이상으로 돌파와 추격의 템포를 유지해서 적을 섬멸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작전은 오직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여러 개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전차의 대량 손실은 신규 생산과 수리를 통해 보충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다른 병과 역시 신속히 돌파를 선도하는 기갑부대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차량화 되어야 했으며 여기에 대한 보급 지원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어느 하나 이러한 전제를 충족 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마니아 군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육군의 기갑 교리는 매우 뒤떨어진 것 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루마니아의 전략적, 군사적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창의력의 부족은 그나마 있는 교리 체계 내에서 조차 많은 전술적 결함을 가져왔다. 루마니아의 기갑 교리는 매우 융통성이 없었으며 사실 루마니아 군 내에서는 실전을 치루리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전차 운용은 대부분 기동에 양호한 지형에서의 제한적인 정면 공격에 초점이 맞춰졌다. 루마니아군 내의 기갑 이론가들은 조우전이나 시가전, 삼림지대나 기동이 곤란한 지형, 또는 후퇴전이나 방어전에서 전차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다른 병과와의 긴밀한 협동이 강조되었지만 실제 기동훈련은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루마니아군의 교범에는 전차와 항공기의 합동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1935년부터 국방 예산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총사령부는 기갑 병과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단계로 총사령부는 구식화 된 전차부터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루마니아군의 교리에 맞는 외국제 전차의 시제품들이 검토되었다. 1930년대에는 아직 세계 각국이 경전차를 중시하고 있었으며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경전차만을 고려대상에 넣었다. 루마니아군은 126대의 체코제 LT-35와 200대의 프랑스제 르노 R-35를 주문했다. 루마니아군내의 기갑 전문가들은 스코다의 모델이 당시 획득 가능한 경전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며 스코다 측은 LT-35가 보병 지원용으로 만들어 졌다고 광고했다. (이 물건의 설계로 미뤄 볼 때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주장이었지만.) 반면 프랑스제의 R-35는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방어력을 가졌으며 보병 지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차였다. 그런데 루마니아의 도로 사정은 매우 형편 없어서 심지어 이런 경전차들 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재정 부족으로 도로 개선 사업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총사령부는 체코의 CKD로부터 417대의 AH IV tankette을 수입했는데 이 물건은 너무나 무장이 빈약하고 방어력이 약해서 보병 지원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tankette은 루마니아의 빈약한 도로망에서도 충분히 운용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이것이 자국 군대의 교리에 맞건 안맞건 상관없이 전체 기갑 전력의 56%를 tankette으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군에게는 다행히도 CKD는 계약한 대수를 다 채우지 못했고 단지 35대의 tankette만 인도되었다. 그리고 스코다에서 발주한 LT-35 경전차는 모두 무사히 인도되었다. 결국 tankette들은 기병 여단들에 정찰용으로 분산 배치 되었는데 사실 이게 더 적합한 임무였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서 1940년까지 40대의 R-35만이 인도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 기갑부대의 재편을 가속화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에 큰 인상을 받고 루마니아군이 보유한 모든 전차를 단일 부대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쓰러뜨린 지 3주 뒤인 1939년 10월 24일에 차량-기계화 여단이 편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즉흥적인 반응은 결코 루마니아군 수뇌부가 전차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군내의 장기간의 발전 정체는 군 내부에 일관된 전차전 교리를 연구할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차량-기계화 여단은 2개 기갑대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로 편성되었는데 각 기갑대대는 따로따로 차량화 보병연대에 부속되었다. 여전히 전차의 역할은 보병지원에 머물렀다. 이 여단의 간부들은 나중에 부대의 편제와 뒤떨어진 운용 사상이 차량-기계화 여단의 전술적 운용 범위를 축소 시켰다고 인정했다. 
1940년 10월에 독일 군사 사절단(Deutsche Heeresmission, 이하 DHM)이 루마니아에 파견되었다. 독일 사절단은 1941년 2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루마니아군의 훈련을 맡았는데 다른 병과 보다 기갑병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루마니아군의 전략은 여전히 방어적이었지만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 교리가 도입되었다. 이로서 기갑부대 운용 방식도 제한적인 보병 지원에서 독립적인 전술적 종심 타격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추축국에 가담 함으로서 루마니아군은 비록 제한적 이기는 하지만 독일제 전차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원수는 독일 군사사절단에게 훈련을 마치는 대로 독일제 군사 장비를 판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실현 되었는데 독일 제 13 기갑사단과 제 16 기갑사단이 루마니아에 도착했을 때 전차 일부를 루마니아군에 매각했다. 이로서 루마니아군은 종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춘 두개의 독립 기갑 부대를 창설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동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서 훈련된 부대 – 독일군이나 독일식 교리로 훈련되고 차량화 된 루마니아 보병 사단 – 를 루마니아군 지휘하에 넣게 된다면 최소한 루마니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상당 하는 기계화 부대를 가질 수 있을 것 이었다.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바뀌자 차량-기계화 여단의 입지가 자동적으로 강화되었다. 독일 기갑사단들의 연전 연승은 루마니아군 내의 전차 옹호론자들이 군 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여단의 일지는 여단 참모들이 “독일군의 기동전 교리에 맞출 수 있도록 부대 편제를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단은 곧 체코와 프랑스로부터 추가로 전차를 공급받고 독일이 폴란드에서 노획한 R-35까지 인도 받아서 1941년 1월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다시 2월에는 제 1 기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제 전차 부대는 보병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126대의 LT-35를 보유한 1개 연대와 75대의 R-35를 보유한 1개 연대, 그리고 2개 차량화 보병 연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대전차, 중대와 대공포 중대, 공병 중대와 통신 중대, 기갑 수색대로 편성된 혼성 지원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 사단만이 루마니아군 내에서 완전히 차량화 된 부대였다. 
그러나 많은 내부적 요인이 이 사단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없게 했다. 일부 요인은 장비에 있었지만 나머지 요인은 장기간의 발전 정체의 영향이었다. 장비의 문제는 만성적인 수량 부족과 장비의 수준에 있었다. 루마니아가 장비들을 주문할 당시에는 모두 최신 장비들 이었지만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1941년 무렵에는 모두 구식화 되어 있었다. 전차들은 구경도 작고 포구 초속도 느린 대포를 달았으며 LT-35는 너무나 방어력이 형편없었고 R-35는 너무 느려 보병 지원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루마니아군은 전차의 수준 면에서 절망적으로 형편 없지는 않았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차가 독일의 3호나 4호 전차만은 못 했지만 1940년 말 까지도 독일군 전차의 60%는 1호와 2호, 그리고 체코제 모델이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개전 당시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13대중 1대 만이 신형 전차로 나머지는 루마니아군의 전차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물건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루마니군의 기갑전력의 규모와 손실을 대체할 능력의 부족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총 22,600대의 전차를 가진 소련에 대해 3,6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독일측에 전차 제공을 원했지만 이것은 불가능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상급 대장은 “독일군의 장비를 루마니아에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생산되는 장비들은 우리 군대를 장비하기도 벅찹니다. 물론 우리가 노획한 적 장비들을 양도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태도는 전쟁 말기까지도 변함 없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위해서 체코나 프랑스의 공장에서 생산한 장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원래 의도한 수준에 도달 할 수 없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서류상의 편제인 2개 기갑연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 대신에 각 2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차량화 보병연대와 역시 각 2개 대대로 편성되고 모두 LT-35로 장비된 1개 기갑연대만으로 편성되었다. R-35는 너무느려서 제 2 기갑연대는 제 4 야전군 직할대로 변경되었다. 또한 제 1 기갑사단은 지원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래에 나온 것 처럼 사단의 이론상의 편성과 실제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구상한 기계화 사단 
사단 사령부
기갑여단
-차량화연대 : 기관총 대대×1, 경전차 대대×1
-기갑연대 : 경전차 대대× 1, 중형 전차 대대×2
차량화여단
-차량화 연대 : 오토바이 보병 대대×1, 차량화 대대×1
-차량화 보병 연대 : 차량화 대대×3
포병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공병대대
-통신 중대
-대전차포 대
-사단 항공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서류상)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제 2 기갑연대 : R-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2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대공포 중대
-통신 중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실제 편성, 개전당시)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공병 대대
-통신 중대

독소전 발발 당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가동전차 109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사단이라는 것은 이름 뿐이고 실제 전력은 기갑여단이나 기갑연대 전투단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사단은 명예로운 “사단” 칭호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종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단지 전차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술적인 능력도 부족했다.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지적했듯이 전차의 종심 타격은 오직 타 병과의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루마니아군에는 제대로 된 차량화 보병 부대가 없었다. 차량 부족으로 인해서 루마니아군은 소수의 부대를 차량화 시켜서 나머지 사단들을 마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차량을 분산시켜서 모든 사단들을 일부나마 차량화 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결국 트럭은 사단 수송대와 중포를 견인하는데 쓰였으며 보병들은 여전히 자신의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다. 한줌 밖에 안되는 루마니아의 기갑 부대는 보병 부대들의 행군 속도에 묶여 버렸다.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던 소련군은 이 문제를 전차 부대와 기병부대를 혼성 편성하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45년 까지도 소련군이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한 것을 보면 소련군 수뇌부는 이러한 해결 방식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루마니아군은 동부전선에 기병여단 6개를 투입했다. 이중 3개 여단은 각각 1개 차량화 보병연대를 배속받고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쟁 이전 교리에서 기병과 기계화 부대간의 합동 작전이 강조되긴 했지만 루마니아군 수뇌부는 이것을 기병부대에 소수의 전차대를 배속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고 대규모의 기병-기계화 집단을 편성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병-기계화 집단은 루마니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종심 작전 전력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 특히 기갑부대 운용은 루마니아 군의 보급 능력 때문에 큰 제약을 받았다. 루마니아군의 보급은 철도와 징발한 민간차량,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차에 의존했다. 독일군은 바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도 루마니아군 총 참모부에 루마니아군의 역할이 전략적 공세가 아닌 방어적인 범주에서 제한된 규모의 공세를 수행하는 것 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루마니아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측에 독일의 작전 계획을 알리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루마니아는 방어 작전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국내의 교통망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동전을 수행하려면 보급 수단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전반적이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했다. 공세 작전에는 차량화 수송대가 군수의 중추역할을 해야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차량화 된 야전군에 총 11,000대의 차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수량마저 채울 수 없었다. 이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은 평균 447대의 트럭을 보유했지만 루마니아 제 4 군 소속의 보병사단들은 평균 30대에 불과했다. 
개다가 트럭의 종류가 다양해서 트럭 자체의 보급만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결국 보급은 여전히 징발한 민간 마차와 군용 마차에 의존해야 했다. 농부들이 징발에 저항해서 좋은 말은 숨겼기 때문에 군대는 가장 약해 빠진 말만 얻을 수 있었다. 독일측의 사절단이 관찰한 결과 루마니아군의 보급 마차는 한 대당 겨우 탄약 상자 두개만 싣고 있었다.(더 실으면 말이 마차를 끌 수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마차 수송대는 규모만 클뿐 비 효율적이었다. 루마니아군이 참전할 당시 그 군대는 이동 정비소가 없었으며 운송수단들은 순식간에 고장으로 퍼졌다. 게다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은 기동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보급 능력을 기동전에는 별 쓸모 없는 철조망 같은 것을 수송하는데 사용했다. 심지어 가구를 나르는데 트럭을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측은 수송이야 말로 루마니아군의 가장 큰 고충이라고 판단했다. 루마니아 제 3 야전군 사령부는 수송능력의 한계는 국경에서 50km까지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기갑부대의 작전 반경 제한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대의 형편없는 훈련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장비와 예산부족이 원인이었다.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를 기동훈련에 내보내는 것을 꺼려했는데 훈련을 하다가 고장이 나 버리면 실전에 투입할 수 없고 교체할 차량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비와 예산 부족 때문에 훈련은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독일군이 장비하나 없이 훈련만 잘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루마니아군은 장비 문제가 아니라 열의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기갑병과에 속한다는 것이 특별히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갑 장교들의 자질도 우수하지 못 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이나 루마니아 군 자체가 인정하듯이 독일인 교관들이 교육을 담당하기 전 까지 루마니아군 기갑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별 관심도 없었으며 스스로 기량을 연마하려는 열의도 부족한 상태였다. 
독일인 교관들은 독일에서 성공한 방식대로 루마니아군을 아래에서부터 뜯어고쳤다. 먼저 병사 개개인부터 교육을 시켜서 점차 단위 부대를 높여가며 훈련을 시켜 나중에 완전한 사단급 기동훈련을 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 병사들의 기초적인 훈련 부족은 이 계획을 좌절 시켰다. 1941년 여름까지 기갑과 차량화 보병은 소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며 포병은 포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나 사단 참모들이 지적했듯이 공병과 수색대는 훈련일 수가 18일에 불과했고 통신대는 무전기가 부족해 훈련을 하지 못했다. 결국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실전에 투입될 때 까지도 사단차원의 제병협동 훈련을 해 보지 못 했다.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간부들의 질적 수준은 물론 숫적인 문제도 책임 지고 있었다. 기계화 부대의 장비는 복잡해서 운용 인력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했다. 전차 부대는 육군내에서 가장 현역의 비율이 높았다. – 전쟁이전에 각 기갑 연대 병력의 25.5%가 장교와 부사관 이었다. 같은 시기에 포병 연대의 경우는 13.8%만이 간부였다. 그러나 총 사령부는 전투손실을 보충할 보충 병력의 양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특히 루마니아가 농업국 이어서 기술 교육을 받은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이 터지고 첫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 부대의 인력은 특수한 훈련이 필요하고 양성에 1년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을 보충할 인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독일의 군사 고문들은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취약성을 고려해서 사단의 임무를 돌파 작전 보다는 “일반적인 차량화 보병사단으로서 쉬운 임무에 투입할 것”을 강조했다. 사단 사령부는 특히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으며 사령부의 간부들은 보통 보병이나 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제 1 기갑사단은 훈련도 부족했으며 장비와 인력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독일 군사 고문단은 최소한 사단 병사들에게 “엘리트”의식을 심는데 성공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루마니아 장교단에 발전된 기갑 교리를 성공적으로 전수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남부전선에 투입된 유일한 독일의 동맹국의 기계화 부대였다. 초기에 이 사단은 독일 제 11 군에 배속되었다. 오뎃사 포위전이 있기 전 까지 사단은 별 다른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 부대와의 교전만을 벌였다. 게다가 운도 좋아서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전력과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에 관해 연구하는 서방측 작가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는 루마니아군이 작전을 수행한 오뎃사 군관구(Одесский Военний Округ)에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뎃사 군관구-개전 직후에 남부 전선군(Южный Фронт)으로 개칭됨-에 있던 3개 기계화 군단 중 두개 군단은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ый Фрони)으로 이동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제 2 기계화 군단은 주로 독일군 사단들과 교전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만이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투입되었으며 그 숫자도 기껏 탱크 10대 안팎의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기껏해야 비슷한 수준의 소련군 기갑 부대를 상대했으며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상대였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은 겨우 60여대의 신형 전차만 보유했으며 나머지 전차들은 BT-5,7, T-26등의 구식 전차였다. 
첫 2주간의 작전에서 제 2 제대로 운용되던 사단은 키쉬네프(Kishnev) 서쪽에서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을 저지하고 있던 소련 제 95 소총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드네스뜨르(Днестр) 강으로 향하는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를 방어하던 소련 기병 부대를 뚫고 언덕이 많은 지역을 돌파해서 키쉬네프를 북쪽-소련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여 점령했다. 루마니아 군사사가들은 이것을 1941년에 사단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는 이성공을 신속하고 과감한 기동에 의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기갑 사단의 장교들은 루마니아군에서 흔치 않게 과감한 결단력과 주도력을 보였다. 물론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이 소련군 보다 숫적으로 세배 우세했다는 점도 승리에 상당 부분 작용은 했을 것이다. 사단은 키쉬네프 시가지 공격에 보병 지원없이 1개 기갑대대만을 투입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소련군 주력은 시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가전에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1개 기병 중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루마니아 저항군 게릴라들의 지원만 받고 싸웠다. 그리고 사단은 소련 95 소총사단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독일 제 54 군단이 명령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는 실패했다. 그러나 베사라비아의 주도인 키쉬네프의 수복은 루마니아측에게는 자랑스러운 일 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 전차 부대는 독일 제 72 보병사단 보다 10시간 먼저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사단의 최초의 실전 투입은 이 사단이 장비 보족과 기동전에 대한 경험 부족, 그리고 심각한 기초 훈련 부족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음을 보여줬다. 안토네스쿠는 개전 직전에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우리의 공군과 기갑사단은 소련군이 운신할 공간을 없애 버릴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러나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소련군 후위 부대의 소규모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 야지 기동에서 조차 어려움을 겪는 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7월 6일, 9일, 15일에 각각 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방으로 돌파해서 이들이 모길례프, 소로차, 티기나 등 드네스뜨르 강의 도하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바았다. 그러나 이 임무는 실패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소련군을 쁘루뜨 강과 드네스뜨르강 사이에서 포착 섬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소련군은 후퇴에 성공한 사단들을 오뎃사에 투입하거나 아마도 끄림 반도에 까지 투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사단 사령부는 비가 오고 난 뒤 악화된 도로 사정이 기동을 제약했다고 보고했다. 평균적인 독일 기갑사단에서는 차량의 20%가 반 궤도 차량이었다. 소련군 역시 농업용 트랙터를 징발함 으로서 어느 정도 야지 기동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완전히 바퀴달린 차량에만 의존했으며 이들은 진창으로 변한 비포장 도로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비가 오는 날에는 말과 도보로 움직이는 보병사단들이 제 1 기갑사단 보다 더 기동력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단은 수색대의 오토바이들이 베사라비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 가동불능이 되어버려서 위험한 삼림 지대에 정찰도 없이 전차를 투입해야만 했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독일 제 198 보병사단이나 루마니아 제 35 보병사단 처럼 소련 전차의 매복 공격에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좋은 운 때문이었다. 사단의 차량들의 기동성 부족으로 전체 사단은 종종 먼 거리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제병 협동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또한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독일측의 잇다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교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수송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아 생긴 교통 체증(독일군의 차량화 보급 부대와 루마니아군의 마차들이 도로에 뒤섞이는 결과를 초래했다)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보급 문제는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독일과는 달리 루마니아측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자연 문제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사라비아는 얼마 전 까지 루마니아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사단이 잘아는 지형에서 조차 기동에 실패한 원인은 전쟁 이전에 장거리 기동훈련을 한번도 제대로 실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군은 이런 결점을 기동전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실패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에 자신들을 가르친 프랑스인들 처럼 통신 문제를 경시했으며 이는 루마니아군 교범에도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역동적인 전장 환경에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는데 통신에 대한 준비 부족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R-35 전차는 무전기가 아예 없었으며 LT-35 전차의 무전기는 교신 거리가 짧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차장들은 교전중인 위험한 상황에서 조차 수신호를 위해서 해치를 열고 나와야 했다. 개전 직전에야 사단은 7대의 장거리 무전기를 획득했지만 이조차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이것으로는 기껏해야 1개 대대에 한대가 돌아갈 수준이었다. 7월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무전기 다섯대는 고장으로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나머지 두 대의 교신 거리는 불과 30km에 그쳤다. 독일 병기국은 각 기갑사단은 군 사령부와의 교신을 위해 교신거리 250km 수준의 무전기가 있어야 하며 사단 예하 부대는 교신거리 50km의 무전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전자 산업이 전무했기 때문에 이 조잡한 무전기 조차 제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전을 겪고 나서 사단 본부는 무전기 교신 부호가 복잡해서 기동전하에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골치 아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단 본부는 교신 수단의 부족으로 작전에 큰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도 이 점에서는 소련군 역시 루마니아군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남부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뜔레네쁘(Ибан В. Тюленев) 대장은 1941년 7월에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야전군과 예하 군단들은 소속 사단들의 위치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소련군의 상급 제대들은 예하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사단장들은 “자발적으로”움직였다. 
루마니아 군이 전쟁 발발 이전에 겪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수리-정비 부대의 조직에 실패했다는 점 이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창설이후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는 훈련을 나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단은 기동력을 가진 정비대를 갖추지 못했다. 루마니아 동부(그리고 나중에는 베사라비아로 이동한)에 있는 정비소는 기초적인 수리밖에 하지 못 했다. 반면 독일군 기갑 연대가 예하에 거느린 야전 정비 중대는 야외 기동시에도 엔진 교체를 할 수 있었다. 사단 사령부는 상급 사령부인 독일측에 전차의 예비 부품 보급을 끊임없이 요청했으나 독일측은 “단 하나의 부품도 공급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첫 3주간 별다른 큰 격전을 치루지도 않았는데 사단은 가지고 있는 전차의 절반 이상을 기계 고장으로 상실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 뒤에 사단은 장비들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10일간 후방으로 재 정비를 위해 이동했다. 이것은 모두 사단이 자체적인 수리는커녕 장비 정비 능력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초적인 훈련 부족으로 수많은 작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전차들은 전투 중에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차병들이 전차 안에서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생긴 화약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쟁전에 훈련만 충분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들이었다. 심지어 르노 FT-17같은 구식 전차 조차 이런 훈련을 하는데 충분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뒤 사단 정비소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으며 제 1 기갑사단은 독일 제 11군에서 루마니아 제 4군 예하로 배속 변경되었다. 우선 사단은 병력과 장비 상태에 알맞은 임무를 맞게 되었다. 사단은 루마니아 제 5 군단에 배속되어 소련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하고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8월 10일, 사단에 남쪽으로 진격 방향을 바꿔 오뎃사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기습을 통해 오뎃사를 점령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임무였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키쉬네프 탈환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사실 오뎃사의 동쪽 방어선은 가장 소련군의 방어가 약한 곳 이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군의 주공이 시의 서쪽과 남쪽에 집중되리라 판단했으며 2개 소총사단이 각각 정면 20~25km를 담당했다. 반면 동쪽 방어선에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 모아 편성한 12,548명의 병력을 가진 혼성 부대가 정면 55km의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 전 소련군의 교범이 명시한 km당 방어 병력의 4분의 1 수준이 불과한 것 이었다. 그러나 키쉬네프와 달리 오뎃사의 소련군 해안 군 사령부(Командовал дивизией-Приморской)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뎃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쉬네프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나 해안 군 사령부는 오뎃사외곽에 3중의 요새화된 방어망을 구축해 놓고있었다. 설사 기갑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가더라도 오뎃사로 향하는 최 단거리 루트에는 바다와 소금 호수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지협이 있었다. 이곳은 아주 이상적인 방어 지대로 만약 루마니아군이 진입하면 소련군은 호수의 댐을 폭파시켜서 바로 저지대를 침수시킬 수 있었다.
기갑사단의 첫 공격은 먼저 도착한 전차들과 1개 차량화 보병연대만 가지고 감행되었다. 사단 포병과 사단 직할 지원부대들은 후방에 뒤쳐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1일의 공격에서 기갑사단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방어선을 돌파하기는커녕 반격에 되 밀려 나왔다. 
다음날 전차들이 야포를 견인해 전선까지 이동시켰고 루마니아 제 5 군단은 제 15 보병사단과 제 1 기병여단을 증원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5 군단은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제 1 기병여단을 소련군 방어선 최 외곽으로 투입해 버렸다. 그리고 제 15 보병사단장은 보병들에게 전차 지원을 시키자는 기갑사단장의 제안을 묵살하고 보병 단독의 공격을 주장했다. 그 결과 기갑사단과 제 15 보병사단은 따로 따로 공격에 나섰고 그 결과 소련군의 단 2개 소총연대에 차례로 격퇴당했다. 게다가 이중 1개 연대는 개전 초기 실전 경험을 겪은 부대였으나 나머지 1개 연대는 루마니아측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흑해 함대에서 긁어 모아 편성한 해군 수병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비록 해군 보병들이 왕성한 사기와 전투의욕을 가졌지만 보병 훈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두개 소총연대는 3일 동안 루마니아 15 보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전선에서 이탈해 다른 지구로 이동했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사단을 오뎃사 방어선의 북서쪽 지구에 정면 공격하는데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북서쪽 방어지구는 동쪽 지구 보다 전차 운용에 훨씬 적합한 지형으로 평탄한데다가 전차가 이동시 은폐가 가능한 야트막한 언덕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련 해안 군의 병력은 겨우 제 1 방어선만 커버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 1 방어선의 돌파만 성공하면 전차 부대는 충분히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비록 소련군의 대전차포는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에게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오뎃사의 대전차 방어는 형편없었다. 8월 17일 당시 북서쪽 방어지구에는 방어 정면 1km당 6.4문의 야포가 배치되어 있는 수준이었으며 이중 2문 정도가 대전차 포 였다. 소련군은 전쟁 이전의 교범에서 대전차 방어에는 최소한 1km당 문의 대전차포가 대전차 장애물과 함께 투입되어야 하며 적의 공격에 취약한 지형에서는 1km당 25문의 대전차 포가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단은 상급 지휘관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전력이 약화되었다. 기갑사단이 독일 제 11군에 배속되었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사단의 통합성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해 훈련된 인력은 독일 제 11군과 루마니아 제 3 야전군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제 4 야전군에 사단이 배속됐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상습 지휘관들이 여전히 옛 교리에 얽매여 있음알 알게 되었다. 독일식의 기동전 이론을 습득한 기갑사단 간부들과 여전히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된다고 믿는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의 폭은 더 깊어졌다. 전쟁 이전에 루마니아 군의 교리에서 전차의 역할은 미미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군 고급 지휘관들은 전차가 어떻게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모호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나중에 “초기의 전차 운용에서 전차 부대는 전차의 성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루마니아군은 전차를 야간에 포도 밭이나 수풀에 매복한 적 보병을 몰아내는데 투입되었다. 사실 이것은 보병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임무였다.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단이 귀중한 전차들을 방어전에서 소모해 버리는 동안 나머지 수많은 보병들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급 지휘관들은 기갑사단이 보유한 장비를 모조리 다른 부대로 넘겨 버렸다. 8월 13일에 1개 기갑 중대는 사단 포병 주력과 함께 제 1 기병여단과 제 15 보병사단에 지원용으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이 중대는 “부적절한 운용으로”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나머지 기갑연대 병력도 계속해서 분리되어 나갔다. 1개 기갑대대는 제 11 보병사단에 배속되었고 다른 대대의 1개 중대는 제 7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아마 가장 끔찍한 착오는 보전 합동 훈련을 체득한 사단 차량화 보병연대를 다른 지구에 보병 부대로 돌려 버린 것 일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항공 정찰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 현황을 파악했고 해안 군 사령부는 생포한 루마니아 포로를 심문해서 전차 부대의 투입 시기와 장소를 알아 냈다. 소련군은 시내에 배치된 대공포까지 동원해서 루마니아군의 주공방향에 집결시켰다. 또한 보병들에게 대전차 공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대량의“몰로토프 칵테일”을 지급했다. 또한 루마니아군이 전차 공격에 보병을 수반할 것을 대비해서 제 95 소총사단 사령부는 40m당 1 정의 밀도로 기관총을 배치시켰다.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그들이 흔히 사용한 전형적인 화력 집중을 달성했다. 
8월 18일,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사실상 섬멸되었다.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은 전과 확대와 추격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정면 돌파에는 부적절 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제 4 군 사령부는 보병이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공병이 적 지뢰원과 대전차 방어를 분쇄한 이후에야 전차를 전과 확대를 위해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소련군의 기관총 화망에 보병의 진격은 돈좌되었고 보병사단에 배속된 기갑 대대의 운명은 보병 사단장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 사단장이 보고했듯이 “적 자동화기와 박격포 사격이 맹렬하여 본 관은 전차들에게 공격을 선도할 것을 명령했”다. 태어나서 처음 전차를 구경한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를 따라 잡는데 실패했고 전차들은 소련군의 맹렬한 대전차 포 방어에 걸려들었다. 참호선을 돌파한 전차들은 그 후방에 준비된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대부분 격파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일지는 “32대의 전차가 소모되었다”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으며 전차 전술에 무지한 보병 지휘관들에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총 참모부는 전차 전술에 대한 이해는 윗 계급으로 갈수록 형편없어 진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단의 마지막 공격시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면 고급지휘관들은 기갑 전문가와은 거리가 멀다는 이 평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제 4군 사령부는 8월 18일 공격에 R-35를 장비한 제 2 기갑연대로 기갑사단의 전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공격지구에 투입해서 헛되이 소모만 시켰다. 이제 전투가 기동전에서 진지전을 바뀌고 있는 시점이어서 방어력이 약한 LT-35보다는 장갑이 강력한 R-35가 소련군 거점에 대한 공격에 더 필요했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이 계속해서 별다는 정찰 없이 전차대를 투입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전차 함정 조차 발견하지 못한채 걸려들어 소련군 대전차포에 격파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뎃사 포위전이 끝난다음에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은 강력한 포병과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중전차가 적합하며 아군이 가진 경전차는 방어선이 보병에 의해 돌파당한뒤 성과를 확대하는데에만 쓸모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 해안 군은 전투 초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으나 나중에 17대의 경전차와 12대의 Tankette가 보급되었다. 다시 15대의 경전차가 보급되었고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Tankette 50대가 보급되었다. 비록 트랙터를 개조해 만든 조잡한 차량들이 별로 성능이 좋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서 오뎃사의 소련군은 포위한 루마니아군과 비슷한 기갑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별 볼일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10월 2일에 전차를 투입해서 행한 반격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은 소련군 포로를 심문해서 소련 전차대의 공격 방향과 시간을 알아냈지만 여기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방어진지는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불과 7대의 차량만 잃고 종심 8km~10km를 돌파했다. 
이렇게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이 각기 다른 성과를 거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과 훈련 수준의 차이였다. 비록 공격에 투입된 차량중 35대만이 실제 전차였고 나머지는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련 지휘관들은 상세한 작전을 짜서 보병과 포병(카츄사 로켓을 포함하여),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했다. 반면 루마니아군은 대략적인 계획만 짜고 항공지원만 받는 상황에서 전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소련군 대전차포의 성능은 우수했지만 루마니아군에겐 대전차 포탄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 해안 군은 보병들에게 대전차 전술을 철저히 가르쳤지만 루마니아 보병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탱크를 구경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오뎃사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대한 기록에서 루마니아군 전차가 참호선을 돌파해도 고립된 소련군 거점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고 적었다. 반면 루마니아군 보병들은 전차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전선 붕괴를 가져왔다. 
8월 18일의 재앙적인 공격이 있기 전날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에게 독일군의 공세 지원을 위해 제 1 기갑사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뎃사에 대한 공격이 끝나고 남은 가동 전차는 23대에 불과했다. 2개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은 계속해서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으며 거듭하는 정면공격으로 전차만 잃어갔다. 루마니아는 독일측의 지원 없이 전차를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몇 년전에 예상했듯이 국가가 자체적으로 기계화 전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기계화 부대는 소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이었다.

결 론
사단이 완전히 섬멸된 뒤 루마니아 육군 참모총장은 효율적인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먼저 국경선으로 그 값을 치뤘고 이제는 그 열 배가 넘는 피로 값을 치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화 부대의 발전을 저해한 육군의 보수적 장군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루마니아의 기갑부대 발전은 네 가지 주요한 요소에 의해 저해되었다. 첫째는 루마니아의 전쟁 이전 재정 정책이고 둘째는 낙후된 공업, 셋째는 육군의 뒤떨어진 교리, 넷째는 군 전반의 훈련 부족이었다.루마니아는 재정 부족으로 독립된 전차 생산 공업을 육성하지 못 했으며 얼마 안되는 재원을 자국의 뒤떨어진 교리에 적합한 값싼 무기를 획득하는데 투입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외국으로 부터의 기술 독립과 좀더 쉽게 유지와 현대화가 가능했다. 육군의 교리는 애당초 전차를 부차적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은 전반적인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장비의 부족과 기갑 병과에 대한 인식 부족은 장기간의 발전 지체를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 기갑병과 간부들의 자질 저하를 가져왔다. 장교들은 전술 발전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훈련을 유지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외교 정책의 전환과 독일과의 동맹으로 인한 전략 변화는 루마니아 군 내에서 기갑 병과의 위치를 변화시킬 기회로 다가왔다. 비록 독일인 교관들의 훈련은 독일인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 했으나 루마나아 기갑 장교들은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의 원리와 독립된 전차부대가 제병 협동작전으로 이룰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리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장비와 충분한 훈련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간의 훈련만 마친 채 사단은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얼마안되는 전투 기간동안 장비의 수량과 성능 부족, 전쟁이전의 정체 기간으로 인한 훈련의 부족등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약점은 사단이 기습이나 짧은 거리의 추격전에 투입되었을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독일 제 11군 사령부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문제점을 잘 인식했으며 이에 맞는 임무에만 투입했다. 그러나 기갑사단이 루마니아군 상급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어갔을 때 이들은 기갑전에 무지한 상급 지휘관들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 기갑병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상급 부대가 사단에 부여하는 임무는 사단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 역시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기갑부대는 “소규모의 국지적 교전에서도 별 성과를 못 거두고 소모되어 갔다.”

프레쉬니스버거 대학로점, 약간 유감

대학로에 다시 프레쉬니스버거가 들어서서 좋긴 한데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매장이 너무 넓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전에 있었던 대학로점은 가게도 작고 느긋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다시 문을 연 대학로점은 너무 넓고 그리고 너무 밝은 분위기가 납니다. 어째 버거킹이나 맥도날드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되나? 가끔 가서 햄버거를 먹을 때 마다 내가 버거킹에 간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가끔 들더군요.
또 인테리어도 뭔가 딱딱한 느낌이 듭니다. 이전의 대학로점은 좀 오래되고 친숙한 느낌(마치 단골 술집 같은)을 줘서 햄버거를 주문하고 기다릴 때 꽤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래도 버거킹과 맥도날드에 점령당한 대학로에 이 녀석이 들어서니 반갑긴 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갈 때 마다 손님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다 여기도 또 닫아 버리는 건 아닐런지?

이글루스의 전시작전권 반환문제에 대한 토론 - 계속

평소에는 잡글을 쓰며 혼자 블로그질을 즐기는 편인데 이번주에는 전시작전권환수와 관련해 이글루스에서 아주 흥미로운 토론이 있었습니다. 토론 주제도 흥미롭고 내용도 좋다 보니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우리에겐 왜 한미연합사가 필요한가? - 김재창

군국주의의 극치 - 히요
=> 절대로 하면 안되는 짓에 뛰어들다 - 개발부장
=>> 개발부장님 글에 부쳐 - 히요
=>>> 아악 역시 하지 말걸 - 개발부장

허, 군국주의라고? - sonnet

어느 쪽 인건지? - 히요

군국주의 - 히요

현실주의, 군국주의 - sonnet

그럼 뭐라고 하면 좋을지? - 히요

민주주의, 전문가, 여론형성 - sonnet
=히요님 글에 대한 반발 하나 - 박군

히요씨의 주장에 답하다 #1 - sonnet

비판글 함 적었다 난리 나는구나 - 히요
=> 비교체험 극과 극 : 전작권 관련 토론을 지켜보면서 - oldman


강건너 불구경하며 박수치는 변태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토론이란 점은 부인하기 어렵군요.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토론하시는 분들의 기분이 상하는 일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됐으면 싶습니다.

2006년 12월 29일 금요일

돈 없는 군대의 기계화 : 1930년대 이탈리아군의 사례

한국 군대는 한정된 예산으로 챙겨야 할 게 많다 보니 첨단장비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항상 봉착해 있습니다.

이렇게 예산의 제약을 받는 국가가 방대한 재래식 전력을 유지하면서 또 첨단 전력을 확보하려고 고분 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라면 1920~30년대의 이탈리아가 생각납니다. 한국과 종종 비교되는 국가이기도 하군요.

이탈리아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가난한 국가였지만 1차 대전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데다 전쟁으로 별 재미를 못 봤기 때문에 계속 강대국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다못해 겨우 식민지 전쟁 수준인 이디오피아 전쟁조차 약간 과장을 하면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디오피아 전쟁으로 1935/6년과 1936/7년 에는 국방비가 크게 증가해 재정 적자가 십억 리라 단위를 돌파했다지요.

이탈리아와 같이 가난한 국가에서는 자원 배분이 매우 신중하게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 즉 보병과 기병이 있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전차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1920년대 동안은 눈에 띄는 기계화부대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쾌속사단(Divisione Celeri) 이었습니다. 쾌속사단은 기병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1933년부터 대대급의 전차부대가 배속됐습니다. 사실 기병과 전차를 결합하는 것은 이 당시 가난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을 가졌고 많은 수의 보병과 기병부대를 보유한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지요.
스페인 내전에서는 차량화 부대인 리토리오(Littorio) 사단에 전차대대가 배속돼 기갑사단 비스무리하게 운용됐습니다만 임시 편제였으니 제대로 된 기계화부대로 분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육군이 제대로 된 정규편제의 기계화부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37년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여단급 제대에 불과했습니다.
1937년에 편성된 1 기갑여단(Brigata Corazzata)은 1개 Bersaglieri 연대와 3개 기갑대대, 그리고 기타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1937년에 실시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7년 말 까지 2 기갑여단이 편성을 완료해 이탈리아는 2개 여단의 독립 기계화부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육군의 기계화를 대규모로 실시하기에는 밑천이 부족한 국가였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는 총 71,000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이 중 군에서 징발해서 쓸만한 트럭은 12,000대였고 나머지는 일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은 기술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규모가 영세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하니 전시 동원을 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가 1940년 6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생산한 군용 차량은 최저 83,000대에서 최고 120,000대로 추정됩니다. 전시 동원치고는 형편 없군요.)

공업력은 둘째 치고 이미 많은 수의 보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사단의 유지와 장비 교체에 들어가는 예산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갑여단이 1937년에 창설된 것도 보병사단의 장비 교체에 우선순위가 밀리던 와중에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탈리아육군이 본격적으로 사단급 기동부대의 편성을 시작한 것은 1939년 부터였습니다.이탈리아 육군도 자국의 공업력과 경제력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확장은 2개 기갑사단과 2개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기갑군단(Corpo d’Armata Corazzata) 정도에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기갑사단은 기존의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확대 편성할 계획이었고 차량화 보병사단은 이미 편성된 부대가 있었으니 참 경제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기갑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쾌속사단으로 편성된 쾌속군단(Corpo d’Armata Celere)을 편성해 두 개의 군단으로 기동군을 편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물론 쾌속사단들도 이미 편성돼 있었으니 기갑여단을 기갑사단으로 확장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예산이 소요될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아아… 슬픈 이탈리아.

새로 편성되는 기갑사단은 4개 기갑대대를 가진 1개 기갑연대, 1개 Bersaglieri 연대, 1개 포병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기갑여단들은 기갑전력과 포병전력을 대폭 증강했는데 쓸만한 중형전차나 중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들도 어딘가 허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은 그냥 편제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부실했습니다. 보병이 1개 연대 뿐인데다가 전차들은 아군에게 더 지장을 주는 경전차 뿐이라 전투력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편제상 대수는 184대였는데 전차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육성한 1939년 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중형전차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기갑장비의 개선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육군은 보병사단과 쾌속사단의 장비 교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수단에 자원을 더 배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1930년대의 이탈리아 육군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933년 부터 이미 2,000대가 넘는 CV33계열 전차(?)가 생산돼 있었기 때문에 기계화부대 편성과 전차 개발에 예산을 더 집어 넣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체가 얼마 안있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걸 알았다면 장군과 관료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 졌겠지요. 그나마 193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M11/39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물건이었고 그 후속작 M13/40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CV33 계열은 경전차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는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 냈는데 바로 이해 12월 15일에 벌어진 Dembeguina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디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 보병들을 쓸어 버린 뒤 고립된 CV33들의 궤도를 별다른 장비도 없이 끊어 버린 다음 간단히 불을 질러서 격파하거나 그냥 전차병들을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선회포탑이 없고 방어력과 무장 모두 부실한 CV33은 보병지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철제 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 피박을 본 이디오피아 전쟁의 결과 겨우 이탈리아 육군은 선회 포탑을 가진 중형전차 개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만 그 결과 나온 M11/39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3호 전차 같은 걸출한 물건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족 하나, 일부 군사사가들은 이탈리아 육군이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이디오피아 육군에 대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라는 걸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경향도 보이더군요.)

사단 포병은 겨우 24문의 75mm포를 가진 2개 대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지원 화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최저 105mm급을 장비한 독일군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대공화기나 대전차포도 부족했습니다. 각 기갑사단은 8문의 대전차포와 16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는데 대전차포의 부족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1940년 1월에 이탈리아 측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정작 이탈리아는 자국 군대를 장비할 수량도 채우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이 거래를 굴욕으로 생각하고 사위인 치아노에게 거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지요.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갑사단 창설은 진행됩니다.
가장 먼저 편성된 기갑사단은 132 기갑사단 Ariete로 제 2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1939년 2월 1일에 편성됐습니다. 두 번째 기갑사단은 131 기갑사단 Centauro로 짐작하시다 시피 제 1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같은 해 4월 20일에 편성됐습니다. 이 두개 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을 위해 황급히 병력과 장비를 보충 받았는데 1939년 전반기 동안 80% 정도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중 Centauro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에 투입됐는데 알바니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고장으로 상당한 수의 장비를 잃었다고 합니다. CV33, L3/35는 산악지형에서 종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행군을 방해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귀환한 Littorio사단이 정식 기갑사단으로 승격돼 133 기갑사단 Littorio 가 됐습니다.

두체가 호기롭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 중 그나마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32, 133 두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133 기갑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투입된 뒤 1941년 말이 돼서야 장비교체를 완료했고 1942년 1월에야 주 전장인 북아프리카로 파견됩니다.
나머지 하나인 131 기갑사단은 1940년 10-11월의 그리스 침공에서 그리스군에게 큰 손실을 입어 12월에는 예비대로 돌려져 재 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단은 1941년 1월 다시 전투에 투입됐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133 기갑사단 Littorio 와 함께 그럭저럭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마친 뒤 장비교체를 위해 1941년 3월부터 재편에 들어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전투로 전차 소모가 급증한 결과 장비 보충이 더뎌 1942년이 돼서야 재편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갑사단에 배속돼 있던 4개 기갑대대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파견되는 바람에 기갑사단들의 편성은 더욱 더 곤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실제로 영국과의 전쟁이 개시될 당시 이탈리아군이 투입할 수 있었던 기갑사단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2 기갑사단 Ariete는 1941년 1월, 영국군의 반격으로 먼저 파견된 1, 2, 3, 5 기갑대대가 박살 난 뒤에야 리비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기갑부대 창설은 국가의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 낙후된 기술수준이 결합돼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열강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고작 여단급 전력에 불과한 기갑사단 3개를 편성하고도 자원이 부족해 허덕였으니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선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하니 무솔리니가 꿈꾼 기적을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고서적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Calculations : Net Assessment and the Coming of WW II
Gerhardt Schreiber, Die politische und militaerische Entwicklung im Mittelmeerraum 1940/41, DRZW band 3
Ian W. Walker,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Vera Zamagni, Italy : How to lose the war and win the peace,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2006년 12월 28일 목요일

책과 관련된 나쁘지는 않지만 황당한 일

도착한 책 몇 권을 살펴 보니 좀 특이한 녀석이 두 놈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녀석.



주문한 뒤 이 놈 한권만 안오더니만 결국 잊을 만 하니 도착했습니다.

이놈은 Schöningh 출판사가 찍어내는 Zeitalter der Weltkriege 시리즈의 1권으로 현재 2권까지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출간 됐을 땐 작전사로 접근한 연구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짧은 논문 여러개를 모아 놓은 저작인데 흥미가 당기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뒤섞여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놈 입니다.



황당한게 주문한 것은 페이퍼 백인데 도착한건 하드커버판 이란 점입니다.



그냥 먹어 버리고 싶긴 한데 뭔가 찝찝하니 확인메일을 보내봐야 겠습니다.

2006년 12월 27일 수요일

황교주님 우리 동네 오셨네~

저는 상당히 불효자식이다 보니 가끔 가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갈 때 마다 동네 근처에 어떤 건물이 하나 지어지는게 가끔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리고 또 동네에 있는 어떤 썰렁한 농장 하나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일자 한국일보를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더군요.

황우석씨 연구활동 계속

할 말을 잃었습니다. 교주님이 이런 촌구석에 새로이 둥지를 트시다니! 아아. 이 감격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할 일이 많다 보니 성지 순례를 며칠 미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지를 한번 순례하고 오는 길 입니다.

새해에도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께 줄기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라멘.

원숭이 꽃신의 모범사례 - 1974년의 남베트남군

이번 작통권 논쟁에 대한 어떤 분의 트랙백에 달린 sonnet님의 댓글을 보니 생각나서 올립니다.

그러나 이 작전의 성공은 얼마 가지 못했고 스바이 리엥(Svay Rieng) 전역은 남베트남 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가 됐다. 1974년은 남베트남 정부에 있어 치명적인 해가 되고 말았다. 티우의 “전 지역 절대 사수” 전략은 다른 두개의 요인과 결합해 남베트남의 운명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두 개의 요인은 미국의 원조 감소와 이에 따른 남베트남군의 사기 저하였다. 이 두개 요소는 결국 사이공 함락을 가져오고 주권국가로서의 남베트남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남베트남은 1975년에 붕괴했지만 사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때 던져졌고 붕괴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미군의 철수는 남베트남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인들으로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만들었다. 1969년 베트남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합쳐 22개 사단이 있었지만 1974년에는 남베트남군 13개 사단 뿐이었다. 반면 남베트남에 침투한 북베트남군은 1969년 352개 대대였으나 1974년 초에는 646개 대대로 증강됐다. 즉 양군의 전력 비율은 북쪽에 유리하게 기울었으며 그것도 계속해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군의 철수로 항공지원이 격감한 것이었는데 남베트남으로서는 이것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항상 미국의 공군력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것이 없어지자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남베트남군에게 미국식으로, 즉 공중기동, 강력한 항공화력지원, 막대한 보급지원하에서 싸우는데 익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남베트남군은 항공지원, 탄약, 장비,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면서 과거에 배운 방식대로 싸워야 했다. 이미 북베트남과의 전쟁은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남베트남군대는 미국의 원조가 격감한 상황에 맞춰 전력 구조와 작전 개념을 개편할 여유가 없었다.

(중략)

1974년이 되자 우물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2-73년 회계연도에 22억 달러였으나 1973-74년 회계연도에는 그 절반도 안되는 9억6400만 달러로 격감했다. 1974년 초 사이공 DAO(Defense Attache Office)의 머레이 소장은 마틴 주월대사에게 장차 닥칠 붕괴를 모면하기 위해서 티우와 남베트남군 장군들에게 제한된 원조에 맞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권고하도록 말했다. 마틴 대사는 머레이 소장에게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 문제가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남베트남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원조를 받은 것 처럼 보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ENHANCE와 ENHANCE PLUS 계획에 따라 7억5300만 달러에 상당하는 항공기, 헬리콥터, 전차, 야포, 그리고 기타 장비를 원조 받았다. 그러나 많은 장비들은 남베트남군의 요구에 미달하거나 또는 남베트남측이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측도 인정했듯 많은 장비가 “방치된 채로 고철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 불행하게도 남베트남 측은 미국이 막대한 장비를 원조해 줬기 때문에 여기 필요한 예비부품과 연료, 탄약을 계속해서 원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군 수뇌부는 원조 감소 때문에 물자 절약을 시도했지만 일선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미국으로부터 배운 방식대로 싸우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화력 및 항공지원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기본 전술과 작전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탄약과 연료가 확보대는 대로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1974년 초가 되자 물자는 고갈되고 보급 체계는 회복 불능으로 붕괴됐다. 남베트남은 기존에 미국의 우산 밑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결과 베트남군의 전투력은 급감했고 사기도 함께 저하됐다. 1974년 중순, 포병 탄약이 크게 부족해 지자 주요 작전이 장애에 부딛히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부 고원지대의 포병 포대들은 미군이 주둔할 때는 하루 평균 100발의 탄약을 소모했으나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1974년 여름이 되자 남베트남군 보병은 한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실정이 됐다. 수류탄과 기타 공용화기 탄약의 지급도 줄어들었다. 무전기의 배터리도 부족했기 때문에 통신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연료의 부족은 전투력과 기동력을 저하시켰다. 연료의 부족으로 남베트남군은 보유한 차량과 장비의 55%만 운용할 수 있었고 또 운용하는 것 자체도 작전단위에서 제한 되었다. 남베트남군의 트럭 중 50%가 연료 및 부품 부족으로 보관상태에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 제 1군단의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연료가 부족해 구급차의 운용도 지장을 받고 있다. 부상병을 수송하기 위해서 2½톤 트럭 한대로 구급차 네 대를 견인해야 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연료가 부족해 메콩강 삼각주에서 작전하는 부대의 절반을 해체해야 했다. 남베트남 공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연료와 예비부품 부족으로 헬리콥터 및 수송기의 가동률은 50~70%까지 줄어들었다.

1974년 중순, 남베트남군 제 3군단장 팜 꾸옥 투안(Pham Quoc Thuan) 장군은 물자 부족이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73년 4/4분기에… 연료 및 탄약 보급은 3/4 분기의 30% 수준, 1972년 4/4분기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1974년 1/4분기가 되자 보급은 30% 더 줄어들었고 2/4분기에는 20%가 더 줄어들었다… 1973년 초 3군단은 하루 평균 전술항공지원에 200소티를 할당받았으나 1973년 말이 되자 80소티로 줄어들었고 1974년 전반기에는 30소티에서 최대 60소티 정도가 됐다. 항공지원의 감소는 항공기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연료, 폭탄, 탄약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남베트남군은 확보하고 있는 전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최대의 화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James H. Willbanks, abandoning Vietnam : How America left and South Vietnam Lost its War, p.201-203


한국의 사정은 남베트남 보다는 많이 나아 보이지만 이번 전작권 환수 문제에서 드러났듯 꽃신이 없으면 못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작전권을 서둘러 돌려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무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시작전권은 우리의 권리이니 돌려받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옳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시급한 사안인지는 의문이군요.

2006년 12월 25일 월요일

깊은밤 갑자기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좀 한가하게 영화를 볼 수 있으려나 해서 영상자료원에 갔습니다. 24일의 프로그램은 "목없는 여살인마"와 "깊은밤 갑자기"였습니다. 둘 다 몇 번 보긴 했는데 깊은밤 갑자기는 TV에서만 봤었지요. 사실 목각인형이 나오는 것 말고는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일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매우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다른 분들이 한국 공포영화의 걸작이라고 평가하시는데 전혀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긴장감도 잘 살아있고 영화 후반부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출몰하는 목각인형 장면은 어설픈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만들었다는 감탄이 나왔습니다. 80년대 초반 작품이라지만 과연 90년대 중반 이후 부터 쏟아진 한국식 공포영화 중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물건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잘 해봐야 여고괴담 정도.)

그리고 이 영화는 후반부에서 공포물로 진행되기 전 까지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하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전개가 자연스럽고 긴장감도 잘 조절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남편의 라이터를 계속 켜 보다가 불이 켜지는 장면은 정말 섬뜩하더군요. 남편의 불륜을 의심하면서 미쳐가는 주인공을 연기한 김영애의 연기는 정말 발군입니다. 전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남편이 불륜을 저질렀는가를 약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더 긴장감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남편의 불륜 문제를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이렇게 멋진 영화가 나오지는 못 했을 것 같습니다.

함께 본 목없는 여살인마는 약간 깨더군요. 같은 80년대 초반의 영화지만 무섭다기 보다는 좀 키치적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를 보니 깊은밤 갑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 잘 알겠더군요.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헝가리식 절멸전쟁? (재탕)

원래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번역 글인데 이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폐쇄됐는지라 여기에 재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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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8호에 실린 Truman O. Anderson의 “A Hungarian Vernichtungkrieg? Hungarian troops and the Soviet Partisan War in Ukraine, 1942”를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에는 자주 영미권 학자들의 영어 논문이 실리는데 이놈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매우 좋다고 생각돼서 게시판에 올립니다. 각주 번역은 편의상 생략했는데 양해를 바랍니다.

헝가리식 절멸전쟁? 헝가리군과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1942년


1. 도입

독일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 정규군의 개입 문제는 독일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함부르크 사회학 연구소(Hamburger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의 “독일 국방군 전시회”개최는 독일 사회의 “씻을 수 없는 과거” 문제를 새로운 논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조직적으로 범죄행위에 개입했음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독일 국방군이 행한 범죄의 정도와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이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동유럽 출신 자원자들이 폴란드와 소련 유태인에 대한 학살에 개입한 문제와 이른바 “동방군단(Osttruppen)”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중동부 유럽 국가의 독일동맹군들이 “이념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며 각기 다른 분석을 하고 있다. Alexander Dallin은 독일 점령하의 오뎃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민간인을 잘 대했다고 지적했지만 독일의 점령 정책 자체는 매우 가혹한 것 이었다고 평가했다. John Armstrong 역시 하버드 대학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이 의견을 지지했는데 하버드 대학의 자료에 헝가리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한편 Peter Gosztony(동부전선의 헝가리군을 연구한 몇 안되는 학자이다.)는 헝가리는 독일군에 비해 민간인을 훨씬 온건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1942년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지휘관들이 전선후방의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분석하여 헝가리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남부 후방군사구역(rückwährtiges Heeresgebiet Süd)에서는 독일, 헝가리군과 현지 자원병들이 중 동부 우끄라이나 일대에서 증대하는 일반 주민들의 소요와 날로 커져가는 빨치산 활동을 상대하여 독일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군사구역 북부(체르니히프와 수미)는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은 독일군에 비해 형편없는 무장과 훈련 상태였지만 빨치산 활동이 심각한 지구를 맡고 있었고 반대로 독일 보안 부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손실이 증대하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임무를 맡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반면 독일측은 헝가리가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측의 논쟁은 인력과 장비 부족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끄라이나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로 넘어갔다. 헝가리군은 빨치산 세력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민간인을 살상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은 독일군은 물론 우끄라이나의 협조적인 세력에게도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이러한 보복은 효과가 없으며 반작용만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헝가리군 장군 한 명은 자신의 관할구역 내 빨치산 출몰지역의 남성 중 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사람을 모두 사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독일측은 헝가리측에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가혹한 보복은 게릴라 활동만 증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1942년 9월에서 10월까지 게릴라 출몰지구의 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초토화 시키기로 합의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 빨치산 작전 수행 방식에 비추어 보면 이런식의 대응은 약간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빨치산전에 대해서 독일측이 조사 분석한 문헌(주로 벨로루시아 지역을 다루고 있다)을 보면 독일측은 우끄라이나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끄라이나 대부분이 탐욕스러운 에리히 코흐(Erich Koch)의 우크라이나 제국위원회(Reichskommissariat Ukraine)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드네쁘르강 동안의 광대한 지역은 1942년부터 1943년 까지 독일의 군정 통치하에 있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파괴적인 경제 수탈등 가혹한 독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독일군 고위 간부들은 친 우끄라이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중에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관인 칼 폰 로끄(Karl von Roques)중장과 부사령관이고 나중에 로끄의 후임이 된 에리히 프리데리치(Erich Friderici) 중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에 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우끄라이나 토착민들을 빨치산 활동에 대한 보복 같은 가혹한 독일의 점령정책 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들의 정책은 인간 존중 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지만 독일측이 1942~43년 기간동안 우끄라이나 주민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점령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에 이미 그 기초가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헝가리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방식을 택했다. Gosztony는 헝가리군이 독일군 보다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꺼렸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측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부 후방군사구역에서 발생한 가장 잔혹한 보복 작전은 대부분 헝가리군이 수행한 것 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대해 독일측과 헝가리측이 벌인 논쟁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측 역시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을 “적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독일군의 기준은 항상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1943년에 독일의 우끄라이나 지배가 끝장날 때 까지 친 우끄라이나적 성향을 유지했으나 이런 온정주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전쟁이 격화되어 가면서 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희박해 졌다. 독일 지휘관들의 재량권 밖에서 행해지는 일들로 우끄라이나인들의 우호적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군 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끄라이나 주민에 대한 강제 노동 징발 – 로끄와 프리데리치가 강력히 반대했다. - 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측의 빨치산 소탕 방식 역시 사실은 헝가리군 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 물론 독일측은 자신들이 훨씬 온건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독일측의 잔인한 대응역시 우끄라이나 인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게릴라 전에 대한 독일 지휘관들의 명령 역시 매우 모순적인 것 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깨끗한 전쟁”을 치루려는 신념과 “이데올로기상의 적”을 분쇄하려는 투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1942년에 독일측이 행한 빨치산 토벌작전 기록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독일 지휘관들이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줬음이 드러났다. 1942년 9월에서 10월사이에 독일측이 민간인 소개를 실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개된 민간인들을 위한 준비는 매우 형편없이 준비 되었다. 독일측은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작전의 일부만을 행했을 뿐이며 나머지 “더러운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부대 관할로 넘어갔다. SS와 경찰 부대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헝가리군 지구에서 헝가리군을 지원하여 여러 차례의 잔혹한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국방군 간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통 합동 작전이 순조롭게(reibunglos)진행되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었다. 또한 잔학행위는 남부 후방군사구역 직할의 비밀 야전 헌병(geheim Feldpolizei)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 대한 독일측의 비난은 자기 위선이나 뻔뻔한 기만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군 지휘관들이 자국군의 잔학행위와 헝가리군의 잔학행위를 구별지워 판단하려 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점이다. 아마도 독일 지휘관들이 자국의 동맹군을 비난한 것은 독일군이 예의 바르고 전문적인 집단이라는 환상과 자국 군대가 41년 6월 22일 이후 자행한 일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 간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반영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측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이 논문의 초점은 헝가리군이 동부전선에서 수행한 “절멸 전쟁(Vernichtungkrieg)”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잔학행위의 원인은 무었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

이 연구는 독일, 러시아, 헝가리의 1차 문헌을 이용하여 이루어 졌다. 독일측 기록으로는 남부 후방군사구역과 그 예하 부대의 작전 일지가 포함되어있다. 이 기록은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군사 분과에 보관되어 있는데 다행히도 1942년 부분은 거의 손상 없이 남아있으며 민간인과 접촉이 빈번했던 비교적 하급 제대의 기록까지 있다. 관련 기록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미국 연방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측 문헌으로는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조직과 지하 공산당 조직, 이들을 지원한 NKVD의 기록과 1944년 초까지 독일 점령기간을 연구한 지역 정부의 연구 기록등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예쁘의 국가 중앙 문서보관소와 체르니히프, 수미 현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자료는 1997년에 필자가 체르니히프와 수미에 당시 살았던 주민들을 인터뷰하여 수집하였다. 헝가리군에 대해서는 부다페스트의 군사사 기록 보관소(Hadtörtnélmi Levéltar)에 보관된 자료를 참조했다.


2. 1942년 3월까지 우끄라이나의 빨치산 전쟁

바바로사 작전초기에 독일 국방군은 빨치산에 대한 문제는 겪지 않았다. 스딸린은 전쟁 이전에는 빨치산 부대 조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측은 전쟁 초기에 효율적인 조직을 편성하지 못 했다. 초기에 편성된 빨치산 조직은 지역당 조직과 NKVD에 의해 조직되어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 못 했다. 특히 우끄라이나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독일은 침공전에 준군사 조직이나 민간인의 저항이 있을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보복은 유대인과 공산당 등 적대적(이라고 생각되는)집단에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총 사령부는 1941년 7월 12일에 이러한 방침을 확정했다. 남부 후방 군사구역 사령관 폰 로끄는 우끄라이나는 우호적인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육군 총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정의롭다는 인상은 유지되어야 한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보타지 행위에 대해서 우끄라이나인 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돌려야 한다. 보복 역시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한해서만 행해야 할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명령은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충실하게 수행되었다. 폰 로끄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있을 경우 모두 “특별 사건(besondere Ereignisse)”으로 분류하여 자신에게 분류하라고 명령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빨치산 활동에도 불구하고 1941년 10월 이전에 대량 보복은 단 한 건이 있었다. 1941년 8월 29일 제 454 보안 사단 소속의 82 차량화 헌병 대대는 체르보녜 마을에서 우끄라이나인들이 빨치산이라고 고발한 유대인 6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0월부터 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방군은 동진하면서 공산당이 좀더 조직적으로 지하조직과 빨치산을 편성한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제 빨치산은 낙오된 소련 정규군이나 퇴각하는 정규군 부대를 지원하여 직접적으로 독일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드녜쁘르강 만곡부 지역에서는 수주간 보안 사단과 빨치산 부대간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 후방군사구역은 제 6 군으로부터 제 62 보병사단을 증원 받아 뽈따바 지구의 빨치산을 소탕했다. 여기서부터 남부 후방군사구역의 대 민간인 정책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폰 로끄의 명령에 반해 남부 후방군사구역 예하 병력은 군사구역 참모부의 명령에 따라 우끄라이나인 마을을 불태우는 보복을 시작했다. 생포된 빨치산이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순찰하는 독일군이 즉결 처형을 했다. 보복 작전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군사구역 사령부가 다른 동부 전선의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고정 관념을 대 빨치산 작전에 그대로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끄라이나 민간인의 살상에도 불구하고 군사구역 사령부는 12월에 친 우끄라이나적 점령 정책을 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우끄라이나 인을 “아리안”인종으로 규정했다. 프리데리치는 12월 14일자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독일에 대한 우끄라이나 민간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우끄라인들의 해방에 대한 소망이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공포로 바뀌는 것은 안된다.”

한편, 12월부터 헝가리군이 후방군사구역에 투입되어 빨치산 소탕에 참여했으며 곧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군사구역 예하의 헝가리 군은 “헝가리 동부 수비 집단(königliche ungarische Besatzunggruppe Ost)”으로 불리웠으며 제 102, 105, 108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2월 18일 에서 19일, 독일측은 체르니히프 북동쪽 75km 에 위치한 꼬류끼프까 지구에서 1,7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빨치산 집단을 파악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이들이 소련 제 4군의 장교와 중앙당 간부, 그리고 지역당의 열혈당원, 유대인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박격포와 자동화기, 그리고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12월 20일, Kálman Csiby대령이 지휘하는 제 105 여단 2 대대가 게릴라 소탕을 위해 출동했다. 이틀 뒤 대대는 게릴라 700명을 사살했으며 잔여 인원은 중부 집단군 지구로 도주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대인 90명을 작전 중 사살했으며 최소한 마을 한 곳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기록되었다. 독일측 기록에는 이 지역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다. 그러나 105 여단이 이후의 전투에서 형편없는 전과를 올린점에 미뤄 본다면 빨치산 700~800명 사살은 확실한 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100명 이상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의 러시아측 문헌은 이 소탕 작전에서 114명이 학살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12월에 체르니히프 지구 빨치산이 배포한 삐라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다. 헝가리측의 사상자 숫자로 볼 때 교전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빨치산은 보복으로 학살된 민간인 이었다. 여단의 보고서에는 헝가리군이 전사 7명과 부상 10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 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우끄라이나의 경찰 보조원(Hilfspolizei, 보통 Hipo 라고 부름)중에서 11명이 전사, 9명이 행방불명, 27명이 부상당했다.

꼬류끼프까 지구 전투는 이후 헝가리군의 전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격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군사구역의 북쪽 경계는 체르니히프 일대에 형성되었다. 헝가리군은 데스나강과 벨로루시아와 러시아 경계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지구의 빨치산은 체르니히프 지하당 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미래의 소련 연방영웅 페도로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월 에서 3월까지 독일군이 혼란한 전선일대로 집중된 동안 후방의 헝가리 제 105 여단은 페도로프가 지휘하는 빨치산 부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은 헝가리군과 점령군에 협력하는 우끄라이나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빨치산 부대는 홀미 일대에서 26명의 우끄라이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 17명을 죽였으며 후퇴하는 과정에서 집 34채를 불태웠다. 2월 5일에 옐니예 에서 두 명의 헝가리 병사가 매복 공격에 사살 되었으며 12일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105여단 소속 병력이 매복 공격을 받아 31명의 사상자를 냈다. 헝가리군은 보복작전에서 루끼-후또르 마을을 불태우고 139명의 “빨치산”을 “사살” 했다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공격은 더욱 더 대담해 졌다. 3월 2일, 헝가리 제 46 보병연대는 홀미와 꼬노똡 일대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두명이 행방불명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0일 뒤에 페도로프는 제 105 경보병사단(이전의 105여단이 개편된)의 전투단을 아바니브까 마을에서 습격해 4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또한 빨치산은 30명의 경찰 보조원을 죽이고 6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독일측 보고서에 따르면 빨치산은 지역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경찰 보조원의 아이들의 손을 자르고 19명의 주민을 강제로 입대 시켰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헝가리군은 빨치산과 그 후원세력을 “전투원”이 아닌 “범죄자”로 파악했다. 늘어나는 손실로 헝가리군의 사기는 낮아졌다. 지휘관들은 증원병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독일측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임무를 맡겼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동시에 민간인에 대한 대우도 가혹해 졌으며 빨치산 소탕도 한층 더 과격해 졌다. 생포된 빨치산이 그를 감시하던 경비병 두 명을 죽이자 105 사단측은 1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빨치산을 포로로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측도 헝가리측의 불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헝가리 제 105 사단장 Kolossváry 준장과 체르니히프의 독일 제 194 야전사령부(Feldkommandantur) 지휘관 뷔어펠(Würfel)중령의 요청에 따라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는 페도로프의 빨치산 부대에 대한 토벌을 위해 증원 병력을 투입했다. 703 경비 대대(Wachbattalion)과 544 향토 대대(Landesschützen-battalion)가 증원되어 헝가리군 2개 대대와 함께 옐리녜 남쪽의 삼림지대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이 전투단은 남부 후방군사구역 사령부 예하의 비밀 야전 헌병 3개 분견대(Abteilung)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는 독일측의 정보가 매우 정확했으며 일부 우끄라이나 경찰의 탈주와 영하 15~3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성공적 이었다. 페도로프 집단은 900명중 22명이 사살되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측 주장에 따르면 27명이 사살되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전술적인 측면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가 끝난뒤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Csendes 중령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점령했으며 마을 주민 대부분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공군의 공습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며칠 뒤 헝가리군이 마을로 다시 갔을 때 마을 주민 대다수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Csendes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체포에 저항하는 주민 30명을 사살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을 집합시켜 독일 비밀 야전 헌병에 인계했다. 헝가리군은 옐니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3월 29일부터 4월 4일까지 옐니녜 주변에서 민간인 536명이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 중 230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고멜에 있는 민간인 수감시설로 이송되었다. 군사구역 사령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는데 고멜은 중부 집단군의 관할 구역이었으며 프리데리치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4년 해방 뒤 NKVD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고멜에서는 민간인들 중 노인들만 석방되고 여성과 어린이는 학살됐다고 한다.

군사구역 사령부측이 민간인 학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독일측은 작전의 성공적 종료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군사구역 북부 지역은 평정 된 것 처럼 보였다. 703 경비 대대 대대장은 그의 나이 먹은 부하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했다. 신병 치료차 떠나있던 폰 로끄 역시 복귀한 직후 작전의 성과를 치하했다. 만약 독일측이 헝가리군의 작전에 불만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겼을 것 이다. 그러나 Csendes의 추정은 독일군에 비해 덜 낙관적 이었다. 그는 최소 300명 이상의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추정했다. 반면 Kolossváry 준장은 작전의 성과에 만족했으나 작전 기간 중 자신의 여단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로 되어 있는데 독일-헝가리 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며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 Kolossváry 준장의 비판

Kolossváry 준장은 1942년 초 105 사단의 작전 경과를 상급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경 사단의 역경”이라는 제목으로 네 장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은 먼저 105 사단의 절반이 예비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상태 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장교와 병사들은 정신력으로 훈련과 육체적인 문제를 극복해 왔으나 부족한 보급과 좋지 않은 기후, 그리고 지속되는 전투 손실로 지휘관들의 “열정과 초인적인 의지”가 없이는 부대의 상황이 악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를 좀더 세부적으로 기록했다. 1월의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평균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장거리 행군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7명이 심각한 동상으로 절단 수술을 받았으며 250명이 2도 동상에 걸렸다. 사단 예하의 각 대대는 각각 호로드니아, 바흐마취 니즈인, 노브로로드-세베르스끼, 얌삘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대중 일부는 체르니히프의 야전 병원과 사단 본부로부터 최고 70~8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사단의 주둔 지역은 철도망이 부실했으며 빈약한 도로 사정으로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보급 문제는 매우 열악했으며 편지 배달도 원활하지 못 했다. 사단의 한 대대는 연 초의 작전 기간 중 거의 2500km를 행군했으며 주둔지의 거주 사정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으며 가내에 가축을 같이 키우는 우크라이나 가옥”이었다. 의무 지원은 기초적인 수준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급품에 이 같은 기생충이라도 붙어 있는 경우에는 집단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3월 말 까지의 소탕작전에서 105 사단은 101명의 전사자와 129명의 부상자를 냈다. 부상자들은 좋지 않은 날씨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체르니히프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군이 겪은 여러가지 고통 중에서도 가장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외국인 지휘관과 병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기상 상황에 대해 잘못 된 정보를 주며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그들의 행태”였다. 그는 소련측이 이런 불만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독일군과 헝가리군 사이의 균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빨치산은 그들이 약탈하고 방화한 마을을 헝가리군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독일측은 이러한 사태가 사전에 아무런 논의도 없이 발생한데 해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 측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으며 이런 문제를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Kolossváry 준장은 결론에 가까워 지면서 자신의 작전 구역의 빨치산이 숫적으로 매우 우세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이 나폴레옹 전쟁당시 가장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내전 당시에도 역시 활발한 게릴라 활동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의 상황은 빨치산의 세력 확대에 매우 유리한 상황 조성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자신의 담당 구역의 면적, 각 부대의 행군 범위, 3월의 작전에서 사살한 빨치산 숫자(그는 5,132명으로 추정했다.)등을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단이 맡고 있는 고정 거점 방어를 우끄라이나 부대에 넘기고 각 대대를 사단의 통제하에 운용하며 화염방사기와 박격포, 대전차포와 기관단총의 보급을 요청하는 한편 독일측에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들은 매우 간단한 요구사항이었다. Kolossváry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폰 로끄의 참모진들은 헝가리측에 추가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폰 로끄는 그의 후임인 프리데리치와 마찬가지로 헝가리측이 병력과 장비 부족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폰 로끄는 헝가리군의 상태에는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Kolossváry가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폰 로끄는 육군총사령부 군수국에 헝가리측의 곤궁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보복에 대한 문제는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헝가리군과 독일군측에 상당기간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Kolossváry의 보고서에서는 헝가리군과 독일 상급 사령부 사이의 의견 불일치 문제를 주로 지적했으며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석을 했다. 그러나 다시 여름으로 접어 들면서 민간인에 대한 헝가리군의 태도는 한층 더 격해 졌고 민간인에 대한 보복 문제는 헝가리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전략 전술적으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4. 하계 대공세와 보복에 대한 논의


봄의 홍수와 페도로프 집단의 퇴각으로 헝가리군의 담당 지구는 일시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빨치산과의 특별한 교전은 없었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새로운 하계 공세인 BLAU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10만 평방 km에 달하는 지역에서 빨치산 소탕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기껏 1,3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6월에 군사구역의 관할 구역이 수미 지구까지 확대되면서 브랸스끄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점을 둔 강력한 빨치산 부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일부 빨치산 부대는 수미에 확보한 전방 기지를 기반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얌삘 남쪽과 서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6월 말이 되자 군사지구 사령부는 중부 집단군 으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으며 시도르 꼬빡 일대에 있는 대규모 빨치산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헝가리 108, 105 사단의 일부 병력과 소련군 포로로 편성한 “투르키스탄” 대대, 공군의 비행장 경비 병력 1개 중대, 꼬노똡 에서 차출한 건설 부대 병력(Gruppe Becker, 베커 집단), 1개 전차 중대, 공병, 대공포 등 1,2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작전은 6월 20일부터 26일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었으며 독일측은 기대이하의 성과로 헝가리측과 논쟁을 벌였다. 헝가리측은 250명을 작전 중 사살하고 143명을 생포한 뒤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상당수의 포로를 독일 비밀 야전헌병의 감시하에 뿌띠블리 지구로 이송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모두 빨치산 주력은 포위망을 빠져나갔다는 점을 인정했다. 헝가리군 사령관 Imre Bogányi 중장은 지역 민간인들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기간 중 민간인들이 빨치산이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전 중에도 노바 슬로브다, 야치녜, 체레뽀보, 이바니프스끼, 세슐린등의 마을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작전 구역의 남성중 15~60세의 남성은 모두 사살하고 생포해서 이송한 포로들도 사살해야 하며 여자 포로들 중에서도 가슴 밑에 별 무늬 문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주로 사용한 표지)을 한 경우는 사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ogányi 중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6월 25일에 베류흐에서 발생한 폭탄 폭발의 책임을 물어 베류흐에서 10명의 인질을, 그 인접 마을들에서 각각 5명씩의 인질을 처형했다.

이와 관련된 독일측 기록으로는 노바 슬로바다와 칼리체, 리노보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 행위는 인접 부대인 바익스 집단 사령관 폰 바익스 상급대장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7월 3일에 바익스는 브리데리치에게 헝가리군이 마을을 파괴하는 행동이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행위는 얌삘과 세레디냐-부다 일대의 빨치산 활동을 감소시키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익스는 독일 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으며 헝가리측의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뿌띠블은 텅 비었다. 헝가리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1,300명의 비적이 포위망을 돌파했다. 12곳의 마을과 460톤의 곡물이 헝가리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헝가리군을 피해 달아났다. 헝가리군을 긴급히 (독일군 부대로)교체 시켜야 한다고 본다.”

프리데리치는 작전 기간중 뿌띠블을 시찰했다. 헝가리군의 보복 작전에서 프리데리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고 이것을 육군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똑같이 기록했다. 한편, 프리데리치나 그의 참모진 중 한명은 Bogányi가 인질을 대량 처형하자고 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뿌띠블 작전 직후 프리데리치는 빨치산전에 대한 지침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새로운 지침은 누구를 “포로”로 대우하고 누구를 “빨치산”으로 구분 할 것인가를 언급한1941년에 내려진 명령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새 지침에는 “잔악한 유대-볼셰비즘적 전쟁 방식”에 대한 유사한 언급이 있었으며 이전 지침에서 벗어난 내용은 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내용도 추가 되었는데 교전 중이지 않은 상황에서 투항하는 빨치산은 처형을 하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반면 소련 정규군 병사는 어떤 상황에서 항복하건 규정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집단 처벌”이라는 규정을 새로 도입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에 제약을 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발적인 게릴라에 대한 절멸 전쟁은 유조의 요소가 있다.” 또한 죄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독일적 정의관에 반하는 행위이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프리데리치는 모스끄바는 빨치산에게 독일군이 민간인에 대한 대량 보복을 하게 부추김 으로서 “주민들 사이에 독일군과 그 지원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인질을 잡고 실제로 처형해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행위는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사용할 전술이 아니다. 이것은 작전이 끝나고 행하는 보복성 행위이다. 추가 조사 과정에서 밝혀낸 결과 이 때문에 주민들의 우호도가 감소하고 마을 전체가 빨치산에 협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보복만 무자비하게 가함으로서 독일이 지지기반을 잃고 있으며 필요한 물자의 징발, 귀중한 노동력의 상실, 빨치산에 대한 지지만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사구역 사령부는 이전에도 예하 부대의 잔학 행위를 단속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폰 로끄는 1941년 7월에 “사적 처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리데리치의 경우는 헝가리군의 행위 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리데리치의 새로운 게릴라전 방침과 Bogányi가 옹호하는 무차별적 보복 방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리데리치는 마을 주민 전체가(in ihrer Gesamtheit) 빨치산 활동에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보복 학살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야전부대가 주민들의 빨치산 관여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에 프리데리치가 내린 명령의 의도는 의문의 대상이다. 아마 프리데리치 자신도 보복을 “완전히” 금지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새 명령을 하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독일 비밀 야전 헌병 부대는 니즈인 마을에서 독일 헌병 하사 한 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로드꼬 마을의 민간인 116명을 처형했다. 이 학살은 그 지구의 독일군 지휘관(194 야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어났지만 프리데리치는 이 잔학행위에 대해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뿌띠블리 마을에서와 같이 반복적인 마을 초토화와 대량 학살을 감소시키는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프리데리치의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Bogányi는 노바 슬로보다 마을을 6월 26일에 초토화 시켰다고 보고했는데 1943년 10월과 11월에 작성된 소련 뿌띠블리 지구당의 보고서에는 바로 7월 6일에 헝가리군이 다시 노바 슬로보다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7월 7일의 학살에서 헝가리군은 마을 주민 407명을 사살하거나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헝가리군의 군율 문란과 작전 수행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다시 보복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194 야전사령부 사령관은 7월 18일에 뿌띠블리의 시장으로부터 헝가리군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 보고 받았다. 뿌띠블리 시장은 헝가리군이 무차별적인 살상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 야전사령부측은 군사 지구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했다.

“빨치산 무리를 특정 지역으로 몰아 붙이는 작전은 효과가 없다. 빨치산 집단은 지나가면서 머무르는 마을 마다 식량과 물자를 징발하며 지역 주민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유지들은 빨치산이 지역에 출몰한다는 점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빨치산 주력을 포위 격멸해야만 지역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서 해방 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런 보고서를 올린 사람이 며칠 전에 니즈인 마을에서 116명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같은 기간에 194 야전사령부 예하의 307 지역사령부(Ortskommandantur 307)는 헝가리 105 경사단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을에서 자신들이 숙소로 쓰고 있던 민가를 파괴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또한 제 450 투르키스탄 대대의 장교 한명은 프리데리치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헝가리군이 삼림 지대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서 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이 보고되고 군사구역사령부가 헝가리측에 항의를 전달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헝가리군은 독일측의 비난에 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데리치는 보복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내린지 3일 뒤에 빨치산 작전에 대한 새로운 전술 지침을 하달했다. 이 문건은 현재 없으나 네 명의 지휘관(제 213 보안사단, 제 194 야전사령부, 제 198 야전사령부, 헝가리 주둔군)이 이에 대해 보낸 회신이 남아 있다. 이 네통의 회신은 모두 남아 있으며 원래 명령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재 구성할 만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술 지침의 핵심은 “예하 부대의 자원으로 좀더 공세적인”행동을 취하라는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프리데리치는 상급 사령부에 빨치산 소탕에 투입할 전력이 부족함을 여러 차례 호소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리데리치는 자신이 증원병력을 요청했음에도 상급 사령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좀더 정교한 전술을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Bogányi는 이 지침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예하 부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세부적으로 나열하고 “이미 이런 문제점은 충분히 겪고 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우리에게 분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 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Bogányi는 전문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회신에서 불만만 제기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해결안을 같이 적었다. 이것은 3월 31일에 Kolossváry가 올린 보고서와 유사한 내용 이었다. 물론 Bogányi의 답장에는 직접적으로 대응 보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전술적 측면 보다는 지역 주민이 빨치산의 지지 세력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는 독일 비밀 야전 헌병은 작전 수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빨치산 출몰 지역과 빨치산을 지지하는 마을은 경제활동을 봉쇄해 버려야 하며 필요하다면 봉쇄로 기아를 유발 시킬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대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북부 관할 구역의 민간인을 소개시키는 것 이었다. Bogányi는 빨치산 출몰지역의 성인 남성을 모조리 노동 수용소로 이송해서 노동에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Bogányi는 7월 2일에 하달된 새로운 명령에 의거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데리치가 Bogányi의 제안이 있기 전에 북쪽 지역의 민간인 소개를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리데리치는 민간인 소개를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며 9월 10일에 집단군 사령부에 세레디냐-부다 와 데스나 강 동안의 벨리까 베리즈까, 홀루비브까, 리스녜, 빌료시브까, 스챠하일리브까, 즈놉-노보호로지께, 류바히프, 우끄라이스끼, 체르보니, 바실리브까 일대의 민간인을 소개하고 이 일대의 자재와 물자를 이송시키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민간인과 물자의 소개가 이루어 진 것은 확실한 것 같으며 10월까지 완료 된 것으로 보인다. 소개된 주민들은 제 213 보안사단과 197 야전사령부의 관할로 들어갔다.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주리 주 서부와 필리핀 봉기, 보어 전쟁, 일본군의 만주 지역 게릴라 작전과 말라야, 케냐, 베트남 전쟁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민간인 소개는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 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부 후방군사구역이 실시한 민간인 소개 작전이 효과적 이었는가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2006년 12월 23일 토요일

불길한 전주곡

뉴욕타임즈에 매우 불길한 기사가 하나 실렸다.

Shiites Remake Baghdad in There Image

뭐, 이것도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이라크 시아파들이 미국측에 관여하지 말라고 공갈을 치는 상황이니 정말 개판 오분전이 맞긴 맞는 것 같다. 그나마 미군마저 없으면 수니파는 어찌하리오?

물론 이웃의 수니파 형제들이 이런 꼴을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터. sonnet님이 얼마전에 사우디의 노골적인 위협이라는 글에서 지적하셨듯 시아파를 향한 지하드가 가열차게 전개될 지도 모르겠다. 남의 일이긴 하지만 불안하다.

로 總統의 大 獅子吼!



어제 대통령의 연설을 본 知人의 한 줄 요약.

로 總統의 大 獅子吼!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by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m FDR to George W. Bush

Dale R. Herspring의 이 저작은 꽤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먼저 민군관계(Civil-Military Relations)와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문제를 군의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점이 참신합니다. 기존의 유명한 저작들, 특히 새뮤얼 헌팅턴의 연구는 탁월하긴 하지만 주로 민간관료집단의 관점에서 민군관계와 문민통제를 설명했지요.

Herspring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부터 현재의 행정부에 이르기 까지 대통령을 중심으로한 행정부와 군의 관계를 군대가 민간통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의 첫 머리에 브래들리의 유명한 “There is no place in a democratic state for the attitude that would elevate each military hero above public reproach simply because he did the job he has been trainded for and is paid to do.”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미국의 직업군인의 가치관이 국방부 자체가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등장하면서 변화하고 있으며 군 엘리트들이 행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려고 노력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 행정부의 민군관계를 대통령과 고위 장성들에 초점을 맞춰 주요 정책에 있어 군 엘리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요 군사문제에 있어 정부의 정책 수행과 군대의 군사적 요구는 어떻게 상호작용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개설서로 사용하기에 적절할 정도로 정리가 잘 돼 있고 2차대전과 그 이후 미국이 수행한 중요한 군사작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럭저럭 합격점을 줄 만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1차 사료의 인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매우 불만입니다. 특히 상당수의 1차 사료가 이용 가능한 70년 이전의 행정부들에 대해서도 신문, 회고록 수준에서 자료 접근이 끝나고 있는데 이 점은 아쉽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비교적 당대의 문제, 특히 레이건 이후 행정부들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기 때문에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습니다. 자료의 제약 때문에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저자는 카터와 클린턴 시기의 민군관계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뭐, 사실 이 두 대통령이 군대와 많이 충돌했고 특히 후자는 예산을 무기로 군대를 압박하는 만행(?)을 별 생각없이(?) 저지르기도 했지요.

개설서로는 훌륭하지만 추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을 듯 합니다. 그래도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고 저자의 접근 방식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2006년 12월 21일 목요일

David Irving 석방

영국의 조갑제(?) 데이빗 어빙이 석방됐다는 소식입니다.

작년 11월에 체포됐으니 1년 만이군요.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뒤 한동안 여러 극우 단체에서 석방 활동을 펴는 통에 심지어 저같은 Untermensch에게도 석방을 위한 기금 모금 메일이 온 적이 있었다지요.

그러나 저러나 이 양반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바꾸게 됐다고 말했는데 과연 앞으로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2006년 12월 20일 수요일

너무 노골적이다....

Einsatzgruppen의 고학력 깡패들에 대한 글에 대해 sonnet님은 후겐베르크 같은 위험인물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후겐베르크 이야기도 나온김에 보니 중앙일보가 인터넷판의 대문에 걸어 놓은 사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찝찝하다. 이거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이것 참.

이정도로 속을 드러내도 괜찮을 정도로 사회가 보수화 된 모양이다. 하긴. 박대통령 찬양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고.. 그래도 언론인이라는 자가 이 무슨 지각없는 글질인가. 이미 대한민국에 박정희 오타쿠가 가득찬 마당에 주류언론의 논설위원까지 합류할 필요는 없다.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

2006년 12월 18일 월요일

만약 독립운동가들이 아편 밀매를 했다면...

안창호 선생의 1920년 1월 30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옥관빈(玉觀彬)군이 내방하여 왈 미국에 아편을 밀매할 방책을 언(言)하며 동의를 요(要)함에 절대불가라고 왈(曰) 여(余)의 주장하는 도덕은 주색잡기 등(等)보다 인류의 해독을 주는 허기적(許欺的) 행위를 대죄악으로 봄으로 하허(何許)한 점으로든지 차등사(此等事)를 철저(徹底)하게 행(行)치 않을 터이오, 또 군(君)에게도 차(此)를 권하노라고 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궁색한 경제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합니다. 그나마 안창호와 같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행입니다.

만약 저때 옥관빈의 제안을 받아 들여 아편밀매를 했다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매우 난감했을겁니다. 아마도 싸구려 마약을 팔아먹는 북조선과 50보 100보인 상황이 됐을지도 모르겠군요.

2006년 12월 17일 일요일

자연과학 전공자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독일

이공계 위기를 외치는 것이 대한민국만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다행히 동행이 있군요. 그것도 선진국으로.

독일의 공대 진학률 저하는 예전 부터 익히 들어왔는데 최근에는 위험수준으로 인식되는 모양입니다. 슈피겔 2006년 50호는 고급 인력의 수급 문제를 다루고 있더군요. 이 기사에 따르면 지난 2003년 유럽연합 주요국가의 20세에서 29세 청년 1,000명 중 자연과학 전공자는 프랑스가 22명, 영국이 21명, 에스파냐가 12.6명, 이탈리아가 9명이었는데 독일은 이탈리아 보다 못 한 8.4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우수한 국가 경쟁력을 자랑하는 핀란드는 17.4명으로 영국, 프랑스와 맞먹는 수준이군요.
이거야 말로 독일의 굴욕입니다. 세계 제 1위의 수출대국이 엔지니어 공급 부족으로 고민이라?

그나마 독일로서 다행인 것은 90년대 중반이후 감소세를 보이던 공과대학 진학률이 2000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증가 추세라는 점 입니다.

요즘 대한민국도 국가 경쟁력 저하를 크게 우려하고 있던데 이상태로 기술인력이 감소한다면 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저와 같은 건달들이 적당하게 편히 살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수한 엔지니어의 확보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공계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2월 2일을 이공계인의 날로 정하는데 대 찬성입니다. 빼빼로 데이 같은 것도 있는 마당에.

2006년 12월 14일 목요일

독일군 정보부의 삽질과 베르됭의 대재앙

과거의 독일군은 작전과 전술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정보부문에 있어서는 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1~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은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피박을 본 사례가 제법 있지요. 아무리 주먹을 잘 써도 앞이 잘 안보이면 별 수 없으니.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

2006년 12월 11일 월요일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W II on the Eastern Front

콘스탄틴 플레샤코프는 “짜르의 마지막 함대(Tsar’s Last Armada)”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입니다. 짜르의 마지막 함대가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플레샤코프의 비교적 최근 저작인 독소전 첫 10일간의 긴박한 상황을 다룬 이 책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W II on the Eastern Front”도 번역되지 않을까 기대해 봤는데 아직까지 특별한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당분간 소개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짜르의 마지막 함대는 매우 재미있고 약간의 감동을 주는 좋은 책 이었습니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소설과 같은 이야기 전개는 책의 장점이었습니다. 독자와의 소통에서 성공했다고 평가해야 되려나요?

그런데 Stalin’s Folly는 짜르의 마지막 함대와는 이야기 구조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소련 수뇌부가 독일의 기습에 허둥대면서 대 재앙을 초래한 독소전 첫 10일간을 다루는 만큼 완결된 이야기 보다는 여운이 남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10일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물론 1장과 2장에서 1941년 1~2월의 사건에 대해서도 다루긴 합니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고 전개가 더 빠르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독소전에 대한 기존의 유명한 저작들을 읽으신 분들에게는 매력없는 책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이 재미있긴 했지만 동시에 조금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남서전선군의 8군단 잔존 병력이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끝납니다. 안개로 뒤덮인 호밀밭을 따라 붉은기를 든 정치위원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일렬 종대로 행군 광경을 묘사한 마지막 단락은 패잔병들의 암울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소련측의 입장에서만 사건을 묘사하고 있어 다소 아쉽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그 덕에 더욱 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방식으로 독일측의 시각을 다룬 그 유명한 카렐의 Unternehmen Barbarossa가 있군요.

국내에 꼭 번역됐으면 싶은 책 입니다. 역사에 관심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우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작 “짜르의 마지막 함대”처럼요.

J. Nagl 중령의 이라크군 육성에 대한 견해

이라크전의 이라크화에 대한 sonnet님의 글을 읽으니 J. Nagl 중령이 2005년에 Learning to Eat Soup with a Knife 개정판에 썼던 이라크군 육성의 필요성에 대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누구나 알 법한(?) 뻔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지만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군인의 견해는 어떤지 한번 읽어 보시는 것도 딱히 해로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J. Nagl 중령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이라크에서 근무했습니다. 무려 2년이나 지났군요.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비정규전을 목적으로 훈련받은 부대를 동시에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도록 훈련시키는 문제를 과소 평가하고 있었다. 또 현지인으로 부대를 편성, 훈련, 무장시켜 비정규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도 과소 평가했다. 비정규전 상황에서 적은 현지 군과 경찰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공격 목표로 삼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임무에 헌신적인 현지 전력을 육성하는 것은 말 그대로“나이프로 스프를 먹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현지인 부대는 비정규전에서 외부 세력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타고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현지 전력은 대중의 지원을 통해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데 이런 지지는 해당 국가의 군대가 아니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또 정찰 임무에 따로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족내의 충성, 가족간의 유대관계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는데 이런 요소들은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의 정치, 경제적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외부 세력은 알지 못하는 현지의 관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장점들은 현지인 부대를 비정규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아마도, 약간 과장해서 설명하면 외부의 세력은 결코 비정규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 외부 세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현지인 부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외부의 세력이 현지의 세력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다. 서방의 군대는 통신 수단과 훈련 프로그램, 포병 화력 및 근접항공지원, 의무 지원, 그리고 신속대응전력이다. 이 중에서 신속대응전력은 현지 전력에게 신뢰감을 불어주고 사기를 높여주고 전투력을 향상시킨다. 특히 고문단이 함께 있을 경우 효과가 더 크다.

게릴라들이 현지인 부대를 공격하는 점을 보면 현지 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34기갑연대 1대대 TF는 칼리디야(Khalidiyah)에 주둔하는 동안 이라크 경찰과 이라크 군 2개 대대를 열심히 지원했다. 이라크인들은 미군의 지도와 물자, 재정 지원 수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 군을 모병, 편성, 훈련, 무장 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라크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고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해 나가면서 서로간에 일정한 신뢰가 형성 됐으며 일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긴 했지만 대대의 주둔 기한이 지나 후속 부대인 506연대 1대대 TF와 교대할 때 까지도 지역 치안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육성하지 못 했다. 현지인 부대를 편성, 훈련, 무장 시키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영국은 미국이 베트남에 참전하기 이전 말라야에서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베트남의 미군도 최소한 1군단 지구에서는 해병대가 Combined Action Platoon Program을 실시해 성과를 거뒀다. 이라크의 미군이 이라크를 대내외적인 위협에서 방어하기 위해서 이라크 군을 육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현 시점에서 말라야의 영국군과 베트남의 미 해병대의 사례는 유용한 교훈이 될 수 있다. 이라크군을 육성하는 것은 현재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라크인에 의한, 이라크인의 승리 말이다.


대략 1년 전 쯤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특출난 성과가 없는걸 보면 역시 "괴뢰군(?)"을 육성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인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Combined Action Platoon은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알려 주실 분 계신지요?

2006년 12월 9일 토요일

1951년 3월 중순 경상북도의 식료품 소매가격

UN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UNCACK)에서는 한국전쟁 시기 후방지역의 사회상에 대한 방대하고 세부적인 자료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어린양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후방 지역의 소매 물가에 관한 자료였습니다. 물론 물가 통계는 장기간에 걸친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활용도가 높긴 한데 당장 입수한 것이 단편적인 수준이라 뭔가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흥미로운 자료이긴 합니다만.

RG 338, UNCACK, Weekly Action Report, 1951, Box 17에는 1951년 3월 중순 경상북도 지역의 소매 물가를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이 중에서 식료품과 관련된 부분만 인용해 봅니다.

1951년 3월 13일 / 3월 20일 : 가격 단위는 원

(도정한) 쌀 [1두] : 17,000 / 17,500
(도정한) 보리 [1두] : 16,000 / 16,000
(도정한) 밀 [1두] : 15,000 / 16,000
콩 [1두] : 17,000 / 17,000
팥 [1두] : 26,000 / 25,000
쇠고기 [375그램] : ? / ?
돼지고기 [375그램] : 2,700 / 2,700
밀가루 [375그램] : 800 / 800
달걀 [1개] : 350 / 350
황태 : [1쾌(20마리)] : 7,000 / 7,000
설탕 [375그램] : 7,000 / 6,000
소금 [2리터] : 2,000 / 2,000
후추 [375그램] : 3,300 / 3,500
간장 [2리터] : 1,200 / 1,300
두부 [375그램] : 500 / 500
무 [375그램] : 300 / 400
배추 [375그램] : 700 / ?
참기름 [1되(1.8리터)] : 17,000 / 17,000
양파 [375그램] : 450 / 400
고구마 [1관] : 2,000 / 1,900
사과 [375그램] : 1,000 / ?

이 시기의 통계가 좀 더 많이 축적되면 꽤 재미있는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의 꼼꼼함은 칭찬할 만한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6년 12월 7일 목요일

[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

美利堅史는 천조의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지라 한국의 이름난(?) 장수들을 같이 다루기는 뭐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美利堅史의 외전으로 海東名將傳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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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견룡대정 차지철)

차지철은 서울 사람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2년에 출생했다. 전하기를 차지철의 아비는 매우 호색한이어 여색을 심히 밝혔다 하는데 훗날 사람들이 “역시 개가 범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차지철은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차지철은 군관이 되고자 화통도감에 들어가 마침내 군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5년, 차지철이 미리견의 화통도감에서 화포 쓰는 법을 배워 돌아왔다. 아이젠하워 6년, 차지철은 산원(散員)이 되어 좌우위(左右衛)로 옮겼다.

존 F. 케네디 원년, 차지철이 사보이 객잔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사람됨을 좋게 여겨 마음 속에 있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요사이 붉은 도적의 준동이 심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정에는 사특한 마음을 품은 간신배가 넘치니 잠을 이룰 수 없소이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크게 감격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소장은 장군께 견마의 노를 다하겠사옵니다.”

존 F. 케네디 원년 5월 16일, 평소 박정희의 인품을 사모하던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일으켜 문하시중(門下侍中) 장면을 몰아냈다.

이 때 차지철의 공이 매우 컸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장수들이 박정희를 옹립하여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 장도영(張都映)은 이를 알고 중랑장 서종철을 보내 좌우위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차지철은 중랑장 박치옥의 휘하에 있었다. 서종철이 군사를 이끌고 박치옥의 영으로 들이닥치자 박치옥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차지철이 도끼로 병기고를 부수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박정희를 따르는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난입하자 문하시중 장면은 크게 낭패하여 사찰로 숨어들어 비구니들에게 목숨을 의탁하였다.

박정희와 여러 장수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를 두고 상장군 장도영을 수장으로 옹립했다.

케네디 2년, 차지철은 학문을 닦기 위해 군관을 그만 두었다.

케네디 3년, 여러 장수들이 박정희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처음에 박정희는 왕위에 오르기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여러 장수들의 권유와 백성들의 간청에 못이겨 왕위에 올랐다.

천자가 박정희에게 “토북괴 반공대장군 한국국왕(討北傀 反共大將軍 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박정희는 국왕이 되자 차지철을 아껴 그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때 처음 전국구(全國區)라는 제도가 생겨났는데 시정의 잡배들은 전국구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한 까닭에 생긴 것이라 하였다.

차지철은 관직에 있으면서 서원에서 학업을 닦아 박사가 되었다. 차지철이 학업을 닦을 때 여러 사람들은 차지철이 서원에 나가지 않으니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차지철이 박사가 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서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박사가 되었으니 공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없구려!”

제럴드 포드 원년 8월 15일, 중전 육(陸)씨가 북괴의 자객 문세광의 육혈포에 맞아 승하하였다. 이로 인해 박정희의 상심이 매우 컸다. 견룡대정 박종규(朴種圭)에게 자객을 들인 죄를 물어 파직했다.

박종규가 파직되자 차지철이 새로이 견룡대정이 되었다.

차지철은 견룡군을 이끌게 되자 먼저 국왕의 위엄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차지철이 매주 견룡군을 이끌고 시위를 하며 위엄을 과시하니 이를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때 차지철의 위세가 당당하니 문하시중 마저도 차지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이때 사특아랍백(沙特阿拉白), 의랍극(依拉克) 등 서토의 여러 추장들이 흑유의 가격을 올려 백성들의 삶이 심히 곤궁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 간혹 삶이 어렵다 하여 국왕을 능멸하고 사특한 무리들의 요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심히 많아 뜻 있는 신료들이 이를 심히 불안하게 여겼다.

이때 많은 신료들은 민심을 두려워 했으나 유독 차지철 만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간포채(柬埔寨)에서는 3백만을 죽였다한다.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면 병거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아니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차지철의 기백에 감탄하였다.

지미 카터 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차지철도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김재규는 국왕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킬 때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른 무인으로 평소 차지철이 자신을 하대함에 분개하였다.

“내가 장군일 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일개 산원이었다. 저자의 오만함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하니 김재규가 마침내 역심을 품고 자객들을 모아들였다.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박정희에게 육혈포를 난사하자 차지철은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병가의 상책은 삼십육계라 하였으니 지금이 그때로다.”

그러나 자객들이 객잔을 에워싸고 총포를 난사하며 밀려드니 드디어 차지철이 견룡군의 여러 군관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차지철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견룡대정까지 올랐으며 민주 국가에서 백성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하였다. 차지철은 종종 “간포채에서 3백만을 죽였다 하니 우리도 그쯤 죽이면 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 그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을 시해할 때 형세가 외로움을 깨닫고 삼십육계를 하려 했으니 병법에 능한 것이 이 정도였다. 아깝게도 자객들의 흉탄을 피하지 못해 비명횡사했으니 어찌 아니 슬프리오.

2006년 12월 6일 수요일

1635~40년 프랑스군의 기병 부족 문제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보병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고 기병의 비중이 크게 축소 됩니다. 예를 들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 정복전쟁(reconquista)을 치루고 있던 카스티야 가 대표적인데 그라나다 전투 초기에 아라곤 군(대부분 카스티야에서 동원되었음)은 기병 6,000~10,000명, 보병 10,000~16,000명 으로 편성됐는데 그라나다 전투 말기에는 기병 10,000명, 보병 50,000명으로 그 비율이 1:1 에서 1:5 로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94년 프랑스 국왕이 거느린 군대는 13,000명의 기병과 15,000명의 보병으로 편성돼 있었으나 1552년에는 기병 6,000명과 보병 32,000명으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1:5로 변화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보병의 중요성은 더더욱 증대됐고 이제 기병은 정찰, 보급 부대 호위 정도의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기병은 부차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그 결과 17세기 초-중반 프랑스 육군은 기병이 지나치게 축소됐습니다. 1635년 프랑스는 보병 115,0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을 배정했지만 기병에 배정한 예산은 불과 9,500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이 이제 1:11에 달한 것 입니다.

30년 전쟁 시기에 주요 교전국들은 기병 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17세기의 전투는 16세기 보다 기동의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황당하지만 보급 문제도 기병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이 높았던 당시의 보급체계는 더 넓은 반경에서 약탈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을 필요로 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장기간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자 어처구니 없게도 기병이 좀 더 보급에 유리해 진 것이죠.
그러나 상대적으로 태평했던(?) 프랑스는 이런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1630년대 내내 주요 야전군에서 기병 대 보병의 비율은 평균 1:10 에서 1:12 사이였다고 하죠.

그러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30년 전쟁에 개입하자 기병의 부족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가 됐습니다. 1635~36년에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에서 전개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군은 보병 12,000과 기병 13,000명으로 구성돼 프랑스군에 비해 기동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 기병대는 이해 8월 기습적으로 파리 교외 지역을 휩쓸어 프랑스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지요.

프랑스도 이 무렵 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병 증강을 꾀했으나 예산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파냐 군대의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황급히 기병연대 편성을 시작하지만 예산도 불충분한데다 숙련된 기병을 짧은 시간안에 긁어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결국 궁색한 상황에 몰린 프랑스 정부는 형식상으로 남아있던 봉건 의무를 귀족들에게 부과합니다. 1636년 프랑스는 왕령으로 아직 군에 있지 않은 귀족들에게 40일간 기병으로 복무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런 궁여지책도 효과가 없었던 것이 이미 봉건적인 군사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던 귀족들은 기병으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예 국왕의 소집령에 무시로서 대응하는 귀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왕은 1638년 까지 계속해서 매년 소집령을 내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정부 예산으로 기병을 증강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해에 프랑스는 6개 중대로 편성된 기병연대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1641년이 되면 각 야전군 소속의 기병 전력은 5,000~7,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경우 보병 10,855명에 대해 기병은 7,261명 이었다고 하지요. 프랑스 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은 1650년대에는 40% 수준에 달했습니다.

비록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었지만 기동력이 중요해 지면서 기병도 17세기 초반의 찬밥 대접은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다시는 전장의 주역이 되지는 못 했지만 말입니다.

2006년 12월 5일 화요일

어이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21시를 조금 넘긴 시각, 급히 필요한 책이 있어 서점에 갔다가 이것을 보게 됐다.

그리고 저자명을 보는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예전 부터 이덕일씨의 저작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 물론 비싼 종이를 써 가며 책을 내는 이상 독자와의 소통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면 사료에 대한 접근과 취사선택, 비판에 엄격해야 하는데 이덕일씨의 저작은 그게 잘 안돼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이 책은 그 모든 것의 결정판이다. 책 후반부에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인용해 치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분명히 이덕일씨는 사학과에서 전문적인 역사 글쓰기를 배운 사람이 맞을 텐데 어떻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를 들먹일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떤 아는 사람이 이덕일씨는 전형적인 상업적 글을 쓰는 사람으로 팔리기만 하면 어떤 소재라도 쓸 것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예상이 적중했다. 명색이 사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환단고기를 들먹이는 종말적인 상황이 왔다.

맙소사.

2006년 12월 3일 일요일

1940~41년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

이른바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한 독일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런던에 대한 폭격을 1941년 봄 까지 줄기차게 실시합니다. 그러나 육군이 1940년 10월부터 소련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은 쓸데없이 영국의 민간인만 희생시켜 적개심만 고취시키는 삽질로 끝나 버렸지요.

생각없는 전쟁 지도층의 삽질의 대표 사례가 아마도 이 런던 공습이 아닐까 합니다.

런던 공습기간 독일 공군의 공격 패턴은 상당히 재미있는데 1941년 1월 까지는 소이탄의 비율도 특별히 높지 않고 출격 빈도가 잦은 대신 출격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련 침공이 임박한 1941년 봄, 특히 3월 말~5월에는 출격 빈도가 줄어드는 대신 공격 규모가 커지고 소이탄 사용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의 통계는 Ulf Balke, Die Einsätze des Kampfgeschwaders 2, 422~425쪽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고폭탄(톤) / 소이탄(개) / 당일 출격 기수

1940년 9월

5/6일 야간 : 68.80 / 112 / 68
6/7일 야간 : 22.35 / 38 / 23
7/8일 야간 : 655.00 / 806 / 625
8/9일 야간 : 206.50 / 327 / 290
9/10일 야간 : 336.75 / 307 / 286
10/11일 야간 : 151.00 / 400 / 148
11일 : ? / ? / 73
11/12일 야간 : 216.80 / 148 / 178
13일 : 130.00 / 250 / 53
13/14일 야간 : 123.50 / 200 / 105
14일 : 12.00 / 0 / 49
14/15일 야간 : 55.40 / 43 / 38
15일 : 133.00 / 108 / 148
15/16일 야간 : 224.00 / 279 / 181
16일 : 40.00 / 90 / 38
16/17일 야간 : 172.00 / 318 / 170
17일 : 12.75 / 0 / 13
17/18일 야간 : 333.50 / 591 / 268
18일 : ? / ? / 30
18/19일 야간 : 349.75 / 628 / 280
19/20일 야간 : 310.20 / 533 / 255
20/21일 야간 : 153.70 / 79 / 109
21/22일 야간 : 164.37 / 329 / 113
22/23일 야간 : 95.85 / ? / 103
23/24일 야간 : 310.25 / 611 / 249
24/25일 야간 : 256.30 / 384 / 96
25/26일 야간 : 260.20 / 441 / 220
26/27일 야간 : 162.00 / 101 / 155
27/28일 야간 : 168.50 / ? / 163
28/29일 야간 : 325.05 / 303 / 249
29/30일 야간 : 294.00 / 136 / 246
30/10월 1일 야간 : 113.00 / 109 / 104

1940년 10월

1일 : 6.95 / 0 / 27
1/2일 야간 : 250.10 / 115 / 214
2/3일 야간 : 130.95 / 300 / 105
3일 : 49.40 / 32 / 46
3/4일 야간 : 61.40 / 0 / 44
4일 : 65.15 / 12 / 66
4/5일 야간 : 189.50 / 236 / 134
5일 : 11.65 / 0 / 44
5/6일 야간 : 242.10 / 176 / 177
6일 : 55.95 / 0 / 57
6/7일 야간 : 8.50 / 0 / 7
7일 : 23.00 / 0 / 96 (Jabo)
7/8일 야간 : 210.55 / 143 / 179
8일 : 24.00 / 0 / ? (Jabo)
8/9일 야간 : 257.00 / 264 / 208
9일 : 22.25 / 0 / 78 (Jabo)
9/10일 야간 : 263.50 / 245 / 216
10/11일 야간 : 269.00 / 718 / 222
11일 : 12.00 / 0 / 47
11/12일 야간 : 213.00 / 126 / 152
12일 : 34.00 / 0 / 135 (Jabo)
12/13일 야간 : 148.00 / 24 / 119
13/14일 야간 : 248.40 / 131 / 255
14일 : 19.00 / 0 / 19
14/15일 야간 : 304.00 / 292 / 242
15일 : 46.00 / 0 / 185 (Jabo)
15/16일 야간 : 538.00 / 177 / 410
16/17일 야간 : 346.00 / 187 / 280
17/18일 야간 : 322.00 / 134 / 254
18/19일 야간 : 172.00 / 132 / 125
19/20일 야간 : 386.00 / 192 / 202
20/21일 야간 : 356.00 / 192 / 298
21일 : 37.00 / 0 / 37
21/22일 야간 : 115.00 / 52 / 100
22/23일 야간 : 98 / 40 / 85
23/24일 야간 : 55.00 / 0 / 64
24/25일 야간 : 75.00 / 0 / 64
25일 : 46.00 / 0 / 186 (Jabo)
25/26일 야간 : 193.00 / 193 / 159
26/27일 야간 : 253.00 / 176 / 203
27일 : 53.00 / 0 / 159 (Jabo)
27/28일 야간 : 127.00 / 0 / 114
28일 : 16.00 / 0 / 61 (Jabo)
28/29일 야간 : 176.00 / 111 / 146
29일 : 25.00 / 0 / 77 (Jabo)
29/30일 야간 : 236.00 / 109 / 186
30일 : 13.00 / 0 / 52 (Jabo)
30/31일 야간 : 178.00 / 92 / ?
31일/11월 1일 야간 : 48.00 / 83 / 67

1940년 11월

1/2일 야간 : 215.00 / 130 / 171
2일 : 11.00 / 0 / 33 (Jabo)
2/3일 야간 : 117.00 / 126 / 102
3일 : 17.00 / 0 / 11
4/5일 야간 : 184.00 / 16 / 157
5/6일 야간 : 139.00 / 0 / 119
6/7일 야간 : 223.00 / 4 / 192
7/8일 야간 : 242.00 / 9 / 193
8일 : 7.00 / 0 / 25 (Jabo)
8/9일 야간 : 133.00 / 0 / 125
9일 : 19.00 / 0 / 24
9/10일 야간 : 124.00 / 0 / 125
10/11일 야간 : 212.00 / 7 / 171
12/13일 야간 : 165.00 / 92 / 126
13/14일 야간 : 28.00 / 0 / 25
14/15일 야간 : 24.00 / 2 / 21
15일 : 5.35 / 0 / 33 (Jabo)
15/16일 야간 : 413.50 / 1142 / 358
16/17일 야간 : 104.00 / 68 / 87
17/18일 야간 : 56.00 / 64 / 49
18/19일 야간 : 5.00 / 0 / 10
19/20일 야간 : 33.00 / 0 / 37
20/21일 야간 : 48.00 / 32 / 45
21/22일 야간 : 31.00 / 32 / 40
22/23일 야간 : 34.00 / 20 / 43
24/25일 야간 : 37.00 / 0 / ?
27일 : 15.00 / 0 / 18
28/29일 야간 : 22.00 / 44 /21
29/30일 야간 : 380.00 / 820 / 335

1940년 12월

1/2일 야간 : 31.00 / 0 / 17
4/5일 야간 : 48.00 / 39 / 42
5/6일 야간 : 33.00 / 0 / 29
8/9일 야간 : 387.00 / 3,188 / 413
11/12일 야간 : 17.00 / 0 / 15
19/20일 야간 : 39.65 / 36 / 49
22/23일 야간 : 11.20 / 0 / 28
27/38일 야간 : 111.20 / 393 / 108
29/30일 야간 : 127.00 / 613 / 136

1941년 1월

5/6일 야간 : 67.00 / 24 / 63
7일 : 17.10 / 0 / 25
9/10일 야간 : 65.60 / 470 / 67
11/12일 야간 : 144.00 / 598 / 137
12/13일 야간 : 155.00 / 823 / 141
15/16일 야간 : 15.00 / 20 / 15
19/20일 야간 : 48.00 / 160 / 54
28일 : 5.90 / 28 / 19
29/30일 : 58.25 / 86 / 37
30일 : 18.50 / 38 / 26
31일 : 22.80 / 19 / 32

1941년 2월

5/6일 야간 : 17.60 / 70 / 30
26/27일 야간 : 80.00 / 0 / 53

1941년 3월

4/5일 야간 : 10.00 / 0 / 10
8/9일 야간 : 130.00 / 693 / 131
9/10일 야간 : 95.00 / 444 / 126
15/16일 야간 : 107.70 / 388 / 101
18/19일 야간 : 35.00 / 70 / 33
19/20일 야간 : 467.00 / 3,398 / 479
20/21일 야간 : 24.00 / 222 / 32

1941년 4월

16/17일 야간 : 890,00 / 4,200 / 685
19/20일 야간 : 1,026.00 / 4,252 / 712

1941년 5월

10/11일 야간 : 711.00 / 2,409 / 507

독일이 1940년 8월 1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런던에 투하한 폭탄은 총 19,634톤이라고 합니다. 2위인 버밍엄(Birmingham)은 1,822톤 으로 1위의 10%에도 못 미치는군요. 그만큼 단기결전에 실패한 독일군, 특히 독일 공군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수도에 공격을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이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이 쏟아 부은 폭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참고로, 독일 공군이 1944년 1월 21일부터 개시한 런던 공습작전인 Steinbock 작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을 투하한 날은 2월 18일~19일의 야간 공습으로 총 178톤을 투하했다고 하는군요.

[美利堅史] - 韓國傳 허경영 列傳

한국은 본시 외방의 궁벽한 나라이나 간혹 기인이 나타나 이름을 떨치니 평화왕 문선명은 일찌기 천조에 입조하여 많은 작위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간혹 그 뜻을 펼치지 못하는 자도 많으니 허경영(許京寧)이 그러하다.

허경영은 한국의 서울 사람으로 트루먼 6년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경영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허다하게 많으나 하나같이 허황되어 기록할 바가 못 된다. 경영은 스스로 한국 제일의 거상인 이병철의 양자요, 국왕 박정희의 적통이라 하였으나 종로를 지나가는 비둘기와 고양이조차 비웃었다.

조지 H. W. 부시 5년, 허경영이 패망한 이씨의 중조(重祚)를 외치며 진리평화당(眞理平和黨)의 깃발을 걸고 무리를 모았으나 뭇 백성들의 조롱거리만 되었다.

빌 클린턴 5년, 허경영이 다시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깃발을 내걸고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백성들의 삶이 곤궁하고 온갖 사교가 기승을 부려 허경영도 다소나마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이때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적통이라 참칭하고 소위 혁명공약 10조를 내거니 많은 백성들이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허경영은 이후 무리들과 함께 검은 수레에 황소의 상(像)을 싣고 저자를 누비고 다녔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3년, 허경영은 재차 청와궁에 들겠노라 외치며 무리를 모았으나 저자의 무뢰배들 조차 외면하였다.

허경영은 그 하는 말과 행동이 허황되고 참람된 점이 없지 않았으나 기이한 행동으로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결코 그 공이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허경영 전(傳)을 지어 후대에 알리려 한다.

2006년 12월 2일 토요일

수령님 어록

오늘날 공화국 북반부를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후진지역으로 이끄시고 사상적으로는 신정일치 고대국가로 변화시키신 경애해 마지 않는 수령님께서는 말바꾸기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치신 바 있다.

장군님 어록

수령님께서 1968년에 말씀 하시길.

사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당안의 형편만 보아도 『박헌영파』요 『오지섭파』요, 『연안파』요, 『이르꾸쯔파』요 뭐요 하는 숱한 어중이 떠중이들이 있었는데 그 자들은 제가끔 상전을 등에 업고 그에 아부굴종하면서 자기파들끼리 한 자리 해 먹자고 날뛰었습니다.

근로단체들의 역할을 높일 데 대하여, 1968년 10월 11일, 김일성 저작집 23, 이종석, 북한로동당연구, p159에서 재인용


그리고 1948년 말씀에는…

경애하는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 북조선에 남아 있는 쏘베트군대의 철거에 대하여 쏘베트정부가 채택한 결정에 관한 보고를 듣고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전 조선 인민의 이름으로써 각하와 또는 각하를 통하여 위대한 전 쏘베트인민에게 나의 무한한 경애와 감사에 넘치는 뜨거운 충정을 표하는 바 입니다.

(중략)

앞으로도 위대한 쏘베트련맹과 친히 당신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께서는 우리가 민족적 및 자주적 권리를 수호함에 있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발전강화함에 있어 지지와 원조를 하여 주실 것을 우리 인민은 믿어 마지 않습니다.

(중략)

조선 인민의 가장 친근한 벗이며 해방자이신 쓰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이 1948년 9월 22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김일성선집 권 2, 1954, p277, 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p99~100에서 재인용


수령님께서는 건망증이 심하셨던 것 같다. 낄낄낄.

2006년 11월 30일 목요일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제도에 대한 몇 가지 궁금한 점

상해 임시정부가 1919년에 제정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는 여러 모로 흥미롭습니다. 이 법령에 따르면 대한민국육군의 기본 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군단 : 2~6개 여단 : 편제 상 직할대 없음
2. 여단 : 2개 연대 + 1개 기병중대 + 2개 공병중대 + 2개 헌병중대 + 2개 위생대
3. 연대 : 3개 대대 + 1개 기관총 대대(3개 중대) + 1개 폭탄대(중대 급)
4. 대대 : 4개 중대 + 1개 기관총 중대
5. 중대 : 3개 소대
6. 소대 : 3개 분대

일단 임시정부가 편제에 따른 군대는 한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에서 흥미로운 점은

1. 기본적으로 4각 편제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사단이 없다는 점 입니다. 여단은 바로 군단 직할로 편제돼 있습니다.

2. 연대 편제에 딸려 있는 폭탄대 입니다. 아직까지 임시정부의 군사교리에 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아(그리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대충 감으로 짐작하자면 일종의 전투공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3.대대편제의 기관총중대는 정원 50명으로 소대규모라는 점 입니다. 일단 이건 성격상 중기관총을 장비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이런 편제로는 잘 해야 1개 보병중대 당 중기관총 1~2정 정도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임시정부야 제대로 된 군대를 편성할 능력도 없었으니 편제표 상 기관총 중대를 4개 소대로 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말이죠.

4. 분대 정원은 분대장인 하사를 포함 17명이고 소대정원은 소대장 포함 51명 입니다. 즉 대략 이런 편성입니다.

소대장
1분대 : 17명
2분대 : 17명
3분대 : 16명

편제 표에도 1개 소대가 51명 이기 때문에 3분대는 16명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이거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임시 군제에서 부대 편제는 정말 생각나는대로 짠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드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망상이 듭니다.

"1개 분대가 17명이니 1개 소대는 17×3=51명으로 하자. (편제표를 작성한다) 어? 그런데 소대장이 빠졌군. 음 소대장을 넣으면 52명이 되는데 고치기 귀찮은데.. 그래 3 분대는 16명으로 하자"

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5. 군단 사령부 편제를 보면 참모장 1인과 참모관 약간 명을 둔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단 참모부는 제대로 된 편제를 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장은 임시정부임시군제 말고는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못 봤으니 상상의 나래는 이 쯤에서 접는게 좋을 것 같군요.

프레쉬니스버거 대학로점

몇 개월 전. 직장을 때려치고 다시 혜화동으로 돌아 온 뒤 프레쉬니스버거나 먹어볼 까 해서 그곳이 있던 곳으로 갔는데... 없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본인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곳 저곳 찿아 봤지만 확실히 없어졌더군요. 아무래도 크기는 작고 값이 비싸서 망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걸 봤습니다.



이걸 가까운 곳에서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굉장히 즐겁네요. 흐흐흐. 솔직히 버거킹 따위보다는 이쪽에 백만표를 더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어쨌건 기쁩니다. 이히~

미국 육군의 차량화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오늘날의 미육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곳 저곳 들쑤시며 뉴스거리를 만드는 존재였지만 불과 100년전의 미 육군은 주요 열강의 육군 치고는 비리비리한 군대였습니다. 유럽과 같은 국가 총동원체제가 자리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은 육군이 약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것이 캐나다와 멕시코같이 적대적이지도 않고 군사력도 그저 그런 나라들이었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

2006년 11월 27일 월요일

WTM 9탄

이틀간 앓고 나니 일도 안되고 공부도 안되는지라 편의점에 맥주나 살 까 해서 갔더니 WTM 9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탕은 한국에서 만든걸 집어 넣고 그동안 WTM 시리즈에 딸려 있던 한 장짜리 만화가 안 들어 있더군요.

재미있게도 이번 시리즈는 냉전의 투사들입니다.

세 통을 샀는데 두 통은...



크으... 홍건적들이 애용했던 T-10 입니다. 으헉.

이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는...



천자국의 M-551이군요. 뭔가 심히 불안한 느낌입니다.